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검열과 사랑 이야기 민음사 모던 클래식 49
샤리아르 만다니푸르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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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니푸르라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것만 같은 작가가 쓴 <이란의 검열과 사랑이야기>라는 이 소설을 읽기는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소설의 줄거리만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간단하다. 한 좌파적 성향을 띠고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고 이후에 퇴학당한 한 남자(다라)와 어린 대학 신입생 여자(사라)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이 둘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 그리고 이 이야기를 검열하는 검열관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 하지만 소설은 저자 자신의 독백, 두 연인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랑, 그리고 소설가와 검열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논의들을 둘러싸고, 계속적인 의식과 시점의 전환, 시간의 전환, 여러 가지 창작 과정의 문제들이 어떠한 일정한 방식도 찾을 수 없는 구조로, 다시 말해  전혀 일관적일 수 없는 구조로 전개된다. 그러니 이 글에서는 줄거리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바로 몇 가지 이야기 해 볼 수 있는 포인트들을 살펴보자.  


1. 먼저 소설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Censoring an Iranian Love story>라는 제목. 아마 좀 더 정확한 번역을 하자면 <이란식 사랑 이야기의 검열>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란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검열. 이 소설을 이끌어 가고 있는 두 주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란식 사랑 이야기의 검열>이라는 이 책은 어떤 것일까. 이것은 사랑 이야기를 그려내는 소설인가, 아니면 이 이야기에 대한 검열의 과정을 그려내는 소설인가?


2. 작가에 따르면,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은 종교적 시각에 따라 모든 저작물에 대한 극심한 검열로 인해(당연히 이슬람 율법에 따른), 어떤 이야기도 그대로 출판되기는 불가능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검열로 인해 소설가는 밥을 굶고, 출판사는 문을 닫는다. 하지만 작가는 무조건 검열이라는 것에 대해 무한하게 적대적인 듯 하지는 않다. 물론 소설가의 자조섞인 말에 따르면 이란의 작가들은 검열을 담당하는 '종교 및 문화 지도부'의 사사건건의 개입을 피해나가기 위해 벼라별 문체, 단어, 문장들을 써내게 된다. 말하자면 그런 이유로 더 나은 글을 쓰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이야기. 어쩌면 이 작품 내에서 검열은 일종의 창작행위의 이면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어쩌면 예술적 진리를 예술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은 검열관들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만든다. 그렇다면 창작이 있는 그대로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검열이란 무엇이며, 검열과 창작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당신들 가운데 누구도 이 영화를 진실로 이해했다고 생각지 않소. 이 영화는 본다는 것의 기술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까. 보는 것 뒤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기술 말이오. 영화예술과 그것의 시각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군요. 겉으로는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진부하고, 눈멀고, 종잇장처럼 얇은 삶을 펼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영화는 상이한 삶과 기이한 캐릭터에 초점을 맞출 수 있으니 말이오. 그런 다음 영화의 기거법으로, 모든 운전자들과 경찰들과 가족들과 교장 선생들이 얼마나 눈이 멀었는지 보여 주는 거고. 그러나 이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상이한 삶과 기이한 캐릭터마저도 아니라고 할 수 있소. 정작은, 본다는 것이 얼마나 영화적인 기술인지를 보여 주려는 것이지요. 내가 감독이었다면 영화의 제목을 달리 지었을 것이오. '영화의 향기' 혹은 '예술의 향기'...... 처음부터 다시 틀고 여러분은 모두 나가 주시오. 혼자 보고 싶으니." -p244-45


검열관 x. 나는 그에게서 <장미의 이름>에서 튀어나온 호르헤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자신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서, 이 진리가 위험한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통제하려는 자들 - 종교 혹은 정치를 우위에 두고 - 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은 일정 이상 서로 닮아 있다. 보라. 눈먼 검열관 x의 말은 예술에 대한 매우 깊은 이해를 담고 있는지를. 비록 눈은 멀었으나, 예술적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이 맹인에게 있어, 검열이란 예술을 잘못 '볼' 수도 있는 자들의 불순한 '바라봄'을 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 물어야만 할 것이 있다. 과연 그의 '정화'는 예술 자체를 위한 것인가, 혹은 정치 또는 종교 - 이란이 신정체제인 관계로 - 를 위한 것인가? 예술 자체의 고유한 진리를 위한 정화가 아니라, 외부적인 일자 또는 큰 타자(the Other)를 위한 정화가 이루어지며, 예술이 변질될 때. 여기에 어울리는 다른 이름은 없을 것이다. '재앙'이라는 이름 이외에는.*  

3. 먼저 검열에 관한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사랑의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하자. 누구에게나 사랑이란 참 골치아픈 문제다. 하지만 또 어찌보면 매우 상투적인 그런 문구와 이야기들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라와 사라의 이야기가 그렇다(적어도 소설의 전반부에 있어서). 다라는 어느날 사라를 보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이란과 세계의 현대 문학의 걸작들 일일이 점을 찍어가며 자신의 사랑을 전한다. 마치 비밀스러운 암호를 전하듯이. 사라는 이 흥미롭지만 치명적인 전희를 통해 결국 얼굴도 모르는 다라에 대한 사랑을 키워간다. 매우 흥미로운, 그러나 동시에 매우 전형적인 이야기. 그러나 이 이란식 사랑 이야기는 결코 이러한 클리쉐(cliche)와 같이 진부한 방식에 빠진 채로 전개되지 않는다.


4. '감금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문구를 들고 시위 현장에 나갔던 사라. 그녀는 그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녀를 자유주의자로 폄하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미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그리고 종교적인 순수주의자들은 그녀의 피켓팅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이라 말한다. 도대체 이 문구는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문구가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드러나는 일종의 전복을 위한 복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전형적인 (이란식 그리고 세계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사랑 이야기의 플랏을 그리고 있는 전반부와는 달리, 소설의 후반부는 일종의 혼란으로, 심지어 작가 조차도 이야기가 자신의 손을 떠나버렸다고 말할 정도의 혼돈으로 빠져들어간다. 사라는 더 이상 수동적인 주체, 혹은 다라가 빠져버린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인 사랑의 주체가 되어간다. 예를 들어, 시장에서 있었던 히잡을 벗어버린 사건을 떠올려 보라. 이란이나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여성이 히잡을 벗어버리는 것은 단순한 법의 위반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권리를 포기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매우 위험한 일이다. 다라의 제지에도 사라는 오래된 육필본 시집을 얻기 위해 히잡을 벗어주기를 서슴지 않는다. 어떠한 정치적인 또는 종교적인 규정 또는 금제도 그녀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여성적 주체의 모습을 통해 보자면, '감금에 죽음을, 자유에 죽음을'이라는 이 일견 모순적인 문장에는 공산주의자에게도, 헤즈볼라에게도, 자유주의자에게도 있을 수 없는 정치적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성적인 금제와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적 성역할로부터의 해방의 차원을 말이다.


5. 그로 인해 대상적인 지위에 머물던 사라는 주체적인 지위로 나아간다. 그녀는 다라를 적극적으로 시험하고(다라의 투옥 사건을 상기할 것), 사랑을 위해 안정된 혼처를 포기하기도 하며(매시간 수염을 다듬어야 하는 중국산 연필 장수 신밧드), 사회적 시선과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다. 그와 함께 소설가 역시 자신이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내고 있는 이 두 연인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된다.**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의 구도에서 벗어난(사라는 더 이상 대상이 아니며, 다라 역시 더 이상 완전한 주체가 아니다),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무너진(선을 긋고자 노력하는 소설가는 페트로비치의 사라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더 이상 이야기 외부에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닫히지 않은 채로 끝을 맺고 있다. 어쩌면 이 '닫히지 않은 채로 끝을 맺는다'는 표현 자체에 모순이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는 정작 소설을 끝냈으나, 검열은 끝나지 않은...


6. 어찌 보자면 중요한 것은 결국 이란식 사랑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란식 검열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말했듯이, 사랑 이야기 자체만을 놓고 보자면 소설의 줄거리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검열이 부가되어 이야기는 완전히 제멋대로, 비일관적으로 흐르게 되며, 다른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마치 일종의 보충물(supplement)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하지만 사라가 지닌 정치에서 벗어나는 정치의 급진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이러한 검열로 인함은 아닌가. 비록 작가가 말한 통제의 상실이 검열로 인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검열 역시 사랑이나 예술의 과정을 오직 하나 뿐인 정치-종교적 관점을 통해 정화해내지는 못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이 갖가지 모순으로 가득 찬 이란식 사랑/검열 이야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사는 아드소에게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조심하라고 한다. 그들은 결코 혼자 죽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재앙이란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호르헤는 결국 장서관을 불태웠고, 물론 장님 검열관 x는 아니지만, 페트로비치는 사라에 대한 집착으로 다라를 죽이려 하며, 결국 소설은 비완결로 끝이 난다.


**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꼽추 난장이의 이미지가 의미심장하다. 이 꼽추 난장이는 아마도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한 패러디일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왕궁의 광대였던 꼽추 난장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재봉사에게 초대받아 저녁을 먹다가 음식이 기도에 걸려 죽는다. 그리고 그의 시체는 유대인 의사의 집앞으로 치워지는데, 유대인 의사는 이 시신을 밟아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게 하며, 자신이 죽인 줄 알고 집 굴뚝에 시체를 넣어둔다. 이런 식으로 난장이의 시신은 돌고 돌게 되는데, 이 이야기만 놓고 볼 때 난장이에게서 별다른 의미를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죽은 난장이'의 응시, 연인들을 쏘아보고 있는 그 응시에서 이 꼽추 난장이가 페트로비치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검열을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도 하다. 말하자면 소설가는 검열로 인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된 것이다. 죽은 꼽추 난장이의 응시, 죽은 이의 응시는 '유령'의 응시다. 국가라는 실존하지 않는 것의 '유령적 신체'. 페트로비치는 바로 이런 유령적 신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 어쩌면 이 '검열'이라는 것을 일종의 보충물(supplement)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전혀 핵심적인 것(사랑 이야기)이 아니라, 그저 곁다리로 더해졌을 뿐인데, 원래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버린, 혹은 더해진 것으로 대체되어 버린 그런 것. 말하자면 데리다가 말하기와 글쓰기의 관계에서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그대로 위험한 보충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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