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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하우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50
니콜 크라우스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레이트 하우스. 글자 그대로 큰 집, 위대한 집, 위대한 집안. 이 '집'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이미지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집은 건축물을, 또는 더 나아가 돌아갈 곳, 즉 고향을, 그리고 한 조상의 자손들이 이룬 집안, 씨족, 더 나아가 민족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이 '집'에 대한 여러 의미들이 겹쳐져서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위대한 위대한 집, 즉 헤롯에 의해 개축된 성전은 ACE 70년 경(ACE는 after common era의 줄임말. 요즘은 AD[anno domine] 보다 이 종교적 의미가 제거된 연법을 사용함)에 유대 지역의 반란에 대한 로마 제국의 진압으로 돌 위에 돌 하나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 이후로 로마 제국 전역으로, 다시 말해 지중해 연안의 전역으로 유대인들이 퍼져나가게 되었고, 우리는 이를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이름으로 기억한다.
이후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끝없이 이어진다. 서양 중세가 끝나갈 무렵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인퀴지션(Inquisition)* 이라 불리는 유대인 핍박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전국적인 유대인 추방이,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포그롬(Pogrom)이라 알려진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그 모든 유대인 학살의 정점에 있다. 바로 나치에 의해 제시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Die Endlosung)'으로서 말이다. 유럽의 '유대인 문제'는 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이라는 중핵을 둘러싸고 구성된다.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소설 역시 이 홀로코스트 세대의 유산/상속의 문제, 혹은 의무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잠시 간략히나마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워낙에 소설 자체가 네 가지의 매우 상관성이 낮은 이야기들로 진행되다 보니 줄거리라고 말하는 것도 좀 어색하기는 하다. 하지만 분명 기괴하게 크고, 매우 여러 개의 서랍을 가진 '책상'이라는 물건을 두고 연관되어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소설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이 소설의 구성적 순서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이야기는 조지 와이즈로부터 시작된다. 와이즈 집안의 '유산'인 책상. 그는 '상속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과거 유대 역사 학자였던 아버지의 유물들을 모으고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있기 전에 살았던 부다페스트, 그 곳에 위치한 어린 시절의 집에 있던 가구들 하나하나를 모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그의 사업은 나중에는 오래된 가구들이나 수공품들을 거래하는 직업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는 매우 집요하고 철저한 사람이었고, 그런 이유로 업계에서 큰 손이 된다. 그의 염원은 부다페스트의 집에 있던 모든 것을 되찾아, 예루살렘의 하오렌 가에 위치한 그의 집안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 그러나 그에게도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있다.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이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열쇠를 물려 받았던 여러 개의 서랍이 딸려있는 큰 책상. 와이즈의 정보망에 걸려든 책상은 로테 버그라는 런던에 사는 유대인 작가의 소유로 있다가, 다니엘 바스키라는 인물을 거쳐, 뉴욕에 사는 나디아라는 소설가의 소유로 있다.
문제는 이 책상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다른 두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많은 기억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수영 구멍'에서 남편의 독백적 내러티브를 거쳐 그려지고 있는 로테 버그에게 이 책상은 비밀스러운 것이다.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던 바스키가 그녀에게 이 책상을 달라고 했을 때, 그렇게 오랫동안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던 이 책상을 그녀는 선뜻 내준다. 그녀의 남편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큰 수수께끼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부인의 삶 자체가 수수께끼다. 이후에 알게 되지만, 결혼했을 때 이미 그녀는 포기해 버린 자식이 있었다. 누구의 자식인가. 그리고 어떤 아이일까. 혹시 그 소중한 '유산'을 물려줄 정도의 사람이라면, 바스키라는 그 청년? 하지만 그가 버그가 죽은 이후로 알게 된 것은 이미 그녀가 낳아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켰던 아이는 이미 젊었을 때 죽었다고 한다. 그럼 도데체 어떻게 그녀는 어떻게 그 책상을 얻었을까. 그녀의 남자는 누구였나. 버젠(버그의 남편)은 결국 그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얻기를 포기하고, 수수께끼로, 답이 없는/열려진, 비어있는 '구멍'으로 남긴다.**
책상은 바스키를 거쳐 뉴욕에 사는 소설가 나디아의 손에 들어간다. 그녀는 이 책상에서 25년간 작업했다. 남의 삶을 도둑질 하는 듯한 자책감과 소설을 쓰면서 드는 권태, 이혼 모든 상념들이 이 '블루 프린트'의 이미지로서의 책상 속에 녹아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바스키의 딸임을 자처하는 레아 와이즈라는 젊은 아가씨가 나타난다. 그녀에게 선뜻 책상을 넘기는 나디아. 그러나 나디아의 삶은 그 책상 없이는 너무나 불안하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하오렌 가로 책상을 찾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찾아간 주소의 집주인은 그 책상을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갑작스런 삶의 변화 속에서 그녀는 교통사고를 범하고 만다.
그녀의 차에 치여 식물인간 상태가 되어버린 사람은 전직 판사, 도브다.*** 그는 영국에서 잘나가던 판사였지만 일을 그만 두고 고국인 이스라엘로 돌아와 글을 쓰고 있다. 그의 아버지의 독백.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과도한 보호를 받고 자랐고, 형과는 달리 고집이 셌던 인물인 도브에 대한 기억들. 그는 전기 줄로 괴롭힘을 당하는 상어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그가 바로 그 상어와 같이(호흡 보조 장치와 심전도 기구들을 두르고) 의식을 잃은 채 침상에 누워있다.
그리고 조지 와이즈의 아이들, 아브너와 레아. 레아 와이즈는 당연히 조지 와이즈의 아이다. 레아는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상속의 의무'를 완수하게 하기 위해, 나디아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덕에 두 사람의 삶이 완전히 망가진다. 어쨌든 와이즈가 자신의 '상속의 의무'를 실행하는 동안 아이들은 마치 유령이 나올 법한 환경 속에 버려진다. 과거의 기억 속에 살아가는, 이미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사람의 아이들. 그들이 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결여된 아이들(Children manque)'일 것이다.(이 '결여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다루게 될 것이다.)
잠시 - 아니 좀 길게 - 줄거리에 대해 살펴 보았으니 이제 해야 할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하자. 이 소설 속에서 상속이 의무와 같은 것이었듯이, 내게 있어 이 소설이 지닌 이념적 요소들을 논하고 비평하는 것이 의무와 같은 것이다.
1. 시간의 문제
이 소설의 시간은 어딘가 어그러져 있는 듯 하다. 물론 그럴 수 밖에 없다. 인물들, 또는 주위 인물들의 기억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의 매우 연결고리가 약한 모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시간은 도저히 정방향으로 흐르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어그러진 시간, '탈구된(disjointed)' 시간에는 어떤 다른 의미도 담겨 있다. 어떤 정의롭지 못한, 불의한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시간이 탈구되어 있음을 말한다. 마치 햄릿과 같이 말이다. 어딘가 바르지 못한 시간, 옳지 못한 시간 속에서, 삶 역시 어그러져 간다.
어찌 보면, 이 소설을 이루고 있는 전체적인 플롯은 조지 와이즈에게 있어, 그리고 더 나아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유대인들에게 있어 탈구된 시간을 바로잡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조지 와이즈가 추구하는 '정확한' 과거로의 회귀가, 기억의 회복이, 보상적 정의가 탈구된 시간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혹은, 다시 말해, 정의로울 수 있을까?)
2. '역사'로서의 책상, '그레이트 하우스' 학파
시간의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기 위해 '책상'이라는 기표로, '역사'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자. 와이즈의 아버지가 쓰던 책상은, 와이즈가 되찾은 '바로 그' 책상은 그의 아버지가 유대 역사를 연구하던 학자였다는 의미에서 '역사'와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랍비 요카난 벤 자카이의 이야기와 느부갓네살의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유대왕 시드기야와 그의 권속들을 모두 붙잡아 바벨론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열왕기 25장)가 언급된다.
역사적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바벨론의 예루살렘 점령 이후 솔로몬의 성전은 파괴된다. 그러나 그 이후 페르시아의 바벨론 정복 이후, 페르시아 왕 키루스(우리말 성서에서는 '고레스'로 표기)는 유대인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은 페르시아의 허가를 얻어, 성전을 재건한다. 이후 성전은 앞에서 언급된 그대로, 헤롯에 의해 한 차례 중건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ACE 70년 경의 유대 반란(소설에서 언급된 바 코크바를 수장으로 한) 때 로마 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의 여기저기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 때 랍비 요카난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 성 밖으로 몰래 빠져나가 로마군 지휘관에게 학교를 만들어 유대인들의 율법을 보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야브네라는 지역에 학교를 세웠고, 이 학파의 이름이 바로 '그레이트 하우스'인 것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성전(그레이트 하우스)'을 문자로 다시 세운 것이다.
와이즈의 기억에 대한 회복, 상속의 의무는 바로 이런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사라져버린 과거에 대한 회복으로서 그는 아버지의 책상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찾기 원한다. 그러나 보상받을 수 없는 것을 다시 (정확하게 동일하게) 돌려받을 때 과연 그가 그렇게도 원하는 '그레이트 하우스'의 회복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과연 그가 원하는 '그레이트 하우스'는 완전한 하나로, 다시 말해 온전한 것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것인가?
3. '결여된 아이들', 지그문트 바우만, <홀로코스트와 모더니티> 신판 서문, "기억의 의무 - 그러나 무엇을?"에서...
이러한 논점과 관련하여 이야기 할 것은 와이즈 집안의 아이들이다. 어쩌면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지라도, '아이들의 거짓말'이 책상과 연관되었던 나디아, 그리고 그녀의 망가진 삶으로 인해 '희생된' 도브라는 인물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만 하다.
바로 이 와이즈 집안의 유령과 같은 아이들이 'Children manque' 혹은 '결여된 아이들'을 대표하는 것은 아닐까. 이 말은 홀로코스트 이후 세대를 뜻하는 말이다. 바우만은 <홀로코스트와 모더니티>라는 책의 신판 서문에서 이 '결여된 아이들'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바우만에 따를 때, 오늘날 그들도 희생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무엇에 희생되었단 말인가? 바우만이 <홀로코스트와 모더니티> 신판 서문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그는 먼저 나치들의 '최종 해결책'에 대해, 그리고 수동적으로 이 최종 해결책에 동참했던 독일인들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그들의 태도는 '악의 진부함(또는 평범성)'이라는 말 그 자체로 설명이 될 수 있을 법한 수동적인 태도로 몇몇 미치광이들이 벌인 잔치에 동참한다. 자신들이 알던 '개별적인' 선한 유대인들에 대한 기억은 쓰레기와 같이 버리고, 당시 사회(의 광기)가 내세우던 불량한 유대인이라는 재현을 아무런 거부 없이 받아들인 그들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그의 비판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비판적 시각은 이 '결여된 아이들', 즉 홀로코스트 세대 이후의 유대인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유대 국가에 사는 사람들로 옮겨간다.
여기에서 바로 이 현대 유대 국가를 사는 유대인들의 '기억의 정치'가 지니는 문제가 드러난다. 그들의 자기 동일성, 또는 정체성은 바로 이 지나가버린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경험하지 못한) 홀로코스트라는 외상적(traumatic) 기억에 의해 지배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을 -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들 이전의 세대를 - 희생자로 만들었던 자들의, 나치와 그들에게 수동적으로 동조한 자들의 장소에 자신들을 치환시킨다. 희생자들(또는 희생자로 스스로를 재현하는 자들)이 팔레스타인 인들이라는 희생자를 만드는 자들이 되어 있는 것이다.
4. 유산/상속의 의무로서의 책상, 그러나 거치는 사람마다 의미가 달라지는, 비이었는 기표
와이즈가 '상속의 의무'를 실행하기 위해 되찾고자 하는 아버지의 책상, 그것은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책상을 거쳐간 사람들에게 다른 의미로 남아 있다. 로테 버그에게 있어, 그 의미는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그렇기에 그녀의 남편에게 그 책상의 의미는 아내와 동일하게 수수께끼,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 나디아에게 있어 그 책상은 오래 전의 친구 바스키에 대한 기억과 그 만큼이나 오래된 그녀의 작업을 구상하게 했던 '블루 프린트(blue print)'의 의미로 남게 된다.
와이즈에게 있어 아버지의 유산, 유대인의 역사, 자신의 상속의 의무를 완수하게 해 줄 궁극적인 대상인 이 책상은 결코 동일한 것, 온전한 하나가 아니다. 그 책상은 분명히 장소를 달리하고, 상황을 달리 할 때 마다 다른 의미와 연관되는 것, 즉 비어있는 기표일 뿐이다. 이 텅빈 기표로서의 책상을 단순한 어떤 상속물, 또는 물건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유대인'이라는 이름과 연관시켜 생각해 보자.
5. '유대인'이라는 이름
이 글을 쓰기 전에 찾아 보았던 서평들 중 하나는 이 책이 디아스포라에 관한 질문으로 추동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서평이 제시하는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예루살렘이 없는 유대 민족은 어떤 것인가? 나라가 없이 어떻게 유대인이 있을 수 있는가? 신이 있는 곳을 모른다면 어떻게 희생제물을 바칠 수 있을 것인가? 어찌 보자면 이 질문들은 타당하다. 민족이란 그들이 사는 장소, 즉 생활영역을 가진 자들이다. 예루살렘과 연관되지 않은 유대인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신을 모시지 않는 유대인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은 '유대인'이라는 기표가 지닌 어떤 것을 일정 이상 놓치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정체성은 바로 '정체성'이 없다는 것이고, 땅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일반적으로 그들이 섞여 살았던 지역인 유럽에서, 터키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그 지방의 지역민들과 그들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집이 없다는 것(unheimlichkeit)*****이었다는 말이다.
그들을 다른 민족과 구분하게 되는 기원적 서사에서, 그들 민족과 종교의 조상인(그리고 동일하게 다른 중동 지역민들과 다른 두 유일신 종교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신으로부터 자신의 아버지의 집과 고향을 뒤로 하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들의 '약속의 땅'에서도, 그들은 장막을 치고 사는 유목민으로서의 생활을 지속한다. 그리고 또한 그들의 기원적 서사에서 나오는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은 어떤가. 히브리 민족은 당시 가장 발달한 문명의 풍요로움을 뒤로하고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을 향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장장 40년을 떠돈다. 과연 그들이 농경민으로서, 정주민으로서 살았던 세월이 얼마나 될까. 그들을 특징짓는 율법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들의 율법이 그들 주위에 살던 민족과 스스로를 완전히 구분하기 위한 전적으로 새로운 계약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 이름이 가지는 정체성 없는, 정체성으로부터 벗어난 정체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지배적 지위를 점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히려 그들의 이전 세대를 희생자들로 만들었던 나치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이 가장 적게 살고 있는 국가'라는 이 모순적인 말은 의미를 가진다.
과연 <그레이트 하우스>를, 이 위대한 집안을, 위대한 민족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기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oddly compelling)' 소설은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기묘한 방식으로...
주
*유대인들에 대한 개종과 숨어있는 유대인들의 색출 및 탄압을 전제한 이단 심문/판
**'수영 구멍'이라는 제목, 특히 이 '구멍'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이것이 나디아의 독백의 장이 '전원 기립'인 이유이며, 도브는 유일하게 책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관계가 있다면 간접적인 것일 뿐이다.
****자카이의 아들 요카난[우리말 성서식으로는 요한]의 의미. 랍비는 율법 선생을 의미
*****원래는 이 말로부터 uncanny(섬뜩한)이라는 번역어가 나온다. 하지만 Heim이라는 단어가 집, 고향, 돌아갈 곳을 의미하기에 '집 없는'을 뜻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