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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보니,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라고는 너밖에 없구나. 너는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방주로 들어가거라.
모든 정결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그리고 부정한 짐승은 수컷과 암컷으로 두 쌍씩, 네가 데리고 가거라.
...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수컷과 암컷 둘씩 노아에게로 와서, 방주로 들어갔다.
이레가 지나서, 홍수가 땅을 뒤덮었다.
노아가 육백 살 되는 해의 둘째 달, 그 달 열이렛날, 바로 그 날에 땅 속 깊은 곳에서 큰 샘들이 모두 터지고, 하늘에서는 홍수 문들이 열려서,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비가 땅 위로 쏟아졌다.
...
이렇게 주님께서는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없애 버리셨다. 사람을 비롯하여 짐승까지, 길짐승과 공중의 새에 이르기까지, 땅 위에서 모두 없애 버리셨다. 다만 노아와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과 짐승들만이 살아 남았다.
- <성서>, 창세기 7장
세 가지 목소리로 연주되는 종말의 카논(canon)
홍수, '물 없는' 홍수, 그것은 어떤 환경적 종말의 다른 이름이다. 표지 그림에서처럼 동물과 인간이 떠다니고 자동차와 건물이 잠기는 그런 홍수가 그려지지는 않지만, 인간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홍수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하는 이 소설은 마치 두 가지 다른 성부의 주제의 윤창과 하나의 바소 콘티뉴오(basso continuo, 순환통주)가 표현해내는 하나의 완전한 바로크 스타일의 카논과 같이 어떤 종말과 남은 자들의 시작을 연주하고 있다. 종결부에 가까운 어느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과거의 기억과 이후의 시점으로 향하는 시간 그리고 두 다른 시점의 목소리들의 전개, 그리고 어떤 시간의 전개를 마치 베이스 성부와 같이 규칙적으로 얽히고 풀리는 두 성부의 진행을 떠받치는 종교적 담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카논의 구조를 띈다.
먼저 두 목소리의 주인은 이야기를 주로 끌어나가는 토비와 렌이다. 공적인 것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으로 설정된 세계 내에서, 모친의 병으로 인해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무너지고, 더 이상 이전의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게 되어, 평민촌의 험악한 삶으로 자신을 던져넣고, 그 속에서 발버둥치다 에덴의 정원사들의 종교 집단에 가입하게 된 토비, 그리고 자본에 의해 선택받은 삶으로부터 어머니 루선의 외도와 그에 이은 도피를 따라 같은 집단에 들어오게 된 렌, 이들은 어느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물 없는' 홍수를 각자의 위치에서 - 토비는 블랑코라는 폭력배를 피해 숨어든 새론당신 스파에 마련한 은신처에서, 렌은 루선을 피해 취직할 수 밖에 없었던 비늘클럽의 격리실에서 - 맞이하게 된다.
당연히 여기에서 물 없는 홍수란 국가와 공적인 것이 사라지고 사기업들만이 남은 디스토피아적 설정의 어떤 미래적 세계 내에서 자본에 의한 공공연한 생물학적 기술의 남용의 결과로 도래하는 인간 종의 멸종에 가까운 절멸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성서라는 책 속에서 이야기 되는 홍수와 같은, 그러나 그와는 달리 물 없이 도래하는 홍수(이에 대해서는 이후에 좀 더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그들 각각의 기억을 통해 디스토피아적 사회와 이로부터 도피한 '에덴의 정원사' 집단에서의 생활의 면면이, 때로 시차를 두고, 또는 때로 겹쳐지면서 이어진다.*
[* 토비의 삶은 3인칭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렌의 삶은 1인칭으로 전개되는데, 이런 시점의 변동은 어떤 특정한 효과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토비는 사회적인 관계로 인해 정원사들의 집단에 가입한 경우이며 어떤 객관적이고 단단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로 인해 그녀는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게 된다. 반면 렌의 경우, 정원사 집단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물론 자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개인적 관계로 인한 것이며, 이에 더해 사춘기 시기의 동요가 함께 더해져, 그녀는 일정 이상 주관적인 방식의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토비의 3인칭 시점과 렌의 1인칭 시점의 서술은 이를 보다 더 확연히 드러내는 효과를 가진다.]
이 두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이 어떤 장르적 음악과도 같은 구조를 지닌 이야기를 떠받치는 저음부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담화, 즉 정원사 집단의 지도자 아담 1의 설교다. 종교, 자본에 대한 저항, 환경과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보존이 혼합된 이 설교자의 담화는 환경 운동가 및 저술가들 - 예를 들어,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 혹은 어머니와 같은 것으로 그려내는 <가이아> 이론의 러브록이나 DDT 피해를 비판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저술하여 환경 운동의 선구자가 된 레이철 칼슨 - 을 성인으로 삼는 기념일들로 하여 의례의 형식으로 전달되고 있는데, 어쨌든 이 성인들의 축일은 시간의 흐름의 기준이 되고, 이들의 축일에 맞추어 행해지는 지도자 아담 1의 혼합적 신학의 담화 - 기독교적 종교와 자연 또는 환경이 혼합되어 일종의 자연으로서의 신을 그려내는 - 는 이 매우 그럴 법한 허구를 필연적인 어떤 것으로 풀어내고 있는 카논의 구조에서 그 기반이 되는 순환통주의 역할을 담당한다.
어쨌든 창세기에 서술된 죄악이 넘쳐나는 세상을, 인간들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한 신, 그에게 선택받은 의로운 자 노아, 그가 신의 명령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만드는 커다란 배, 그 배에 실린 동물들, 40일간의 비와 터져나오는 땅 속의 물, 아라랏 산 위에 안착한 배, 그리고 다시는 홍수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서의 무지개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같이, 이 공상과학 소설(science fiction)이나 디스토피아 소설(distopia novel)이 아닌 사변적 허구(speculative fiction, [*역자는 이 문구를 '사색소설'이라고 번역])는 - 작가의 말에 따를 때 - 어떤 파국과 그 파국에서 남은 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 일종의 종말론적 배치로부터 우리는 어떤 정치적 차원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희구했던 종말론적 종교운동의 궤적이 항상 현실 정치와의 대립으로 치달았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토비와 렌,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정원사들 모두가 처해 있는 허구적 현 상태(status quo) 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국가의 소멸과 기업의 사회 지배가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다. 군과 치안을 담당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체보안회사, 주택 조합과 생물 과학 연구를 독점하고 있는 건강현인 조합, 쾌락적 욕구 충족을 자본화하는 섹스 마트 등으로 구성된 이 사회의 가장 높은 위계를 점하고 있는 대자본들은 배제된 자들을 양산하여, 평민촌이라고 불리는 울타리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마치 'homo homini lupus(인간은 인간에 대한 늑대)'라는 홉스의 격언을 연상케 하는 삶, 공적인 것이 소멸되어 버린 사회 내에서, 인간은 인간을 잡아먹는다(예를 들어, 시크릿 버거에서 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 패티).
공적인 것이 사라져버린 이 디스토피아적 배치 내에서, 이러한 자본의 지배는 기술을 통해 진행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학에 대한 어떤 기술적 왜곡을 보게 된다. 과학은 새로운 것을,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지식의 장 속에 끌어들이는 노력이며 과정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배치 내에서, 과학이 행하는 작업에 찍히는 방점은 더 이상 모든 인간을 위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특정한 기술들을 개발하여 더 많은 돈을 벌고, 시장의 약육강식적 경쟁구도 속에서 특정한 인간의 지배적 우위를 지키는 기술적 봉사에 찍힌다. 정원사들은 바로 이런 배경으로부터 등장한다. 물 없는 홍수를 기다리며 모든 기술적 지배에 저항하는 공동체는 한 때 이 체제를 위해 봉사하던 과학자들이다.
어쨌든 이 전직 과학자들이 어떤 이유로 종말론이라는 종교적 주제와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소설은 그들을 기술적 생산도구로 종속시키고 있던 자본의 장치에 대해 이들이 반감을 품었고, 그래서 그로부터 빠져나오게 되는 정황에 대해서는 자세하지는 않지만 추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이들이 굳이 종교에, 특히 터무니 없는 종말론에 대해 연관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과연 자본의 지배라는 절대적인 것이 물 없는 홍수라는 필연적인 - 하지만 동시에 우연적인 - 장치를 통해 사라진 세계 내에서(여기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를 떠올리는 것은 그리 무리한 상상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것의 자리를 어떤 환경적 담론과 종교적인 것의 혼합적 형상이 채우고 들어온 세계 내에서, 과연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환경 혹은 자연과 신의 융합, 신의 자연화, 혹은 자연의 신격화에서 말이다. 문제는 인간의 역사(history)가 결코 어떤 순수한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그 오염된 배경 속에서도 생존해왔다는 점이다. 인간 종 혹은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인간이라는 동물은 어떤 의미에서든 오염된 혹은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적응하여(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육식을 하게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까지 그 이야기(history)를 이어왔으며, 또한 이어가고 있다.
어쩌면 문제는 결국 오늘날의 환경 담론이 지닌 어떤 회고적, 낭만적 성향에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말하자면 과거의 세계 혹은 지구는 오늘날과 달리 오염되지 않았다던가, 인간이 신과 같은 자연을 마구 훼손하여 더 이상 옛날과 같지 않으니, 이제라도 전통적인 삶으로 되돌아가 자연이 인간의 오염을 스스로 정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그런 류의 태도에 말이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될 뿐이다. 마치 원래 어떤 순수한 것(에덴 동산)이 있었고, 인간은 그 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는 그런 방식의 회귀의 욕구. 그런 절대적인 것(자본의 지배)을 다른 절대적인 것(신-자연)으로 대체한 세계 내에 남겨진 인간들은 어떤 내일을 맞이하게 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