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조진국 지음 / 해냄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왜 항상 사랑의 크기와 높이는 같을 수 없는 걸까. 한 치의 높고 낮음도 없이 마주하는 사랑을 할 수는 없을까. 이는 사랑이라는 명제 앞에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하고 자신과 타인에게 질문해보았음직한 물음일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말로도 쉽게 단정할 수 없고 또 쉽게 단정해서도 안 되는 사랑의 총 천연한 색깔들. 그 다양한 빛깔만큼이나 너와 나의 사랑이 다르고 이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감정의 나래들은 우리 자신을 조금 더 성숙한 누군가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나에게만큼은 특별한 어떤 대상이 나타남으로써 감지되는 나의 또 다른 모습들을, 사랑이라는 건 그 만큼 누군가를 송두리째 바꾸어놓기도 할 만큼의 보이지 않는 무언의 힘이 있다는 것을.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에게 빛이 된다. 푹 꺼지고 그늘져 있던 자리가 그 사람이 들어오면서부터 양지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사라지면, 그 사람이 있던 자리는 투명해진다. 그 자리가 투명해 보이는 것은 빛이 살다간 흔적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 또한 우리들 중의 그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사랑을 한다. 한 남자와 두 여자, 그 관계 안에서의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남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한편의 짧은 드라마처럼 섬세하게 보여준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진부한 사랑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비춰지지 않고 나의 모습과 동일시되며 애잔하게 마음을 두드릴 수 있음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누군가에게 나의 존재가 조금 더 의미 있게 각인되기 시작할 때의 그 설레임과 떨림을. 매일 보던 풍경과 매일 듣던 세상의 모든 음성들이 하나하나 살아있는 것 같은 신비함, 어떤 것도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되어버리는 순간의 경이로움을 사랑을 하면서 많은 이들은 경험한다. 그래, 뭔가 깨어있는 듯 희망적인 기쁨의 순간을.
그런 사랑은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의 그 빛을 잃어가고 꽃이 시들어가듯 메말라간다. 어떻게 보면 사랑이란 본래의 모습을 숨기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영원한 사랑은 없었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나 자신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진대, 왜 그것이 변하는 것에 대한 대비는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런 나 자신을 자책하며 상대방이 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하고 상처입고 마음 아파하는 것인지, 이렇듯 예기치 못한 사랑의 3단 변화에 대해 우리는 놀라 당황하고 만다. 너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왜 다른 곳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두 사람의 정점은 찾지 못한 채로 관계 내에서의 간극만 점점 벌어지고 말텐데도...
『사랑에 빠지면 울던 아이는 사라지고 훌쩍 어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솜사탕이 허물어지는 가슴 아픈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 순간 이후 금세 어른이 돼버린다고 해도, 지금은 웃으며 사랑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을 울던 아이도 곧 배우게 될 것이다.』
선배로부터 시작된 희정과 경진의 만남, 이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조심스런 만남을 하게 되면서 점차 호감을 느낀다. 사사로운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을 만드는 애틋한 연인이 되어가는 듯 보였지만 사랑에는 항상 예기치 못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법, 초록고양이라는 한 여자의 등장으로 갈등 상황을 맞게 된다. 그 사랑의 확고한 믿음과 신뢰만이 벽처럼 탄탄하게 서 있으면 좋으련만, 이 역시 내 맘 같지 않은 게 현실인가보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사랑을 이야기하는 방식도 모두 다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은 다 그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사랑할 때 생기는 잦은 우연은 행복한 운명으로 연결시킬 수 있지만 헤어진 후에 맞닥뜨리는 우연은 깊은 슬픔으로 직행한다. 처음으로 네 옆에 내가 없는 너의 모습을 보게 되니 낯설다. 누가 내 몸에 손가락 하나만 눌러도 나는 피아노 건반처럼 슬픈 음을 낼 것만 같다』
사랑에 대해 조진국 작가는 그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때론 섬세하게 때론 솔직하게 독자들은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나를 만나고 과거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느리지만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마음을 전하는 거북이 같은 사랑을 하는 이들에게 조금은 더 힘내라고 응원해주고픈 그의 맘이 담겨있는 것처럼. 나 역시 그랬다. 홀연하도록 쓸쓸한 사랑을 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혹은 사랑을 하면서도 외롭고 허전한 이들에게 조금은 마음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랑을 하는 데 있어서 속도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경박하지 않게 오히려 느긋하게 다가가는 사랑의 진심을 알아줄 이는 분명 존재하기에. 견딜 수 없을 만큼 풍파가 몰아쳐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사랑을 한다. 그것은 사랑의 아픔 그 이상으로 사랑이 내 자신을 나답게 만드는 그 힘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 빛은 영원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