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와하는 자에게 니체는 약이 될 것 같다. 그는 쉴새없이 선악의 대립 대신 진리는 그라이데이션의 문제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니체는 틀림없이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종종 양심의 가책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을 갈갈이 찢어놓는지 묘사한다. 아마도 경험담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게 "젊음"이라고 말한다. 사물을 예스와 노로만 대하고 "뉘앙스의 기술"을 아직 익히지 못한채 무조건적인 취향을 내세운다. 때문에 그는 사물을 위조하기 전까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다. 기실 젊음 그 자체가 기만적이고 위조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기만당한 것에 대해 자책한다. 그가 스스로 기만을 원하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의 감정을 불신하고, 좋은 양심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결국 그는 젊음을 반대한다고 나서지만, 이런 과정 전체가 젊음이었음을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된다.


주체, 책임. 이런 거 니체는 안 믿는다. 고대인들이 유쾌했던 것은 책임을 신에게 돌릴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순진무구함이 니체에게는 있다. 젊음은 기만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쓸데없이 스스로를 자책한다. 여전히 상대주의적인 니체의 태도가 있다. 젊음은 예스, 노 밖에 모르고 무조건적인 취향- 그것은 악취미이다.-으로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다. 정작 삶의 가장 큰 상(prize)는 뉘앙스의 기술이다. 삶의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감정에 기교를 부린다.


뉘앙스: small difference


하나의 소설: <파이 이야기>. 파이의 진실은 뭘까? 리처드 파커는 호랑이일까? 아니면 잔인한 선원일까? 파이는 호랑이와 사투하며 살아남은 걸까? 식인을 하며 살아남은 걸까? 파이는 니체가 말한 "뉘앙스의 기술"을 사용한 걸까? 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우리가 믿는 것이 진실일까?

하나의 영화" 팀 버튼의 <빅 피쉬>. "난 진실보다 차라리 네 아버지의 구라를 택하겠다." 주인공의 아버지 친구는 주인공에게 아버지의 진실을 말해 준다. 아버지는 모험을 떠난 게 아니라 영업사원이라 밖으로 나돌아다닌 것 뿐이다. 아버지는 거인도 샴 쌍둥이도 만나지 못했고, 영업을 뛰다 주인공의 출산에 늦은 것 뿐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주인공이 아버지의 모험담을 자신의 아들에게 들려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하지만 여전히 드는 의문. 톰 클랜시의 소설을 영화화한 <CLEAR AND PRESENT DANGER> (해리슨 포드가 잭 라이언으로 나온다) 에서 잭 라이언에게 동료 CIA 요원이자 악당이 말한다. "세상은 회색이야 이 보이스카우트 같은 녀석아" 하지만, 우리의 잭 라이언은 예스와 노로 사물을 대하고 "뉘앙스의 기술"을 익히지 못한 채 국회에서 남미의 불법 CIA 작전을 고발한다. 보통 자기합리화를 악당이 한다고 헐리웃 영화는 말한다. 영웅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 재벌 모 회장이 다들 떡값 주는데 왜 우리만 문제삼느냐고 할 때 이걸 자기합리화라고 하지 "뉘앙스의 기술"이라고 하지 않는다. 과연 "자기합리화"와 "뉘앙스의 기술"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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