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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 러시
유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솔출판사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처음으로 유미리 소설을 읽었다. 예전부터 이런 재일 동포 작가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왠지 한국계 동포가 일본에서 유명 소설가가 됐다는 사실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거나 대견해하기 보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마 유달리 어두웠던 그녀의 성장 배경과 범상치 않은 생의 이력이 섬뜩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다 찜질방에서 우연히 이 소설을 보게 됐다. 유미리가 쓴 소설이라는 것을 알고 읽지 않으려 했는데 작품 소개를 읽어보자 흥미가 일었다.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14세 소년의 심리가 무서우리만큼 치밀하면서 긴장감 있게 묘사됐다는 평을 보자 궁금해졌다. 14세 소년이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난 도무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책을 들었다.
서두를 읽어가면서 난 번역이라서 이렇게 글이 애매모호한 것일까, 아니면 작가 자체가 이렇게 애매모호하고 흐릿하게 글을 쓰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흐릿한 안개 같은 묘사 너머로 알 수 없는 광기와 잔혹함이 느껴졌고 그 광기와 잔혹함이 뿜어내는 원시적인 힘과 공포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 흐릿한 언어의 정글 속으로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주인공 카즈키와 만나게 됐다. 카즈키의 넘치는 폭력성과 동시에 수반되는 어린 그의 공포와 불안이 애처로우리만큼 섬세하게 조화를 이루어 난 그의 성격을 파악하려고 애를 쓰면서 그의 어지러운 가족 관계와 무의미한 일상을 따라다녔다. 과연 읽다보니 터무니없이 무식하고 무정하고 둔감한 그의 아버지에 대해 반감이 들었고 종교에 빠져 자식들이 불행해져도 몰라라 하고 도망쳐 버린 엄마의 무책임함에 화가 났고 동시에 카즈키의 주변을 지키는 소수의 선인들에게 안도하기도 했다.
소설은 오만방자하면서 동시에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인 주인공과 천사 같은 형과 또 하나의 희생양이자 구원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쿄코등 여러 인물을 등장시킨다. 이들과 더불어 금각의 할아버지와 야쿠자 사내 카나모토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구원이라든가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고독과 인생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과 인생에 대한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에서 그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기뻐하고 공감하면서 작가가 제시한 화두를 반추한다.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를 살해하고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남들 같은 평범한 가정을 만들고자 애쓰는 주인공을 보면서 현대에 있어 가족이란 무엇인가 난 깊이 생각하게 됐다. 아이들을 만들고 그들의 부모로 살아간다는 것, 단순히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내는 차원을 넘어서 그 아이들의 맹목적인 믿음을 받아줄 수 있을 만한 든든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때로는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요즘 들어 우연히 난 두 명의 일본 여류 작가가 살인을 소재로 쓴 힘이 넘치는 소설을 읽게 됐다. 하나는 키리오 나츠오의 ‘아웃’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유미리의 이 ‘골드 러시’이다. 모르겠다. 소재가 살인이라서 그런 것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만 여성 작가가 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박력 있고 대담한 소설들이다. 피부가 오그라들 정도로 정직하게 묘사한 인간의 심층 심리를 보면서 소스라치면서 주인공들의 절망 속에 내 자신의 절망이 오롯이 비치는 것을 보는 것은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동시에 위안도 받는다. 절망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의 일부임을. 누구는 극단적으로 표현하다보면 살인으로서 그 절망감을 표출하기도 하지만 난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쏟거나 쓴 술을 한 잔씩 마시면서 그 절망감을 삼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은 나이는 어리지만 몸은 커버리고 지능은 높지만 감성은 교묘하게 순진무구한 아이에게 왜 가족을 살해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고자 애쓰면서 끝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일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은 채 살아왔다. 그러나 당연한 일들이 모이고 모여 아주 복잡한 판단력을 발휘해야 할 일들로 발전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 그것이 또 인간의 삶이다. 난 궁금해진다. 나라면 카즈키에게 왜 아버지를 죽이지 말았어야했는지 잘 설명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