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푸른시원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쩌다가 반백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담에야 말로만 듣던 소크라테스 원전을 읽게 된 걸까.  천병희 역본이 무난하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고, 철학 입문서에 소개된 것을 계기로 읽은 크리톤은 지혜가 넘치는, 명불허전의 느낌은 전혀 없다.  그냥 도망가면 되지 뭐 이렇게 구구절절 따지나 싶기도 하다. 크리톤이 주변의 평판을 신경쓰는 것은 분명하지만, 본질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사형판결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불의를 불의로 갚아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존중받을 만한 사람들의 의견에만 신경써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의견이 현대인에게는 그나마 지혜로 받아들여질만 하다.) 여기서 불의의 정의와 한계는?  그럼 정당방위는? 하는 의문이 든다. 소크라테스가 도주한다 하더라도 그게 국가가 무너질만한 만한 해악일까? 일종의 설레발 아닐까? 그리고, 판결의 부당함에 대한 크리톤의 주장은 밟아버리고(자신의 목숨이 달려있는데도 말이다.) 국가의 명령을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만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그 당시에 왜 특이한 존재였을까?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서는 이런 사고방식이 특이했을 수도 있다. "아름답고 올바르게 사는 것" 어쩌면 고대 그리스 사회분위기는 현대처럼 현세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교적인 느낌까지 나는, 정의 미덕, 아름다움을 찾는 소크라테스가 특이했을 수도. 하지만, "잘 살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초래할 수 있지도 않을까. 그냥 이 순간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외부의 권위를 설정하고 거기에 복종하고 검열하는 느낌이 든다. 소크라테스는 도주하지 않는 것이 정의라는 식으로 주장하는데 그 정의라는 것이 민사상의 계약처럼 느껴진다. 있기? 없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국가와 자신은 계약을 맺었으며 도주는 그 계약을 깨는 것이기 때문에 불의라는 것이다. 애초에 그 계약의 합의한 게 맞는지도 의문이지만, 소크라테스는 부득불 합의한게 맞다고 우긴다. 국가를 주인에 자신을 노예에 비유하는 대목은 혹시 플라톤이? 하는 의심이 든다. 플라톤은 정변에 참여했다가 실패해서 노예로 끌려갈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는데(대표작이 "국가"다.) 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기 주장을 편게 아닌가? 하는 느낌적 느낌이 드는 것이다. "어떤 원칙, 내용이 어떻든 정의라고 부르는 것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했다"라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주목받는 이유일까?  만약 앞의 이유가 플라톤의 이유라면 소크라테스가 죽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마지막 한 마디"신이 우리를 그 쪽으로 인도하시니"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들어봤을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다이몬이 시켰기 때문이었을까... 나에게도 다이몬이 있을까.. 오 수호령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