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런 겪음, 즉 불의를 당하는 것은 남자에게 어울릴 일도 아니고 오히려 어떤 노예에게나, 즉 불의를 당하고 모욕을 겪고도 스스로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도 자기가 신경 쓰는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하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나은 노예에게나 어울릴 일이거든요. 하지만 내 생각에 법들을 제정하는 사람들은 약한사람들, 즉 다중입니다. ,,. 사람들 가운데 더 힘 있는 사람들과 더 많이 가질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자기들보다 더 많이 갖지 못하게 하려 하면서 그들은 말합니다. 더 많이 갖는 것은 추하고 부정의한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 애쓰는 것이야말로 부정의한 것이라고 말이죠..... 생각에 충분한 본성을 갖고 태어난 남자라면 이 모든 것들을 떨쳐 버리고 깨부수고 빠져나가서, 우리가 써 놓은 것들과 술수들(mangganeumata)과 주문들과 법들, 그러니까 자연에 반하는 그 모든 것들을 짓밟고 떨쳐 일어나 자기가 우리의 주인임을 밝히게 됩니다. 우리의 노예이던 자가 말이죠."(플라톤,고르기아스)


칼리클레스의 힘에 대한 찬양. 얼핏 들어도 '민주적인' 소양에는 거리감이 있다. 칼리클레스는 강자의 입장이지만 자연에서 관찰한 또다른 법칙은 영원한 강자가 없다는 것이다. 예전에 전성기가 지난 사자의 비참한 말로를 본 적이 있다. 칼리클레스는 자기가 그런 사자가 되었을 때도 이런 주장을 할까? 현대적 관점에서 이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칼리클레스가 스스로 주인이 되는 노예를 예시로 들었기 때문에 인습에 따르지 말고 스스로 주체가 되라는 혁명적인 태도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는 칼리클레스의 주장을 희석하는 거 아닐까? 결정적으로 강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칼리클레스의 말은 남성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고 현재 여성주의에서 말하는 가부장적이고 유해한 남성성의 원형일 수도 있지 아닐까?)



.그 누구에게든 노예 노릇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오히려 내가 지금 당신에게 까놓고 이야기하는 이것이 자연에 따른 아름답고 정의로운 것입니다. 제대로 살려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들은 가능한 한 최대가 되도록 내 버려 두고 징벌하지 않아야 하며, 용기와 현명 때문에 가능한 한 최대인 이 욕망들에 봉사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 매번 욕망이 일어나는 그 대상들로 채워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다중에겐 가능하지 않다고 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움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비난하지요. 자신들의 무능력을 감추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들은 방종이 정말 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앞에서 내가 이야기한 것처럼. 본성이 더 훌륭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들 자신이 쾌락들에 대한 채움을 확보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용기 없음 때문에 그들은 절제와 정의를 칭찬합니다. 하긴, 애초부터 왕들의 아들들이었거나 그 본성상 스스로 어떤 관직이나 참주 자리나 지배권을 확보할 능력을 갖고 있던 바로 그런 사람들에는 진실로 절제와 정의보다 더 추하고 나쁜 것이 무엇일까요?."(플라톤,고르기아스)


 절제를 찬양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혼의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욕망에도 등급을 매길 수 있을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욕망에는 절제가 미덕일 것이다. 하지만, 한 영성서적에서 인간의 궁극의 욕망은 자신의 근원과 다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만약 칼리클레스의 주장이 인간의 발전을 전제로 한 그런 궁극의 욕망을 눈치보지말고 끝까지 추구하라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혁명적인 언사가 될 수 있다. 직관적인 느낌인데, 플라톤이 이런 혁명성을 희석시키기 위해 칼리클레스의 주장을 교묘히 비트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체제에게 그 누구에게든 노예 노릇하면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라는 말보다 더 혁명적인 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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