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통 민음사 모던 클래식 51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단편 모음집을 읽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책을 덮고 나면 별다른 기억이 없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몇몇 단편들만을 기억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단편 각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수가 벌써 이름들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여럿이다. 얼마 전 어딘가 인터넷 언론 기사에서, 소설을 일관적으로 구성하고, 그 소설의 줄거리를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인물의 수가 약 일곱 명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보았던 것 같다. 어떤 일관적인 기억을 위해 이 소설집 전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너무 많다.(단지 이국적인 아프리카식 이름들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이 소설집을 읽는 과정은 결코 일관적인 것일 수 없다.


물론 다행히도 이 책의 작품들에는 어떤 공통적인 정서 혹은 주제가 있다. 단순히 아프리카인들 특히, 나이지리아인들의 소외 혹은 인정 욕구라는 측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어떤 익명성이라는 측면이다. 익명적인 사람들의 비일관적인 이야기. 바로 다수를 있는 그대로 현시하는, 어떠 하나의 이름 하에 재현하지 않는 작품이라는 측면에 대해서 말이다.


철학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존재론에는 해묵은 문제가 있다. 그 시초로부터 철학자들을 괴롭혀왔던 문제 - 일자(One)와 다수(multiple)의 문제, 혹은 일대 다의 문제라는 골치아픈 문제(그리고 언듯 보기에 쓸데 없는 것 같은 문제). 과연 존재는 일자인가 혹은 다수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어떤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 물론 답을 위한 논증은 필수라는 의미에서 완전히 허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한 층위를 더 내려가서 보자면, 그 논증을 보증하는 어떠한 객관적인 보증물도 없다는 의미에서 -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으로 돌려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다수를 우선으로 하는 입장(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제시하는 다수적 플라톤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 혹은 사물들은 다수적이다. 개별 사물들의 존재를 볼 때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여럿이며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물들을 파악하는 우리, 혹은 인간 존재자의 인식 방법이다. 인간은 여럿을 하나로 구조화하여 파악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하나의 이름 하에 파악되는 일자는 어떤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바디우를 따라서, 이 작용을 하나로-셈하기[count-as-one, compte-pour-un]이라고 하기로 하자.)


예를 들어 말하자면, 지금 내가 앞에 두고 있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숨통>이라는 책은 하나의 일자화의 구조에 따라 파악된다. 우선 물리적으로 볼 때, 이 책에는 많은 낱장의 종이들이 있고, 그 위에 인쇄된 글자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소설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도 역시, 이 책을 구성하는 작품들의 이름들이, 그리고 그 개별 작품 가운데 들어있는 사물들과 사람들을 지시하는 이름들이, 동사, 조사, 연계사, 지시사 등등이 있을 것이다. 이런 하나로-셈하기의 작용은 비단 이 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인식하는 인간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가 있는 방안, 집, 동네, 더 나아가 사회나 국가의 차원에서 볼 때에도 이런 셈의 작용은 이어져,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인간이 처한 상황(situation) 속에서 파악된다.(상황이란 집합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인 하나로-셈하기 혹은 현시(presentation)의 작용은 언제나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남기게 된다. 바로 공백(공집합)이라는 이름의 원소 혹은 비어있는 부분집합을 말이다. 이 공백은 상황 내에서 셈해지지 않은 것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불안을 초래하는데, 이런 공백이 초래하는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 혹은 억압하기 위해 - 한 번 하나로 셈해진 구조는 다시 한번 하나로 셈해진다(re-present). 이 두 번째 셈하기를 재현[representation]이라 하기로 하자.


이러한 재현의 구조의 기제가 되는 것을 바디우는 상황의 상태(the state of situation, l'etat de la situation)이라고 명명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일자화의, 또는 이중적인 일자화의 구조 내에서 상황 내에 포함되어 있는 공백이라 불리는 부분집합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억압되거나 잊혀질 뿐이라는 것. 말하자면, 국가(state)라는 재현 체계* 내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시의 구조 또는 상황 내에 포함되어 있는 억압된 원소 또는 부분집합의 문제.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공백의 문제의 이름들이 있지 않은가. 이미 잊혀져 가고 있는 용산 세입자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명동의 재개발의 피해자들, 포이동, 이주노동자들...

[* 상태와 국가는 한 단어 state 또는 etat에 의해 동시적으로 지칭되는 것이다. 바디우는 바로 이 state라는 하나의 말을 통해 현시의 체제에서 공백을 억압하는 상태 또는 국가를 동시적으로 겨누고 있다.] 


이런 긴 서론 아닌 서론을, 이 그냥 생각만 해보기에도 복잡하고 재미없는 현대 철학의 이야기를 들먹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숨통>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책 혹은 소설집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있는 그대로의 현시의 이야기들을 재현이라는 작용의 개입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 그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현시되는 있는, presented) 각양각색의 이름 없는 인물들의 공백의 문제, 말하자면 감방에 갖힌 오빠에게마 가족의 관심이 쏠려 있는 한 소녀('1번 감방'), 성공한 사업가인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는 한 여자('모조품'), 종교 갈등 문제로 발생한 시장 통의 혼란에서 만난 두 여자('사적인 행위'), 정치적 혼란기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를 만남 퇴직 수학 교수('유령'), 미국으로 이주하여 정체성 갈등을 겪고 있고 중산층 가정에서 한 혼혈 아동을 돌봐주고 있는 여자('지난주 월요일에'), 아프리카 문학 그리고 동성애적인 성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한 여성작가('점핑 멍키 힐'), 미국의 삶이 모든 것을 보장할 줄만 알았으나 삶이 녹록치 않음으로 고미하는 젊은 여자('숨통'),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남편과 자식을 잃고 미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대사관을 찾은 한 여자('미국 대사관'),  한 부유한 나이지리아 여자와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으로 만나게 된 동성애자 남자('전율'), 자신의 나이지리아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의사 남편과 결혼하게 된 나이지리아 여자('중매인'), 어린 시절 할머니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오빠를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한 한 여자('내일은 너무 멀다'), 자식과 손녀를 서양적 정체성에 잃게 된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여자('고집 센 역사가')의 이야기들을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현시와 재현에 관련한 그것 만이 아니다. 문학이라는 것과 관련한 약간은 다른 층위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일자적인 아프리카 문학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 그리고 특히 이 작품집에 속한 '점핑 멍키 힐'이라는 단편에서도 드러나는 바이겠지만, 현시와 재현의 문제에 관련하여 문학에는, 특히 근/현대 문학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다.


먼저 '점핑 멍키 힐'에서 내가 읽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과연 아프리카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대할 때 마치 어떤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점핑 멍키 힐'이라는 그 모순적인 이름의 리조트에서(그것은 원숭이들이 뛰어 다니는 언덕인가, 아니면 뛰어 오르는 원숭이 언덕인가) 논의되던 아프리카 문학은 실제로는 참가자 자신들이 속한 국가 혹은 민족의 이야기들을 엮어낸 문학일 뿐이다. 


특히 문학 교수라는 에드워드라는 인물의 가부장적이며 반-동성애적인 성향이 기억이 나는데, 마치 그는 자신이 (올바른) 아프리카 문학의 현신이라도 되는 양 모임을 주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비어있는 제스쳐였을 뿐이다. 과연 누가 그의 주장을 인정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그 모임의 참가자들 중 그 누구라도 아프리카 문학의 주도적 위치를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아프리카 문학이란 그저 비어있는 것, 혹은 아무런 정체성이나 질적 규정에 의해서도 주장될 수 없는, 단순히 귀속 되어 있음으로 인해 정의되는 집합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실체'는 없다. 그저 셈의 효과, 즉 다수들에 후행하는 하나 혹은 일자가 있을 뿐이다. 


두 번째로, 지금까지의 근/현대 문학에 속한 위대한 작품들은 어떤 비일관성을 다루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상황 혹은 세계 속에 속해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공백과 같은 부분들에 대한 서술이 근/현대 문학의 성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황 속에 속한 비일관성들이 문학 작품으로 제시될 경우, 그 비 일관성들은 단순히 현시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학 작품의 일관성을 위해 재현의 구조를 편입하여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것(현시)을 그 특성으로 하는 근/현대 문학이 작품의 서술을 위해서는 비일관성을 최소한 일정 부분 이상 감추거나 억압하는 기제(재현의 기제)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을 발생시키는 문제이며, 근/현대 문학의 난관, 불가능성이다. 


이 작품집 <숨통>은 그런 불가능성을 일정 이상 우회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듯 하다. 각자에게 속한 기억할 수 없는 고유한 이름들, 그들의 현시의 이야기들, 그리고 이 현시의 이야기들을 일관적인 재현의 구조 속에 편입시키지 않는 갖가지 실험적 기법들 - 특히 2인칭 시점 - 과 단순히 그 안에 모아낸 집합의 이름일 뿐인 이름 짓기. 이 모든 것이 이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 난관으로서의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그것이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정체성, 특정성, 또는 유한성을 벗어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일종의 보편으로서의 공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것, 그것이 바로 이 아프리카 문학 작품이 아닌,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가 써낸 근/현대 문학이 지닌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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