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의 행복 강의

 

선생님의 삶에 방향을 준 가장 결정적인 마주침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알랭 바디우: 연극과 철학 이전에, 그것은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어떤 것이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중에, 실제로, 어린 시절의 영화 같은 기억(souvenir écran)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이어지는 내 실존에 결정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여섯 살이었죠. 내 아버지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셨는데 – 그분은 해방 때 툴루즈 시장에 임명되셨죠 – 벽에다가 군사작전과 특히 러시아군 전선의 이동을 보여주는 커다란 지도를 붙여놓으셨습니다. 이 전선은 지도 위에 압정으로 고정된 가는 끈으로 표시되었습니다. 나는 자주 압정과 끈이 옮겨지는 걸 보곤 했는데 많이 물어보지는 않았죠. 은밀한 활동을 하는 분이었던 내 아버지는 정치 상황과 전쟁에 관련된 모든 것에 관해 애들 앞에서는 정확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죠. 1944년 봄이었습니다. 하루는, 그러니까 그게 크림반도 지역에 소비에트의 공세가 있던 날이었는데, 나는 아버지가 끈을 왼편으로 옮겨놓는 걸 봤습니다. 분명하게 독일이 서쪽으로 물러났다는 의미로 말이지요. 그저 그들의 정복적 전진이 멈췄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은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게 된 거지요. 불현듯 이해가 되면서, 나는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확실히 전쟁을 이기게 되는 건가요?>> 그 한 순간에, 아버지의 대답은 매우 분명했지요. <<그럼, 알랭! 그걸 바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이 말이 선생님의 격률이 된 건가요?

 

이 대답은 진정한 아버지의 각인(inscription)이었습니다. 나는 정세가 어떻든 우리가 바라고 결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확신을 물려받았습니다. 이후로, 나는 거의 언제나 지배적인 의견들에 반항했습니다. 그런 의견들이 거의 언제나 보수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나는 결코 어떤 확신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확신이 더 이상 유행에 뒤진다는 이유 같은 걸로는 말입니다.

 

선생님은 의지를 중요시하십니다. 그런데 한 중요한 철학전통은, 그러니까 스토아주의는 사람들에게 행복해지려면 일어나는 것을 바라라고 조언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편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것보다 지혜로운 게 아닐까요?

 

1940년에, 우리 운명은 전쟁에 패했다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스토아철학자는 모두가 페텡주의자(pétainistes)가 되는 편이 온당하다고 말했을까요? 페탱(Pétain)은 지방 방문으로 환호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나라가 전쟁의 가장 혹독한 피해를 겪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요. 이걸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는 스토아철학을 믿지 않습니다. 황금 욕조 바닥에 앉아서 운명의 수용을 설교하는 지극히 부유한 세네카의 스토아철학적 가르침을 말입니다.

또한 엄격한 유물론자들인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법칙에 맞서 일어서서 무익하게 삶을 위태롭게 하는[혹은 목숨을 거는, ristquer sa vie] 일이 부조리하다고 여겼지요. 하지만 이런 교설에 이어지는 귀결은 무엇일까요? 지나가는 날을 즐기라는 것, 호라티우스의 유명한 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직역하면, 오늘을 잡아라])이라는 말이 아닌가요? 거기에 탁월한 것은 없지요. 이러한 고대의 지혜에는 타고난 이기주의의 요소가 있습니다. 주체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내에서 고요한 장소를 찾아서, 이 세계가 타자들의 삶을 피폐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이기주의적 윤리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지혜의 가르침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 만연했는데, 그 시절의 역사적 상황은 우리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경제나 정치 체계가 요구하는 가능성에 완전히 반하는 방향을 정하고 실천할 가능성의 여지가 거의 주지 않는 그런 세계적 헤게모니가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류의 상황은 도처에서 가능한 가장 좋은 장소를 찾기 위해서는 이 체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관념을 조장합니다.

그러니까, <<현실주의적인>> 철학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의 변화에 관한 모든 관점을 포기하자. 자리를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혹은 파스칼 브뤼크너가 이 완고한 보수주의에 부여하는 형태로, <<서구적 생활양식은 협상할 수 없다>>라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거기에 녹아들어가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것을 원합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격률에 대한 내 충실성입니다.

 

전쟁 이후에, 연극과 마주치게 해준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지요. 이 마주침이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연극이 어떻게 삶의 안내자가 되었는지요?

 

내가 학생이었을 때, 누구나 중학교에 오는 즉시 라신(Racine), 코르네이유(Corneille) 그리고 몰리에르(Molière)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좋던 싫던 간에, 우리는 그 작품들을 상세하게 공부해야 해서, 1학년[우리의 고등학교 2학년 과정]까지, 매년 그것들 중 하나를 상연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교육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프로그램 보다는 사람을 훨씬 쉽게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내게 닥쳐온 겁니다. 4학년[중학교 3학년 과정] , 나는 연극을 누구나 참여하는 경이로운 것으로 만들었던 프랑스어 선생님을 만났지요. 희곡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걸 즐기는 게 중요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분은 각각의 지원자가 한 자리씩 맡을 수 있는 극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저와 다른 급우들은 점차 배우가 되어갔지요. 그런 만남이란! 그건 우리 중학교 학생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일종의 중단이었습니다. 우리는 관객을 대하며 오직 그때 일어나는 것에만 책임을 지며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것은 또한, 내 아버지가 말씀하셨듯이, 그것을 바라야 했던 것입니다! 스카팽의 간계(Fourberies de Scapin)라는 작품의 주제역(rôle-titre)을 맡았는데, 이것 때문에 속임수나 임기응변을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무대조명에 뛰어드는 순간에 떨리던 감정을 기억합니다. 무대에 뛰어오르며, 보이지 않는 객석 뒤편을 향해 <<옥타브 님, 거기서 무슨 소란입니까?>>라는 대사를 던져야 했습니다. 그렇지요. 연극을 하려면, 불안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 홀로 완전한 빛 안에 서는 거기 있음의 극도로 어려움을 바라고 넘어서야 하는데, 그 불안은 위험에 맞서 저항하는 당신 안에 있는 어떤 것입니다.

 

주체적 보수주의, 그러니까 자기와 흘러가는 대로의 세계에 대한 보존으로 기우는 인간적 성향이 있을까요?

 

그렇지요. 인간의 정신에는 깊이 보수적인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은 삶 그 자체에서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계속 살아야 하니까요. 결국, 스피노자가 쓰는 그대로, <<존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지켜야 합니다. 내 아버지가 의지로 충분할 수 있다고 가르쳐주셨을 때, 아버지는 때로 자기 안에 있는 이런 보수적인 성향을 눌러야 한다는 걸 암시하셨던 겁니다.

연극, 그것은 또한 몸이 어떤 허구에 복무하는 이런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때 무언가가 순전한 생존본능과 대립하게 됩니다. 배우의 연기에는 자기의 완전한 노출이라는 위험을 수용하는 기적적인 결정이 있습니다. 4학년 때 내 선생님 덕분에, 나는 이 모든 것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연극은 내 첫 번째 부름(vocation)이었지요. 그리고 나는 언제나 연극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연극에서 바로 결정으로서의 마주침을 마주한 셈이로군요.

 

무엇보다 나는 실제로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내 프랑스어 선생님을 말입니다. 그분은 연극의 마주침의 살아있는 매개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향연Le Banquet에서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철학 자체가 언제나 누군가와의 마주침에 의존한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소크라테스와의 만남에 관한 알키비아데스의 멋진 이야기의 의미입니다. 의지, 결정, 타자에 대한 자기노출과 관계라는 문제들이 상정되는 누군가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당신을 멋지면서도 위태로운 삶의 상황에 놓는 것이지요.

 

선생님의 다른 마주침은 철학과 장폴 사르트르의 강의였습니다. 어떤 이유로 철학을 삶의 방향으로 선택하셨던 건가요?

 

내가 사르트르라는 매개를 통해 마주쳤던 철학 또한 아버지의 격률을 연장합니다. 나는 본질적인 한 논점에서 사르트르에 충실하게 남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상황을 논거로 들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의 중심적인 논점이지요. 상황은 결코 바라고, 결정하고, 행동하기를 멈추는 것이 옳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 어떤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오직 자유로운 의식이며, 그런 이상 우리는 어떠한 정황에서도 자기 고유한 책임을 치워버릴 수 없습니다. 상황이 우리의 의지가 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듯 해도, 우리는 그 상황의 급진적인 변화를 바라야만 합니다. 그것이 사르트르의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철학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데 소용이 될 수 있을까요?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던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을 발견할 때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의 마주침에서, 당신은 자신의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이기주의를 손상시킬 무언가를 발견합니다. 당신은 스스로의 실존이 완전하게 다른 한 사람에 의지함을 받아들일 겁니다. 그것을 경험하기 전에 당신은 그걸 조금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은 별안간 자기 고유의 실존이 타자에 대한 의존에 놓임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습관적으로 취하는 조심스러움은 당신의 실존 안에 자리한 이 타자에 의해 손상됩니다. 이어서, 우리는 이 행복으로부터 귀결들을 끌어내거나, 이 시원적인 새로움의 영향 아래 살아가기 위해, 이 행복을 절정에서 유지하도록 노력하거나, 또는 그것을 되찾고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행복이 때로 만족에 반하는 방향으로 작용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이유로 행복과 만족을 대립시키시는지요?

 

먼저, 행복은 근본적으로 평등을 지향하며(égalitaire) 타자의 문제를 통합하지만, 만족은 생존의 이기주의와 연결되며 평등을 무시합니다. 또 만족은 마주침이나 결정에 의지하지 않습니다. 만족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가 세계 내에서 좋은 장소를 발견하거나, 좋은 직업을 가지거나, 멋진 자동차를 사거나, 외국으로의 멋진 바캉스를 떠날 때입니다. 만족이란 것은 우리가 획득을 위해 싸웠던 것들의 소비입니다. 결국,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 내에서 적당한 장소를 점유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거기서 얻는] 혜택을 즐기기(향유하기, jouir)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족은 행복에 대해서 주체성을 제한하는 형상이며, 세계의 규범들에 따른 성공의 형상입니다.

스토아철학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만족하는 데 만족하라.>> 이는 나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공유하는 평범한 입장이지요. 하지만, 철학자로서, 나는 내가 행복이라 부르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철학은 언제나 인간이 이러한 실재적 행복의 편으로 향하게 하기를 추구해왔습니다. 만족을 희생시켜야 그러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때에도 말입니다.

 

만일 행복이 불가능한 듯 보였던 무엇에 대한 강력하면서도 창조적인 실존을 향유하는 데 있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요?

 

세계에 대한 정상적인 관계는 만족과 불만 사이의 변증법에 의해 지배됩니다. 사실상, 이것은 요구의 변증법이며, 우리는 이것을 <<세계의 종합적 전망>>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재적 행복은 사회적 삶의 정상적인 범주가 아닙니다. 당신이 행복을 요구하는데 안된다는 대답을 듣는다면, 당신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가능성은 당신 자신을 변화시키고 이 불가능한 무엇에 대한 요구를 그만두는 겁니다. 당신은 행복을 금지 당하고, 만족에 그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따르는 것이지요. 그런 것이 보수주의의 주체적 뿌리입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 자신의 욕망을 굽히지 않는 것, 혹은 내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라기를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세계를 바꿔야만 하는 순간이 있는 겁니다. 불가능한 것의 명령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인류의 형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행복할 때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건가요?

 

그렇지요! 행복함의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그리고 행복이 만족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옹호함으로써. 세상의 주인들은 변화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다른 무언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를 택한다면, 그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당신에게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의 문제이지요. 그리스 인민은 <<우리는 당신들의 금융적 전횡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다르게 살기 원한다.>> 유럽[연합]의 기관들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에 반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해야 하며, 만일 당신들이 계속 바라지 않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무슨 일이 닥칠지 각오해야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자발적인 종속을 거부할 때, 그들은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은 만족과 불만의 변증법에 머물기를 요구하는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부과된 것과 다른 무언가가 가능하다고 결정할 수 있기를 원한다고 밝힙니다. 우리가 유토피아의 영역에 있지 않은 이상, 완벽하게 보수적인 여러 경제학자들은 그리스의 부채가 재구성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건 두 말 없이 부채의 삭제로 귀착되지요. 실제로, 유럽의 지도자들이 불가능하다고 고려하는 것은 인민이 이 사안에 관해 결정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합리적인 경제 제재가 아니라 정치적 처벌입니다. 그것은 행복의 욕망에 대한 징벌입니다. 만족시킬 수 없는 만족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결코 살아있지 않지만 살기를 희망하며, 언제고 행복해지고자 할 때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파스칼은 서술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절박해야만 할까요?

 

이것은 침울한 문구입니다! 하지만 파스칼이 그렇게 쓴 것은 바로 그가 다른 세상에서의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 행복의 불가능성을 역설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른 행복을 약속하는데, 그들은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증거로 독자를 열광시킬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자에서 초월적인 행복을 꺼내는 겁니다.

나는 언제나 꿈꿔왔으나 결코 접근하지 못한 행복에 관한 이런 테제에 완전히 반대합니다. 그것은 거짓이며, 행복은 절대로 가능합니다. 하지만 보수적인 만족의 형태로는 아니지요. 행복은 마주침과 결정에서 감당하는 위험이라는 조건 아래 가능하며, 이 마주침과 결정은 요컨대 어느 순간에 모든 인간의 삶에 제시됩니다.

 

하지만 병, 사고, 참사, 파열 그리고 갈등을 일으키는 분열 같은 불행은 어떨까요?

 

행복과 만족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불행이라는 말의 분리를 초래합니다. 깊은 불만으로 그칠 뿐일 불행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깊은 구렁에 빠져드는 상황에서도, 행복의 길이 완전히 막히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왜냐하면 가능성의 영역과 중요성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건강한 두 다리를 가진 사람에게 세 걸음을 걷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마비에서 재활 중인 사람에게 그것은 엄청난 행복이지요.

그러므로 결코 행복이 없어졌다고 선언해서는 안됩니다. 행복은 정해진 상황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변경하는 데 있으니까요. 행복은 추상적이고도 일반적인 불가능성들이 부과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뭔가요?

 

우리는 심각한 불만과 불가능한 것의 극단적인 연장이라는 상태를 불행의 일차적인 정의로 제시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불행은 또한 행복의 좌절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도입하는 충실성의 규범 – 언제나 마주침에 연결되며, 따라서 행복에 연결되는 – 은 이러한 행복추구의 영속성을 명령으로 제시합니다. 충실성은 유일한 윤리적 명령이지만, 이 명령은 무모한 확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행복의 파국(catastrophes)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파국에는 다양한 차원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쳐버리거나 포기함으로써 발생하며, 다른 경우에는 불충실이나 배신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내 철학에서, (mal)은 주체적으로 행복의 파국에 원인이 되는 사실입니다. 나는 그것을 재앙(désastre)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행복의 경험이 강렬할수록 끔찍해지는 경험입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재앙을 아주 좋아하는데, 만족에 그치라고 요구하기 위한 중요한 논변을 거기에서 끌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박탈된 존재(désêtre)"보다는 재앙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렇지요! 재앙의 위험을 무릅쓰지만 그래서 또한 실재적 행복의 위험도 감당하는 편이 처음부터 단번에 금지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내가 "박탈된 존재"라 부르는 것은 인간 주체를 그의 동물적 생존으로, 오로지 그의 만족으로, 그의 사회적 장소로 되돌리는 그러한 인간 주체의 보수적 성향입니다. "박탈된 존재"는 진정으로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주체가 경험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나 우정이란 관계는 이러한 즉각적인 욕구의 만족의 지배에 의해 변질되는 걸까요?

 

오늘날의 세계는 근본적인 이타성(異他性)과 교환의 모델을 가지는데, 그것은 상업적인 패러다임입니다. 우리는 타자에 대한 모든 관계를 잘 이해된 상호적 이익들로 이루어진 계약적 차원으로 환원하게 되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분리가 이전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이유입니다. 우리는 매우 빠르게 무언가의 낙후성에 대한 때 이른 느낌을 받습니다. 상품들의 낙후성에 비추어서 말입니다. 오늘날의 보수주의는 상품의 문제에 의해 침식되며, 이 문제는 당신이 언제나 새로운 모델을 사야 한다고, 그래서 이러한 상품의 낙후성을 상정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소비자는 지배적인 대상적 형상이며, 곧 세계를 움직이는 형상입니다. 우리의 지배자들은 걱정스럽게 사람들의 상품구매 수준을 추적합니다. 만일 갑자기 아무도 [상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체계가 볼링 핀처럼 다 무너질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갑작스럽게 출현하거나, 새롭거나, 근본적으로 쓸모 없거나, 또는 범죄적으로 비열한 물건들을 구매해야 할 필요에 얽매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이런 것은 사람들 간의 관계들의 유적인 형상을, 지금 공식적으로 경쟁을 중시하는 관계들로 오염시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충실성을 찬양하십니까?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새로운 상품에 대한 집착 – 흔히 유행으로 가장된 – 이 행복을 훼손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충실성이라는 가치는 모든 형태로 위협받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자동차에 무한정하게 충실할 권리가 없으며, 다른 자동차를 사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적 체계가 위협받게 되니까요!

이 명령은 집합적이거나 또는 개인적인 우주에 스며들어, 많은 분리를 만들어냅니다. 이 논리에 대해, 우리는 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격률을 맞세워야 합니다. <<너는 네가 원했던 것을, 네가 바랐던 것을, 네가 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을 계속 바랄 수 있다. 너는 그럴 수 있고,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

 

http://www.lemonde.fr/idees/article/2015/08/14/commentvivre-sa-vie_4724566_3232.html#4gFtxbPkQMr41HMC.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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