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 사용 설명서
전석순 지음 / 민음사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제품 사용 설명서라는 형식을 차용한,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 기본적으로 이것이 내가 전석순이라는 주목할 만한 신인 작가의 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매우 그럴 듯한'. 이 문구를 예술에 적용했던 한 사상가가 있다. 서양 고대로부터 예술은 철학이 철학의 고유한 사유를 지속할 수 있었던 한 조건이었다. 이 '매우 그럴 듯한'이라는 문구는 내게 있어 철학을 시작한 한 위대한 사상가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예술이 진리를 거울에 비춰내듯이 모방하는 '매우 그럴듯한' 반영물이라고 보았다. 이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사상가 플라톤의 예술관에 반대하여 그의 제자이자 같은 정도로 위대한 사상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에 진리가 없다는 플라톤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은 그저 허구일 뿐이며, 오로지 효용을 통해서만 평가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이 효용이 그 유명한 '카타르시스'다. 


요즘 들어 소리 소문 없이 서점에 깔리고 있는 청년 서사들에 대한 키워드는 무엇보다 바로 이 카타르시스라는 것이다. 이 카타르시스라는 단어에 일종의 '위로'와 '해학'이라는 의미가 동시에 담겨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1권에서 비극을, 지금은 실전된 2권에서 희극을 다루었다). <철수 사용 설명서> 역시 단순하게 이들 중 분류할 수 있겠지만, 일종의 풍자의 형식을 빌어 우리 사회 청년들의 '표준적인' 혹은 '평균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설은 결코 단순히 특정 세대를 위한'위로'를 위한 모티프만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자기 계발 담론의 소비와 함께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낙오된 이들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는 청년 세대 서사가 이에 평행적인 궤도를 달리고 있는 정황에서, 우리는 이 책에 대해서도 어쩌면 그런 책들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상 이 책은 대한민국 대표 백수 '철수'(그 이름 마저도 평균적이며 대표적이다)의 이야기가 다른 청년 세대 서사들과 같이 어떤 '위로'로서 기능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계발을 통한 자신의 몸값을 올리기에 열중해야 하고, 이런 과정에서 밀려난 많은 사람들의 상황을 동병상련적으로 너무나도 그럴싸하게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결코 그런 평가 만으로는 이 책이 지닌 모든 것을 잡아낸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위로 혹은 카타르시스라는 말에 담겨있는 치료적 차원의 의미, 나는 특히 그 의미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이 책에 대한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볼 작정이다. 


단순한 '위로' 혹은 패러디를 통한 '해학'이라는 평가만으로는 잡아낼 수 없는 지점들에 접근하기 위해, 좀 멀리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기로 하자. 여기에서 우리는 좀 머리가 복잡해지는 - 그리고 소설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어 보일 수도 있는 - 이야기를 통해야만 한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소설을 보는 입장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비미학[원제: 비미학을 위한 작은 매뉴얼Petit manuel pour d'inesthetique>이라는 책을 통해, 예술을 바라보는 - 보다 정확히 말해서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 네 가지 입장에 대해 말한다. 그는 이 네 입장을 내재성(immanence)과 단독성(singularity)라는 두 가지 기준을 통해 도출해낸다.*,**


먼저 첫번째 입장은 지도적(didactic) 도식이다. 지도적 도식에 따르면, 예술은 진리를 담고 있지 않으며 진리는 예술 바깥에 있다(진리가 예술 안에 없으므로 내재성은 없고, 예술과는 분리된 진리만의 고유한 영역이 인정되므로 단독성은 있음).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예는 플라톤인데 그는 시를 오로지 진리의 '매우 그럴싸한' 반영물로 규정하고, 시인들을 추방을 주장하는 한편, 시가 오로지 진리를 모르는 자들을 교육하는(지도하는) 목적으로만 쓰여야 한다고 말한다. 


두번째 입장은 낭만적(romantic) 도식이다. 낭만적 도식에 따를 때, 오로지 예술만이 진리를 만들어낸다(진리가 예술 안에 있으므로 내재성은 있으나, 진리가 예술만의 고유한 진리가 아니므로 단독성이 없음). 이 입장의 예로는 하이데거를 들 수 있을 것인데, 하이데거는 플라톤이 추방했던 시인들에게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오직 시만이 존재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세번째 입장은 고전적(classical) 도식이다. 이 도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관을, 말하자면 <시학>에서 제시된 카타르시스적인 예술관에 따른 것으로, 예술은 진리를 생산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예술에는 어떠한 고유한 진리도 없다(내재성과 단독성의 결여). 예술의 가치는 오로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카타르시스, 즉 해소 또는 해학을 통한 '위로'인 것이다.


문제는 이 과거의 세 가지 입장이 회복불가능할 정도로 "포화"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포화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말하자면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없는, 진부한 것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20세기의 지도적 도식은 현실 공산주의의 교조적 이념을 선전하는 도구일 뿐이고, 낭만적 도식은 신들의 복귀라는 완성되지 못한 예언 가운데 소진되어 버렸으며, 고전적 도식은 (라깡 이래로) 그 분석적 냉소주의에 빠져버렸다. 


그렇기에 바디우는 진리 절차로서의 예술을 제시할 수 있으며, 내재성과 단독성 양자를 모두 갖추고 있는 네번째 입장, 즉 유적인 도식을 제시한다. 예술(또는 예술 작품)의 실존 그 자체가 진리의 한 영역이며, 그 고유한 영역을 갖추고 있는 그런 도식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적인 도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진리 절차로서의 예술에 대한 사유 그 자체일 것이다.(시인들을 추방해야 하는 한편으로 시를 진리의 교육을 위해 사용해야한다는 플라톤의 모순적 입장에 얽힌 매듭을 풀어냈다는 의미에서, 혹자의 평가에 의하면, 예술에 대한 입장은 플라톤 보다 더 플라톤적인 것이다.)


굳이 이런 길고 재미없는 이야기를 한 이유는 바로 이 네 번째 입장을 통해 이 소설을 보기 위해서다. 전석순의 작품은 다시 말해 두지만 단순히 요즘 유행하고 있는 '포화된' 청년 세대 담론들 중 하나로 소비하기에는 상당히 중요한 그 자체로서의 '이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이 예술 작품으로서의 소설 자체에 대해, 이 소설이 내포하고 있는 이념적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기로 하자.


1. 평균이라는 이름으로 상황지어지는 '판타지'의 공간: 대한민국***


소설 전반에 걸쳐 우리는 '평균', '표준', '비교'라는 단어를 매우 여러 차례 접하게 된다. 애초에 철수라는 이름 자체가 매우 '평균적인' 또는 일반인들을 대표하는 '표준적' 이름이다. 요즘은 어떤 지 모르겠지만 20대 후반의 세대만 하더라도 교과서에서 철수와 영희를 보고 자랐던 기억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 또는 전석순이 철수라는 대표적인 이름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은 놀라울 정도로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다. 과거의 거대서사적 이데올로기(민족통일, 민주주의, 독재타도 등)가 사라진 대한민국의 공간을 자유시장주의가 잠식하고, 그 하부 이데올로기로 나타난 자기계발담론이 일종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정황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판타지다. 우리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언젠가'는 도래할 성공에 대한 꿈.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판타지를 지배하고 있는 이름이 바로 '평균'이라는 것이다. 평균, 표준, 기준이라는 것은 자기계발담론이 장악하고 있는 공간 내에서, 내가 적어도 내 주위의 다른 놈들 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일종의 위안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율배반적으로 이 기준은 바로 남과 나의 비교를 위한 것이다.  


평균이라는 판타지의 공간으로 재현되는 대한민국의 사회. 이 공간 내에서 모든 것은 가치평가된다. 다시 말해, 경제적 가치로 평가된다. 이 때 일어나는 것이 바로 대상화 할 수 없는 것의 대상화, 바로 철수라는 인간의 물신화다. 전석순이 제시하는 제품 매뉴얼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철수의 모든 것이, 모든 기능들이 일종의 사용 방법, 제품 후기, Q&A 등을 통해 제시되고 평가되고 있지 않은가. 이 판타지의 공간 내에서 일어나는 물신화는, 동시에, 어떤 이데올로기의 승화를 수반한다. 내가 제시한 판타지의 공간이 가진 이름의 승화, 바로 '평균'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승화를 말이다. 어디에서도 우리는 - 그리고 우리를 대표하는 이름으로서의 철수는 - 언제나 우리를 비교하는 기준이 있다. 바로 '엄머 친구 아들/딸'이라는 이름의 기준이 말이다. '평균'이라는 이데올로기와 궤를 같이 하는 '비교'라는 이름의 이면적 기능은 '엄마 친구 아들/딸'이라는, 만남 적도 없고 앞으로 만날  일도 없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일종의 '초월적 기표'를 만들어 낸다. 


전석순의 패러디(아닌 패러디)는 바로 이러한 판타지 공간 내에서의 철저한 물신화/승화의 동시성을 철수에 대한 철저한 대상화(다른 말로 객관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매우 탁월한 무대 장치를 통해 우리는 이 판타지 공간 속에 감추어진 교환 가치와 평균/가치비교라는 허구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새를 얻게 된다. 그러나 그 틈새를 들여다보기 이전에 먼저 철수와 그의 주위 사람들이 열심히 찾고 있는 존재의 숨겨진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 의미를 찾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2. 의미 찾기, 철수 존재의 해석학 - 철수의 의미, 철수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전석순이 그려내는 철수는 어딘가 고장나 있는 듯 하다. 무언가 열심히 해 보려고 하지만, 재능이 없는 건지 아니면 열정이 없는 건지 물만 마신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산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가'는 철수가 뭔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자신만의 꽃을 피울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철수(존재)의 목적을, 존재의 이유를, 무엇보다 의미를 찾아 해맨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실존에 어떤 의미나 이유가 있을까. 우리는 안다. 그런 이유나 의미는 어디까지나, 실존 자체에 붙여지는 해석의 행위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이러한 해석학 만으로는 철수 자신에 대해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아니 어쩌면 거꾸로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철수의 매뉴얼이 다루고 있는 모든 사용 '모드'들에서 철수가 잘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잘 못하는 것이 많다). 이런 해석학적 방식을 통해 찾게 되는 철수의 (숨겨진) 존재 이유는 부정적인 것을 드러냄, 비교 대상으로서의 철저한 대상화 뿐이 아닌가. 자신의 부정성에 대해, 자신의 부정적 실존에 대해 철수는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일종의 고백의 내면화.


3. 개인화, 고백, 부정성의 내면화?


이런 부정성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철수는 몇 가지 기억을 더듬어 몇 가지 이야기들을 꺼낸다. 자신의 손을 때리던 피아노 선생의 잣대, 과외 선생에 대한 기억, 시도때도 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열, 매일 매일 없던 잘못 까지도 지어서라도 고백하게 했던 담임 선생.  


철수가 자신을 대상화(또는 객관화)하여 쓰고 있는 이 사용 매뉴얼에서 등장하는 고백이라는 장치에서 생각해 볼 것은 무엇인가. 개인적으로는 푸코의 작업이었다. 고백이라는 장치는 <감시와 처벌>에서 그가 제시하는 훈육과 통제의 장치들 중 하나였다. 그의 (완전하게 객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매우 실증적인 작업을 통해, 푸코는 근대 사회를 구성하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 작업이 실질적으로 그 구조에 대한 비판, 그리고 주체의 문제로 오롯이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어쨌든 푸코의 작업에서 근대성의 긍정적 측면을 포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이러한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학자들도 있다). 


완전한 대상성(또는 객관성)은 언제나 개인의 부정적 실존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부과해버린다. 사회의 구조는 이러한 부정성의 제거와 효율적인 가치 창조를 훈육할 뿐이며, 자기 계발의 시대의 주도적 담론에서 낙오한 자들은 어디까지나 그들 스스로의 책임으로 그렇게 된 자들일 뿐이다.


4. 매뉴얼로는 결코 잡아낼 수 없는 것 - 공백 


철수는 자신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할 사항들을 적어나간다. 어찌 보자면 이것이야말로 보다 완전해지는 고백, 자기 부정성의 내면화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예외적인 것들의 정상화. 이러한 예외적인 것들의 목록이 길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중요한 질문에 이르게 된다: 철수가 철수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바로 이런 부정성이라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무런 의미도 이유도 없는 열이다. 철수가 취업 모드에도, 연애 모드에도 쓸모 없는 제품이 될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바로 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열이다. 그러나 이 열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철수가 되집는 그 열의 이유에 대한 기억도 실은 그저 그 열이 처음으로 나타났던 피아노 학원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이란 열려있는 것, 달리 볼 때 계속 채워나가야만 하는 것, 언제나 완전하지 않으며, 공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철수가 매뉴얼을 마무리 짓는 지점에서, 자신의 삶에 이런 공백의 지점이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한 결여된 지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삶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것임을 깨닫는다. 삶이란 계속 채워나가야 하는 것, 그러나 결코 완전하게 채울 수 없는 것, 언제나 열려있는 매뉴얼임을 말이다. 적어도 죽을 때까지 인간은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인간에게 만드는 것, 삶을 삶이게 만드는 것은 공백이다. 더 이상 삶의 매뉴얼을 채워나갈 부분이 없거나, 힘이 없을 때, 아니 매뉴얼이 완성 그 자체에 왔다고 여겨질 때, 삶은 그 이면인 죽음으로 전환된다. 


애초에 삶의 토대가 되는 것, 그 조건이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공백, 그리고 우연이 아니던가. 마치 철수가 가족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러한 공백이 원래 그런 것임을 알게 될 때 철수는 애초에 잘못 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를 쓸모 없는 것으로 규정하려 했던 선생을 비롯한 사회의 구조가 아닌가 질문에 이른다. 그리고 철수 자신이, 우리 모두가 너무나 공고한 것으로 여기는 비교와 평균, 그리고 효율성의 추구를 위한 자기 계발의 체제라는 판타지에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읽어나갈 때, 철수가 가진 질적인 요소들, 또는 성격들은 하나씩 감산되며(또는 소거되며), 20대 후반의 남자 백수로부터, 20대 후반의 남자, 남자을 거쳐, 인간 일반에 대한 인식으로 향하게 된다. 분명 20대 청년 담론의 서사 구조에서 어떤 '위로'를 받게 된다는 것은 어떤 자기 동일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동일성/정체성의 추구는 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청년들에 해당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 도식에 따르는 카타르시스의 추구만으로는 그저 20대들의 고충을 위로하고 그걸로 문제가 해결된 듯한 착각으로 빠지기 십상이다(카타르시스는 일종의 치료적 차원의 제거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제기될 수 있는 - 지도적 도식에 따른 - 20대 담론을 어떤 운동을 위한 촉발 계기로 교조화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판타지의 공간에서 우리가 이 누군가 정해진 몇몇을 위한 판타지를 깨고, 모두를 위한 꿈을 꿀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념의 교조화나 경험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사실 바디우의 예술에 관한 관점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그의 독특한 진리관에 대해 먼저 이야기 해야만 한다. 우선 바디우는 진리를 하나로 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과학, 예술, 정치, 사랑의 네 가지 차원이 있으며(그리고 이 네 가지 진리에 다른 차원이 더해질 수도 있다), 이 진리의 각 차원은 철학을 위한 조건이 된다. 그리고 진리는 일종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매우 우연적으로 주어지는 '사건'에 대한 선언을 통해 주체가 발생하고, 이 주체는 기존의 세계(바디우의 용어로는 상황) 내에 정립된 질서(상황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것들의 부분집합을 만들어내는데, 이 새로운 부분집합은 무한한 생성의 과정 중에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바디우의 예술관은 철학의 조건으로서의 그리고 어떤 새로운 것의 창안으로서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 것이다. 그리고 '내재성'과 '단독성'은 예술과 진리의 관계로부터 나오는 기준들이다.


** 바디우의 진리 절차로서의 예술에 관한 논의는 비미학(장태순 역, 이학사)를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이 책에서 단독성(singularity)는 특이성으로 번역되는데, 이 singluarity라는 말은 오히려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신 앞의 단독자'라는 개념에서 일대 일의 관계에 얽힘을, 즉 단 하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단독성이라고 옮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에 단독성이라는 번역어를 사용한다. 


*** 여기에서 판타지는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에서 사용하는 개념을 따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