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에게 무의식은 억압된 트라우마라기보다 상징계가 주체에게 미치는 효과에 따라 탄생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그것은 타자가 나의 생존에 절대적일 때의 생존방법이기도 하고, 언어라는 대타자를 애초에 내가 만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타자의 언어와 욕망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상 무의식은 타자의 담론이다.”(p112.)

 

나는 타자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결여의 존재이고, 타자 역시 완전하지 않은 결여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타자가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 타자가 원하리라 짐작되는 것을 내가 가지면 나를 사랑할 것이기에- 타자가 결여한 것을 원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나는 대체물로만 만족해야 하고, 그러한 욕망을 가지는 순간 주체가 된다. 욕망하는 순간 상징계의 체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이해한 라캉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파랑새를 찾아 영원히 떠도는 이미지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소소한 쾌락은 가지지만 영원히 결핍에 시달리는 존재, 물론 억지로 갖다 대기지만 부처의 삶은 둑카다.”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가. 추가적인 질문은 충동”(drive)는 주체와 어떤 관계인 걸까. 상징계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주체의 논리를 세우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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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욕망이라는 하나의 기표를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다른 기표로 치환하는 과정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초기의 치환행위를 통하여 의미작용의 과정이 시작되고 아이는 결여의 주체로서 상징계에 작업한다. 또한 이 때문에 라캉은 상징화 과정자체를 팔루스적이라고 묘사한다. 팔루스는 아버지의 이름을 통하여 무의식을 조직· 편성하는 중심적 기표로서 실행된다. 누구도 애초에 그것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전제 하에 팔루스는 근원적 상실 대상으로 간주된다.(p89)

 

내가 상실했다고 상상하는 것.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잃어버렸다고 상상하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 채워질 수 없는 결핍이 된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그것에 복종하면서) 나는 주체가 된다.

 선생님의 말: 라캉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남자는 아버지에게 복종하면서 쾌락을 얻는 대신에 자신의 일부를 희생한다. 반면 이런 과정이 없는 여자는 진정한 혁명이 가능하다.(아마도 남자는 시스템에 굴복하는 대신에 주체가 되고 쾌락을 얻는 반면에 여자는 아예 시스템 바깥에 있다는 뜻)

 

동시에 아버지는 법을 상징하지만, 자신은 법 바깥에 있기도 하다. 즉 아버지에 복종한다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법과 법을 위반하고자 하는 욕망은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주체는 이것을 피할 수 없다. 법에 복종할 수록 죄의식은 더 증가하는 것이다. 



팔루스는 구체적으로 언어를 말하는 것일까?   
















ps "연애나 결혼관계는 단순히 당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친구,친척 그리고 제도를 포함하는 전체 사회조직에 관계된다. 즉 개인적인 관계들이 남녀를 사회적인 의미들로 구성된 상징회로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p84)  


어째 이 문장이 쏠린다. 연애관계란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기표'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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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어려운 이유는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독자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가정 아래 하나의 이야기가 스타트를 한다면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는 출발점 한참 뒤에서 스타트해 이야기를 따라 잡기 위해 두배로 빨리 달릴 수 밖에 없다. 상징계의 출발점은 구조주의와 소쉬르, 야콥슨이고, 상징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1.구조주의

구조주의의 기본전제는 모든 사회적 활동이 자체의 본질적 규범과 문법을 가진 기호체계를 포함하는 한 언어로 조직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의 행위를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사회 관계라는 배경  하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p59)

 

2. 소쉬르

언어는 기초의 복잡한 체계로서 존재한다. 주어진 기호는 본질적인 가치나 의미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의미작용의 전 체계 안에서 설정되는 상대적 위치를 통하여, 그리고 그 체계의 다른 모든 기호들과의 차이를 통하여 정의된다. 기호는 실제 물질세계의 특성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기호를 지시해 주며 이 기호는 다시 우리를 또 다른 기호로 이끌게 된다.... 언어는 의식에 선행한다.

(항상 헷갈리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기표안기의가 있으니까 시니피에.) (p.66)

 

3.야콥슨

야콥슨에 의하면 은유는 하나의 개념을 다른 개념으로 치환하는 행위이며 그러므로 선택의 축인 계열축에 상응한다. 환유는 한 개념이 다른 개념을 연상시키거나 그것에 인접해 있으므로 인접 (contiguity) 관계이며, 그러므로 이것은 결합의 축인 통합축에 상응한다. 라캉은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의 구조적 모형이 압축(condensation) 과 전치(displacement)라는 프로이트의 꿈작업의 과정에 직접적으로 대응된다고 생각했다. ... 이 두 과정들은 프로이트가 일차과정(primary process)이라고 부른 것으로서 의식적 사고인 이차과정(secondary process)과 대조된다. 은유와 환유에 대한 야콥슨의 구분을 프로이트의 일차과정과 비교함으로써 라캉은 마침내 무의식이 어떻게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는가를 보일 수 있었다. 그에 의하면 무의식은 은유와 환유의 규칙에 따라 운용된다. (p72)

 

후기: 언어가 의식에 선행한다. 즉 언어화(상징화) 할 수 있는 것만이 의식에 들어온다. 주체(subject)는 언어(라는 대타자-언어는 내가 만든게 아니다.)에 굴복할 때(sub) 탄생하는 것이다. 나는 라캉의 이론을 느낌적 느낌으로 캐리커처할 수 밖에 없다. 굳이 내 맘대로 도식화한다면 신체와 감각의 영역(상상계)에서 얻어진 재료를 언어라는 대타자(상징계)를 통해서 무의식()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라는 도식?(음 딴에는 그럴 듯한데?)

소쉬르의 이론을 한번 비튼 게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고정된 의미가 없다는 나이브한 의미로 이해하기로.... 선생님이 숀 호머가 <도둑맞은 편지>에 대해 해설한 부분은 틀렸다고 웅변하신다. 머리를 굴리다가 떨어질 것 같다. 이쯤에서 멈추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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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계는 자아의 영역이며 감각에 대한 지각,동일시 그리고 통일성에 대한 환영적인 감각으로 구성된 언어 이전의 영역이다. 상상계의 일차적 관계는 자신의 신체, 즉 신체와 거울상 자체와의 관계이다....거울단계에서 느끼게 되는 근원적 통일성과 연속성의 감각은 환영적인 것이므로 자와와 관련된 근본적인 부조화가 존재한다....요약하면 상상계는 동일시와 거울상의 영역이며 왜곡과 환영의 영역이다. 이것은 자아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상상계적 통일성과 연속성을 얻고자 하는 무모한 투쟁이 일어나는 영역이다.

 

라캉이 어려운 이유

 

라캉의 생각 자체가 시간이 흐르며 변한다.

 

라캉은 개념을 순수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마치 시어처럼. 은유. 환유

심지어는 무의식이 쓴다, 라고 말한다. 모순적인 논리,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해 의견이 분분한 면은 니체를 떠올리게 한다.

 

설레발치는 의사들에게 경고 차원에서 일부러 어렵게 썼다.

(핑계일 가능성이 있다)

 

철학 등 인접한 의문의 개념들을 슬쩍 비틀어서 이용한다.

 

=> 라캉도 본인이 무슨 말 하는지 몰랐던게 아닐까?

 

에끄리를 전부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전재산을 줄 용의도 있다는 말. ”상상계라는 폐쇄적인 느낌이 번역보다 상상적인 것이라는 번역이 더 나을 것이다. 주체안에는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 것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후기: 거울을 보며 파편화된 신체의 감각에서 가상의 통일된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 한다는 논리(이 과정에서 소외가 발생한다.) 는 자아는 오온의 가합일 뿐이라는 불교의 무아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추가적인 질문: 상상계, 즉 환영인 이미지가 현실적으로 함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엔카의 법문 중에서 들은 말. -우리는 황금궁전 안에 우리의 이미지를 모셔둔다. 그리고, 그 이미지가 상처받으면 괴로워한다. 그 이미지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보통 평판이라는 것을 신경쓴다. 그런데 그것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환영에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뜻일까?(라캉은 소외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환영이라고 해도 여러명이 믿게 되면 실재하게 되는 걸까? 마치 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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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관해 아주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초기 불교의 수행법 중에 <부정관>이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몸이 더럽다는 것을 관조하여 육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수행법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몸 안에 있는 배설물, 몸 안의 혈액과 장기, 관절의 기름, 피부의 털 따위를 관조하는 식이다. 지금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허무적인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데 실제로경전에는 부정관을 수행하는 비구들이 자꾸 자살을 해서 부정관 대신 자비관을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안다. <서브스턴스>를 보면서 이 영화가 꼭 불교의 <부정관>을 영화버전으로 만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공황장애나 불안증세 같은 심장두근거림이나 자기조절이 안되는 사람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화관에 가기를 권한다. 애초에 기대를 한 것은 젊음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여성의 갈등과 심리묘사? 같은 거였는데 영화를 보면서 이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플라이>같은 영화였나? 하는 느낌이 들면서 처음엔 편한 마음으로 간 영화관에서 마음을 다잡고 호흡명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지금 영화관에서 나가면 쪽팔리겠지? 옆에 앉은 여자가 다리를 치워줄까 등등을 상상하며) 차라리 파리인간이 녹색 점액을 토해내는 장면이라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정말로 끔찍한 건 클로즈업된 멀쩡한 육체에 바늘을 찔러놓고 보충제?를 집어넣는 장면이나 뼈가 도독도독 튀어나온 등에서 필시 끈적끈적할 수액을 뽑아내거나 방금 전까지 움직이던 육체를 타일 바닥에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이다.(머리가 퉁퉁 튄다.) 위빠사나 명상을 가르치는 고엔카가 법문 중에 인간의 몸에 붙어 있는 것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것이 떨어지는 순간 더러운 것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멀쩡한 육체가 하나씩 인수분해될 때 이 가르침이 실감나게 떠올랐다. 인간의 몸은 더러운가? 적어도 감독은 너네가 좋아하는 젊은 여체를 말 그대로 실감나게 느껴봐라 씨바. 좋으냐? 좋아? 하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 같다. 역설적인 것은 나체의 데미무어를 보면서 어이쿠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몸매와 저 미모를 유지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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