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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천국에서 지옥까지 ㅣ 삶과 전설 10
헤이젤 로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해냄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후지와라 신야는 <황천의 개>에서 대학교수의 권유로 사르트르를 처음 읽고 “철부지같다”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라나 뭐라나요.
글쎄요, 저는 이들의 연애 행각을 읽고 약간 거부감을 느꼈는데요. 이들이 좀 오만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나는 똑똑해, 그리고 아직 젊어. 그러니 한번 맘껏 즐겨볼까” 하는 뉘앙스랄까요. 마치 오렌지족이 “나는 젊어, 생긴것도 그럴 듯해, 돈도 많아, 그러니 한번 즐겨볼까”하는 거요 .(그래서,비버는 노화를 그토록 절망적으로 받아들인 것 아니었을까요) 자의식 과잉이라는 느낌도 드는군요. 자아라는 것이 거대하게 부풀어서 뒤뚱거린다고 할까요. 마루야마 켄지가 <소설가의 각오>에서 미시마 유키오가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라고 썼는데 같은 말을 사르트르에게 해보고 싶네요.
옛날에 사랑이란 늘씬한 미남미녀들이 우아한 카페에서 찻잔을 기울이거나 가로수가 늘어선 로맨틱한 거리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하려면 어떤 “자격”이 필요하고(키는 180이상? 생긴건 원빈 이상?) 저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냉소했었지요. 돌이켜보면 이것도 오만이었지만 이들이 과연 그 많은 연인들을 진심으로 대했는지 정말로 그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존중했는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읽다 보면 사르트르가 얼마나 여자들을 깜쪽같이 속여 넘겼는가가 나옵니다. “맙소사, 나한텐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모르겠습니다. 아직 이들의 감정의 결을.올그렌이 한 말이 오히려 제 가슴에 닿았습니다.“부분적인 사랑이란게 있나요?” 아마도 관계라는 것에도 여러 가지 프리즘이 있고, 여러 가지 음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오히려 사랑이란 무엇이다라고 정의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해 놓고 내가 이 여자(남자)를 사랑하고 있다(있나?)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그냥 따라가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연애관계를 보면 말입니다. (후반에 가면 등장인물이 헷갈릴 정도입니다.사르트르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 기억했을까요?) 그들은 과연 그 많은 사람들의 본질을 본 걸까요? 그냥 쇼핑하듯 “신상”을 보듯 상대방을 만난 건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사르트르가 “패밀리”를 끝까지 부양한 건 기억에 남네요.
그냥 고상하게 볼 것 없이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 남자,여자 둘이서 맘껏 즐긴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조차 사르트르의 “권력”이 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말이죠. 그러고 보니 이런 생활도 프랑스니까 가능했겠지요(저는 지금 처음 부자동네에 가본 시골청년 같은 기분입니다.)
하지만, 사르트르가 “국내에서 망명”했다는 점은 인정하고 싶습니다. 모두다 “오른쪽”이라고 말할 때 혼자서만 “왼쪽” 이라고 말하는 것,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죠. 처음에는 나치에게 살해당한 붉은 머리 철학자의 말처럼 “부르주아” 였겠지만 나중에 “전투적 지식인”으로 선회한 듯 합니다. 아마도 그 계기는 “문학은 개똥이야” 란 말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그 많은 관계를 가운데 왜 비버와 사르트르의 관계가 가장 초점일까요? 음. 아마 글을 써서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을 전달할 수 있었던 사람이 비버이기 때문일 수도 있구요. 실제로 후기에 보니 다른 여자들에 대한 험담이 사르트르의 편지에서 드러난다고 하니 실제로도 가장 깊은 맘을 터 놓을 수 있는 관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 관계란 무엇인가를 공유하는 거같아요
아마 내 안에 여러 가지의 나가 있고 그 각각의 나가 결핍하고 있는 것이 다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 결핍을 메우기 위해 각각의 다른 상대를 원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나”가 비버와 사르트르를 이어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신: 프랑스에서는 철학교사가 가장 존경받는 직업이었다고 하네요. 이런 흐뭇한 시대가 있었다니 이것도 프랑스니까 가능했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