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는 묘하게 읽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다.


몇몇 평론에서는 이 책을 SF로 분류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의견이 좀 다르다. 물론 이 책이 제시하는 배경이 현실과는 다른 상황, 즉 장기 공급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인간의 클론을 양산하고 이 클론들로 부터(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장기를 공급받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상황을 상정한다는 측면에서 판타지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제시하는 이야기의 전개구조에서 방점이 찍히는 부분은 성장, 생애사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랑을 비롯한 관계의 문제다. 어떠한 팬시한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 그에 따른 상상(그것이 디스토피아가 되었던 꿈과 희망에 기대는 낙관전인 유토피아가 되었던 간에)을 통한 전개는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 안에 있는 어떤 기묘한 위화감이다.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흐르는 기묘한, 그리고 동시에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그 이상한 느낌. 배경 설명이 없는 상태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마치 그 배경에 대한 상상을 읽는 이에게 강요하는 듯 한 추리소설과 같은 느낌이 있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런 부분은 소설의 종장에서 헤일셤에 관한 그리고 그 보다도 더 못한 사람들에 대한 취급이 드러나는 부분에서 밝혀지게 된다. 

이러한 위화감은 이 소설의 제목이 된 '나를 보내지마Never let me go'라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던 어린 소녀 캐시와 그녀의 관리자였던 마담의 조우에서도 잘 드러난다. 나는 그 노래를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설이 말하고 있는 그 장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소녀는 이 노래의 제목으로부터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상황에 대해(장기 기증을 위한 클론들은 , 정말로 소녀적인 상상을 하고 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빼앗기고 아이가 다른 사람 손에 어딘가로 데려가지는 상황. 그리고 마담은 아마도 헤일셤에서 관리자들이 결국은 키워진(혹은 사육된) 클론들을 기증 센터로 보내야만 하는 상황을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기증, 아니 합법적인 장기 적출을 의무적으로 당해야만 하는 부당한 상황에서)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클론들의 보다 나은 대우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헤일셤의 존재가 바로 그런 일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주장하는(그리고 실제로 그들 헤일셤 출신자들의 교육과 더 나은 대우를 위해 일하기도 했던) 교장 선생과 마담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은 이러한 제도를 떠받치는(또는 기증을 위한 클론들을 사육하는) 일종의 관리자들이었을 뿐이다.*  캐시와 토미는 마치 이들이 구원자라도 되는 듯, 그들 헤일셤 출신자들 사이에서 돌던 루머를, 마치 풀 한포기라도 잡는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찾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이 대하게 된 현실은 냉혹하다고 하기에도 뭔가 모자란 듯한 것이었다.

정작 캐시와 토미 그리고 루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런 부당한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간의 삼각관계, 그리고 헤일셤 출신의 클론 인간들의 울타리 내에서의 인간관계의 문제였다 - 이들의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잠시라도(3년이라는 시간) 기증을 유예하기 위한 교장 선생 그리고 마담과의 만남도 결국에는 이들의 사랑에 대한 문제에서 나오게 된 작은 몸짓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부당하게 비자발적인 장기기증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러 평론에서는 이 소설이 현실에는 없는 장기기증 제도 - 과학 혹은 의학과 조금은 연관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SF 운운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 에 대한 문제를, 디스토피아를 드러내는 것과 같은 센세이션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현실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성장소설의 형태로 잔잔히 다루고 있다는 말을 하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이야 말로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캐시, 토미, 루스 그리고 심지어 그들 보다 한 층위 위에서 전체 문제를 알고 있었던 관리자였던 교장 선생이나 마담까지도, 바로 주어진 것으로서의 상황 혹은 세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현실은 너무나도 당연히 따라야 했던 것이다.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만일 이 소설이 무언가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그 문제가 중요성을 인정 받아야 한다면, 바로 이런 인식의 층위의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 사람들이 정작 그들 자신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 정의의 문제가 동떨어져 있다고 믿고 있는, 혹은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려는 바로 자신의 곤경을 드러내고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자신의 상황과 인식이 다른 층위에 있게 되는 문제.(이런 것을 인지 부조화라고 하지 않던가.) 과연 이런 일이 소설 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내가 이 소설을 단순히 '현실에는 없는' 장기기증의 문제를 센세이션을 통하지 않으면서 잔잔히 드러내어 성찰하고 있는 SF 소설 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넘어가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 소를 사육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소를 비인간적으로 대우해서 키우든, 아니면 초원에서 풀을 뜯게 하여 키우든, 소가 마지막으로 향하게 되는 곳은 도살장이다. 여기에서는 도살장이 기증센터로 교체될 뿐이다. 물론 고기의 질, 혹은 장기의 질에 대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클론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는 단지 언어도단일 뿐이다.

** 관건은 바로 이것이다. 소설에서는 어떠한 현실 고발도 없다. 그저 주어진 것에 대한 인정과 과거에 대한 회한만이 있을 뿐. 그런 의미에서 어떠한 현실성도 담보하지 않으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SF의 장르적 특성에 부합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실체적 현실에 대한 문제라기 보다 개인의 단독적인 상황(개인적이며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있는)의 층위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체적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이런 단독적 상황이 주는 위화감을 '잔잔하게' 또는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것. 그래서 이 소설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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