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법적 정의>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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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으로 제닝스 선생의 책을 국내에 소개하게 된 것은 세 번째다. 아마도 지금쯤 멕시코 아카풀코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을 제닝스 선생은 성서와 신학에 관한 탁월한 지식으로 무장한 유쾌한 노학자다. 특히 데리다를 비롯한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논의에 관한 명석함으로 번뜩이는 이 대가와 함께 처음으로 작업할 기회를 얻었던 것도 벌써 대략 7, 8년쯤은 흐른 듯 하다. 우연한 기회였다. 아직 본격적으로 번역 일에 뛰어들기도 전에 오며 가며 알게 된 제닝스 선생의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Reading Derrida/Thinking Paul)> 구해 읽다가 이걸 우리말로 옮겨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함께 공부하던 한 친구의 소개로 마침 국내에 방문하게 된 제닝스 선생(이하 테드 제닝스로 표기)을 직접 뵙고, 퀴어 신학의 눈으로 신약성서를 살피며 기독교의 반동성애적 경향의 성서해석에 대해 도전하는 <예수가 사랑한 남자(The Man Jesus Loved)>라는 책을 먼저 번역하게 되었다. 이 책이 판매고로 보자면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마침 사회와 교계의 반동성애적 경향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가 작게나마 조금씩 터져나오기 시작하던 분위기에서 나름의 반향을 얻었고, 그런 탓에 테드 제닝스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퀴어 신학자 혹은 동성애 신학자라는 타이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테드 제닝스의 중요성은 결코 퀴어 신학에만 그치지 않는다.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에서 드러나는 데리다 사상에 대한 철학적 해박함과 바울 신학에 대한 명석함은 대가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러한 철학과 신학의 연결 및 협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탁월한 사유의 공간은 데리다와 바울이라는 언뜻 보기에 관련이 없는 둘 사이에서 법과 모순적 관계에 있는 정의와 법 바깥에 있는 정의의 요구라는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이 둘 사이의 비교나 축자적 해석에만 그치지 않는 독창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번에 소개하게 된 책 <무법적 정의(Outlaw Justice)>는 앞선 작업과 관련하여 이전부터 계획되었던 작업인데(이에 관해서는 <데리다/바울>의 서문에서 언급한다), 앞서 소개된 책이 바울 읽기에서 데리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타당한 관점들을 소개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라면, 이번에 소개되는 책은 보다 본격적으로 바울의 로마서에 뛰어들어 근래 무신론적 사상가들이 제공한 정치적인 바울 읽기의 성과를 함께 소개하는 작업이다.  


내가 번역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뻔뻔스럽게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의 대단한 역작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법한 책이다. 정말 그런 지는 결국 독자가 판단할 몫이겠으나, 일단은 다음과 같은 질문의 답을 통해 가름할 수 있을 듯 하다. 말하자면, 정치적 측면에서, 특히 일반적으로 소위 정치신학이라 말하는 측면에서 바울을, 특히 바울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데 어떤 이점이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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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간 혹은 역사와 절연된 측면에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읽어오던 로마서라는 텍스트를, 이 텍스트를 쓴 바울을 다시 읽어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교회와 신학계에 한정되어 있던 바울 독해는 로마서를 어떤 개인적 차원의 시각으로 국한하여, 로마서를 바울로 상정되는 한 개인이 율법의 선한 명령을 실행하고자 하지만 죄를 향한 방향으로 고정된 그 자신의 육신으로 인해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어떤 실존적 고뇌를 말하곤 한다. 개인적 차원의 올바름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얻게 되는 칭의(이신칭의)는 서구 중세라는 역사적 배경(종교개혁)에서 나름의 정치적 의미를 얻기도 했으나, 이러한 해석 방식에 치중할 때 로마서 읽기는 시대착오적이기에 오늘날 교회 바깥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를테면 개인적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 정의의 요청과 요구는 시야에서 사라져버리고, 이로 인해 로마서는 종교적인 올바름 혹은 의로움을 얻기 위한 무시간적인 바울 신학과 윤리를 서술하는 텍스트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 따를 때, 로마서 1:18~25의 서술은 '동성애'에 대한 정죄로, 3:21~31에서 나타나는 의로움을 인정받는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치부되고, 이와 함께 로마서 8장의 '피조물의 간절한 기다림'에 대한 서술은 우주론적 신비의 차원에 할당되며, 유대 민족의 구원을 말하는 9~11장의 논의는 일종의 부가적 서술로, 그리고 이후 12~15장의 논의는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위한 교훈으로 해석된다. 로마서에 대한 정치신학적 독해는 바로 이러한 교회와 신학계라는 게토 바깥에서는 도저히 어떤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해석에 보다 타당한 역사적 맥락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이러한 개인적•실존적 차원에 국한된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연다. 또한 이와 함께, 마치 바울 당시의 로마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지배만이 단 하나뿐인 가능한 지배체제로 간주되는 오늘날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에서 어떤 시사점을 이끌어낼 가능성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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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관련하여, 그것도 정치신학적 측면에서 로마서 읽기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정치신학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학자는 나치스 정당의 법적 논리를 기반했던 법학자 카를 슈미트다. 이 책이 취하는 정치신학적 관점이란 결국 슈미트와 그의 동시대인이었던 발터 벤야민 간에 있었던 대화에서 유래한다. 이를테면, 슈미트는 '국가에 관한 모든 근대적 이론들이 일종의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들'이라는 주장을 제시하는데, 이는 국가 주권을 마치 신의 지상권(또는 자유의지)인 것처럼 간주한다는 보수적인 가톨릭 신학의 논리에 기반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속화된 정치와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를 주장하며, 법의 지배를 중단하게 될 '예외상태'를 선포하는 자로서의 군주 또는 독재자에 관한 논리를 제공한다. 벤야민은 이에 대한 반론으로 '신적 폭력'과 '약한 메시아적 힘'을 제시한다. '신적 폭력이란 유사하게 법의 지배를 중단하는 무엇이지만, 이는 국가와 지배자의 입장에 서는 슈미트의 논지와 완전한 대척점에 서는 대중 혁명이나 총파업과 같은 무엇이다. 그리고 '약한 메시아적 힘'이란 개별 민중에게 간직된 국가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고 이를 뒤집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두 사람의 대화가, 야코프 타우베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신약성서에 매우 중요한 한 인물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까닭이다. 바로 로마서를 쓴 성 바울이라는 인물 말이다. 타우베스는 <바울의 정치신학>에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의 로마서가 메시아 조직의 로마에 대한 선전포고라고 말하기도 한다(클라우제비츠에 따를 때,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로마서와 정치의 관계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적 맥락 안에서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또 이를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낯설게 하기(defamiliarizing) 방식이 필요하다. 즉, 로마서의 언어를 이 서신이 쓰일 당시의 역사적•정치적 언어로 바꿔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일반적인 성서 번역에서 나타나는 의 혹은 올바름(righteousness)은 정의(justice)로, 그리스도(Christ)는 메시아(Messiah)로, 예수(Jesus)는 여호수아(Joshua)로, 믿음(faith)는 충실함(faithfulness) 혹은 충성(loyaty)로,  은혜(grace)는 관대함(generosity) 혹은 호의(favor)로 바꿔 말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용어상의 전환은 성서 본문과 성서가 쓰일 당시 문서들에서 후견인(patronus)과 피후견인(clientes)의 주종 관계나 로마 황제에게 쓰이던 용어들을 지도자인 메시아에 대해 전용하는 방식으로, 당대의 사회•정치상을 보여주는 역사서들의 일반적인 번역을 고려할 때 충분한 근거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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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배경에서 이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물론 테드 제닝스가 제시하는 관점에 따라서 말이다. 어떤 새로운 정의를 말하는 이 편지의 시작은, 제닝스에 따를 때, 일종의 사법적 기소 혹은 고발로 시작된다. 로마에 거주하는 메시아적 세포조직에 대한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바울은 마치 법정에 나선 검사와 같이 법에 대한 기소를 시작한다. 먼저 이방인의, 다시 말해 로마 제국의 법에 대한 고발이 시작된다.(이때 개인주의적인 해석에 따를 때 문란한 성생활과 동성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해석되던 로마서 1:18~25는 이러한 바울 생존 당시의 정치적 맥락에서 오히려 로마 제국의 지배층에 대한 고발임이 드러난다.) 하지만 유대 민족의 율법도 바울의 기소를 피해가지 못한다. 당연히 이는 각각의 법으로 운영되는 두 사회와 정치체에 대한 고발이다. 


이러한 고발에는 이방인의 법과 유대 민족의 율법이 어떤 한 사건과 관련하여 정의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그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부정의를 낳는 도구가 되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즉, 로마 제국의 법(이방인들의 법)은 신이 보낸 메시아를 제국의 반역자를 벌하는 형벌(십자가형)로 처형했고, 유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율법에 따라 그 메시아를 제국 군인들의 손에 넘겼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두 법은 모두 정의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고 따라서 부정의하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의, 곧 이 두 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정의를 가져올 필요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적인 정의, 이방인의 법과 유대인의 법 양자 모두에서 벗어나는, 그 둘의 바깥에 있는, 곧 무법적 정의(outlaw justice)인 것이다. 그리고 이 법 바깥의 정의는 법의 준수가 아니라 오직 충실성 혹은 충성에 기초하는 것으로, 먼저 죽기까지 충성한 메시아 자신의 충실함은 지지자들의 충실함을 불러와 그들을 신적인 정의의 부름에, 메시아적 정의의 요청과 요구에 부응하는 정의로운 자들의 공동체를 만든다.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메시아적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생명과 영에 속한 메시아적 인류는 죽음과 육신에 속한 아담적 인류의 근본적인 전환이다. 여기에서 생명과 영 그리고 죽음과 육신이란 어떤 의미에서 삶의 양식에 관한 것이며, 전자가 충실함에 기초한 정의와 관련된다면 후자는 기존의 법과 관련된다. 바울의 논변에 따를 때,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더 이상 죽음의 관할에 속하지 않는다면, 죽음에서 살아난 메시아를 따르는 지지자들은 이미 죽음의 관할에 곧 법의 관할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메시아를 따르는 자들은 확실하게 메시아의 죽음 이전의 법에 속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희소한 자원과 이 희소성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economy) 혹은 이법(理法)이 아니라 넘쳐남에, 선물과 같은 관대함과 호의에 기초한 포함의 논리에, 오로지 신적인 정의와 메시아에 대한 충성에 이어 선물과 같이 주어지는 관대함의 논리에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포함과 연대는 심지어 – 일반적으로 우주론적 차원의 신비를 말한다고 간주되는 – 로마서 8장의 피조물들과의 연대에 이르기까지 연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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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에는 약속의 문제가 남는다. 신이 과거에 맺은 계약은 깨어진 것이고, 계약을 맺는 자들에게 주어진 법은 폐지되어야 할 무엇인가? 로마서 9~11장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은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서, 기존에 맺어진 계약과 이에 따른 법은 메시아적 정의를 통해 더욱 완성되어야 할 무엇이라 주장하며,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이 비록 한 때 메시아에 반대하는 자들이었으나 종국에는 이 새로운 신적 정의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드러낸다.(이것은 기독교권의 역사에서 지속된 소위 '유대인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바울의 논변을 근거로 한 유대인의 배제가 얼마나 큰 오류인지 보여준다.) 여기에서 특기할 점은 제닝스가 지적하는 신의 특성이다. 바로 결코 예상할 수 없으나 그럼에도 언제라도 믿을 수 있는(일관적인), 결코 약속을 깨지 않는다는 특성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약속은 마치 '즉흥연주'와 같이 진행되며 심지어 신적인 정의에 반대하는 자들마저 자신의 구도에 포함해 넣는다. 마치 재즈 연주처럼 몇 가지 틀이 정해지지만 언제라도 일어나는 일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매순간의 임기응변으로 진행되는 이 연주는 각자의 선율과 박자로 진행되기에 무엇이 나올지 예상할 수 없지만, 모두가 함께 합쳐질 때 하나의 음악이 되며 어떤 의미에서 언제라도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완성될 무엇이다.(이 책의 체제 역시 마치 악보와 같이 구성되어 있는데, '전개부[phase]'나 '종결부[coda]'라는 용어에서 이런 점이 드러난다.)


이후에 이어지는 로마서 마지막 부분(12~15장 전반부)은 종래의 해석에 따를 때, 단순히 공동체적 교훈을 제시한 부분으로 해석되곤 했다. 바울의 복잡하면서도 마치 나선을 따라 상승하는 듯 여겨지는 특유의 신학이 서술된 1~8장의 논의에 비할 때 부차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제닝스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부분이야말로 정작 중요한 부분이다. 말하자면 이 부분의 논의에서 나타나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거나, 메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서로를 환영하며, 관대함을 보이라는 이야기는 단순히 종교•윤리적 교훈이 아니라 메시아의 몸에 통합된 충실한 자들을 위한 강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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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마지막으로 가기에 앞서, 책에서 소환하는 여러 사상가들 중에 두 사람을 끌어내어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이 두 사람은 데리다 외에 아마도 제닝스가 가장 자주 언급한다고 여겨지는 바디우와 아감벤이다. 책에서도 이런 경향이 드러나지만, 전에 저자가 국내에 방문했을 때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자면, 그는 기본적으로 바울 해석에 관해 전반적으로 바디우 보다는 아감벤에 동의하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제닝스가 책의 논의를 시작하는 토대는 벤야민에게서 유래한 '메시아적인 것'의 정치신학이며, 이를 보다 분명하게 논의한 타우베스나 아감벤의 바울 해석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독해 방식에 바디우의 바울을 보는 시각은 적합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바디우의 바울 논의는 바울 텍스트의 정치신학적 해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사건-주체-진리의 구조에 따라 어떤 새로운 보편의 주체를 찾고 그 예시를 들기 위한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 '주체'의 문제에서 오는데, 제닝스가 이 책에서 뒷부분에서 '메시아의 몸', 곧 메시아 사건에 충실한 자들의 공동체를, 어떤 집단적 주체를, 메시아적 '전위대'를 말하기 때문이다. 아감벤이 주로 사용하는 '분할의 분할'이라는 논리, 말하자면 어떤 구분을 만드는 분할을 다시 분할하여 그것을 양쪽이 서로 트여있어 '작동하지 않는' 혹은 '무위의' 구분으로 만들어버리는 논리는 특히 바울의 종말론적 입장에 적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지금의 시간'은 분할의 분할로 만들어진 나머지 혹은 잔여가 과거와 현재 사이에 자리잡아 각각이 결코 닫혀지지 않는, 다시 말해 과거도 현재도 아닌,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시간의 중지(일종의 예외상태)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어떤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은 찾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구분에 이 분할의 분할을 적용하면, 비-비-이방인이나 비-비-유대인은 이방인도 유대인도 아닌 자가 된다. 이는 어쩌면 바울의 종말론적 관점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을 적용할 때, 주체는 흔들린다. 아니 분명한 주체의 가능성은 제거되고, 종말론에 어울리는 '주체성'만이 남는다. 메시아적 '전위대'라는 것은 아감벤의 입장에서 그리 타당하지 않을 무엇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시아 사건에 충실한 새로운 집단적 주체(바디우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유대인적 주체도 이방인적 주체도 아닌 비변증법적 주체로서의 기독교적 주체)에 관해서라면 차라리 바디우의 관점이 더 나은 설명력을 가질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 책 자체가 일정 이상의 절충적 성격을 띤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바울의 로마서라는 근간이 있다. 하지만 어쨌든 로마서에 관한 근래의 정치철학적 해석에 있어서는 각각의 부분에 서로 입장의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상들이 번갈아 등장하며 한 데 뭉쳐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가 삭감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인해 일정 이상의 협상과 양보가 있었다 해도 바울의 로마서를 중심에 둔 탁월한 정치신학적, 정치철학적 주해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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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충이나 협상이라는 사안과 관련하여, 로마서 15장 하반부에서 16장으로 이어지는 부분에 관해 제닝스가 제시하는 논변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 되겠다. 이 부분은 주로 바울의 로마방문 목적과 로마에 있다고 간주되는 바울의 동역자들에 대한 인사말이 주를 이루는데, 여기에서 제닝스는 바울의 인사말에 등장하는 몇몇 외국 출신자들과 아마도 해방노예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독해와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 활발히 활동했던 초기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또 종래의 로마서 번역이 이러한 교회의 '위험한' 면모를 감추기 위한 방식으로 변조되었으나 오히려 그랬기에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어쩌면 제닝스가 로마서 해석의 역사에서 그 급진성을 간직하고자 하는 투쟁을 논하며 언급하는 '도래할 민주주의'와 약간은 다른 맥락이 되겠으나, 이 책이 전개하는 로마서 해석의 절충적 성격은 어쩌면 서로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를 간직한 논의들이 로마서 해석이라는 장 안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각각의 단점을 메워주는 어떤 환대의 장을 마련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환대의 장 안에서 독자들은 저자의 명석한 로마서 독해에서 각각의 상황에 맞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향연의 장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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