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분과 전체 - 개정증보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지음, 유영미 옮김, 김재영 감수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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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과 전체>는 양자역학을 성립시킨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쓴 일종의 회고록이다. 그의 모든 인생사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고, 양자역학이 성립하고 황금기를 거쳐 원자폭탄이라는 괴물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신의 연구경력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양자역학이라는 지금도 ‘귀신신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리는 흥미로운 소재에다 1차세계대전부터 2차세계대전이라는 격동의 BGM이 깔리면서 이 이야기는 비단 양자역학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필요할까? 물론 양자역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으면 이 책의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과형인간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자연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들이 인문학에도 적용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책에 등장하는 과학자들은 원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정도의 기술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지 않는다. 그들이 고민하는 것은 자신들이 새로 발굴한 영역의 철학적·윤리적 함의, 사회적 영향, 종교나 정치 등 인접영역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먼저 이야기는 아직 학창시절의 저자가 친구들과 하이킹을 하며 원자론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1차세계대전 직후의 독일 청년들은 어째 21세기 대한민국보다 더 풍성한 학창생활을 보낸 것 같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하이킹과 캠핑을 하고 친구 집에서 피아노 연주모임을 갖기도 한다.) 저자는 친구어머니의 충고대로 음악가로서 소박한 삶을 살기보다는 더 많은 가능성을 택해 뮌헨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여정을 시작한다. 부러운 것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인적 인프라(?)다. 아인슈타인은 말할 것 없고, 덴마크의 닐스 보어,오토 한 등 마치 수호전의 108영웅같은 등장인물들이 물리학의 난제들에 인생을 걸고 비단 연구뿐만 아니라 우정을 서로 나누며, 그 와중에서 종교와 철학의 담론까지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 이들은 죽기 전에 ‘한 평생 잘 살았다’하고 회고할 것 같다. 저자가 자연에서 보는 것은 “단순성과 완결성 앞에서 거의 기겁했던 경험”(p135) 이다. 저자는 “중심적 질서”(p.391)라고 비슷한 단어로 다른 정치,사회적 현상을 분석하기도 한다. 양자역학이 지금도 얼핏 신묘하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일상을 묘사하는 뉴턴 역학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체계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은 그런 다른 개념체계를 기존의 고전물리학의 용어로 설명해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진다. 이 과정에서 개념과 언어, 관찰한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의미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 등등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 저자와 닐스 보어와의 대화 중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상보성’인데 하나의 관찰상황과 측정도구는 다른 관찰상황과 배타적이지만 두 개 다 진실이라는 것이다. 배경지식의 부족으로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상보성 아래에서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는 뉴턴역학계의 공리는 “물은 확률적으로 100도에서 끓는다”라는 일종의 확률분포로 바뀌는 것 같다. 관찰하려는 행위 자체가 불확정성을 초래한다면 실험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관찰자가 관찰하려는 행위 자체가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은 어떤 주장을 접하면 그 주장을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부터 확인하라는( 여성학자 정희진이 말하는 ‘위치성’) 인문학적 통찰을 연상시킨다. 기존의 객관, 주관은 상대적인 영역으로 후퇴한다. 108영웅 중 한 명인 카를 프리드리히는 칸트를 신봉하는 철학자와 토론하며  “역사적 발달과 더불어 인간의 사고 구조도 변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과학적 진실에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 절대적이라고 믿고 있던 것들 중에도 우리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을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닐스 보어의 말대로‘심연에 진리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풍랑에 휩쓸린 배의 갑판에 서 있는 것 같은 상황에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나침반’과 ‘의미’는 무엇일까?  격동의 시대에 걸맞게 저자 역시 평소와다른 선택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히틀러의 독일을 떠날 것인가? 과연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 올 원자력 연구에 힘을 더해야 할 것인가? 저자는 원자폭탄의 책임론을 물으며 미국과학자들을 비난하는 토론에서 서늘한 말을 한다. 단지 우리가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과학자들보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양자역학을 처음 들었을 때 경악하지 않는다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비전공자에게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전문적인 부분을 건너 뛰더라도, 양자역학의 시대를 열고 황금기를 이끈, 그리고 파국까지 오롯이 경험한 한 과학자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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