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올해 우리의 경로는 부정 또는 재앙에 대한 탐구의 경로이며, 나는 간단한 문제에 관한 숙고를 통해 그 탐구를 진행하고자 한다. 철학자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달리 제기될 때, 이러한 심문이 관건이 된다. 철학자들이 있을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조건들은 무엇인가? 달리 말해서, 그 문제는 텍스트로부터 철학 또는 철학자들의 과거 또는 현재의 실존을 연역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국가를 인용함을 통해 이 문제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자문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실존하기 위해 요구되는 기준들은 어떤 것들인가? 그렇다면 부정적인 길을 통해 그 문제에 접근해보도록 하자.
1. 철학자는 사유의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의 실존은 예술가로서의 예술가의 결정을 기입하는 그의 작업물들에 의해 확인된다. 예술가의 실존은 작업물과 예술적 활동을 사유로 인정하며, 그 자체를 활동하는 사유의 실존으로 제시한다. 반대로, 철학은 본질적으로 활동하는 사유로 인식되지 않는다:
- 소크라테스는 직업이 없었으며, 실업자다.
- 견유학자 디오게네스의 철학은 매우 전형적인 일화들을 제기한다.
- 스피노자에게 있어, 자유로운 인간은 신의 지복(beatitude, 완전한 행복)의 매개체 안에 그 자신이 수용된 사람이다. 스피노자는 윤리학(l’Ethique, 에티카)의 저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거기 있음(il y a)를 가능하게 하는 방식을 보여준 사람이다. 말하자면, 그 거기 있음의 실존은 하나의 조건이거나 또는 그 저술의 결과지만, 그 실존은 기하학적 방식의(more geometrico) 증명을 통한 본질적인 방식으로 주장되지 않는다.
- 데카르트에게 있어, 우리가 진정한 문제들 – 의학, 역학, 윤리, 수학 – 에 전념할 수 있도록, 형이상항의 문제들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저술을 남긴 위대한 철학자들은 결국 철학자로서의 실존이 그들의 철학적 저술의 실존 안에 구속되어 있는 범위 내에서만 말할 뿐이다. 철학적 저술은 더 나은 것에 봉사하겠지만 우연히 실존한다는 측면으로부터 추론된 저술 작업으로 되돌아 가도록 방임된다. 그리고 철학자는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가 되도록 하는 것을 계획하는 동시에, 그 이상적인 목표에 관련하여 그의 작업을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본질로부터, 철학은 일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
현재, 플라톤은 우리에게 철학자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철학적 본성(철학자들의 본성)은 언제나 있는 그리고 생성과 퇴락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그 실체(우시아[ousia], 언제나 있는 영원한 존재자)를 그들에게 밝히는 이 과학science(mathesis, 보편학, 수학)을 언제나 사랑한다>>(VI, 485 b) 우시아ousia와 마떼시스mathesis의 프랑스어 번역에 관한 해설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일반적으로, 우리는 에피스테메episteme, 마떼마mathema, 마떼마타mathemata라는 말들을 science(지식, 과학)로 번역한다. 나는 에피스테메를 과학(science)으로, 즉 테크네와 대립하는 가능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번역한다. 테크네가 단순히 기술과는 다른 것을 반향하는 맥락에서, 우리는 테크네를 지식(savoir) 또는 전문지식(savoir faire)으로 번역하여, 과학과 지식 사이에 대립관계를 도입할 것이다.
나는 마떼마mathema를 수학소(matheme)로 번역할 것인데, 이 말은 어떤 지식에 대한 설명을 통한 에피스테메를 지시하며, 따라서 전문지식으로부터 드러난 것이다.
마떼마타ta mathemata(수학)는 과학으로 번역할 것인데, 이것은 남김 없이 전달가능한 지식으로 드러나는 과학이다.
우시아ousia는 사유가 ‘토 온to on(존재자들)’과 ‘토 이네to einai(존재)’ 사이에 배치되는 불확정된 상관관계 내에서 부여되는 존재의 등재 항목이다.
그리스어 어휘의 다른 한 극단에서, 우시아는, 플라톤에게 있어, 에이도스eidos인데, 즉 이념(이데아, idea)의 가능한 검증을 통한 그것의 결정의 분할에 의한 존재인 것이다. 우시아는 에이도스에 따른 드러남 가운데 있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어 번역상의 동요가 정당화된다. 즉 본질[essence](에이도스에 의한 결정으로부터 드러난 우시아)로서든, 또는 실체[기체, subsistance](에이도스의 이편에 있는 것, 즉 결정 아래에 자리잡은 것의 이편에 있는 것으로서의 우시아)로서든 어느 편이라도 말이다.
해설 끝.
이러한 철학자에 대한 정의를 보다 자세히 검토해보자. 플라톤은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철학적 본성(phusis)>>이 있다고, 달리 말하자면, 철학자는 단독적인 결정으로서 현시된다. 즉, 언제나 그의 존재 가운에 있는 것에 대한, 즉 언제나 있는 존재자로서의 우시아에 대한 해명을 유일하게 허용하는 수학소(matheme)에 대한 사랑에 빠져있는 – <<언제나 사랑한다>> – 철학적 본성을 결정해 보고자 하는 본성의 형성을 통해 제시되는 그러한 결정으로서 말이다. 철학자는 여기에서 어떤 고유한 주체적 긴장 아래 놓인 주체의 특정한 형상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철학자의 주체성은 테크네의 외양을 띈 에피스테메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보편학(수학, mathesis)에 사로잡혀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에 있음이 지시된다. 보편학(알게 되기를 욕망하는 행위)은 그 언제나 지속하는 본질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어떤 바라봄(theoria) – 어떤 실행이 아닌 – 에만 관련되는 사랑을 그 대상으로 설정한다. 철학은 예술이 아니며 – 즉, 생산을 위해 일하는 사유가 아니며 – 철학자는 예술가, 즉 사유의 예술가가 아니다. 그가 예술가가 될 때, 철학자는 철학자로서의 그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와 예술의 관계에는 간격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개념들에 대한 설명이라는 탁월한 기교가 될 장식적인 성향에 비추어볼 때 말이다.
2. 철학자는 정치가, 즉 사유의 전략가인가?
철학자의 개입은 상황에 개입하는 노선을 통해 증언할 수 있는 정치가를 신호하는데, 그 노선은 상황의 역사성으로부터 진리를 만든다(또는 만든다). 정치가는 절대적 필요성이라는 원소를 통해 상황의 가능성들에 대해 언표하는 자다. 철학자는 스스로에게 그런 성향을 부과하는가? 플라톤에게 있어, 상황은 원칙(arche)의 그것이며, 명령의 입장이다. 정치는 원칙의 문제인데, 마키아벨리가 의미하는 군주(le Prince)와 군주정을 초래하게 될 것을 원칙을 통해 이해하도록 하자. 정치는 원칙의 우두머리(prince)이며, 또한 군주정, 즉 주권을 정초하고 설정하는 어떤 것이다. 주체적으로, 정치가(le politique)는 상황의 원칙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다. 도시 내적으로(공적인 책무) 또는 도시를 방위하는(군사적 전략) 그런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철학자는 그 스스로가 정치적 상황의 원칙을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탱할 수 없다. <<자네는 정치 권력에 대한 무시를 포함하는 진정한 철학자의 삶과 다른 삶을 아는가?>>(VII 521 b).실존을 통해 파악되는 진정한 철학자의 삶은 정치적 명령들에 대한 무시를 함축한다. 그의 삶은 유일하게 실존적 확정으로서의 모든 철학적 명령으로부터만 감산되는 것이 아니며 – 따라서 철학자는 정치가가 아니며 – 그 보다는 오히려 정치가가 그러한 욕망을 가질 수 없는 그의 철학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 테제는 철학자-왕이라는 플라톤적 테제와 모순되는 듯 보인다.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주요한 모순 – 국가의 열쇠가 되는 – 인데, 왜냐하면 정치가가 철학자의 상황을 배제하는 철학자-왕의 상황이라는 서로를 배제하는 두 욕망들에 개입하는 이상, 전개하기 매우 까다로운 규범성에 따라, 정치가는 철학자를 강제하거나 또는 그가 철학자가 되도록 강제되기 때문이다. 철학자라는 이름에 합당한 철학자에게 있어 정치의 실행은 강제된 매듭인데, 만일 정치가 상황의 원칙(arche)이라면, 철학자는 정치가가 아닌 동시에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식별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철학자는 과학적 담론으로부터 식별가능한가?
그리고 우선적으로, 과학적인 것의 실존을 증언하는 자는 무엇인가? 주체로서의 과학자에 의해 증언되는 실존은 예술가의 실존이나 정치가의 실존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 과학자는 우선적인 의미에서 저술 작업들을 생산하지 않으며, 상황적인 궤적들과 관련되지도 않는다. 만일 그 실존이 축적가능한 언표들 – 이론들, 과학자들로부터 발견된 법칙들 – 을 통해 증언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언표들은 사용가능한 모든 문집을 통해, 그것을 언술하는 자의 언표를 무관하게(중립적으로) 만드는 합의적 작업을 통해 직접적으로 재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자의 실존을 증언하는 유일한 것은 고유한 이름들이다. 탈레스(Thales) 또는 푸리에(Fourier)의 정리를 말할 때, 우리는 고유한 이름의 개념들을 표출할 뿐이며 다음과 같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즉,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 과학은 명백히 과학자들의 고유한 이름으로부터 그들 스스로가 기술적으로 벗어나는 언표들을 드러내지만, 그 이름들이, 즉 그 언표들에 관련된 고유한 이름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오는 축적가능한 언표들의 항구적인 보충물이 남겨진다. 비록 그 언표들의 축적가능한 성격이 그 언표들을 그것들 각각의 이름에 고유한 것과 무관하게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정말로 탈레스가 그 언표의 이름을 산출한 정리의 창안자인가를 아는 것과는 상관 없이, 그 언표는 탈레스라는 고유한 이름 아래 과학적으로 실존한다.
철학에 있어서도 그러한가? 별로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철학에서 고유한 이름은 데카르트주의, 칸트주의와 같은 단독적인 형용사화를 통해 찍혀 나오지만, 그러한 형용사화는 철학이 축적적인 언표들의 형상 내에서 제시될 수 없다는 사실로 귀착된다. <<나는 생각하며, 따라서 존재한다>>는 언표는 데카르트적인 코기토(cogito)라기 보다는 데카르트의 코기토인데,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객관화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것이 그의 코기토인지를 자문하는 일을 피한다. 오히려, 그것은 바로 탈레스의, 결정적으로 탈레스에 의해 발견된,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지만 탈레스의 이름 아래 등재된 정리이다.* 또한 <<나는 생각하며, 따라서 존재한다>>는 철학적 언표는, 있는 그대로, 진정하고 검증가능한 언표들의 자료집에 통합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주체적 색인이 그 언표에 관해 그 학자의 고유한 이름에 의해 고정된 순전한 보충물일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의 최초의 언표들은 고유한 이름들의 놀라운 순수성을 지탱하지 않으며, 그 언표들의 고유한 셈을 위해서나, 독립적으로 그 언표들을 단언한 자에 대해 기능하지 않는다. 철학적 언표는 언제나 그것의 생성에 있어 이중적 시련을, 즉 반박과 변용이라는 시련을, 그 언표가 철학의 역사적 생성을 가로지른다는 것으로부터 이어지는 이중적 양상을 경험하게 된다.
[*탈레스의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명제에서 물이란 세계를 감싸 안고 흐르는 근원의 강 오케아노스와 신들이 그 이름을 두고 맹세하는 강 스튁스를 말하는데,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탈레스가 말하는 물이란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즉 사유다. 다시 말해 존재의 근원은 사유라는 것이다.]
a) 반박의 시련
<순수이성비판>의 순수이성의 오류추리들Des paralogismes de la raison pure이라는 장(순수 이성의 변증적 추론에 대한 [순수이성비판] 2부, 선험적 변증Dialectique Transcendantale, 2권)에서, 칸트는 코기토를 반박하고 있는데, 이것은 내가 칸트주의를 통해 실행하는 데카르트적 언표에 대한 반박이다. <<사람들이 우리의 생각하는 존재라는 본성에 영향을 미치는 순수 이성에 대한 과학으로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선험적 심리학(psycholgie transcendentale)의 네 가지 오류추리로부터. 우리는 그것에 전적으로 내용이 비어있는 그 자체로서의 단적인 재현 이외에 다른 토대를 부여할 수 없다. 즉, 내게 있어, 그것이 개념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리고 모든 개념들을 수반하는 단순한 인식일 뿐인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말이다. 이 <<내게 있어>>로부터, 이 생각하는 <<그>> 또는 사물(Ding)로부터, 우리는 하나의 생각하는 선험적 주체 = X 이상의 그 무엇으로도 재현될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가 결코, 별개로, 최소 개념을 가질 수 없는 이 주체를 인식하는 술어들인 생각들로부터 인한 것이다.>>
존재에 대한 동일한 지점에 대해, 나라는 지점에 대해, 데카르트가 분명한 그 자신에 대해 가졌던 개념에 대한 언표를 정립하는 지점에서, 칸트는 개념이 없는 비어있는 기능을 본다. 이와 같이 엄격한 반론을 통해 뒤집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적 언표는 칸트적 언표에 관해 적합한 철학적 궤적으로 존속한다. 코기토는 그것의 반박과 변용의 연속 내에서, 그리고 따라서 달리 실존하지 않는 일반적인 철학적 담론으로부터의 축적가능하지 않은 변형들 내에서, 계속 철학적 가치를 지니는데, 이것은 어떠한 철학도 결코 그 언표들을 통해 요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적 언표는 그것의 다양한 반박들 – 동일한 반박을 통해 유지된 – 을 가로질러 유지되는 가치를 지니며, 그 언표는 전적으로 저자나 맥락에 봉합된 채로 남는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는 언표는 데카르트의 언표지만, 그 가치와 지정 사이에는 가장 낮은 층위의 역할이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 그의 언표들이 그 주체의 고유한 이름으로서의 색인이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분리되지 않는다면, 한 철학자를 그의 언표들에 할당할 수 없지 않겠는가?
b) 변용의 시련
라깡은 응축(condensation)과 전위(deplacement)라는 프로이트적 개념들에 적용된 근대적 언어학(쏘쉬르, 야콥슨)에 비추어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다시 읽은 이후,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l’Instance de la Lettre dans l’Inconscient에서 다음과 같이 쓸 것이다. <<… 바로 이 몇 마디 되지 않는 말로 나는 청중을 잠시 당황시킬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며, 따라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 말해야만 할 것은 이것이다. 내가 나의 생각의 장난감인 그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내가 생각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에크리Ecrits p517).
라깡의 조작(operation)은 데카르트의 언표를 탈국지화한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사물, 생각하는-존재의 국지화 그 자체로서의 나는 그것을 분리로 겪으며, 그 국지화의 단위였던 나는 존재의 장소와 사유의 장소 사이에 위치한 간극의 지점이 된다. 엄격한 의미에서, 라깡은 코기토를 배제한다. 그는 코기토에 간극의 구조를 도입하거나 또는 주체로서의 나를 쓰러뜨린다. 그러나 철학적 언표를 그러한 변용의 반복에 종속시키는 것, 그것은 실제로 그에게 큰 가치를 승인하여, 라깡이 데카르트로의 복귀를 확고하게 단언했던 이유를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그는, 프로이트적 발견 이후에,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버리고자 하는 동시에 무의식의 주체가 과학의 주체, 즉 데카르트적 코기토를 지탱했다고 주장했다. 그로부터 데카르트는 그 언표 가운데 제시될 수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나는 생각하며, 따라서 존재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사유는 유일하게 그 언표의 저편, 즉 반박 – 칸트의 비우기 – 과 변용 – 라깡의 버리기 – 의 연속적 횡단을 통해 그 공존(coexistence)을 정초하는 그 저편에서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는 변용과 반박을 가로질러 영속하는 그 언표들(고유한 이름의 전횡에 종속된)의 축적가능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기에, 철학자는 과학자가 아니다.
결론: 철학은 언명하는(enonciative) 또는 규칙을 정하는(legiferante) 사유가 아니다. 따라서 과학은, 또한 예술이나 정치도, 우리가 철학의 고유한 이름에 점으로 표시되도록 하는 것을 알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무엇인가?
철학자는 실존하는 어떤 사람인가? 플라톤에게 있어, 그것은 전적으로 사랑의 기능에 대한 문제다. 철학자는 특정한 방식을 사랑하는 자일 터인데, 왜냐하면 그 실존을 어떤 강화의 체제 내에서 확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테제를 주장할 것이다. 사랑 안에서, 타자의 시험에 놓인 한 개인은 – 그러나 우리는 둘을 말할 것이며, 그것이 덜 까다롭다 – 이미 되어 있게 될, 그리고 강화된 실존에 의해 나타나게 될 주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이라는 우리가 되어 있을 어떤 사람으로서의 지혜를 사랑하는 자를 – philo-sophia – 회복시키는 어떤 분명한 강렬함(intensite)의 체제 내에는 사랑이 있었다. 사랑은 철학자-주체(le sujet-philosophe)에게 관건이 되는 결정적으로 확정하는데 있어 주형이 된다. 철학자들에게는 그 실존을 강화하는데 봉사하는 이 사랑의 특정성을 지시할 책임이 있다. 철학적 사랑은 본질적으로 성구분(sexuation)에서 빠져나온 둘이다. 성차는 그 자체로 승인된 실재이나, 철학자로서의 철학자는 오로지 긴 시간을 둔 효과에 집착하는 채로 지속할 수 밖에 없다. 왜? 철학적 성향에 의해 요구되는 둘은 하나로부터 소급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임에 틀림없으며, 그러한 소급적 주체는 하나의 화신, 즉 언제나 성구분의 둘을 반영하는 어떤 것에 대해 순전히 우연적인 변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종종 에로스(eros)의 문제에 대해 말하며 이에 대해 스스로 반박할 것이지만, 그는 연속적으로 어떤 한 가지에 대해 말하기를 지속하는데, 그것은 철학적 정체성 내에서 요구되며 연루되는 사랑이 둘을, 즉 동일자의 법(le loi du Meme) 아래 정립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둘을, 승화시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둘의 실재라는 바위는 동일자의 등재 하에서 그것을 사유하는 능력에 대한 난관이며, 철학의 책무는 바로 그로부터 동일자의 올바름(droits)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인데, 결국 이 책무는 성구분에 걸려 좌초하게 된다. 그러한 좌초 – 성구분에 크게 관련된 – 는 끊임 없이 반복되는데, 실제로 이 성구분의 장소에서 정신분석과 철학 사이의 관계는 가볍게 여겨진다. 사랑은 분명히 철학자를 식별하는 원칙이지만, 동일자의 올바름은 보존되며, 따라서 성구분이 억제되는, 조건 하에 있다. 그런 지점으로부터, <<아프로디시아(aphrodisiac)>>로서의 사랑, 성적인 쾌락으로서의 사랑은 결코 완전히 무시되지 않으며, 우리는 그 힘을 인정한다. <<그런데 자네는 관능적인 사랑의 쾌락 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것을 아는가? 저는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보다 더 광적인 것도 없지요>>.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이어진다. <<반대로, 진정한 사랑은 지혜와 척도로 질서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인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결코 광적인 것도 무절제로 나타나는 것도 진정한 사랑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네. 그럴 수 없지요>>(III, 403 a).
그러므로 사랑이 철학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이라는 이 둘의 최대 강도(intensite)의 원칙이 어떤 특정한 체제 하에 붙잡혀 있을 경우, 즉 동일자의 법 아래 붙잡혀 있을 경우로 국한된다. 달리 말하자면, 이 최대의 강도는 있는 그대로 지속되지만,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는데, 즉 그 무매개성(immediatete, 직접성)으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성구분의 둘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그 자체로부터 분리된 강렬함(intensite), 즉 감각적인 것 내에서 강렬함이 그 자체를 증언하지 않기에 보존된 사랑. 동일자의 올바름을 지탱하는 이 강렬함이 은폐된 오르또스-에로스(orthos-eros), 올바른 사랑은 일종의 탈-강화(desintensification) 가운데 강렬하게 지속된다. 달리 말해, 철학적 사랑은 성구분의 둘이라는 우연적인 강도를 폐기하는 본질적인 강렬함을 통해 확산하거나 확산되어야만 한다. 철학은 성을 넘어선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즉 성구분의 둘의 주위를 맴도는 그 무질서한 우연성에 비추어 본 질서에 대한 사랑이다. <<올바른 사랑은 절제와 척도를 통해 질서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III 403 a). 이 잣대(aune)라는 말은 보수적 이데올로기로서가 아니라, 탈-강화된 강렬함의 엄밀한 형상 아래 이해해야만 한다. 만일 이 형상이 가능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철학적 사랑, 즉 오르또스 에로스(orthos eros)는 그것의 명백하게 성적인 우연성으로부터 분리된다. 그것은 이어지는 가설로 열린다. 사랑과 성 사이에는 필연적인 연관이 언제나 실존한다면, 이 둘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이 사랑의 강렬함은 분리되어 있음에도 있으며, 동일자의 표지 하에 사랑을 지킨다. 만일 우리가 끝까지 이 가설을 지지한다면, 실존의 강화와 관련된 철학자의 식별은 사랑과 성구분 사이의 비본질적 유대라는 가설 아래 실행된다. 플라톤이 보기에, 사랑에는 동일자의 논리에 연결될 수 있으며 성적인 우연성으로부터 빼내어진 보편성의 요소가 있다. 철학자는 이 사랑의 잠재적인 보편성 내에서 정립되는 것을 추구한다. 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우연성에 의해 나타내지지 않는 항들을 통해 실존의 강렬함이라는 원칙을 추구한다. 철학적 활동은 원래 개념적 체계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통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 강렬한(intense) 보편성에 의해 흔적이 남겨진(empreinte) 주체적 성향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적인 우연성으로부터 감산된 채로, 철학자는 성구분의 법칙 아래 놓인 실존의 공통적인 활동 가운데 있는데, 실제로 그는 대상 없는 욕망에 의해 또는 성을 넘어선 사랑에 의해 파악되기에 이른다. 플라톤에 따를 때, 철학은 대상 없는 욕망이 철학자를 식별가능한 것으로 드러내는 어떤 것을 통해 실존할 때에만 실존한다. 철학적 사랑은 사랑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주제가 반복된다. 삶은 철학자에게 있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실제로, 만일 대상 없는 욕망이 실존한다면, 구속하는 것으로서의 삶은 대상의 법칙 아래 놓인 욕망에 의해, 또는 성구분의 법칙 아래 놓인 사랑에 의해 부여되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의 삶을 넘어서 죽음을 길들인다고 말해지며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에게 있어 삶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삶이 철학자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idee)은, 그가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철학자가 되는데 이르기까지, 이러한 죽음의 해소에 대한 동물적 하부구조와 같이 일관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그가 대상 없는 욕망 또는 보편적인 사랑으로 실존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 즉 보편적인 것의 강렬함 가운데 놓인 철학자는 죽음을 걱정하지 않으며, 실제로 죽음은 사유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헤겔에게서 그런 것처럼, 죽음이 사유 안으로 들어온다면,그것은 개념으로서 들어오는 것이며, 달리 말해, 철학자는 이미 그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진정으로 철학이 대상 없는 욕망에 의해 지탱된다면, 철학은 죽음에 관한 사유 – 그것이 신학자의 문제인 이상, 철학의 문제가 아닌 – 라는 문제를 탈구시키는데, 왜냐하면 철학자에게 있어 그 문제는 실존적인 해석학에 의해 제한되는 유일하게 진정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치러야만 할 대가, 그것은 삶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우연적인 강도들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실존의 그물에 걸린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보편적인 강렬함 또는 대상 없는 욕망이라는 가설 아래 형성된 철학자의 성향으로 인해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어떤 사람으로서 확인된다. 철학자는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작용하는 신화 또는 종교에 호소하는 수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의지가 없음에도 죽음으로부터 빠져 나온다. 그러한 철학의 정의로 인도하는 것. 대상 없는 욕망 또는 실존을 강화하는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가설 아래, 철학은 신화적인 또는 종교적인 이야기의 중단이라는 요소 가운데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 강의에서 얻은 것을 요약해보다.
- 철학은 작업하는 사유가 아니며, 그러한 사유의 패러다임은 예술적 활동이다. 철학적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집의 실존과 철학자의 식별 사이의 유대는 외재적 질서에 속한다.
- 철학은 개입하는 사유가 아니며, 그러한 사유의 패러다임은 상황에 관련성이 있는 정치다.
- 철학은 법을 제정하는 사유가 아니며, 그러한 사유의 패러다임은 과학, 즉 고유한 이름들에 의해 열린 체계를 통해 재발견된 축적가능하고 반복가능한 언표들의 집합이다.
- 철학은 강화하는 또는 실존적인 사유가 아니며, 그러한 사유의 패러다임은 둘의 원칙으로서의 사랑이다. 그러나 그러한 강렬함을 억제하고자 시도하는 한, 철학은 무매개적으로 둘의 표지 아래 배치되는데, 왜냐하면 철학적 욕망이 대상 없는 사랑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그 자체에 기초하는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