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회사 일이 너무 바빠지는 바람에 한동안 읽지 못했다. 마지막 주에 허겁지겁 질주하듯이 읽어서 간신히 완독!


다양한 저술들을 인용하면서 여자가 어떻게 여자로서 만들어지는지를 사회문화적으로, 여자의 성장과정을 전부 다루는 저서라, 보봐르는 정말이지 천재인 것 같다. 여자가 '인간의 비참함을 자기 자신의 죄악처럼 느끼지도, 속죄를 구하지도 않아서'(p.965) 미지의 것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완전한 창조자가 되지 못하는 것이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여자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이 고찰은 너무나 유명해서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도 알고 있었지만, 저서 안에서 맥락을 거치며 읽으니 너무 대단하다. 


신화를 다룬 파트가 읽기 힘들어서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으나 제 2권으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속도가 붙었다. 


제2의 성 2권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애써 기억 속에 밀쳐두었던 옛 일들을 무수하게 떠올렸다. 

고등학교 시절에, 근처 공사장의 인부들이 학교 교문 앞에 줄지어 앉아 담배를 피우며 지나가던 우리들을 가리켜서 평가질하던 일들이 있었다. 일하느라 흙먼지와 오물이 잔뜩 묻고 때가 잔뜩 낀 손톱으로 담배를 피우며 가래를 수시로 뱉으면서, 여자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쟤는 다리가 굵고 쟤는 가슴이 크고 쟤는 그래서 몇 점이고 쟤는 걸음걸이가 단정치 못하고...


여자아이의 사춘기가 유별난 것은 흔한 속설로 숱하게 이야기되고, 원래 여자아이란 그런 것이라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보봐르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유년시절 아버지의 보호 아래에 자기가 자신의 주체로서 온전히 뛰어다니던 아이가 자라나면서,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 마음에 들도록 해야하고 자기를 객체로 만들어야한다고.(p.403)' 가르침을 받는데 사춘기가 어떻게 유별나지 않을 수 있을까? 


한쪽에서는 어린아이 취급을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마치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다는 양 신체와 말투와 행동거지 모두를 조각조각내어 평가질을 해대는데 아무리 다른 쪽에서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할지라도 언제 어떻게 자칭 미식가의 앞에 올려진 음식인 양 처우가 바뀔지 모르는 신세에 불과하다는 걸 절절하게 깨닫는 시기 아닌가.


'자기자신을 일자로 설정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이 타자로서 보인다는 것은 기묘한 경험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 수업을 쌓아가는 과정에서 자기를 여자로서 파악하는 여자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p.425) 


보봐르가 보기에는 여자가 쉽게 우는 것조차도 교육 탓이다. 

'여자는 생리적으로 교감 신경계를 통제하는 힘이 남자보다 약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육이 그녀에게 되는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쳤다. ... 풍습이 남자들에게 우는 것을 금지한 이래로 남자들은 울지 않게 되었다. 여자는 항상 세상에 대해 실패의 태도를 취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는 한 번도 세상을 진정으로 떠맡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여자가 세상의 적의와 자기 운명의 부당함을 새롭게 자각하는 데는 장애물 하나로 충분하다. 그 때 그녀는 가장 믿을만한 피난처인 자기 자신에게로 서둘러 도망간다.' (p.831)


각 부들의 제목은 내용을 읽는 내내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준다. 

4부 '해방을 향해'의 첫번째 장이 '독립한 여자'인 건 얼마나 또렷한 방향성인지. 

'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오직 나 혼자 힘으로 살아왔다." 그녀는 록펠러 같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립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투표권과 직업을 아울러 갖는다고 해서 완전한 해방이라고 믿어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노동은 자유가 아니다. ... 사회구조는 여성 조건의 진보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남자들에게 항상 속해있던 이 세계는 아직도 그들이 각인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p.928) 


 이 대목에서 달라 코스따의 '페미니즘의 투쟁'을 떠올린 것은 직전 달의 페미니즘 같이 읽기 대상 도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달라 코스따는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다가 필요성을 느껴서 여성 노동자들만의 단체를 따로 조직했었다는 대목을 인상깊게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페미니즘의 투쟁은 내가 끝까지 완독을 못했는데 아직도 못한 상태네, 다시 읽고 리뷰를 써야지. 


'남자가 누리는 그리고 유년기부터 느껴 온 특권은 인간이라는 소명과 남자라는 운명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p.930)

'세계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세계의 죄를 자기의 죄로 여기며 세계의 진보를 자랑스럽게 여기기 위해서는 특권자 계급에 속해야만 한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생각하고 드러냄으로써 세계를 정당화하는 것은 거기에서 명령권을 장악하고 있는 특권자들에게만 속한다. ... 지금까지 인간이 구현될 수 있었던 것은 여자 속에서가 아니라 남자 속에서다.' (p.965) 


그래서 결국 보봐르가 해방을 외치며 목표로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성의 차이를 넘어서 자기의 자유로운 실존의 험난한 영광 속에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여자는 자기의 역사, 문제, 의구심, 희망을 인류의 그것과 융합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여자는 자기의 삶과 작품에서 인격 뿐만 아니라 현실 전체를 드러내보이려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한 창조자는 될 수 없을 것이다.'(p.965)


제 2의 성을 언젠가 한 번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라도 읽어서 다행이다. 다락방님 덕분에 힘내서 끝까지 완독할 수 있었다! 

다음 주에는 익숙한 타자를 들춰보고, 그 다음 주에는 11월 대상 도서를 읽어야지. 

보봐르가 인용했던 무수한 텍스트들 가운데 스탕달과 소피아 톨스토이의 일기는 읽어보고 싶은데 소피아 톨스토이의 일기는 국내에 출간 준비했었다는 소식만 찾아낼 수 있었고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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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0-31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10월의 마지막말 끝내셨네요. 축하합니다 그리고 고생하셨습니다! 이 책은 읽어두는 게 좋은 책이니만큼 함께 읽을 수 있어 더 좋은 것 같아요. 두꺼운 책이라 혼자서는 좀처럼 진도가 안나가는데 읽어보면 또 정말 좋은 책이잖아요. 고생하셨습니다!!

등롱 2021-11-01 10:40   좋아요 0 | URL
마지막 날 안에 끝내려고 노력했는데 끝내서 너무 기분이 좋아요 ㅎㅎㅎㅎ
감사합니다 ^^
정말 좋은 책이었어요, 고전은 정말 읽을 가치가 충분했어요! 많은 걸 얻는 독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