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시간이 탈구되어 있다(The time is out of joint). - <햄릿>, 셰익스피어.

시간이 어그러져있다. 시간이 틀어져 있다.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을 당했을 때 이런 말을 한다. 2001년 9월 11일은 그런 날이었다. 9/11 사건의 비행기들은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이 가까운' 거리로 뉴욕 트레이드 타워에 다가가 차례로 두 건물을 무너뜨린다. 수천명의 인명을 앗아가고,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이라는 책을 통해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주창한 의회 민주주의와 자유 무역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수도, 말하자면 새로운 예루살렘인(그러나 동시에 모든 불평등과 악의 수도인) 뉴욕이, 미국이,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이 날. 

사프란 포어의 작품은 이 사건에서 죽은 희생자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희생자의 기억을, 희생자는 죽었으나 살아남아, 생존하여(survived), 희생자에 대한 기억 속에 사는 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2차 대전, 좀 더 정확히는 드레스덴 폭격으로 희생되었던 자신의 주위 사람들, 특히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있던 애인의 죽음으로 인해 평생 말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짓누르는  한 유령과 같은 남자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현재까지도 세계 정세에 출몰하는 테러의 유령, 9.11이라는 기원적 사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의 현대사에 출몰했던 -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출몰하고 있는지도 모를 - 나치, 홀로코스트, 그리고 전쟁의 기억이라는 유령이다. 두 기둥, 그리고 두 가지 유령적 기억, 두 가지 빗금쳐진 혹은 무너져 버린 구조물.* 우리는 과연 이 두 무너진 기억의 폐허에서 무엇을 볼 수 있을 것인가?

1. 첫번째 기둥 - 오스카와 열쇠, 블랙이라는 이름, 무한한 탐색. 9살 어린이 오스카 셸은 과학자, 음악 연주자(탬버린), 평화주의자, 그리고 채식주의자다. 왠지 9살 먹은 아이에게 붙이기에는 부담스러운 술어들이 붙어버린 이 애어른에게는 한 가지 참혹한 기억이 있다. 9.11 사태로, 뉴욕 트레이드 타워가 무너질 때, 아버지 토머스 셸이 희생된 것. 이 미국의 패권에 대한 그리고 세계의 자유로운 무역이라는 이름의 물신에 대한 외상은 어린 오스카에게도 일종의 외상적 기억을 남긴다. 살아남은 자의 희생자에 대한 무한한 죄책감과 더불어.

어머니가 죽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결혼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이는 아버지의 기억을, 아버지의 물건들을 더듬는다.** 그리고 찾게 되는 블랙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봉투와 이 봉투 속에 든 이상하게 생긴 열쇠. 오스카는 이 열쇠의 '의미'를 찾는 퀘스트에 나선다. 과연 아버지와 열쇠, 그리고 블랙이란 이름의 관계는 무엇인가?  

재미있는 것은 어디에서도 이 퀘스트에 대한 단초를 얻을 수 없음으로 인해, 거의 무한에 가까운 - 구골플렉스라는 10의 10의 100승을 의미하는 말과 같이 상상도 할 수 없는 -  한 번에 하나씩의, 지난한 탐색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화번호부에서 블랙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모든 사람들을 방문하여 아버지 토머스 셸을 아는지, 혹은 그 이상하게 생긴 특수한 열쇠가 무엇인지를 아는지를 물어보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에서 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친절들.

2. 두번째 기둥 - 할머니와 세입자, 존재와 무, 소통의 불가능성. 오스카의 할아버지 토머스 셸(아버지의 이름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은 드레스덴 폭격의 생존자이며 나치의 유대인 압제의 생존자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 대한 외상적 기억, 희생자들 - 특히 자신의 애인과 애인이 가졌던 자신의 아이 - 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말하기'를 '잃어버린' 사람, 그래서 말이 아닌 몸짓으로, 왼손과 오른손의 문신으로, 그리고 노트에 글을 써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해야만 하는, 어딘가 한 부분이 잘려나가 결코 전체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결혼 전에 그는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킬 정도로 많은 동물들과 함께 살고 있었고(방주의 이미지는 이후에 다시 등장), 조각을 한다곤 하지만, 미완성의 조각들만 잔뜩 만들어내고 결코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의 죽은 애인의 동생이었던 할머니와 다시 만난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모델이 되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자연히 사랑에 빠진 그들. 결혼을 원하지만 그에게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있다. 특히 '아이는 안됨'이라는...

할머니 역시 이상한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그녀의 삶을 존재를 붙들기 위한 것인 듯,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공간을 존재의 영역과 무의 영역으로 분류하여, 살아있는 자신의 공간에는 '존재'라는 이름을, 그리고 마치 전쟁의 포화 속에서 그리고 그로 인해 얻게 된 유럽의 외상적 기억 속에 갇혀 사는 남편에게는, 재와 같은, 유령과 같은 남편에게는 무라는 이름이 붙여진 공간 속에 '거류'하게 하는 그녀. 젊은 시절의 할머니에게는 자신의 삶을, 살아있는 시간을, 현존을 붙잡아 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시간을 붙잡음, 글쓰기,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 그러나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그녀가 글을 쓰는 타자기에는 잉크리본이 없다). 마치 약속과 같이 그 도래가 연기되고 있는 욕망.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근원적인 소통의 불가능성이 있다. 한편으로, '말하기를 잃어버린' 자의 소통의 불가능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 집 안에서 마치 거류민과 같이, '세입자'와 같이 '무'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할아버지와 존재와 무의 구획을 정하고 현존의 언어를 붙들어 내고자 하는 집주인으로서의 할머니, 두 사람 사이에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간극. 결국 아내가 오스카의 아버지를 가지게 되자 할아버지는 집을 떠나, 40년간의 정처없는 방황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언젠가 드레스덴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던 아들 토머스 셸을 향한, 결코 (생전에) 전달되지 못한 끝 없는 편지가 쓰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돌아온 자기 집에서 '세입자'로 살아가는 할아버지 토머스 셸.

그렇다면 오스카가 행하는 무한에 가까운  탐색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 9살 먹은 이 아이를 이 지난한 탐색의 과정에 나서게 강제하는가? 오스카의 끝 없는 작업은 결국 블랙 씨를 만나 열쇠의 의미를 묻는 장면으로, 그리고 한 밤 중에 세입자/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관을 파헤치는 장면으로 향하게 된다. 

먼저 블랙이라는 이름이 쓰여진 봉투, 그리고 이 봉투에서 나온 열쇠에 대한 퀘스트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알고 보면 블랙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와는 그저 우연히 만남에 의해 맺어진 관계일 뿐이다. 퇴근 길에 가라지 세일(garage sale)에서 산 꽃병, 그리고 그 꽃병에서 나온 열쇠. 물론 그 주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열쇠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과 관련된, 그러나 오스카의 아버지 토머스와는 별 다른 관련이 없는 열쇠인 것이다. 이 열쇠, 마치 어떤 자물쇠를 열어 비밀스런 의미를, 숨겨진 보물을 찾아줄 듯이 여겨지는 열쇠에 어떠한 의미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관을 파헤쳐 확인하는 빈 관을 발굴해내는 힘겨운 노동. 이것은 이미 죽어버린 아버지, 그러나 오스카의 기억 속을 유령과 같이 맴도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의미를 찾아 고착화시키는 작업, 기억하기 위해 의미로 만들어내는, 그러나 동시에 잊기 위해 기억하는, 그리고 이를 뒤로 하고 기억의 너머에서 살아가기 위한 작업, 바로 애도의 작업이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가 끝 없이 써나가는 이 수신자 없는 편지들, 결국 부재하는 수신자의 관을 채워 수신자의 사라진 신체를 대신하는 편지들에서도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아들에게 전할 약속으로 행하는 편지 쓰기, 이 의미의 전달이 끝까지 지연된 편지 쓰기는 할아버지 토머스가 아들 토머스의 비어있는 관을 열어 이 편지들로 아들의 신체를 대신할 때, 그 죽었지만 확실하게 죽지 않은(빈 무덤) 자에 대한 애도의 작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곳에서, 아버지 토머스 셸의 비어있는 무덤에서 우리는 손자 오스카 셸과 할아버지이자 세입자 토머스 셸은 공유된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오스카, 애인과 아이를 전쟁의 참화 가운데 먼저 보낸 할어버지. 이 살아남은 자들이 슬픔, 희생자들과 함께 가지 못한 생존자의 기억, 이미 지나간 기억 속에, 어떤 알지 못할 부채의식 속에 침잠하지 않고, 이 죄책감을 넘어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너머'의 삶을 살기 위해, 외상적 기억을 살아가는 인간은 자신의 기억과, 과거와, 스스로와 화해하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 전제되는 것이 바로 불가능의 가능으로서의 애도의 작업인 것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서도 이러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 드러난다. 서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존재와 무, 주인과 세입자는 그들의 삶을 이어갈, '경계 위에서 살아가기(sur-vivant)'****를 가능하게 하는 장소가 드러난다. 비실존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빈 무덤에 연기된 편지를 배달한 이후 할아버지는 드레스덴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을 향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아내, 오스카의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사랑, 이 불가능한 것의 가능은 존재와 무가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이곳도 저곳도 아닌, 언제나 길 위에 있는 삶을, 경계 위의 삶을 표상하는 이 공항이라는 장소를, 삶을 지속하게 하는 그들을 위한 '방주'를 발견한다.   

그럼으로서의 이 소설이 제시하는 소통의 가능성은 완결된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대대로 상속된 트라우마의 기억, 그로 인한 이상 행동 그리고 그 기억의 치유.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이런 그럴듯한 이야기들만으로 그냥 끝내지는 못하겠다. 왠지 그러기에는 일정 이상 찜찜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 치유 혹은 치료라는 것에 있다. 이 일종의 유령을 내 보내는 과정, '축귀(exorcism)'의 과정에 말이다. 유령의 유령성, 유령 중 가장 유령스러운 것, 가장 성스러운 것. 우리는 그것을 '신'이라는 이름으로 말한다. 그 절대성,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것(Thing)'을 우리는 오스카에게서 볼 수 있다. 일종의 초자아. 인간 위에 있는, 인간의 죄책감의 근원이며(오스카의 경우에는 아버지에 대한,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망자들에 대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의탁하는 것.

오스카는 분명 아버지의 유령을 애도하는 또는 내쫓는 과정에 있었다. 그리고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바로 그러한 축귀의 성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더 이상 연극 중에 난동을 부리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자신이 그러지 않겠다고 말한다. 아이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에서, 또는 초자아에서 해방되어 모든 것을 이해하고, 감싸 안으며, 이미 아이의 모든 행동을 예측하고 미리 손을 써 놓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또 다른 초자아에게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이는 정상이 된 것이다. 정상성 자체를 위한 정상성, 주위의 타자들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미덕, 말하자면 오스카는 이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아 심리학(ego-psychology)을 연상하게 되지는 않는가? 인간의 이상행동은 병이며, 이런 병리적 현상을 바로 잡아 사회라는 절대적인 것 - 여기에서 다시 한번 절대적인 것, 유령 중의 유령이 연상되지는 않는가 - 에 순응 및 적응하게 하는 치료의 행위를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아이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초자아 혹은 대타자 보다 더욱 더 '절대적'이며, 성스러운 것, 유령 중의 가장 유령스러운 것으로 향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의 종결은 아이에게서 귀신의 내쫓음(아버지의)에 성공하기 위해 사회라는 이름의 더 크고 절대적인 귀신으로 전이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말이다. 

만일 치료를 일종의 축귀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진정한 치료는 오히려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의탁 없이,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볼 때 절대적인 것이 일종의 효과일 뿐임을 드러내고, 사막과 같이 아무것도 없음에서,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를, 어떤 현재에나 실체적인 미래가 아닌 언제나 이미 도래하여 있는, 도래하게 될 가능성을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은 결코 아름다운 과정이 아니다. 여기에서는 소설의 종결부가 제시하는 그러한 따사로운 눈길 같은 것은 결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유령적인 것',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의탁 혹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용서가 가능해 지는 지점은 바로 이 사막과 같은 장소 - 초자아 또는 대타자에게서 해방되는 장소 - 일 것이다.  

어쩌면 오스카는 이런 과정 중에 있는 지도 모른다. 아이의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사회라는 대타자의 구조 속에 함몰시켜, 정상성을 위한 정상성 속에서 그려내는 것은 어딘지 암울하다. 과연 그러한 구도 내에서 우리는 어떤 주체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단지 대상화된 주체일 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 제시하는 종결에 대해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이 아이에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러나 언제나 이미 도래해 있는 '약속'을 사유해내야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제시하는 2% 모자란 듯한 종결부의 구조는 바로 그런 완전함에 대한 약속을 위해 세이브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 첫번째 기억의 구조물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만 같았던, 기실 그 내부로부터 어떤 붕괴의 씨앗을 품고 있던 미국의 패권. 두번째 구조물은 완전한 인류를 향한 20세기, 서양 문명이다.    

** 소설 전반에 걸쳐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모티프가 여기저기 등장한다. 마치 비극처럼, 그러나 동시에 희극처럼. 한편으로, 오스카가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불안감은 햄릿이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고 아버지의 자리에 오른 삼촌에 대해 가지는 일종의 오이디푸스적 컴플렉스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비극).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오스카가 맡은 역은 요릭의 해골이라는 역(이라기 보다는 무대 장치)이었다. 요릭은 죽은 햄릿 왕의 궁정 광대였고, 햄릿 왕자에게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다. 비극 속에 등장하는 희극적 인물의 해골. 심지어 오스카는 자신의 무대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 희극적 소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 오스카의 할머니가 손자에게 쓴 편지에서 할아버지는 드레스덴에서 보았던 것 보다 작아져 있다.  

****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말하는 이 sur-vivant이라는 단어는 '생존하다(survivre)'라는 프랑스어 를 sur-(위)와 vivre(살다)로 끊어서 만든어낸 개념이다. 말하자면 위에서 살아가기, 계속 살아가기(living-on)인 것이다.

***** 오스카가 블랙이라는 이름을 찾는 과정 중에도 어머니는 오스카가 만난 사람들에게 연락하여 아이를 배려해 줄 것을 부탁해 놓았다. 

******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는 단적으로 말해서 구원자 없는 구원이라 할 수 있다. 라깡에게 있어 치료라는 개념은 물론 처음에는 분석가가 일종의 권위있는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분석가와 내담자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을 내담자가 알게 함으로써, 말하자면 초자아 또는 대타자가 없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끝나게 된다. 이것은 현재에 있는 것도, 정해진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기에 어떤 전미래(future anterior) 시제로, 가능성으로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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