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영화<애니>라고 꼬맹이 하나가 주연으로 원맨쇼를 펼치며 히트했던 헐리웃 가족영화가 있었는데 “TOMORROW” 라는 주제곡도 유명했던 걸로 기억한다. 포스터만 보면 이 영화도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싶은데 감독이 소마이 신지다. <태풍클럽>이 청춘 학원물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영화도 <애니>같은 문법을 따르는 것 같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묵직하다. 부모가 이혼하려고 하고 있다. 밝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되바라진 꼬마는 그게 싫다. 뭐 충분히 내용을 예상할 수 있지 않은가, <내 사랑 컬리 수><마이키 이야기> 같은 분위기로 뽑아내면 딱이다. 영알못이라 처음 듣는 타마다 토모코?라는 꼬맹이가 실제로 애니처럼 영화를 이끌어 간다. 꼬맹이... 라는 편견을 가지고 영화를 봐서 그런지 연기에 몰입은 잘 되지 않았지만 역시 원맨쇼 수준이다. 하지만 <태풍클럽>처럼 이 영화에도 예술영화틱한 인고의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꼬마는 조금 더 성장하고 모두 행복하고 살았습니다..라고 무난하게 끝내기에는 마지막 장면의 무게가 상당한 것이다. 단순히 귀여운 꼬마의 가족영화, 성장영화라는 틀에 가두기엔 영화의 품이 너무 크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최근에 애인하고 이별했거나 부쩍 늘어나는 흰머리와 주름살에 나도 늙었구나, 하고 현타에 빠진 사람에게 권한다. 오늘도 상실을 경험하셨나요? 축하드립니다. 또다시 새로운 스테이지가 시작되겠군요. 이번 스테이지도 꿋꿋이, 끝까지 클리어하실거라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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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밀란 쿤데라 전집 14
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은 위대한 유럽 소설가다. 그의 예술에 첫 번째로 영감을 준 것은사회적 또는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고, 지리적 호기심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 추구이며 진정한 실존적 치열함이고,
이 덕분에 그의 소설은 (내 생각으로는) 소설의 현대성이라고부를 수 있는 것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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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돈키호테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어떤 위대함도없었다. 왜냐하면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삶이 패배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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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뉴스공장> 영화코너를 보고 이 영화에 호기심이 생겨서 봤는데 후회한다. 패널의 딱 한마디가 영화의 핵심이라 스포일러가 되어 버렸다.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봤으면 허걱, 하면서 봤을 것 같다. 이 영화를 굳이 빗대자면 설정은 <이끼>같은 논두렁 스릴러에다 파졸리니 영화같은, 에로틱하면서도 기괴한 느낌이 버무려져 있는 영화같다. 이것도 스포일러가 될까 자세히 말할 수 없다만 자신의 욕망(사랑)을 위해 어디까지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사회적 평판, 체면,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 등등. 홍상수 영화가 무의식적으로 깔린 (주로 성적인) 욕망들을 다룬 것처럼 참 서슬퍼런 욕망(성욕) 그리고 질투가 이 영화에는 안개처럼 깔려있다. 많은 리뷰가 마지막 장면을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꼽는데 나는 자막이 올라올 때의 사운드가 오히려 기억에 남았다. 예전에 산티아고에 간 적이 있는데 순례 중에 아직 어둑한 새벽 숲 길을 지난 적이 있다. 컴컴한 어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새소리부터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낌새들이 웅웅웅 어둠 저편에, 약간은 불온한 느낌까지 들면서 맥동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숲의 어둠 속에 있었다. 그 때의 느낌을 마지막 사운드가 재현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영화 전체를 요약한 엔딩 크레딧이다. 숲은 이 영화에서 사람들의 행위를 감추고, 감춘 행위를 드러내는 심연같은 곳으로 표현된다. 왠지 요즘 자신의 삶이 물기를 쥐어짠 걸레같은 느낌이 든다면, 집요하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욕망의 기운을 느껴보고 싶다면 한번 추천.

 

ps 우연인지 요즘 트렌드인지 모르겠다만 <퀴어>에 이어 남성 성기를 영화에서 자주 보게 된 것 같다. <프레타 포르테>하트부터 예전에 논란은 주로 여성 성기였던 거 같은데 이것도 시대의 영향인가? 뭐 이것도 분장일 수 있다. <섹스 이즈 코미디>를 보고 이것도 분장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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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대 아메리카 대륙, 미친말과 시팅불이 살아있고, 기병대와 원주민들이 서로 싸우는 세상. 아침에 만났던 이웃과 친족들을 저녁에 다시 만나리라 기대할 수 없는 세상. 거기서 태어나 성장한 검은고라니에게 세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감각과 정서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다. 지금 가자에서 쏟아지는 폭탄 아래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삶과 세계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확실한 건 세계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육박해 들어오는,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힘으로 느껴질 것이란 거다. 이 책은 두 가지 줄기로 이루어져 있다. 검은고라니가 어렸을 때 받은 계시와 그 계시를 현현하기 위해 벌이는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여러 의식들의 묘사, 그리고 운디드니의 학살로 대표되는 원주민들과 기병대 간의 전쟁 묘사이다. 얼핏 융이 이 책을 호평했다고 하는데, 계시를 여러 상징과 제례로 표현하는 원주민들의 문화는 융심리학의 내면작업을 연상시킨다. 보이지 않는 힘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세계는 단지 원자들의 무의미한 이합집산일 뿐인가? 이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권능이다. 신성한 권능에 접근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섬세한 상징을 이용해서 보이지 않는 힘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어렸을 때 검은고라니는 그가 와지쿠들에 맞서 그의 부족을 부활시킬 거라는 계시를 받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결과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검은고라니는 과연 실패한 것일까? 결국 계시는 검은고라니의 환상이고 그의 권능이 작으나마 사람들을 치료하고, 미래를 예언한 것은 우연이거나 원주민의 문화적 영향일 뿐일까? 회한 비슷한 생각에 잠기게 된다. 검은고라니는 계시 중에 와지쿠의 박해가 없는, 죽은 친척들과 들소들이 부활한 이계를 엿본다. 또다른 근사체험을 한 아니타 무르자니(<그 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는 이계를 하나의 에너지처럼 느낀다. 사후세계에 대한 묘사가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은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하나의 반증인가? 계시와 태양춤(선댄스다) 의 묘사는 상당히 구체적이지만 그들의 코드를 공유하지 않는 우리에게 이질적이다. 오히려 체감할 수 있는 부분은 기병대와 원주민 간의 전투 묘사다. 이를 테면 전투중 부상당한 와지쿠에게 열세살 소년이 다가가 머릿 가죽을 벗기려고 한다. 와지쿠의 머리카락이 짧아 소년은 애를 먹는데, 그 와중에 부상당한 와지쿠는 이를 갈며 저항한다. 그러자 소년은 와지쿠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고 머릿가죽을 벗긴다. 어머니에게 그걸 보여주자 어머니는 환호한다. 이 소년이 검은고라니다. 그는 환상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조화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고, 현실에서는 추위를 피하러 온 다람쥐를 불쌍히 여겨 내쫓지 않는 자다. 하지만, 이 날것의 폭력과 죽음의 세계에서 와지쿠의 시체를 두동강이내고, 뚱뚱한 여인과 알몸으로 싸우다 죽는 와지쿠에게 아무런 연민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는 미쳐 있었다"라고 말한다. 피비린내와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는 세계, 아이들과 여인들이 제가 잡혀가는 것은 원하지 않으시겠지요라고 노래부르며 살인과 폭력, 잔인함을 독려하는 이 세계에서 지금 내가 가진 정서와 이성, 도덕은 통하지 않는다. 가장 전율하는 것은 그 세계의 압도적 힘과 그런 세계를 그저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실존이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으로 별안간 죽음을 맞은 곤충처럼 그들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도 없도, 저항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아마 이 대목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에서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압도적 세계 앞에 있다. 피비린내가 나진 않지만 역시 폭력적인 그 세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검은고라니처럼 그 세계를 그냥 오롯이 받아들이는 것 뿐이다.


ps. 당시 원주민들의 여러 스펙트럼도 볼 수 있다. 크로우족과 라코타 족은 서로 와지쿠를 대하듯 싸우고, 심지어 상대를 죽이기 위해 와지쿠와 협력하기도 한다. 붉은구름 같이 와지쿠와 타협하여 '주재소'에 머무르는 원주민도 있고 시팅불처럼 캐나다로도 떠나는 부족도 있다. 그러면서 마치 구한말 여러 스펙트럼이 있었지만 망국으로 연결되었듯 그들 문화는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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