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책에 포함시키려고 했던 텔레라마 인터뷰 번역문. 에이전시가 원저작권사를 설득하는 데 실패해서 같이 넣지 못했다. 책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 공개함. 역자 후기의 제목은 이 인터뷰의 제목을 차용한 것이다.
알랭 바디우: "1980년대 이래, 젊은이들은 가능성들의 지평이 닫히는 것을 봐왔습니다."
79세의 철학자는 젊음을 진단한다. 자유주의에 의해 길을 잃은 젊음을, 다에시(Daech)의 유혹을 받는 젊음을, 그리고 그 자신의 젊음을 검토한다. 그의 젊음은 공산주의로 점철되었고, 그는 여전히 이에 충실하다.
<<우리의 병은 공산주의의 역사적 실패로부터 비롯되었다.>> 2015년 11월 13일 직후에 출간된 시론 우리의 병은 훨씬 오래된 것이다Notre mal vient de plus loin에서, 바디우는 거리낌 없이 그렇게 서술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기 젊은 시절의 마오주의적 이상에 충실하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갈채를, 다른 사람들에게는 야유를 받는 이 참여적 철학자는 전세계에서 번역되는 다수의 책을 저술한 저자다. 그의 저술은 존재와 사건L’Etre et l’Evénement (1988년)이나 세계의 논리Logiques des mondes (2006년) – 곧 세 번째 권인 진리들의 내재성L’Immanence des vérités 으로 이어질 – 같은 수학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대전(大全)에서 연극용 희곡, 전통 사상가들에 관한 세미나, 사랑예찬Eloge de l'amour (2009년)이나 플라톤의 국가La Réplublique, de Platon (2012년) 같은 대중서들을 거쳐 정황들Circonstances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정치적 개입의 텍스트 시리즈에 이른다. 이런 급증을 반영하여, 세 개의 시론이 참된 삶La Vraie Vie : 젊은이의 타락에 대한 요청(파야르Fayard 출판사), 그리스의 경로를 다룬 정황들 8권(리뉴Lignes 출판사), 그리고 시는 무엇을 사유하는가Que pense le poème?(누Nous 출판사)로 출간되었다. 충실하게 급진적인, 급진적으로 충실한 이 철학자를, 자본주의를 맹렬하게 비판하는 이 철학자를 만나보자.
이 참된 삶이라는 책에서는 왜 젊은이들에게 말 걸기 원하신 건가요?
여러 다양한 이유가 한데 뭉친 겁니다. 먼저, 사적인 이유들로 젊은이들이 겪는 중대한 방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은 1980년대 이래 점진적으로 가능성들의 지평이 닫히는 것을 봐왔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헤치고 나가며 거기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젊은이들의 자기비하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목도했던 것이지요. 또한 내 주위에는 학생들이 있었고, 내가 오랫동안 이주민 숙소나 공장에서 정치 활동가로 일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상황들에서 추출된 풍부한 경험을 가진 이주 노동자 젊은이들과 자주 만났습니다. 그리고 또 내 중요한 원천들 중 하나인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와 젊은 사람들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포함되는 이 전통에 있어, 젊음은 철학의 문제 자체이자 그 [문제가 향하는] 목적지입니다. 철학은 미래에도 여전히 가치를 지닐 법한 어떤 것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런 의미에서 철학의 청중은 언제나 젊은이들인데… 철학함(philospher)이란 그 고유한 시간의 조건들에서 진리의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젊음도 변전(devenir)하는 가운데 있는 세계로 들어가며, 또한 좌표축들(repères)과 고정된 지점들(points fixes)을 찾습니다. 그것이 젊음 자체의 과정이지요. 젊음은 그걸 알지 못하지만, 어쨌든 젊음의 문제는 바로 철학자의 문제와 같은 것입니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기를 요청하시죠. 하지만 젊은이들이 방향을 정하고, 진리를 찾도록 돕기 원한다는 사실이 어째서 타락이 되는 걸까요?
소크라테스의 심판자들이 젊은이들의 타락을 기소하고 바로 이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을 때 소크라테스에게 어떤 귀책사유를 돌렸을까요? 전통의 몇 가지 양상들을 의심하게 하고, 도시의 신들에 대한 불경을 공공연히 드러냈으며, 젊은이들이 가족이나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철학이 <<타락시킨다>>면, 이는 철학의 기능이 보수적이기 보다는 비판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 대해, 현실적인 상황은 플라톤의 시대보다 더 복잡합니다. 오늘날, 전통의 중요한 좌표축들은 부서졌지만, 사회가 이 부서진 좌표축들을 대신할 새로운 것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향락(joissances)은 주어지지만, 새로운 가치들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상품에 대한 매혹에, 마르크스가 <<이기주의적 계산의 얼음물>>이라고 부른 어떤 것에 용해되어 버립니다. 젊은이들은 한편으로 전통으로의 복귀라는 진부한 가능성 – 이는 언제나 시체를 일으키고 유령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귀착됩니다 – 과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인 경쟁에 빠져 거기에서 생존을 위해, 그저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투쟁할 가능성 사이에 고착됩니다. 내가 랭보를 따라서 <<참된 삶[진정한 삶]>>이라 명명하는 것은 세 번째 길입니다. 지나간 전통으로의 회귀도, 문명화된 외양을 갖추었으나 실제로는 난폭하고 야만적인,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규칙들의 수용도 아닌 세 번째 길이라는 것이지요. 랭보는 매우 젊은 나이에 [장차] 다가올 방향 상실(désorientation)을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이 든(vieux) 그리스도가 땅을 떠났음을 분명히 봤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녔고, 거기에서 이것저것 모든 것을 조금씩 했지요. 그의 <<바보짓들(folies)>> 중 하나였던 시작(詩作)을 비롯해서 말입니다. 랭보는 자기 삶을 불태웠는데, 근대의 세계가 돈과 성공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랬지요. 그런 다음 식민지를 도는 밀매업자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참된 삶이란 무엇입니까?
복종으로도 즉각적인 충동의 만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삶, 그 때 주체가 주체로 구성되는 그런 삶입니다. 내 견해로는 진리가 드러나는 네 가지 영역이 있는데, 나는 그것을 진리의 네 가지 구성 절차들이라고 명명합니다. 예술, 사랑, 정치 그리고 과학이 그것들이지요. 나는 젊은이들이 이 네 가지 조건들을 가로지르기 바랍니다. 젊은이들이 모든 형태의 예술을 마주치기를, 사랑에 있어 지속과 충실성을 유지하기를,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맞서 정의의 세계를 이루기 위한 정치적 재구축에 참여하기를, 그리고 과학을 기술 또는 자본의 손아귀에 넘기지 않기 위해 지금 그런 것만큼 과학에 무지한 채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소년들과 소녀들에게 각각 한 장씩 할애합니다. 양성의 차이가 오늘날의 젊은이들을 사유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전통들의 동요는 소녀들과 소년들에게 동일한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동요는 여자들에게 더 많은 문을 열어서, 이들은 점점 더 남성적 억압이나 오래된 세계에 퍼져있던 결혼에 대한 의존성에서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경력의 지평들이나 여자들이 [이전에는] 가질 수 없던 능력들을 얻게 되면서 말입니다. 소녀들은 동시대의 세계에서 소년들보다 훨씬 편히 지내며, 특히 그들의 학업에서 더 나은 성과를 보이지요. 나는 완전히 길을 잃은 젊은 사내들을, 그러니까 작은 마약 판매상들, 외곽도시(cités)의 가짜 두목들 등의 소송에 도움을 보태왔습니다. 그들의 누이들이 변호사였는데… 이 소년들에게, 군복무가 사라진 것은 모든 입문의례의 일반적인 사라짐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젊음(jeunesse)과 성년(âge adulte)의 문제는 문턱을 지시하는 정해진 절차들을 통해 다뤄졌습니다. 삶의 시기의 식별(identification)은 이제 모호해졌고, 그래서 청춘지상주의(jenisme), 가능한 한 오래도록 젊게 남아야 한다는 점이 규범이 되는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권력은 여전히 늙은이들에 의해 점유되며, 또한 젊은이들의, 곧 무리 지은 젊은이들의 공포가 지배한다 해도… 이 모든 것은 전반적인 혼란을 초래했지요.
선생님이 정치적 개입에 관해 쓰신 최근의 몇몇 텍스트들에서는 어떤 다른 젊음이 나타납니다. 이 젊은이들은 선생님이 <<젊은 파시스트들>>이라고 규정하신 다에시(Daech)에 가담한 친구들이지요.
나는 유행에 따라 <<급진화된 자들(radicalisés)>>이라는 용어보다는 <<파시스트들>>이라는 용어를 선호합니다. 내가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본주의로부터 산출된 대중적 주체성인데, 여기에 민족주의적이며 정체성 중심적인(identitaire) 담론과 혼합된 것입니다. 파시즘은 반동적인 주체성이지요. 실제로 이 젊은이들은 대체로 외곽도시들에서 그저 하찮은 [마약] 밀매상이 되어야 하는 데서 오는 좌절을,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없었다는 실망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계의 즉각적인 만족을 통해, 또한 경쟁이나 성공의 가혹한 법칙을 통해 다소간 유감스럽고도 기회주의적인 방황을 거부합니다. 이 젊은이들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위반과 즉각성 가운데 자기 삶을 소비하고 불태우는 현상과 사회 안에 자리잡고 은행가나 주식시장에 상장된 스타트업 기업 사장이 되는 현상 사이에서 경험하는 양자택일 바깥에 위치합니다. 그들의 허무주의는 희생적이며 범죄적인 영웅주의와 서구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공격성의 혼합물입니다. 이 파시즘적 공격성은 전통적이며 정체성 중심적인 퇴행에, 부분적으로 이슬람교로부터 그들에게 제시된 전통의 잔해에 의지합니다. 이것은 이슬람교화된(islamise) 파시즘화이며, 파시즘화된 이슬람교가 아닙니다. 그 종교는 그저 하나의 형식일 뿐이며, 자살적 행위와 타자의 살해로 향하는 길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낙심한 주체성에 만족을 허용하는 전반적인 매혹을 목표합니다.
선생님은 어떤 젊은이였나요? 당시에 선생님을 고무시켰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나는 1937년에 태어났습니다. 내 젊은 시절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지나갔는데, 이 시절의 세계는 전후에 나라를 재건하는 세계였고, 구조화된 동시에 역동성이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계급의 차이가 매우 분명했지요. 농촌이나 노동자 출신의 젊은이들은 12살에 학업을 마치고, 대학 입학자는 한 연령층에서 10%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 정당은 강했고, 승리한 소비에트 연방과 연결된 강한 후광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 방향이 그려졌지요. 국가의 자본주의적 재건이라는 방향, 그리고 공산주의 정당으로 구현된 프롤레타리아적 방향. 혁명인가 순응주의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선생님은 둘 다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서민 출신이 아니었고, 본래 중산계급의 윗부분에 속했습니다. 양친 모두 고등사범학교 출신이셨고, 아버지는 툴루즈의 사회당 출신 시장이셨지요. 나는 지식인의 일반적인 인물상을 구현했지만(고등사범학교, 교수자격), 지성적으로는 혁명의 편에 서기를 선택했습니다. 이런 배치는 결국 상당히 편안한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18세기 <<철학자들>>의 지지를 구성하는 노선에 있는 두 가지 길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중의 역할에 동요를 가져온 것은 식민지 전쟁입니다. 나의 진정한 정치 교육은 알제리 전쟁이었고, 이로 인해 나는 급진적인 결정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파리의 경찰서들에서 고문이 있던 시절이었는데… 이럴 때 흐름에 역행하고, 편안함에서 빠져나가며, 자기 삶을 사유의 기준음에 맞춰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직했던 첫 시위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지요. 도처에 <<패배주의적인 지식인들>>을 비난하는 벽보가 붙었습니다. 나는 사회당의 분열에 가담했는데, 이 분열로 PSU(통합 사회당, Parti Socialiste Unifié)가 탄생했지요. 68년 5월 이후, 나는 노동자 숙소들, 외곽도시들, 공장들에서 매우 적극적인 활동가가 되었습니다. 마오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 아래, 그것은 그 시절의 주요 결정들 중 하나였지요.
그 시절에 대해 말씀하시네요. 하지만 선생님은 줄곧 마오주의자이셨고, 선생님의 비방자들은 그걸로 선생님을 비난합니다.
실제로, 나는 공산주의적 가설을 주장합니다. 나는 현실적으로 헤게모니를 쥔 사회•경제적 조직이 유일한 가설이 되는 그러한 세계에 거주하기를 거부합니다. 나는 이 괴물성을, 전체 인구의 10%가 가용자원과 자본의 86%를 소유하는 이 불평등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폐물이 되거나 내던져버릴 무엇이기는 고사하고, 내 견해로 공산주의적 이념은 너무나 젊습니다. 이 이념은 그 역사적 경로에서 시작에 있지만 – 겨우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이지요 – 이에 반해 자본주의는 6, 7세기 전에 발생하여 구체제(Ancien Régime)의 적폐나 불평등을 재생산합니다 – 10%는 어림잡아 그 시대 귀족들의 비율이었지요… 나는 스스로 공산주의 사회들의 악행과 범죄를 완벽하게 알고 있음을 밝히고 싶습니다. 내가 마오주의자였던 것은 스탈린주의의 지양과 변경이라는 비판적 요소들을 마오주의에서 식별했기 때문입니다. 1917년 10월의 러시아 혁명으로 열렸던 시기는 오류와 극적인 변조로 점철되었는데, 그 중 우선적인 것은 공산주의가 그 자체의 원칙에 있어 중앙 집중화된 국가에 대한 불신을 품지만, 러시아 공산주의는 결국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앙 집중화되고 관료적인 국가를, 모든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라는 유혹에 넘어간 국가를 구성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적 가설은 그 첫 번째 성공 안으로 좌초되었고, 초라한 60년이 이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설을 놔버려야 할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체적인 이데올로기적 실패에 [현재의] 정황적 실패를 중복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다가올 선거와 니콜라 사르코지의 잠재적인 복귀를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선생님은 2007년에 사르코지는 무엇의 이름인가De Sarkozy est-il le nom?라는 소책자를 내신 적이 있지요.
나는 1968년 6월 이래 투표하지 않으며, 내 나이에 [투표소로 가는] 그 줄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그건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요. 선거에 대한 의견(자문, consultation)은 오로지 기존 질서에 내부적인 의견일 뿐이며, 동일한 정세 관리와 관한 몇몇 뉘앙스들을 다루는 판정일 뿐입니다. 좌파는 우파와 정확하게 같은 정치를 계속합니다. 그러데, 구별되는 두 가지 길 사이의 진정한 선택이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습니다. 사르코지를 환기하시는군요. 거기에서 내 개인적인 알레르기를 건드리는 셈입니다! 내게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신 아버지께 물려받아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애국주의라는 오래된 바탕이 있는데, 그래서 나는 그런 양아치가 국가원수가 되는 걸 바라지 않습니다만… 하지만, 실제로, 올랑드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사르코지의 정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올랑드는 심지어 과거의 사회적 장악의 붕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는 마크롱 같은 이론가들을 곁에 두고 근대성의 이름으로 그런 것을 정당화합니다. 그에게 근대적인 것이란 19세기 자유주의 곧 자본주의의 본성적 이데올로기로의 회귀이며, 그것은 사회적 규제도 노동권이나 퇴직연금도 좋아하지 않지요. 이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마음껏 활개칠 자유를 얻었고, 대면할 어떠한 강한 적수도 없습니다. 나는 이 적수의, 오직 하나뿐인 진정한 적수의 가설을, 즉 공산주의의 가설을 유지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철학하기를 계속할 것을 말입니다. 이천 년이면 – 이것이 철학의 시간적 층위인데 – 결코 누구도 더 이상 사르코지를 기억하지 않겠지만, 우리는 플라톤이 누군지 완벽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