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약간 덜하지만 한 때 다치바나 다카시가 결코 비판할 수 없는 지와 교양의 아이콘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고양이 빌딩은 모든 책광들의 로망 아니던가. 더불어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가 그만의 “기적의 속독법”때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독서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압박했던 것 같다. 독서에서 좌우파를 나눈다면 속독파를 좌파로 지독파를 우파로 나눌 수 있을 텐데, (느림이 안티테제가 된 요즘은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아마 속독파의 대표주자로 다치바나 다카시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당시 대세였던 다치바나 다카시를 실명비판해서 꽤 신선하게 느껴졌던게 바로 이 책이다.

    

내가 알기론 야마무라 오사무는 대학교 교직원이고 얼마전에 타계했다. 책에 실린 6편의 에세이를 통해 쉬운 문장에 스기우라 민페이, 발터 벤야민 등 자신의 교양에서 뽑아낸 여러 가지 예화를 통해 지독의 우수성을 강조해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그는 다치바나 다카시 류의 책읽기 권수 경쟁이 독자들을 현혹시킬까 이 책을 쓴 것 같다.그가 보기에 속독할 수 있는 책은 아예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며, 일주일에 몇 권 이상 이라는 식의 권수 경쟁도 유치한 짓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하는 발췌독은 야마무라 오사무에게는 아예 독서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다.(그건 독서가 아니라 참조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은 책읽기를 업으로 하는 평론가나 저술가에나 필요한 독서법이라는 것이다. 자신처럼 생업이 따로 있는 생활인에게는 독서가 삶의 최우선 순위도 아니고 하루종일 책만 붙들고 있는 삶은 오히려 건강하지 못한 삶이다. 그에게 독서란 “책과 심신의 조화”이며 읽는 방법에 따라 책 자체가 바뀐다. 지독에서 느낀 자신의 즐거움을 경험담과 함께 소개하면서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은 지독에서 나옴을 강조한다. 표주박의 이미지를 예를 들며 자신의 호흡을 가다듬는 테크닉을 소개하는데 실전사용 가능한 팁이다. 그 외의 지독의 방법론까지 이야기가 전개되지는 않는다. 책을 읽는다는 것, 독서의 즐거움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속독법을 비판하며 대비되는 것이 주내용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를 직접 비판한 부분은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의 문장을 인용하며 시작되는데 사실 읽다보면 다치바나 다카시가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야마무라 오사무가 인용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법은 다치바나가 서점에서 책을 사기전에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책을 솎아내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내가 아는 책읽기의 달인들은 전부 다치바나처럼 속독으로 책을 먼저 솎아낸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 윤성근도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에서 책을 솎아내는 기술로 자신의 속독법을 노하우로 소개한다. 고미숙씨 같은 경우에는 결론부분만 발췌독을 먼저하고, 관심이 생기면 정독을 한다고 한다. 발췌독은 독서가 아니라 참조라고 저자는 분노하지만, 로자 이현우는 “책을 만져보는 것”도 하나의 경험으로 인정한다. 독서의 달인들이 이렇게 독서의 범위를 넓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치바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속독을 권유한 것도 아니고, 본문에서도 자신의 속독법은 속독이 필요한 사람들이 참고정도로 하라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 역시 책의 종류에 따라 정독, 통독, 속독을 적절히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법이라든지,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와 지식, 교양에 대한 관점, 독학의 방법 등 책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묶고 있는데, 독서에 입덕을 권유할 때 곧잘 언급되는 책이다.

 

만약 야마무라 오사무가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알레르기 반응을 느낀다면 그 이유는 독서, 책, 지식, 교양 등에 대한 서로의 관점이 근본부터 틀리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야마무라 오사무가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하는 비판은 배구선수가 농구선수의 플레이를 탓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야마무라 오사무에게 독서는 보물이 숨겨진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이다. 그물을 올릴 때 마다 뭐가 걸려오는지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고. 세심히 살피는 지혜도 필요하다. 어쩌다 귀한 보물이 걸려나오면 탄성을 지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에게 책은 원재료이고 그냥 매체의 하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책이라는 원재료로 돌아가는 자기 머릿속의 정보생산 프로세스인 것이다. 중요한 정보를 준다면 책이 아니라 영상이라도 상관없다. 실제로 문학작품류보다 디비디같은 영상매체를 더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애기하는데 활자가 영상보다 상상력을 키워준다는 상투적인 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에게 독서는 보물이 가득한 바다에 분명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작살을 던지는 것이다. 상어를 잡으려고 작살을 던졌는데 고래가 잡혀봤자 그에게는 실패인 것이다. 교양에 대한 관점도 독특한데 그에게 19세기 문학이나 사변철학 등은 이미 죽은 지식이고, 진화의 계통수가 끝난 공룡같은 것이다. 이유는 더 재미있다. 더 이상 사람들이 그런 것을 읽지도 공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즉 정보의 신진대사가 없다) “고전이란 원래 가치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아예 없다. 그에게 진정한 지식과 교양이란 지금도 활발히 정보의 대사가 이루어지는 첨단과학이다. 다치바나 역시 인간존재의 의미라든지, 시간이라든지 공간이라든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답변 역시 19세기의 사변철학에서가 아니라 현대의 첨단 뇌과학에서 찾는 것 같다. 현대의 첨단과학을 진정한 지식으로 설정하니 당연히 쏟아지는 지금 여기의 출판물과 정보를 전부 스캔해야 하고, 속독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미래의 인간이란 정보의 대사로 움직이는 인간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마치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의 엔딩같은 느낌까지 든다. 한 쪽에서는 이런 다치바나 스타일이 깊이가 없고 “인격적 성숙”이 없다고 비판을 한다.(예를 들면 <서평쓰는 법>의 이원석) 하지만, 이런 비판도 이미 다치바나와는 출발점이 다른 비판이 되는셈이다.

 

독서계의 우파가 될까? 좌파가 될까? 이제 사람들이 책을 너무 읽지 않으니 이런 질문은 아예 하지 않을까? 책을 읽는 목적은 전부 틀리고 인생관도 전부 틀리다. 정말 부러운 사람은 자동차의 기어를 바꾸듯 속독과 지독을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만약 자신의 인생의 골수가 무엇인지 이미 아는 사람은 그 골수를 깊이 빨아먹을 수 있는 지독을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그런 인생의 골수를 찾지 못했거나 그런 건 없다고 믿는 사람은 다치바나식의 속독술이 유효하지 않을까. 다치바나처럼 정보를 축적하고 새로운 지식을 메이킹하는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은 마치 세계일주하듯 이런 저런 책을 “만져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근데 요즘 사람들도 다치바나 다카시나 야마무라 오사무를 알까?

 

ps 다치바다 다카시의 일본내 연혁(?)이나 평가 등이 궁금하다면 사이토 미나코의 <문단아이돌론>이 있다. 여기서 저자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지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축조한 지식이 실은 전공자가 보기에는 페이크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한다. 그 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에 대한 미묘하게 깐죽대는(?) 비평이 재미있게 펼쳐지고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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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가명 > 천국에서 지옥까지

음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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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교본을 숙지하는 것과 직접 물에 들어가보는 것은 틀리다. 대체로 수영교본을 숙지하는 것보다는 물에 들어가 개헤엄이라도 쳐 보는 것을 권장할 것이다. 하지만, 개헤엄도 어느정도 치고 나면 내가 제대로 헤엄을 치고 있는 건지, 남들은 어떻게 헤엄을 치는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책읽기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에는 제멋에 혼자 신나 책을 읽어제끼다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책

벌레"들이 어떻게 책을 읽는지 기웃거리게 되는 것 같다. 여기에는 양질전환의 법칙 같은게 적용이 되어서 어느 정도 책을 읽고 나면 자기가 읽은 책에 관해 나불거리고싶은 욕망도 생긴다. 책벌레들이 쓴 책읽기에 관한 책이 넘쳐나는 요즘은 축복받은 세상이다. 

 

 

"이상한나라의헌책방"의 주인인 윤성근이 쓴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는 초보자들에게도 쉽게 다가가는 장점이 있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부터 시작해서, 읽는 방법 ,책과 처음 만나는 방법 책읽는 습관 등 독서가들이 관심있을 만한 디테일들에 관해 자신의 예를 들고 있다.
책이 얇고 쉬운 문장으로 되어 있어서 어디 책을 한번 읽어볼까 생각하는 사람들부터 이제 막 입덕한 사람들까지 편하게 읽어볼 수 있다.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가진 궁금증은 다음과 같다.

1. 어떻게 읽은 책을 정리할 것인지?(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책에 밑줄을 그어야 하는 것인지?)

2.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책을 읽을 것인지?(저자만의 독서비법이 있는지?)

 

저자의 답:
1. 헌책방주인답게 저자는 책에 밑줄을 긋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재독시 감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대신 점착메모지와 에버노트 활용법을 소개한다. 나도 금방 실전투입 가능한 기술이다.
2. 영상매체를 일단 멀리한다. 책읽기도 바리스타가 커피맛 감별하는 것처럼 독서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외출시에는 잡지를 읽거나 여러가지 교차독서를 하면서 읽는다. 변신을 읽으면서 카프카 평전을 읽는 식이다. 저자는 문사철 독서법이라는 것을 소개하는데 하나의 주제에 관해 문학, 역사, 철학의 측면으로 읽는 것이다. 단순히 책의 내용만 파악하는 것이 독서의 전부가 아니다. 그책이 다른책이나 다른 사상, 저자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책의 그물망 속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피에르 바야르의 주장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마쓰오까 세이고처럼 책의 지도를 만드는 사례도 소개하고 있다. 책 속에 관련된 다른 여러책을 링크걸듯 소개하고 있는데 한 번 클릭해 볼만하다. 저자만의 속독술도 소개하고 있는데 나름 비법이다.

 

재미있게도 윤성근의 독서방식은 서평쓰는 방법과 연결된다. 서평쓰기를 강의한 책은 의외로 적은데 이원석의 <서평쓰는 법>은 간결하게 서평의 본질을 "요약과 비평"으로 압축한다. 이 책 역

시 얇고 쉬운 문장으로 부담없이 읽어 볼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비평을 비교를 통해 값을 매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책 내부의 논리적 정합성도 따져야 하지만 책이 가지고 있는 맥락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평가할 때 그 책이 지니고 있는 다른 책과 시대의 관계 등으로 책의 위치를 정해주어야 한다. 즉 좋은 서평가는 선행학습이 많은 서평가이다. 아마 이런 비평은 윤성근의 교차독서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그 외의 비평의 요소는 번역, 제목,문체, 지식과 논리, 목차 등이 있다. 저자는 실례를 인용하면서 각각의 요소를 설명한다. 서평과 독후감의 차이점은? 서평은 감정이 주를 이루는 독후감과 달리 논리와 체계가 바탕이 된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로자 이현우는 서평가는 게이트키퍼라는 표현을 쓰는데 저자도 서평가에게는 자신의 돈과 비용으로 악서를 읽고 그걸 읽지 말라고 권하는 희생정신이 있다고 말한다.책을 읽고 나서 이제는 좀 재잘거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PS 기시마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를 호되게 비판하는 서평이 나온다. 아마 이원석의 전공이 그 쪽이지 싶다. 아들러가  심리학의 3대 우두머리 중 한명이라는 서술에 대한 비판인데, 재밌게도 로쟈 이현우의 <책에 빠져죽지 않기> "미움받을 용기" 서평에서는 해당 내용을 그대로 사실로 소개하고 있다. 이원석의 주장이 맞다면 책읽기의 달인인 로쟈의 실수를 보는 것 같아 음침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이게 말로만 듣던 샤덴프로이데 뭐 그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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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영화는 호아킨 피닉스의 명연으로 포장된 텅 빈 영화일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이 세상의 악의에 시달리다 결국 자신이 악이 되는 영화라면 아서가 정신과에 다니는 설정은 없는게 낫지 않을까. 조커는 왜 악인이 된 걸까? 라는 물음에 원래 그런 놈이다 라는 답변이 되어 버리니까. "가취" 때문에 번역논란이 있는 것 같은데 난 마지막 머레이와의 대화의 정확한 뉘앙스가 궁금하다. 오히려 이 부분이 대충 넘어간 것 아닐까. 영어가 짧은 나로선 그냥 느낌적 느낌. 영화가 끝난 다음 내 마음대로 조커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까 상상해본다. "흥 그게 법을 어긴 거라고? 너희는 너희들이 지킬 수 있는 것만 법이라고 정해논 거야"  " 내가 죽으면 너희는 내 시체를 밟고 갈걸"  이 대사는 그럴 듯 한걸.  이 영화는 "조롱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화가 아닐까. 이 영화에서 조롱을 참는 사람은 난장이 광대 뿐이다. 아서는 세상을 웃기는 광대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웃음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웃음이 조롱의 의미로 다가가기 때문이다. 토마스 웨인부터, 월가 얼간이들은 아서의 웃음을 조롱으로 받아들인다. 아서조차 머레이의 조롱을 참지 못한다. 아서가 그를 죽인 것은 그를 무대로 불러 웃음거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서는 인정을 원한다. (남자는 인정을 원하고 여자는 공감을 원한다는 오래된 격언) 영화 초반에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착한 청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하지만, 정작 인정을 원했던 머레이(아버지 대역)가 그를 비웃고 어머니가 그를 학대한 계모라는 것이 드러나자 어머니와 상징적인 아버지를 죽인다. 인정을 원한다는 것과 조롱을 참지 못한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 아닐까. 인정을 원한다는 것은 사랑을 원한다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 나의 삶보다는 가치 있기를" 아아 안돼. 이런 문장과 이런 캐릭터에 공감한다면 상태가 안 좋은 거다. 근데 영화보고 나오는데 대기하는 관객들 보면서 크하하하 웃고 싶어지는 거 있지. 젠장. 어쩼든 배우들의 연기 디테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긴 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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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 실존심리치료, 개정판
어빈 D. 얄롬 지음, 최윤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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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코미디인데 내가 35살 때 27살 여자애를 좋아하면서 나이 때문에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다. 그 때는 그녀가 그렇게 젊어보이고 내가 그렇게 나이들게 느껴졌었다. 우울해하면서 책상 한 쪽에 이렇에 낙서를 한 기억이 난다. "괜찮아, 그녀도 늙고 병들테니까"

 

실존이라는 단어는 왠지 거창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스탠퍼드 교수 출신의 정신과의사로 자신이 겪은 상담사례를 우아하고 섬세하게 엮어낸다. 나무잎맥처럼 바른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런 애기들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등장인물들에게 연민과 동질감이 느껴진다.(특히 35살 연하의 젊은이와 사랑에 빠진 할머니) 이제는 나 역시 어딘가가 뒤틀려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실존의 부조리를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하는 것 같다.

"유한성과 우연성"

정말로 자신의 죽음을 가슴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상담사례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노화와 죽음을 외면하거나 과거의 한 점에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죽음을 올바로 직시할 때 역설적으로 삶이 풍성해 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한탄하지만, 사실 우주의 법칙의 본질은 "불공평"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읽다 보면 환자를 대하는  정신과의사들의 속마음이나 정신과치료가 진행되는 과정 등을 엿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시끄러웠던 빌런 정신과 의사를 떠올리게 하는 케이스도 있는데 결말은 사뭇 다르다. 번역을 못한 것 같지는 않는데 원래 문장이 섬세해서인지 읽을 때는 약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우울할 때 읽어보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질 것 같다. 책을 읽고 나은 다음에 가급적자주 되뇌이기로 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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