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 민음사 모던 클래식 5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단편 모음집을 읽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책을 덮고 나면 별다른 기억이 없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몇몇 단편들만을 기억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단편 각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수가 벌써 이름들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여럿이다. 얼마 전 어딘가 인터넷 언론 기사에서, 소설을 일관적으로 구성하고, 그 소설의 줄거리를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인물의 수가 약 일곱 명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보았던 것 같다. 어떤 일관적인 기억을 위해 이 소설집 전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너무 많다.(단지 이국적인 아프리카식 이름들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이 소설집을 읽는 과정은 결코 일관적인 것일 수 없다.


물론 다행히도 이 책의 작품들에는 어떤 공통적인 정서 혹은 주제가 있다. 단순히 아프리카인들 특히, 나이지리아인들의 소외 혹은 인정 욕구라는 측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어떤 익명성이라는 측면이다. 익명적인 사람들의 비일관적인 이야기. 바로 다수를 있는 그대로 현시하는, 어떠 하나의 이름 하에 재현하지 않는 작품이라는 측면에 대해서 말이다.


철학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존재론에는 해묵은 문제가 있다. 그 시초로부터 철학자들을 괴롭혀왔던 문제 - 일자(One)와 다수(multiple)의 문제, 혹은 일대 다의 문제라는 골치아픈 문제(그리고 언듯 보기에 쓸데 없는 것 같은 문제). 과연 존재는 일자인가 혹은 다수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어떤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 물론 답을 위한 논증은 필수라는 의미에서 완전히 허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한 층위를 더 내려가서 보자면, 그 논증을 보증하는 어떠한 객관적인 보증물도 없다는 의미에서 -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으로 돌려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다수를 우선으로 하는 입장(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제시하는 다수적 플라톤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 혹은 사물들은 다수적이다. 개별 사물들의 존재를 볼 때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여럿이며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물들을 파악하는 우리, 혹은 인간 존재자의 인식 방법이다. 인간은 여럿을 하나로 구조화하여 파악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하나의 이름 하에 파악되는 일자는 어떤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바디우를 따라서, 이 작용을 하나로-셈하기[count-as-one, compte-pour-un]이라고 하기로 하자.)


예를 들어 말하자면, 지금 내가 앞에 두고 있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숨통>이라는 책은 하나의 일자화의 구조에 따라 파악된다. 우선 물리적으로 볼 때, 이 책에는 많은 낱장의 종이들이 있고, 그 위에 인쇄된 글자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소설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도 역시, 이 책을 구성하는 작품들의 이름들이, 그리고 그 개별 작품 가운데 들어있는 사물들과 사람들을 지시하는 이름들이, 동사, 조사, 연계사, 지시사 등등이 있을 것이다. 이런 하나로-셈하기의 작용은 비단 이 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인식하는 인간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가 있는 방안, 집, 동네, 더 나아가 사회나 국가의 차원에서 볼 때에도 이런 셈의 작용은 이어져,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인간이 처한 상황(situation) 속에서 파악된다.(상황이란 집합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인 하나로-셈하기 혹은 현시(presentation)의 작용은 언제나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남기게 된다. 바로 공백(공집합)이라는 이름의 원소 혹은 비어있는 부분집합을 말이다. 이 공백은 상황 내에서 셈해지지 않은 것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불안을 초래하는데, 이런 공백이 초래하는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 혹은 억압하기 위해 - 한 번 하나로 셈해진 구조는 다시 한번 하나로 셈해진다(re-present). 이 두 번째 셈하기를 재현[representation]이라 하기로 하자.


이러한 재현의 구조의 기제가 되는 것을 바디우는 상황의 상태(the state of situation, l'etat de la situation)이라고 명명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일자화의, 또는 이중적인 일자화의 구조 내에서 상황 내에 포함되어 있는 공백이라 불리는 부분집합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억압되거나 잊혀질 뿐이라는 것. 말하자면, 국가(state)라는 재현 체계* 내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시의 구조 또는 상황 내에 포함되어 있는 억압된 원소 또는 부분집합의 문제.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공백의 문제의 이름들이 있지 않은가. 이미 잊혀져 가고 있는 용산 세입자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명동의 재개발의 피해자들, 포이동, 이주노동자들...

[* 상태와 국가는 한 단어 state 또는 etat에 의해 동시적으로 지칭되는 것이다. 바디우는 바로 이 state라는 하나의 말을 통해 현시의 체제에서 공백을 억압하는 상태 또는 국가를 동시적으로 겨누고 있다.] 


이런 긴 서론 아닌 서론을, 이 그냥 생각만 해보기에도 복잡하고 재미없는 현대 철학의 이야기를 들먹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숨통>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책 혹은 소설집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있는 그대로의 현시의 이야기들을 재현이라는 작용의 개입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 그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현시되는 있는, presented) 각양각색의 이름 없는 인물들의 공백의 문제, 말하자면 감방에 갖힌 오빠에게마 가족의 관심이 쏠려 있는 한 소녀('1번 감방'), 성공한 사업가인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는 한 여자('모조품'), 종교 갈등 문제로 발생한 시장 통의 혼란에서 만난 두 여자('사적인 행위'), 정치적 혼란기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를 만남 퇴직 수학 교수('유령'), 미국으로 이주하여 정체성 갈등을 겪고 있고 중산층 가정에서 한 혼혈 아동을 돌봐주고 있는 여자('지난주 월요일에'), 아프리카 문학 그리고 동성애적인 성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한 여성작가('점핑 멍키 힐'), 미국의 삶이 모든 것을 보장할 줄만 알았으나 삶이 녹록치 않음으로 고미하는 젊은 여자('숨통'),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남편과 자식을 잃고 미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대사관을 찾은 한 여자('미국 대사관'),  한 부유한 나이지리아 여자와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으로 만나게 된 동성애자 남자('전율'), 자신의 나이지리아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의사 남편과 결혼하게 된 나이지리아 여자('중매인'), 어린 시절 할머니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오빠를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한 한 여자('내일은 너무 멀다'), 자식과 손녀를 서양적 정체성에 잃게 된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여자('고집 센 역사가')의 이야기들을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현시와 재현에 관련한 그것 만이 아니다. 문학이라는 것과 관련한 약간은 다른 층위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일자적인 아프리카 문학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 그리고 특히 이 작품집에 속한 '점핑 멍키 힐'이라는 단편에서도 드러나는 바이겠지만, 현시와 재현의 문제에 관련하여 문학에는, 특히 근/현대 문학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다.


먼저 '점핑 멍키 힐'에서 내가 읽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과연 아프리카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대할 때 마치 어떤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점핑 멍키 힐'이라는 그 모순적인 이름의 리조트에서(그것은 원숭이들이 뛰어 다니는 언덕인가, 아니면 뛰어 오르는 원숭이 언덕인가) 논의되던 아프리카 문학은 실제로는 참가자 자신들이 속한 국가 혹은 민족의 이야기들을 엮어낸 문학일 뿐이다. 


특히 문학 교수라는 에드워드라는 인물의 가부장적이며 반-동성애적인 성향이 기억이 나는데, 마치 그는 자신이 (올바른) 아프리카 문학의 현신이라도 되는 양 모임을 주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비어있는 제스쳐였을 뿐이다. 과연 누가 그의 주장을 인정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그 모임의 참가자들 중 그 누구라도 아프리카 문학의 주도적 위치를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아프리카 문학이란 그저 비어있는 것, 혹은 아무런 정체성이나 질적 규정에 의해서도 주장될 수 없는, 단순히 귀속 되어 있음으로 인해 정의되는 집합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실체'는 없다. 그저 셈의 효과, 즉 다수들에 후행하는 하나 혹은 일자가 있을 뿐이다. 


두 번째로, 지금까지의 근/현대 문학에 속한 위대한 작품들은 어떤 비일관성을 다루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상황 혹은 세계 속에 속해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공백과 같은 부분들에 대한 서술이 근/현대 문학의 성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황 속에 속한 비일관성들이 문학 작품으로 제시될 경우, 그 비 일관성들은 단순히 현시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학 작품의 일관성을 위해 재현의 구조를 편입하여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것(현시)을 그 특성으로 하는 근/현대 문학이 작품의 서술을 위해서는 비일관성을 최소한 일정 부분 이상 감추거나 억압하는 기제(재현의 기제)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을 발생시키는 문제이며, 근/현대 문학의 난관, 불가능성이다. 


이 작품집 <숨통>은 그런 불가능성을 일정 이상 우회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듯 하다. 각자에게 속한 기억할 수 없는 고유한 이름들, 그들의 현시의 이야기들, 그리고 이 현시의 이야기들을 일관적인 재현의 구조 속에 편입시키지 않는 갖가지 실험적 기법들 - 특히 2인칭 시점 - 과 단순히 그 안에 모아낸 집합의 이름일 뿐인 이름 짓기. 이 모든 것이 이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 난관으로서의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그것이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정체성, 특정성, 또는 유한성을 벗어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일종의 보편으로서의 공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것, 그것이 바로 이 아프리카 문학 작품이 아닌,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가 써낸 근/현대 문학이 지닌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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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시간이 탈구되어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 - <햄릿>, 셰익스피어.

시간이 어그러져있다. 시간이 틀어져 있다.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을 당했을 때 이런 말을 한다. 2001년 9월 11일은 그런 날이었다. 9/11 사건의 비행기들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거리로 뉴욕 트레이드 타워에 다가가 차례로 두 건물을 무너뜨린다.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가고,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이라는 책을 통해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주창한 의회 민주주의와 자유 무역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수도, 말하자면 새로운 예루살렘인(그러나 동시에 모든 불평등과 악의 수도인) 뉴욕이, 미국이,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이 날. 

사프란 포어의 작품은 이 사건에서 죽은 희생자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희생자의 기억을, 희생자는 죽었으나 살아남아, 생존하여(survived), 희생자에 대한 기억 속에 사는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2차 대전, 좀 더 정확히는 드레스덴 폭격으로 희생되었던 자신의 주위 사람들, 특히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있던 애인의 죽음으로 인해 평생 말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짓누르는  한 유령과 같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현재까지도 세계 정세에 출몰하는 테러의 유령, 9.11이라는 기원적 사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의 현대사에 출몰했던 -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출몰하고 있는지도 모를 - 나치, 홀로코스트, 그리고 전쟁의 기억이라는 유령이다. 두 기둥, 그리고 두 가지 유령적 기억, 두 가지 빗금쳐진 혹은 무너져 버린 구조물.* 우리는 과연 이 두 무너진 기억의 폐허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인가?

1. 첫번째 기둥 - 오스카와 열쇠, 블랙이라는 이름, 무한한 탐색. 9살 어린이 오스카 셸은 과학자, 음악 연주자(탬버린), 평화주의자, 그리고 채식주의자다. 왠지 9살 먹은 아이에게 붙이기에는 부담스러운 술어들이 붙어버린 이 애어른에게는 한 가지 참혹한 기억이 있다. 9.11 사태로, 뉴욕 트레이드 타워가 무너질 때, 아버지 토머스 셸이 희생된 것. 이 미국의 패권에 대한 그리고 세계의 자유로운 무역이라는 이름의 물신에 대한 외상은 어린 오스카에게도 일종의 외상적 기억을 남긴다. 살아남은 자의 희생자에 대한 무한한 죄책감과 더불어.

어머니가 죽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이는 아버지의 기억을, 아버지의 물건들을 더듬는다.** 그리고 찾게 되는 블랙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봉투와 이 봉투 속에 든 이상하게 생긴 열쇠. 오스카는 이 열쇠의 '의미'를 찾는 퀘스트에 나선다. 과연 아버지와 열쇠, 그리고 블랙이란 이름의 관계는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은 어디에서도 이 퀘스트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없음으로 인해, 거의 무한에 가까운 - 구골플렉스라는 10의 10의 100승을 의미하는 말과 같이 상상도 할 수 없는 -  한 번에 하나씩의, 지난한 탐색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화번호부에서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모든 사람들을 방문하여 아버지 토머스 셸을 아는지, 혹은 그 이상하게 생긴 특수한 열쇠가 무엇인지를 아는지를 물어보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친절들.

2. 두번째 기둥 - 할머니와 세입자, 존재와 무, 소통의 불가능성. 오스카의 할아버지 토머스 셸(아버지의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드레스덴 폭격의 생존자이며 나치의 유대인 압제의 생존자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 대한 외상적 기억, 희생자들 - 특히 자신의 애인과 애인이 가졌던 자신의 아이 - 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말하기'를 '잃어버린' 사람, 그래서 말이 아닌 몸짓으로, 왼손과 오른손의 문신으로, 그리고 노트에 글을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야만 하는, 어딘가 한 부분이 잘려나가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결혼 전에 그는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킬 정도로 많은 동물들과 함께 살고 있었고(방주의 이미지는 이후에 다시 등장), 조각을 한다곤 하지만, 미완성의 조각들만 잔뜩 만들어내고 결코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의 죽은 애인의 동생이었던 할머니와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자연히 사랑에 빠진 그들. 결혼을 원하지만 그에게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다. 특히 '아이는 안됨'이라는...

할머니 역시 이상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그녀의 삶을 존재를 붙들기 위한 것인 듯,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공간을 존재의 영역과 무의 영역으로 분류하여, 살아있는 자신의 공간에는 '존재'라는 이름을, 그리고 마치 전쟁의 포화 속에서 그리고 그로 인해 얻게 된 유럽의 외상적 기억 속에 갇혀 사는 남편에게는, 재와 같은, 유령과 같은 남편에게는 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공간 속에 '거류'하게 하는 그녀. 젊은 시절의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삶을, 살아있는 시간을, 현존을 붙잡아 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시간을 붙잡음, 글쓰기,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그녀가 글을 쓰는 타자기에는 잉크리본이 없다). 마치 약속과 같이 그 도래가 연기되고 있는 욕망.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근원적인 소통의 불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 '말하기를 잃어버린' 자의 소통의 불가능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 집 안에서 마치 거류민과 같이, '세입자'와 같이 '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존재와 무의 구획을 정하고 현존의 언어를 붙들어 내고자 하는 집주인으로서의 할머니, 두 사람 사이에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간극. 결국 아내가 오스카의 아버지를 가지게 되자 할아버지는 집을 떠나, 40년간의 정처없는 방황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언젠가 드레스덴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던 아들 토머스 셸을 향한, 결코 (생전에) 전달되지 못한 끝 없는 편지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온 자기 집에서 '세입자'로 살아가는 할아버지 토머스 셸.

그렇다면 오스카가 행하는 무한에 가까운  탐색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9살 먹은 이 아이를 이 지난한 탐색의 과정에 나서게 강제하는가? 오스카의 끝 없는 작업은 결국 블랙 씨를 만나 열쇠의 의미를 묻는 장면으로, 그리고 한 밤 중에 세입자/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관을 파헤치는 장면으로 향하게 된다. 

먼저 블랙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봉투, 그리고 이 봉투에서 나온 열쇠에 대한 퀘스트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알고 보면 블랙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와는 그저 우연히 만남에 의해 맺어진 관계일 뿐이다. 퇴근 길에 가라지 세일(garage sale)에서 산 꽃병, 그리고 그 꽃병에서 나온 열쇠. 물론 그 주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열쇠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관련된, 그러나 오스카의 아버지 토머스와는 별 다른 관련이 없는 열쇠인 것이다. 이 열쇠, 마치 어떤 자물쇠를 열어 비밀스런 의미를, 숨겨진 보물을 찾아줄 듯이 여겨지는 열쇠에 어떠한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관을 파헤쳐 확인하는 빈 관을 발굴해내는 힘겨운 노동. 이것은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 그러나 오스카의 기억 속을 유령과 같이 맴도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의미를 찾아 고착화시키는 작업, 기억하기 위해 의미로 만들어내는, 그러나 동시에 잊기 위해 기억하는, 그리고 이를 뒤로 하고 기억의 너머에서 살아가기 위한 작업, 바로 애도의 작업이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가 끝 없이 써나가는 이 수신자 없는 편지들, 결국 부재하는 수신자의 관을 채워 수신자의 사라진 신체를 대신하는 편지들에서도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아들에게 전할 약속으로 행하는 편지 쓰기, 이 의미의 전달이 끝까지 지연된 편지 쓰기는 할아버지 토머스가 아들 토머스의 비어있는 관을 열어 이 편지들로 아들의 신체를 대신할 때, 그 죽었지만 확실하게 죽지 않은(빈 무덤) 자에 대한 애도의 작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곳에서, 아버지 토머스 셸의 비어있는 무덤에서 우리는 손자 오스카 셸과 할아버지이자 세입자 토머스 셸은 공유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오스카, 애인과 아이를 전쟁의 참화 가운데 먼저 보낸 할어버지. 이 살아남은 자들이 슬픔, 희생자들과 함께 가지 못한 생존자의 기억, 이미 지나간 기억 속에, 어떤 알지 못할 부채의식 속에 침잠하지 않고, 이 죄책감을 넘어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너머'의 삶을 살기 위해, 외상적 기억을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기억과, 과거와, 스스로와 화해하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전제되는 것이 바로 불가능의 가능으로서의 애도의 작업인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도 이러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서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와 무, 주인과 세입자는 그들의 삶을 이어갈, '경계 위에서 살아가기(sur-vivant)'****를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드러난다. 비실존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빈 무덤에 연기된 편지를 배달한 이후 할아버지는 드레스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을 향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 오스카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사랑, 이 불가능한 것의 가능은 존재와 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이곳도 저곳도 아닌, 언제나 길 위에 있는 삶을, 경계 위의 삶을 표상하는 이 공항이라는 장소를, 삶을 지속하게 하는 그들을 위한 '방주'를 발견한다.   

그럼으로서의 이 소설이 제시하는 소통의 가능성은 완결된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대대로 상속된 트라우마의 기억, 그로 인한 이상 행동 그리고 그 기억의 치유.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이런 그럴듯한 이야기들만으로 그냥 끝내지는 못하겠다. 왠지 그러기에는 일정 이상 찜찜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 치유 혹은 치료라는 것에 있다. 이 일종의 유령을 내 보내는 과정, '축귀(exorcism)'의 과정에 말이다. 유령의 유령성, 유령 중 가장 유령스러운 것, 가장 성스러운 것.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말한다. 그 절대성,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Thing)'을 우리는 오스카에게서 볼 수 있다. 일종의 초자아. 인간 위에 있는, 인간의 죄책감의 근원이며(오스카의 경우에는 아버지에 대한,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망자들에 대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의탁하는 것.

오스카는 분명 아버지의 유령을 애도하는 또는 내쫓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러한 축귀의 성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연극 중에 난동을 부리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자신이 그러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서, 또는 초자아에서 해방되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싸 안으며, 이미 아이의 모든 행동을 예측하고 미리 손을 써 놓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또 다른 초자아에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는 정상이 된 것이다. 정상성 자체를 위한 정상성, 주위의 타자들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미덕, 말하자면 오스카는 이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아 심리학(ego-psychology)을 연상하게 되지는 않는가? 인간의 이상행동은 병이며, 이런 병리적 현상을 바로 잡아 사회라는 절대적인 것 - 여기에서 다시 한번 절대적인 것, 유령 중의 유령이 연상되지는 않는가 - 에 순응 및 적응하게 하는 치료의 행위를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아이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초자아 혹은 대타자 보다 더욱 더 '절대적'이며, 성스러운 것, 유령 중의 가장 유령스러운 것으로 향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의 종결은 아이에게서 귀신의 내쫓음(아버지의)에 성공하기 위해 사회라는 이름의 더 크고 절대적인 귀신으로 전이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이다. 

만일 치료를 일종의 축귀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진정한 치료는 오히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의탁 없이,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볼 때 절대적인 것이 일종의 효과일 뿐임을 드러내고, 사막과 같이 아무것도 없음에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어떤 현재에나 실체적인 미래가 아닌 언제나 이미 도래하여 있는, 도래하게 될 가능성을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은 결코 아름다운 과정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소설의 종결부가 제시하는 그러한 따사로운 눈길 같은 것은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유령적인 것',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의탁 혹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용서가 가능해 지는 지점은 바로 이 사막과 같은 장소 - 초자아 또는 대타자에게서 해방되는 장소 - 일 것이다.  

어쩌면 오스카는 이런 과정 중에 있는 지도 모른다. 아이의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사회라는 대타자의 구조 속에 함몰시켜, 정상성을 위한 정상성 속에서 그려내는 것은 어딘지 암울하다. 과연 그러한 구도 내에서 우리는 어떤 주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단지 대상화된 주체일 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 제시하는 종결에 대해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이 아이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언제나 이미 도래해 있는 '약속'을 사유해내야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제시하는 2% 모자란 듯한 종결부의 구조는 바로 그런 완전함에 대한 약속을 위해 세이브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 첫번째 기억의 구조물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만 같았던, 기실 그 내부로부터 어떤 붕괴의 씨앗을 품고 있던 미국의 패권. 두번째 구조물은 완전한 인류를 향한 20세기, 서양 문명이다.    

** 소설 전반에 걸쳐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모티프가 여기저기 등장한다. 마치 비극처럼, 그러나 동시에 희극처럼. 한편으로, 오스카가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불안감은 햄릿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자리에 오른 삼촌에 대해 가지는 일종의 오이디푸스적 컴플렉스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비극).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스카가 맡은 역은 요릭의 해골이라는 역(이라기 보다는 무대 장치)이었다. 요릭은 죽은 햄릿 왕의 궁정 광대였고, 햄릿 왕자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비극 속에 등장하는 희극적 인물의 해골. 심지어 오스카는 자신의 무대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 희극적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 오스카의 할머니가 손자에게 쓴 편지에서 할아버지는 드레스덴에서 보았던 것 보다 작아져 있다.  

****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하는 이 sur-vivant이라는 단어는 '생존하다(survivre)'라는 프랑스어 를 sur-(위)와 vivre(살다)로 끊어서 만든어낸 개념이다. 말하자면 위에서 살아가기, 계속 살아가기(living-on)인 것이다.

***** 오스카가 블랙이라는 이름을 찾는 과정 중에도 어머니는 오스카가 만난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아이를 배려해 줄 것을 부탁해 놓았다. 

******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는 단적으로 말해서 구원자 없는 구원이라 할 수 있다. 라깡에게 있어 치료라는 개념은 물론 처음에는 분석가가 일종의 권위있는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분석가와 내담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내담자가 알게 함으로써, 말하자면 초자아 또는 대타자가 없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끝나게 된다. 이것은 현재에 있는 것도, 정해진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기에 어떤 전미래(future anterior) 시제로, 가능성으로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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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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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니푸르라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작가가 쓴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라는 이 소설을 읽기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소설의 줄거리만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간단하다. 한 좌파적 성향을 띠고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이후에 퇴학당한 한 남자(다라)와 어린 대학 신입생 여자(사라)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이 둘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 그리고 이 이야기를 검열하는 검열관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 하지만 소설은 저자 자신의 독백, 두 연인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랑, 그리고 소설가와 검열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의들을 둘러싸고, 계속적인 의식과 시점의 전환, 시간의 전환, 여러 가지 창작 과정의 문제들이 어떠한 일정한 방식도 찾을 수 없는 구조로, 다시 말해  전혀 일관적일 수 없는 구조로 전개된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바로 몇 가지 이야기 해 볼 수 있는 포인트들을 살펴보자.  


1. 먼저 소설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Censoring an Iranian Love story>라는 제목. 아마 좀 더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이란식 사랑 이야기의 검열>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란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검열. 이 소설을 이끌어 가고 있는 두 주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란식 사랑 이야기의 검열>이라는 이 책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사랑 이야기를 그려내는 소설인가, 아니면 이 이야기에 대한 검열의 과정을 그려내는 소설인가?


2. 작가에 따르면,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종교적 시각에 따라 모든 저작물에 대한 극심한 검열로 인해(당연히 이슬람 율법에 따른), 어떤 이야기도 그대로 출판되기는 불가능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검열로 인해 소설가는 밥을 굶고, 출판사는 문을 닫는다. 하지만 작가는 무조건 검열이라는 것에 대해 무한하게 적대적인 듯 하지는 않다. 물론 소설가의 자조섞인 말에 따르면 이란의 작가들은 검열을 담당하는 '종교 및 문화 지도부'의 사사건건의 개입을 피해나가기 위해 벼라별 문체, 단어, 문장들을 써내게 된다. 말하자면 그런 이유로 더 나은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 어쩌면 이 작품 내에서 검열은 일종의 창작행위의 이면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예술적 진리를 예술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은 검열관들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만든다. 그렇다면 창작이 있는 그대로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검열이란 무엇이며, 검열과 창작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당신들 가운데 누구도 이 영화를 진실로 이해했다고 생각지 않소. 이 영화는 본다는 것의 기술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 보는 것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기술 말이오. 영화예술과 그것의 시각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겉으로는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진부하고, 눈멀고, 종잇장처럼 얇은 삶을 펼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영화는 상이한 삶과 기이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으니 말이오. 그런 다음 영화의 기거법으로, 모든 운전자들과 경찰들과 가족들과 교장 선생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는지 보여 주는 거고. 그러나 이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이한 삶과 기이한 캐릭터마저도 아니라고 할 수 있소. 정작은, 본다는 것이 얼마나 영화적인 기술인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지요. 내가 감독이었다면 영화의 제목을 달리 지었을 것이오. '영화의 향기' 혹은 '예술의 향기'...... 처음부터 다시 틀고 여러분은 모두 나가 주시오. 혼자 보고 싶으니." -p244-45


검열관 x. 나는 그에게서 <장미의 이름>에서 튀어나온 호르헤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자신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서, 이 진리가 위험한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통제하려는 자들 - 종교 혹은 정치를 우위에 두고 - 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은 일정 이상 서로 닮아 있다. 보라. 눈먼 검열관 x의 말은 예술에 대한 매우 깊은 이해를 담고 있는지를. 비록 눈은 멀었으나, 예술적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이 맹인에게 있어, 검열이란 예술을 잘못 '볼' 수도 있는 자들의 불순한 '바라봄'을 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물어야만 할 것이 있다. 과연 그의 '정화'는 예술 자체를 위한 것인가, 혹은 정치 또는 종교 - 이란이 신정체제인 관계로 - 를 위한 것인가? 예술 자체의 고유한 진리를 위한 정화가 아니라, 외부적인 일자 또는 큰 타자(the Other)를 위한 정화가 이루어지며, 예술이 변질될 때. 여기에 어울리는 다른 이름은 없을 것이다. '재앙'이라는 이름 이외에는.*  

3. 먼저 검열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사랑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누구에게나 사랑이란 참 골치아픈 문제다. 하지만 또 어찌보면 매우 상투적인 그런 문구와 이야기들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라와 사라의 이야기가 그렇다(적어도 소설의 전반부에 있어서). 다라는 어느날 사라를 보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이란과 세계의 현대 문학의 걸작들 일일이 점을 찍어가며 자신의 사랑을 전한다. 마치 비밀스러운 암호를 전하듯이. 사라는 이 흥미롭지만 치명적인 전희를 통해 결국 얼굴도 모르는 다라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매우 흥미로운, 그러나 동시에 매우 전형적인 이야기. 그러나 이 이란식 사랑 이야기는 결코 이러한 클리쉐(cliche)와 같이 진부한 방식에 빠진 채로 전개되지 않는다.


4. '감금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문구를 들고 시위 현장에 나갔던 사라. 그녀는 그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녀를 자유주의자로 폄하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미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그리고 종교적인 순수주의자들은 그녀의 피켓팅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이라 말한다. 도대체 이 문구는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문구가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드러나는 일종의 전복을 위한 복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전형적인 (이란식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사랑 이야기의 플랏을 그리고 있는 전반부와는 달리, 소설의 후반부는 일종의 혼란으로, 심지어 작가 조차도 이야기가 자신의 손을 떠나버렸다고 말할 정도의 혼돈으로 빠져들어간다. 사라는 더 이상 수동적인 주체, 혹은 다라가 빠져버린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인 사랑의 주체가 되어간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있었던 히잡을 벗어버린 사건을 떠올려 보라. 이란이나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여성이 히잡을 벗어버리는 것은 단순한 법의 위반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권리를 포기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라의 제지에도 사라는 오래된 육필본 시집을 얻기 위해 히잡을 벗어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어떠한 정치적인 또는 종교적인 규정 또는 금제도 그녀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여성적 주체의 모습을 통해 보자면, '감금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이 일견 모순적인 문장에는 공산주의자에게도, 헤즈볼라에게도, 자유주의자에게도 있을 수 없는 정치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성적인 금제와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적 성역할로부터의 해방의 차원을 말이다.


5. 그로 인해 대상적인 지위에 머물던 사라는 주체적인 지위로 나아간다. 그녀는 다라를 적극적으로 시험하고(다라의 투옥 사건을 상기할 것), 사랑을 위해 안정된 혼처를 포기하기도 하며(매시간 수염을 다듬어야 하는 중국산 연필 장수 신밧드), 사회적 시선과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와 함께 소설가 역시 자신이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내고 있는 이 두 연인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된다.**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의 구도에서 벗어난(사라는 더 이상 대상이 아니며, 다라 역시 더 이상 완전한 주체가 아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무너진(선을 긋고자 노력하는 소설가는 페트로비치의 사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더 이상 이야기 외부에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닫히지 않은 채로 끝을 맺고 있다. 어쩌면 이 '닫히지 않은 채로 끝을 맺는다'는 표현 자체에 모순이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정작 소설을 끝냈으나, 검열은 끝나지 않은...


6. 어찌 보자면 중요한 것은 결국 이란식 사랑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란식 검열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랑 이야기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소설의 줄거리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검열이 부가되어 이야기는 완전히 제멋대로, 비일관적으로 흐르게 되며,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마치 일종의 보충물(supplement)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라가 지닌 정치에서 벗어나는 정치의 급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검열로 인함은 아닌가. 비록 작가가 말한 통제의 상실이 검열로 인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검열 역시 사랑이나 예술의 과정을 오직 하나 뿐인 정치-종교적 관점을 통해 정화해내지는 못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이 갖가지 모순으로 가득 찬 이란식 사랑/검열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사는 아드소에게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들은 결코 혼자 죽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재앙이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호르헤는 결국 장서관을 불태웠고, 물론 장님 검열관 x는 아니지만, 페트로비치는 사라에 대한 집착으로 다라를 죽이려 하며, 결국 소설은 비완결로 끝이 난다.


**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꼽추 난장이의 이미지가 의미심장하다. 이 꼽추 난장이는 아마도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패러디일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왕궁의 광대였던 꼽추 난장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재봉사에게 초대받아 저녁을 먹다가 음식이 기도에 걸려 죽는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유대인 의사의 집앞으로 치워지는데, 유대인 의사는 이 시신을 밟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게 하며, 자신이 죽인 줄 알고 집 굴뚝에 시체를 넣어둔다. 이런 식으로 난장이의 시신은 돌고 돌게 되는데, 이 이야기만 놓고 볼 때 난장이에게서 별다른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죽은 난장이'의 응시, 연인들을 쏘아보고 있는 그 응시에서 이 꼽추 난장이가 페트로비치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검열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도 하다. 말하자면 소설가는 검열로 인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된 것이다. 죽은 꼽추 난장이의 응시, 죽은 이의 응시는 '유령'의 응시다. 국가라는 실존하지 않는 것의 '유령적 신체'. 페트로비치는 바로 이런 유령적 신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 어쩌면 이 '검열'이라는 것을 일종의 보충물(supplement)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전혀 핵심적인 것(사랑 이야기)이 아니라, 그저 곁다리로 더해졌을 뿐인데, 원래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린, 혹은 더해진 것으로 대체되어 버린 그런 것. 말하자면 데리다가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에서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그대로 위험한 보충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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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하우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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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레이트 하우스. 글자 그대로 큰 집, 위대한 집, 위대한 집안. 이 '집'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집은 건축물을, 또는 더 나아가 돌아갈 곳, 즉 고향을, 그리고 한 조상의 자손들이 이룬 집안, 씨족, 더 나아가 민족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이 '집'에 대한 여러 의미들이 겹쳐져서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위대한 위대한 집, 즉 헤롯에 의해 개축된 성전은 ACE 70년 경(ACE는 after common era의 줄임말. 요즘은 AD[anno domine] 보다 이 종교적 의미가 제거된 연법을 사용함)에 유대 지역의 반란에 대한 로마 제국의 진압으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 이후로 로마 제국 전역으로, 다시 말해 지중해 연안의 전역으로 유대인들이 퍼져나가게 되었고, 우리는 이를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끝없이 이어진다. 서양 중세가 끝나갈 무렵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인퀴지션(Inquisition)* 이라 불리는 유대인 핍박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전국적인 유대인 추방이,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포그롬(Pogrom)이라 알려진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 모든 유대인 학살의 정점에 있다. 바로 나치에 의해 제시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Die Endlosung)'으로서 말이다. 유럽의 '유대인 문제'는 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이라는 중핵을 둘러싸고 구성된다.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소설 역시 이 홀로코스트 세대의 유산/상속의 문제, 혹은 의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잠시 간략히나마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워낙에 소설 자체가 네 가지의 매우 상관성이 낮은 이야기들로 진행되다 보니 줄거리라고 말하는 것도 좀 어색하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 기괴하게 크고, 매우 여러 개의 서랍을 가진 '책상'이라는 물건을 두고 연관되어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이 소설의 구성적 순서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조지 와이즈로부터 시작된다. 와이즈 집안의 '유산'인 책상. 그는 '상속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거 유대 역사 학자였던 아버지의 유물들을 모으고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있기 전에 살았던 부다페스트, 그 곳에 위치한 어린 시절의 집에 있던 가구들 하나하나를 모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그의 사업은 나중에는 오래된 가구들이나 수공품들을 거래하는 직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매우 집요하고 철저한 사람이었고, 그런 이유로 업계에서 큰 손이 된다. 그의 염원은 부다페스트의 집에 있던 모든 것을 되찾아, 예루살렘의 하오렌 가에 위치한 그의 집안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러나 그에게도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있다.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열쇠를 물려 받았던 여러 개의 서랍이 딸려있는 큰 책상. 와이즈의 정보망에 걸려든 책상은 로테 버그라는 런던에 사는 유대인 작가의 소유로 있다가, 다니엘 바스키라는 인물을 거쳐, 뉴욕에 사는 나디아라는 소설가의 소유로 있다. 

  

문제는 이 책상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다른 두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많은 기억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수영 구멍'에서 남편의 독백적 내러티브를 거쳐 그려지고 있는 로테 버그에게 이 책상은 비밀스러운 것이다.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던 바스키가 그녀에게 이 책상을 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오랫동안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던 이 책상을 그녀는 선뜻 내준다. 그녀의 남편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큰 수수께끼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부인의 삶 자체가 수수께끼다. 이후에 알게 되지만, 결혼했을 때 이미 그녀는 포기해 버린 자식이 있었다. 누구의 자식인가. 그리고 어떤 아이일까. 혹시 그 소중한 '유산'을 물려줄 정도의 사람이라면, 바스키라는 그 청년? 하지만 그가 버그가 죽은 이후로 알게 된 것은 이미 그녀가 낳아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켰던 아이는 이미 젊었을 때 죽었다고 한다. 그럼 도데체 어떻게 그녀는 어떻게 그 책상을 얻었을까. 그녀의 남자는 누구였나. 버젠(버그의 남편)은 결국 그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얻기를 포기하고, 수수께끼로, 답이 없는/열려진, 비어있는 '구멍'으로 남긴다.** 

 

책상은 바스키를 거쳐 뉴욕에 사는 소설가 나디아의 손에 들어간다. 그녀는 이 책상에서 25년간 작업했다. 남의 삶을 도둑질 하는 듯한 자책감과 소설을 쓰면서 드는 권태, 이혼 모든 상념들이 이 '블루 프린트'의 이미지로서의 책상 속에 녹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바스키의 딸임을 자처하는 레아 와이즈라는 젊은 아가씨가 나타난다. 그녀에게 선뜻 책상을 넘기는 나디아. 그러나 나디아의 삶은 그 책상 없이는 너무나 불안하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하오렌 가로 책상을 찾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찾아간 주소의 집주인은 그 책상을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갑작스런 삶의 변화 속에서 그녀는 교통사고를 범하고 만다. 


그녀의 차에 치여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버린 사람은 전직 판사, 도브다.*** 그는 영국에서 잘나가던 판사였지만 일을 그만 두고 고국인 이스라엘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다. 그의 아버지의 독백.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과도한 보호를 받고 자랐고, 형과는 달리 고집이 셌던 인물인 도브에 대한 기억들. 그는 전기 줄로 괴롭힘을 당하는 상어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그가 바로 그 상어와 같이(호흡 보조 장치와 심전도 기구들을 두르고) 의식을 잃은 채 침상에 누워있다.   


그리고 조지 와이즈의 아이들, 아브너와 레아. 레아 와이즈는 당연히 조지 와이즈의 아이다. 레아는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상속의 의무'를 완수하게 하기 위해, 나디아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두 사람의 삶이 완전히 망가진다. 어쨌든 와이즈가 자신의 '상속의 의무'를 실행하는 동안 아이들은 마치 유령이 나올 법한 환경 속에 버려진다. 과거의 기억 속에 살아가는, 이미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사람의 아이들. 그들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결여된 아이들(Children manque)'일 것이다.(이 '결여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다루게 될 것이다.)


잠시 - 아니 좀 길게 - 줄거리에 대해 살펴 보았으니 이제 해야 할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이 소설 속에서 상속이 의무와 같은 것이었듯이, 내게 있어 이 소설이 지닌 이념적 요소들을 논하고 비평하는 것이 의무와 같은 것이다. 


1. 시간의 문제


이 소설의 시간은 어딘가 어그러져 있는 듯 하다. 물론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물들, 또는 주위 인물들의 기억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의 매우 연결고리가 약한 모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시간은 도저히 정방향으로 흐르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어그러진 시간, '탈구된(disjointed)' 시간에는 어떤 다른 의미도 담겨 있다. 어떤 정의롭지 못한, 불의한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시간이 탈구되어 있음을 말한다. 마치 햄릿과 같이 말이다. 어딘가 바르지 못한 시간, 옳지 못한 시간 속에서, 삶 역시 어그러져 간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을 이루고 있는 전체적인 플롯은 조지 와이즈에게 있어, 그리고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에게 있어 탈구된 시간을 바로잡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조지 와이즈가 추구하는 '정확한' 과거로의 회귀가, 기억의 회복이, 보상적 정의가 탈구된 시간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혹은, 다시 말해, 정의로울 수 있을까?)   


2. '역사'로서의 책상, '그레이트 하우스' 학파


시간의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기 위해 '책상'이라는 기표로, '역사'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와이즈의 아버지가 쓰던 책상은, 와이즈가 되찾은 '바로 그' 책상은 그의 아버지가 유대 역사를 연구하던 학자였다는 의미에서 '역사'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랍비 요카난 벤 자카이의 이야기와 느부갓네살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유대왕 시드기야와 그의 권속들을 모두 붙잡아 바벨론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열왕기 25장)가 언급된다. 


역사적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바벨론의 예루살렘 점령 이후 솔로몬의 성전은 파괴된다. 그러나 그 이후 페르시아의 바벨론 정복 이후, 페르시아 왕 키루스(우리말 성서에서는 '고레스'로 표기)는 유대인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은 페르시아의 허가를 얻어, 성전을 재건한다. 이후 성전은 앞에서 언급된 그대로, 헤롯에 의해 한 차례 중건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ACE 70년 경의 유대 반란(소설에서 언급된 바 코크바를 수장으로 한) 때 로마 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 때 랍비 요카난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 성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 로마군 지휘관에게 학교를 만들어 유대인들의 율법을 보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야브네라는 지역에 학교를 세웠고, 이 학파의 이름이 바로 '그레이트 하우스'인 것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성전(그레이트 하우스)'을 문자로 다시 세운 것이다. 


와이즈의 기억에 대한 회복, 상속의 의무는 바로 이런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사라져버린 과거에 대한 회복으로서 그는 아버지의 책상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찾기 원한다. 그러나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을 다시 (정확하게 동일하게) 돌려받을 때 과연 그가 그렇게도 원하는 '그레이트 하우스'의 회복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과연 그가 원하는 '그레이트 하우스'는 완전한 하나로, 다시 말해 온전한 것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인가?


3. '결여된 아이들', 지그문트 바우만, <홀로코스트와 모더니티> 신판 서문, "기억의 의무 - 그러나 무엇을?"에서...


이러한 논점과 관련하여 이야기 할 것은 와이즈 집안의 아이들이다. 어쩌면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라도, '아이들의 거짓말'이 책상과 연관되었던 나디아, 그리고 그녀의 망가진 삶으로 인해 '희생된' 도브라는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바로 이 와이즈 집안의 유령과 같은 아이들이 'Children manque' 혹은 '결여된 아이들'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이 말은 홀로코스트 이후 세대를 뜻하는 말이다.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와 모더니티>라는 책의 신판 서문에서 이 '결여된 아이들'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바우만에 따를 때, 오늘날 그들도 희생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무엇에 희생되었단 말인가? 바우만이 <홀로코스트와 모더니티> 신판 서문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그는 먼저 나치들의 '최종 해결책'에 대해, 그리고 수동적으로 이 최종 해결책에 동참했던 독일인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들의 태도는 '악의 진부함(또는 평범성)'이라는 말 그 자체로 설명이 될 수 있을 법한 수동적인 태도로 몇몇 미치광이들이 벌인 잔치에 동참한다. 자신들이 알던 '개별적인' 선한 유대인들에 대한 기억은 쓰레기와 같이 버리고, 당시 사회(의 광기)가 내세우던 불량한 유대인이라는 재현을 아무런 거부 없이 받아들인 그들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비판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비판적 시각은 이 '결여된 아이들', 즉 홀로코스트 세대 이후의 유대인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유대 국가에 사는 사람들로 옮겨간다. 


여기에서 바로 이 현대 유대 국가를 사는 유대인들의 '기억의 정치'가 지니는 문제가 드러난다. 그들의 자기 동일성, 또는 정체성은 바로 이 지나가버린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홀로코스트라는 외상적(traumatic) 기억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을 -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들 이전의 세대를 - 희생자로 만들었던 자들의, 나치와 그들에게 수동적으로 동조한 자들의 장소에 자신들을 치환시킨다. 희생자들(또는 희생자로 스스로를 재현하는 자들)이 팔레스타인 인들이라는 희생자를 만드는 자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4. 유산/상속의 의무로서의 책상, 그러나 거치는 사람마다 의미가 달라지는, 비이었는 기표


와이즈가 '상속의 의무'를 실행하기 위해 되찾고자 하는 아버지의 책상, 그것은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책상을 거쳐간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로 남아 있다. 로테 버그에게 있어, 그 의미는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그렇기에 그녀의 남편에게 그 책상의 의미는 아내와 동일하게 수수께끼,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나디아에게 있어 그 책상은 오래 전의 친구 바스키에 대한 기억과 그 만큼이나 오래된 그녀의 작업을 구상하게 했던 '블루 프린트(blue print)'의 의미로 남게 된다.

와이즈에게 있어 아버지의 유산, 유대인의 역사, 자신의 상속의 의무를 완수하게 해 줄 궁극적인 대상인 이 책상은 결코 동일한 것, 온전한 하나가 아니다. 그 책상은 분명히 장소를 달리하고, 상황을 달리 할 때 마다 다른 의미와 연관되는 것, 즉 비어있는 기표일 뿐이다. 이 텅빈 기표로서의 책상을 단순한 어떤 상속물, 또는 물건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유대인'이라는 이름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자.  


5. '유대인'이라는 이름 


이 글을 쓰기 전에 찾아 보았던 서평들 중 하나는 이 책이 디아스포라에 관한 질문으로 추동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서평이 제시하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예루살렘이 없는 유대 민족은 어떤 것인가? 나라가 없이 어떻게 유대인이 있을 수 있는가? 신이 있는 곳을 모른다면 어떻게 희생제물을 바칠 수 있을 것인가? 어찌 보자면 이 질문들은 타당하다. 민족이란 그들이 사는 장소, 즉 생활영역을 가진 자들이다. 예루살렘과 연관되지 않은 유대인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신을 모시지 않는 유대인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유대인'이라는 기표가 지닌 어떤 것을 일정 이상 놓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정체성은 바로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고, 땅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으로 그들이 섞여 살았던 지역인 유럽에서, 터키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그 지방의 지역민들과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집이 없다는 것(unheimlichkeit)*****이었다는 말이다.  


그들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게 되는 기원적 서사에서, 그들 민족과 종교의 조상인(그리고 동일하게 다른 중동 지역민들과 다른 두 유일신 종교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신으로부터 자신의 아버지의 집과 고향을 뒤로 하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들의 '약속의 땅'에서도, 그들은 장막을 치고 사는 유목민으로서의 생활을 지속한다. 그리고 또한 그들의 기원적 서사에서 나오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은 어떤가. 히브리 민족은 당시 가장 발달한 문명의 풍요로움을 뒤로하고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을 향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장장 40년을 떠돈다. 과연 그들이 농경민으로서, 정주민으로서 살았던 세월이 얼마나 될까. 그들을 특징짓는 율법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들의 율법이 그들 주위에 살던 민족과 스스로를 완전히 구분하기 위한 전적으로 새로운 계약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 이름이 가지는 정체성 없는,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난 정체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지배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의 이전 세대를 희생자들로 만들었던 나치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이 가장 적게 살고 있는 국가'라는 이 모순적인 말은 의미를 가진다. 


과연 <그레이트 하우스>를, 이 위대한 집안을, 위대한 민족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기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oddly compelling)' 소설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묘한 방식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개종과 숨어있는 유대인들의 색출 및 탄압을 전제한 이단 심문/판


**'수영 구멍'이라는 제목, 특히 이 '구멍'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나디아의 독백의 장이 '전원 기립'인 이유이며, 도브는 유일하게 책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관계가 있다면 간접적인 것일 뿐이다.


****자카이의 아들 요카난[우리말 성서식으로는 요한]의 의미. 랍비는 율법 선생을 의미


*****원래는 이 말로부터 uncanny(섬뜩한)이라는 번역어가 나온다. 하지만 Heim이라는 단어가 집, 고향, 돌아갈 곳을 의미하기에 '집 없는'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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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제품 사용 설명서라는 형식을 차용한,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 기본적으로 이것이 내가 전석순이라는 주목할 만한 신인 작가의 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매우 그럴 듯한'. 이 문구를 예술에 적용했던 한 사상가가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예술은 철학이 철학의 고유한 사유를 지속할 수 있었던 한 조건이었다. 이 '매우 그럴 듯한'이라는 문구는 내게 있어 철학을 시작한 한 위대한 사상가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예술이 진리를 거울에 비춰내듯이 모방하는 '매우 그럴듯한' 반영물이라고 보았다. 이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 플라톤의 예술관에 반대하여 그의 제자이자 같은 정도로 위대한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 진리가 없다는 플라톤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은 그저 허구일 뿐이며, 오로지 효용을 통해서만 평가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이 효용이 그 유명한 '카타르시스'다. 


요즘 들어 소리 소문 없이 서점에 깔리고 있는 청년 서사들에 대한 키워드는 무엇보다 바로 이 카타르시스라는 것이다. 이 카타르시스라는 단어에 일종의 '위로'와 '해학'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1권에서 비극을, 지금은 실전된 2권에서 희극을 다루었다). <철수 사용 설명서> 역시 단순하게 이들 중 분류할 수 있겠지만, 일종의 풍자의 형식을 빌어 우리 사회 청년들의 '표준적인' 혹은 '평균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설은 결코 단순히 특정 세대를 위한'위로'를 위한 모티프만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자기 계발 담론의 소비와 함께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낙오된 이들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는 청년 세대 서사가 이에 평행적인 궤도를 달리고 있는 정황에서, 우리는 이 책에 대해서도 어쩌면 그런 책들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 이 책은 대한민국 대표 백수 '철수'(그 이름 마저도 평균적이며 대표적이다)의 이야기가 다른 청년 세대 서사들과 같이 어떤 '위로'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계발을 통한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에 열중해야 하고, 이런 과정에서 밀려난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동병상련적으로 너무나도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그런 평가 만으로는 이 책이 지닌 모든 것을 잡아낸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위로 혹은 카타르시스라는 말에 담겨있는 치료적 차원의 의미, 나는 특히 그 의미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책에 대한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볼 작정이다. 


단순한 '위로' 혹은 패러디를 통한 '해학'이라는 평가만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지점들에 접근하기 위해, 좀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기로 하자. 여기에서 우리는 좀 머리가 복잡해지는 - 그리고 소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어 보일 수도 있는 - 이야기를 통해야만 한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소설을 보는 입장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비미학[원제: 비미학을 위한 작은 매뉴얼Petit manuel pour d'inesthetique>이라는 책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 보다 정확히 말해서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 네 가지 입장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이 네 입장을 내재성(immanence)과 단독성(singularity)라는 두 가지 기준을 통해 도출해낸다.*,**


먼저 첫번째 입장은 지도적(didactic) 도식이다. 지도적 도식에 따르면, 예술은 진리를 담고 있지 않으며 진리는 예술 바깥에 있다(진리가 예술 안에 없으므로 내재성은 없고, 예술과는 분리된 진리만의 고유한 영역이 인정되므로 단독성은 있음).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예는 플라톤인데 그는 시를 오로지 진리의 '매우 그럴싸한' 반영물로 규정하고, 시인들을 추방을 주장하는 한편, 시가 오로지 진리를 모르는 자들을 교육하는(지도하는) 목적으로만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 


두번째 입장은 낭만적(romantic) 도식이다. 낭만적 도식에 따를 때, 오로지 예술만이 진리를 만들어낸다(진리가 예술 안에 있으므로 내재성은 있으나, 진리가 예술만의 고유한 진리가 아니므로 단독성이 없음). 이 입장의 예로는 하이데거를 들 수 있을 것인데, 하이데거는 플라톤이 추방했던 시인들에게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오직 시만이 존재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세번째 입장은 고전적(classical) 도식이다. 이 도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을, 말하자면 <시학>에서 제시된 카타르시스적인 예술관에 따른 것으로, 예술은 진리를 생산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예술에는 어떠한 고유한 진리도 없다(내재성과 단독성의 결여). 예술의 가치는 오로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카타르시스, 즉 해소 또는 해학을 통한 '위로'인 것이다.


문제는 이 과거의 세 가지 입장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포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포화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말하자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는, 진부한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20세기의 지도적 도식은 현실 공산주의의 교조적 이념을 선전하는 도구일 뿐이고, 낭만적 도식은 신들의 복귀라는 완성되지 못한 예언 가운데 소진되어 버렸으며, 고전적 도식은 (라깡 이래로) 그 분석적 냉소주의에 빠져버렸다. 


그렇기에 바디우는 진리 절차로서의 예술을 제시할 수 있으며, 내재성과 단독성 양자를 모두 갖추고 있는 네번째 입장, 즉 유적인 도식을 제시한다. 예술(또는 예술 작품)의 실존 그 자체가 진리의 한 영역이며, 그 고유한 영역을 갖추고 있는 그런 도식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적인 도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진리 절차로서의 예술에 대한 사유 그 자체일 것이다.(시인들을 추방해야 하는 한편으로 시를 진리의 교육을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플라톤의 모순적 입장에 얽힌 매듭을 풀어냈다는 의미에서, 혹자의 평가에 의하면, 예술에 대한 입장은 플라톤 보다 더 플라톤적인 것이다.)


굳이 이런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바로 이 네 번째 입장을 통해 이 소설을 보기 위해서다. 전석순의 작품은 다시 말해 두지만 단순히 요즘 유행하고 있는 '포화된' 청년 세대 담론들 중 하나로 소비하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그 자체로서의 '이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소설 자체에 대해, 이 소설이 내포하고 있는 이념적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기로 하자.


1.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상황지어지는 '판타지'의 공간: 대한민국***


소설 전반에 걸쳐 우리는 '평균', '표준', '비교'라는 단어를 매우 여러 차례 접하게 된다. 애초에 철수라는 이름 자체가 매우 '평균적인' 또는 일반인들을 대표하는 '표준적' 이름이다. 요즘은 어떤 지 모르겠지만 20대 후반의 세대만 하더라도 교과서에서 철수와 영희를 보고 자랐던 기억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 또는 전석순이 철수라는 대표적인 이름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은 놀라울 정도로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의 거대서사적 이데올로기(민족통일, 민주주의, 독재타도 등)가 사라진 대한민국의 공간을 자유시장주의가 잠식하고, 그 하부 이데올로기로 나타난 자기계발담론이 일종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정황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판타지다.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언젠가'는 도래할 성공에 대한 꿈.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판타지를 지배하고 있는 이름이 바로 '평균'이라는 것이다. 평균, 표준, 기준이라는 것은 자기계발담론이 장악하고 있는 공간 내에서, 내가 적어도 내 주위의 다른 놈들 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일종의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으로 이 기준은 바로 남과 나의 비교를 위한 것이다.  


평균이라는 판타지의 공간으로 재현되는 대한민국의 사회. 이 공간 내에서 모든 것은 가치평가된다. 다시 말해, 경제적 가치로 평가된다. 이 때 일어나는 것이 바로 대상화 할 수 없는 것의 대상화, 바로 철수라는 인간의 물신화다. 전석순이 제시하는 제품 매뉴얼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철수의 모든 것이, 모든 기능들이 일종의 사용 방법, 제품 후기, Q&A 등을 통해 제시되고 평가되고 있지 않은가. 이 판타지의 공간 내에서 일어나는 물신화는, 동시에, 어떤 이데올로기의 승화를 수반한다. 내가 제시한 판타지의 공간이 가진 이름의 승화, 바로 '평균'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승화를 말이다. 어디에서도 우리는 - 그리고 우리를 대표하는 이름으로서의 철수는 - 언제나 우리를 비교하는 기준이 있다. 바로 '엄머 친구 아들/딸'이라는 이름의 기준이 말이다. '평균'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궤를 같이 하는 '비교'라는 이름의 이면적 기능은 '엄마 친구 아들/딸'이라는, 만남 적도 없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일종의 '초월적 기표'를 만들어 낸다. 


전석순의 패러디(아닌 패러디)는 바로 이러한 판타지 공간 내에서의 철저한 물신화/승화의 동시성을 철수에 대한 철저한 대상화(다른 말로 객관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매우 탁월한 무대 장치를 통해 우리는 이 판타지 공간 속에 감추어진 교환 가치와 평균/가치비교라는 허구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새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틈새를 들여다보기 이전에 먼저 철수와 그의 주위 사람들이 열심히 찾고 있는 존재의 숨겨진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 의미를 찾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2. 의미 찾기, 철수 존재의 해석학 - 철수의 의미, 철수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전석순이 그려내는 철수는 어딘가 고장나 있는 듯 하다. 무언가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재능이 없는 건지 아니면 열정이 없는 건지 물만 마신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산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가'는 철수가 뭔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자신만의 꽃을 피울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철수(존재)의 목적을, 존재의 이유를, 무엇보다 의미를 찾아 해맨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실존에 어떤 의미나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안다. 그런 이유나 의미는 어디까지나, 실존 자체에 붙여지는 해석의 행위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이러한 해석학 만으로는 철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아니 어쩌면 거꾸로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철수의 매뉴얼이 다루고 있는 모든 사용 '모드'들에서 철수가 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잘 못하는 것이 많다). 이런 해석학적 방식을 통해 찾게 되는 철수의 (숨겨진) 존재 이유는 부정적인 것을 드러냄, 비교 대상으로서의 철저한 대상화 뿐이 아닌가. 자신의 부정성에 대해, 자신의 부정적 실존에 대해 철수는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일종의 고백의 내면화.


3. 개인화, 고백, 부정성의 내면화?


이런 부정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철수는 몇 가지 기억을 더듬어 몇 가지 이야기들을 꺼낸다. 자신의 손을 때리던 피아노 선생의 잣대, 과외 선생에 대한 기억, 시도때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열, 매일 매일 없던 잘못 까지도 지어서라도 고백하게 했던 담임 선생.  


철수가 자신을 대상화(또는 객관화)하여 쓰고 있는 이 사용 매뉴얼에서 등장하는 고백이라는 장치에서 생각해 볼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푸코의 작업이었다. 고백이라는 장치는 <감시와 처벌>에서 그가 제시하는 훈육과 통제의 장치들 중 하나였다. 그의 (완전하게 객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매우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 푸코는 근대 사회를 구성하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 작업이 실질적으로 그 구조에 대한 비판, 그리고 주체의 문제로 오롯이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어쨌든 푸코의 작업에서 근대성의 긍정적 측면을 포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이러한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학자들도 있다). 


완전한 대상성(또는 객관성)은 언제나 개인의 부정적 실존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부과해버린다. 사회의 구조는 이러한 부정성의 제거와 효율적인 가치 창조를 훈육할 뿐이며, 자기 계발의 시대의 주도적 담론에서 낙오한 자들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의 책임으로 그렇게 된 자들일 뿐이다.


4. 매뉴얼로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것 - 공백 


철수는 자신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할 사항들을 적어나간다. 어찌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보다 완전해지는 고백, 자기 부정성의 내면화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외적인 것들의 정상화. 이러한 예외적인 것들의 목록이 길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중요한 질문에 이르게 된다: 철수가 철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바로 이런 부정성이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없는 열이다. 철수가 취업 모드에도, 연애 모드에도 쓸모 없는 제품이 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열이다. 그러나 이 열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철수가 되집는 그 열의 이유에 대한 기억도 실은 그저 그 열이 처음으로 나타났던 피아노 학원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이란 열려있는 것, 달리 볼 때 계속 채워나가야만 하는 것, 언제나 완전하지 않으며, 공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철수가 매뉴얼을 마무리 짓는 지점에서, 자신의 삶에 이런 공백의 지점이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결여된 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삶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것임을 깨닫는다. 삶이란 계속 채워나가야 하는 것, 그러나 결코 완전하게 채울 수 없는 것, 언제나 열려있는 매뉴얼임을 말이다. 적어도 죽을 때까지 인간은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에게 만드는 것, 삶을 삶이게 만드는 것은 공백이다. 더 이상 삶의 매뉴얼을 채워나갈 부분이 없거나, 힘이 없을 때, 아니 매뉴얼이 완성 그 자체에 왔다고 여겨질 때, 삶은 그 이면인 죽음으로 전환된다. 


애초에 삶의 토대가 되는 것, 그 조건이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공백, 그리고 우연이 아니던가. 마치 철수가 가족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러한 공백이 원래 그런 것임을 알게 될 때 철수는 애초에 잘못 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를 쓸모 없는 것으로 규정하려 했던 선생을 비롯한 사회의 구조가 아닌가 질문에 이른다. 그리고 철수 자신이, 우리 모두가 너무나 공고한 것으로 여기는 비교와 평균, 그리고 효율성의 추구를 위한 자기 계발의 체제라는 판타지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읽어나갈 때, 철수가 가진 질적인 요소들, 또는 성격들은 하나씩 감산되며(또는 소거되며), 20대 후반의 남자 백수로부터, 20대 후반의 남자, 남자을 거쳐, 인간 일반에 대한 인식으로 향하게 된다. 분명 20대 청년 담론의 서사 구조에서 어떤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은 어떤 자기 동일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동일성/정체성의 추구는 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청년들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 도식에 따르는 카타르시스의 추구만으로는 그저 20대들의 고충을 위로하고 그걸로 문제가 해결된 듯한 착각으로 빠지기 십상이다(카타르시스는 일종의 치료적 차원의 제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제기될 수 있는 - 지도적 도식에 따른 - 20대 담론을 어떤 운동을 위한 촉발 계기로 교조화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판타지의 공간에서 우리가 이 누군가 정해진 몇몇을 위한 판타지를 깨고, 모두를 위한 꿈을 꿀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념의 교조화나 경험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사실 바디우의 예술에 관한 관점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의 독특한 진리관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야만 한다. 우선 바디우는 진리를 하나로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의 네 가지 차원이 있으며(그리고 이 네 가지 진리에 다른 차원이 더해질 수도 있다), 이 진리의 각 차원은 철학을 위한 조건이 된다. 그리고 진리는 일종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매우 우연적으로 주어지는 '사건'에 대한 선언을 통해 주체가 발생하고, 이 주체는 기존의 세계(바디우의 용어로는 상황) 내에 정립된 질서(상황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것들의 부분집합을 만들어내는데, 이 새로운 부분집합은 무한한 생성의 과정 중에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디우의 예술관은 철학의 조건으로서의 그리고 어떤 새로운 것의 창안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 것이다. 그리고 '내재성'과 '단독성'은 예술과 진리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기준들이다.


** 바디우의 진리 절차로서의 예술에 관한 논의는 비미학(장태순 역, 이학사)를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이 책에서 단독성(singularity)는 특이성으로 번역되는데, 이 singluarity라는 말은 오히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신 앞의 단독자'라는 개념에서 일대 일의 관계에 얽힘을, 즉 단 하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독성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에 단독성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 여기에서 판타지는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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