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x Richter - On the Nature of Daylight


병원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의사는 간결하고 명확하게 말했다. “골다공증입니다. T-점수가 -2.99로 나왔어요.” 순간,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내 몸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던가. “약물 치료와 생활 습관 개선이 필요합니다.” 의사의 말은 귓가에 맴돌았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2.99.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몸, 내 삶,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막막함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착잡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칼슘, 비타민 D, 골다공증 약, 운동..." 의사가 말한 생활 습관 개선 목록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막상 실천하려니 막막했다. 칼슘이 풍부한 음식을 챙겨 먹는 것도,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약까지 먹어야 한다니...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불가피했다.


의문은 점차 내 사고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병원에서의 진단과 숫자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들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다. 이때 문득 떠오른 것이 미셸 푸코였다. 그의 ‘규율 권력’에 관한 이야기는 병원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했다. 푸코는 권력이 단순히 억압하는 힘이 아니라, 개인을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하고 규율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병원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의료 지식과 기술을 통해 사람들을 특정 방식으로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힘의 장(場)이라는 것이다. 진단, 검사, 치료, 그리고 생활 습관 개선에 이르기까지, 병원의 모든 과정은 개인의 몸과 행동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섬세한 권력 작용의 그물망을 형성한다.


병원의 진단은 내 몸을 숫자로 번역했다. 뼈의 밀도를 수치로 보고, 그 숫자가 나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2.99. 단순한 숫자 하나가 내 몸의 상태를, 아니 어쩌면 내 존재 자체를 정의하는 듯했다. 나는 건강한가? 나는 평균에 도달해 있는가? 끊임없이 다른 숫자들과 비교되고 평가되었다. 푸코는 말했다. “권력은 억압하지 않고, 행동을 유도하며, 스스로를 규율하게 만든다.” 그의 말처럼, 병원은 내게 직접적인 강제를 가하지 않았다. 의사의 말과 진단서는 내게 더 나은 선택을 하라고 조언했지만, 동시에 내 몸에 대한 새로운 기준과 불안을 심어주었다. 건강에 대한 불안감,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초조함,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나는 더 이상 내 몸을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내 몸은  의료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감시되고 규율되는 대상이 되었다.


골다공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10월 내내 나는 우울감 속에 갇혀 있었다. 마치 몸속에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듯,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뼈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짓눌렀다. 이 숫자와 진단이 나를 옭아매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이제 '-2.99'라는 숫자로 규정되는 존재인가?" "내 삶은 이제 골다공증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인가?"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걷기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엔 의사의 권고대로 걷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걸으며 느낀 것은 내 몸과의 새로운 대화였다. 발이 땅에 닿는 감각,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햇살의 따스함, 그리고 내 몸에서 울려 퍼지는 숨소리와 심장 박동. 이 단순한 움직임 속에서, 나는 의사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었다. 걷는 것은 단순한 치료 행위를 넘어,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었다.


걷는 동안, 나는 또 다른 질문과 마주했다. 이 숫자들은 내 몸을 규정할 수 있지만, 나의 존재까지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2.99'라는 숫자, 골다공증 환자일 뿐인가? 나는 내 몸의 상태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나의 삶을 구성하고 싶었다. 숫자에 매몰되지 않고, 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골다공증이라는 진단은 내게 새로운 약속처럼 느껴졌다. '나약해진 몸'이라는 현실에 좌절하는 대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처럼. 내 몸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고민할 기회였다. 이제부터라도 내 몸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 몸과 진정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2.99라는 숫자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의 '현재'를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며, 동시에 나를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낙인과도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숫자를 단순히 약점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나는 '-2.99'라는 숫자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매일 걷는 발걸음과 함께 나의 몸과 삶의 경계를 다시 정의하고 있다. 매 걸음마다 나는 내 몸의 한계를  넘어서고,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이 숫자가 내게 던진 질문은 어쩌면 내 남은 삶을 탐구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길 위에서 나는 여전히 묻는다. "나의 몸은 어디까지 나의 것인가?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바람을 가르며 걷는 동안에도, 그 질문은 끊임없이 나를 따라온다. 마치 내게 달라붙은 꼬리처럼. 그리고 나는 매일 그 답을 찾아간다. 걸음걸음마다 내 몸의 감각에 집중하며, 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내 몸의 이야기와 함께, 그 질문을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두 권의 책을 집어 들었다. 마치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의 지도처럼.


『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다니엘 페나크는 몸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생물학적 구조가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감정, 삶의 궤적을 담아내는 매개체로 바라본다. 이 책은 몸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몸과 마음이 서로 연결되어 변화하고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탐구한다. 골다공증이라는 진단 이후, 내 몸과 새롭게 마주하며 느꼈던 생각들, 내 몸은 내 것이면서도 외부의 힘과 시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깨달음, 이 이 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페나크는 독자에게 몸의 이야기와 삶의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내는 기쁨과 슬픔을 전하며, 나로 하여금 내 몸에 대해 보다 부드럽고 열린 시선으로 대하게 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골다공증 진단 후, 내 삶은 단순히 건강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어떻게 나다운 삶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었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나에게 이러한 고민을 철저히 되돌아보게 한 책이었다. 가완디는 현대 의학이 생명 연장에는 탁월하지만,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질문에는 여전히 답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존엄하게 살다 존엄하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을 때 내가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도 연결된다. 단순히 '수치'로 규정된 나의 몸을 넘어서, '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나만의 선택과 주체적인 삶의 태도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처럼, 가완디의 책이 제안하는 의료적·철학적 관점은 골다공증이라는 나의 현재 경험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내 몸의 변화를 수용하며, 어떻게 나다운 삶을 지속할 것인지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과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는 문학적 전통과 스타일은 다르지만, 시간과 고독, 가족의 붕괴라는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는 공통점이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신화적 세계와 미국 남부의 현실적 배경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적 토대 위에서 두 작품은 인간 존재의 본질을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한다. 이 글에서는 시간, 가족, 공간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두 작품의 문학적 깊이를 비교하며, 각 작품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백년의 고독』은 시간의 순환성을 통해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신화적 서사로 그려낸다. 마르케스는 마콘도를 중심으로 시간이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마치 강물이 굽이치듯 반복되고 되돌아오는 구조를 채택한다. 첫 번째 아우렐리아노와 마지막 아우렐리아노는 이름뿐만 아니라 성격과 운명에서 놀라운 유사성을 보이며, 이는 시간의 원형적 순환을 드러낸다. 이 시간의 순환은 부엔디아 가문이 고독이라는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암시하며, 과거의 실수가 미래로 반복된다는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소리와 분노』는 시간을 파편화된 방식으로 다룬다. 포크너는 벤지, 퀸틴, 제이슨이라는 세 명의 화자를 통해 각기 다른 주관적 시간을 제시하며, 시간은 개인의 기억과 심리적 경험 속에서 왜곡된다. 벤지의 시점에서 시간은 무의식적으로 뒤섞이며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무너진다. 퀸틴의 시점에서는 시간은 절망과 집착의 대상이 되어, 그의 고통스러운 심리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시간은 이 작품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들의 심리를 해체하고 가족의 붕괴를 가속화하는 역할을 한다.


마르케스는 포크너의 실험적 시간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신화적이고 순환적인 시간 서사를 구축했다. 포크너의 파편화된 시간은 개인적 기억과 내면적 혼란을 드러내는 반면, 마르케스는 시간을 가족과 공동체의 운명과 연결하여 더 광범위한 역사적 서사를 형성했다.


가족의 몰락은 두 작품의 핵심 주제다. 『백년의 고독』에서는 부엔디아 가문이 고독이라는 운명적 굴레에 갇혀 서서히 무너져 간다. 우르술라는 가족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각 구성원은 자신의 고독과 집착 속에서 길을 잃는다. 아우렐리아노의 전쟁과 레메디오스의 초월적 아름다움은 현실과의 단절을 상징하며, 마지막에 태어난 아우렐리아노는 마콘도의 소멸과 함께 가족의 끝을 맞는다. 마르케스는 가족의 붕괴를 통해 인간 존재의 필연적 고립과 운명적 한계를 탐구한다.


반면, 『소리와 분노』에서 컴슨 가문의 몰락은 가족 내부의 불화와 외부적 변화에서 비롯된다. 퀸틴은 가족의 명예를 지키려는 강박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제이슨은 탐욕과 냉소로 가족의 균열을 심화시킨다. 캐디의 추락은 남부 전통 사회의 몰락과 맞물려 가족의 몰락을 가속화한다. 포크너는 가족의 몰락을 통해 남부 사회의 변화와 그로 인한 인간적 고통을 탐구하며, 한 개인의 실패가 가족과 사회 전체의 붕괴를 어떻게 반영하는지를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마르케스는 포크너의 가족 서사에 감탄하며, 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백년의 고독』의 부엔디아 가문은 『소리와 분노』의 컴슨 가문처럼 몰락해가지만, 마르케스는 이를 역사와 신화의 순환 속에 배치해 가족의 몰락을 더욱 운명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그려냈다.


『백년의 고독』의 마콘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이 마을은 부엔디아 가문의 성쇠와 함께 생성되고 소멸하는, 라틴아메리카 문명의 축소판이다. 마콘도의 공간은 기억과 시간의 저장고로, 우르술라가 지은 집은 가족의 운명과 깊이 얽혀 있다. 마르케스는 마콘도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명과 그 문명이 필연적으로 겪는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소리와 분노』의 컴슨 저택은 남부 귀족 가문의 몰락을 상징한다. 황폐해져 가는 저택은 가족 구성원들의 삶과 함께 점점 쇠락하며, 남부 전통 사회가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힘을 잃어가는 과정을 반영한다. 포크너는 공간의 변화를 통해 과거의 영광과 현재의 몰락을 대비하며, 인간의 행동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마르케스는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 카운티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신화적 공간인 마콘도를 창조했다고 한다. 두 공간 모두 단순한 배경을 넘어, 시간과 기억, 운명을 담아내는 상징적 장소로 기능하며, 인간 존재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장으로 활용된다.


이 두 작품은 독자에게 단순한 문학적 즐거움을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잃고 얻는지, 그리고 고독 속에서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다. 그들의 문학적 시선은 우리가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을 풍부하게 만든다. 이러한 비교는 두 작품의 문학적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우리가 인간 존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이 두 작품이 좋았다면, 아래의 책들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추천한다.


『Home』(Toni Morrison)

토니 모리슨은 『Home』에서 고향을 잃은 인물들의 상처와 치유를 탐구한다. 시간과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는 심리적 힘으로 작용한다. 『소리와 분노』처럼 모리슨의 작품도 시간을 개인의 내적 여정을 담아내는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며, 고통 속에서도 생존과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페드로 파라모』(후안 룰포)

룰포는 『페드로 파라모』에서 순환적 시간과 신화적 공간을 통해 인간의 상실과 기억을 그려낸다. 『백년의 고독』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상처와 역사를 품은 상징적 세계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깊은 서사적 무게와 초현실적 분위기로 독자를 매혹한다.











한국 착품으로는 

1970년대 한국 산업화의 어두운 면을 다룬 이 작품은 빈부 격차와 억압 속에서 가족의 몰락을 탐구한다. 『소리와 분노』가 남부 사회의 붕괴를 가족 서사를 통해 드러냈다면, 이 작품은 한국적 맥락에서의 사회적 불평등과 인간의 고통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짧지만 강렬한 서사는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박경리의 이 작품은 한 가족의 비극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한다. 『백년의 고독』과 유사하게, 가족의 몰락을 통해 인간 존재의 고립과 한계를 보여준다. 깊은 통찰력으로 가족 관계와 시대 변화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다.










『채식주의자』 - 한강

한강은 이 작품에서 사회적 억압과 개인의 내적 갈등을 통해 인간 본성과 고독을 탐구한다. 채식주의자가 된 한 여성이 가족과의 갈등 속에서 소외와 정체성을 경험하는 과정을 여러 화자의 시점으로 풀어내며, 『소리와 분노』의 파편화된 서사와 유사한 문학적 실험을 선보인다.









이 책들은 각각 『백년의 고독』과 『소리와 분노』에서 다루어진 시간, 고독, 가족, 그리고 사회적 맥락 속에서의 인간 존재를 다양한 시각에서 탐구하며, 독자들에게 또 다른 문학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만의 책장 -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
데버라 펠더 지음, 박희원 옮김 / 신사책방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자만의 책장』을 펼치면서 처음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왜 우리는 여전히 이런 책이 필요한가?” 데버라 펠더는 여성 문학의 역사를 이야기하며 여성의 삶을 바꾼 50권의 책을 정리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목록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책들이 아직 그 자리에서 인정받지 못했는지를 상기시킨다. 여자만의 책장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물리적인 책장이 아니라,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모아 그 공간을 다시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여자만의 책장』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이었다. 울프가 여성 작가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이야기했다면, 데버라 펠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만의 책장"을 제안한다. 여기서 "책장"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문학적 유산과 목소리를 보존하고, 나아가 이를 공유하고 확장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원제 "A Bookshelf of Our Own"은 "우리만의 책장"을 통해 여성 문학의 연대를 암시하며,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느낌을 준다. 이 책장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적이다. 각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공간이자, 이를 다른 여성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연대의 장소인 것이다.


이러한 제목의 뉘앙스는 한국어 번역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여자만의 책장』이라는 제목은 여성 독자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그것을 보관하며,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초대장처럼 느껴진다. 울프가 제안한 "방"이 창작의 독립성을 의미했다면, 펠더의 "책장"은 목소리의 축적과 공유를 뜻한다.


우리는 왜 여전히 "여자만의"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여성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은 오랫동안 문학사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만의 책장』에 등장하는 수많은 작품들은 당대에 혁명적이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울프는 여성 작가에게 필요한 조건으로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이야기한다. 여성에게는 경제적 안정과 창작의 독립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울프의 이 단순하고도 명확한 요청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실현되지 못한 요구처럼 느껴진다. 여성 작가들은 여전히 공간과 목소리를 얻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여성 작가를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전히 왜 "여자만의 책장"이 필요하며, 여성의 문학적 목소리가 여전히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문학사 속에서 여성 작가들은 종종 익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거나, 남성 필명을 사용해야 했고, 심지어 그들의 목소리가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제인에어』의 샬럿 브론테는 "커러 벨"이라는 가명을 사용해야 했고, 그녀의 자매 에밀리와 앤 역시 필명을 사용했다. 이러한 역사는 문학이라는 공간마저도 여성에게 얼마나 닫혀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은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가? 오늘날 여성 작가들은 여전히 출판계에서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다.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남성 작가들의 작품보다 문학적으로 덜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은 여러 연구를 통해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여성 소설가 아만다 필리파치(Amanda Filipacchi)는 2013년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위키백과가 여성 소설가들을 '미국 여성 소설가'라는 별도의 분류로 나누는 방식을 고발했다. 그녀는 이러한 분류가 여성 작가들을 문학의 중심에서 주변부로 밀어내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고 지적했다. 이는 여성 작가들이 남성 작가들보다 문학적으로 덜 진지하게 평가받는 문화적 태도의 일환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출처: 뉴욕 타임스, 2013)


또한, 페미니스트 문학 비평 연구에 따르면, 여성 작가의 작품은 종종 남성 작가의 작품에 비해 "개인적"이고 "감정적"이라는 편견 속에서 평가 절하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남성 중심적 문학 평가 체계가 여성 작가들의 작품 가치를 축소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출처: Feminist Literary Criticism)


이와 같은 연구들은 여성 작가들이 여전히 문학 평가와 시장에서 구조적 불평등에 직면해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이러한 경향은 주로 미국과 서구권의 문학 시장을 기반으로 한 결과들이라는 점에서, 다른 문화권, 특히 한국 문학계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나타나는지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여자만의 책장』은 단지 과거의 역사를 조명하는 책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열려야 할 문과 공간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내 책장은 어떤가? 『여자만의 책장』을 읽고 나서야 나는 내 책장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 안에는 남성 작가의 이름이 훨씬 많았고,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몇몇 특별한 예외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독서 습관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내가 접할 수 있는 환경 자체가 여성 작가의 작품을 주류로 제시하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결국, 여자만의 책장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는 여성의 목소리가 가득한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여성의 이야기를 기념하는 차원이 아니라, 문학의 균형을 회복하고 목소리의 다양성을 확장하기 위한 작업이다.


『여자만의 책장』은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놓은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책장이 완결된 작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목록에 포함된 많은 작가들이 한국 독자들에게는 낯설다. 이는 한국 문학 시장이 여전히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가 번역되고 출판될 때, 한국 독자들은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자신의 책장을 더욱 풍성하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자만의 책장』이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현대 여성 작가들만을 다룬 후속작이 나온다면, 더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여자만의 책장』은 단순히 과거를 정리한 책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청사진이다. 더 많은 여성 작가들이 그들만의 방과 책장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이 책장을 만들어가야 한다. 책장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목소리를 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 작가의 작품이 포함된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뿐만 아니라,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역시 당대 여성의 억압과 고통을 다룬 작품들로, 여성 문제를 문학적 주제로 삼아 큰 영향을 미친 사례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만의 책장』이라는 제목이 주는 상징성과 메시지를 고려할 때, 모든 책이 여성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면 보다 명확하고 일관된 주제 의식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가끔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며 살아왔는지 깨닫는다. 그것은 단순한 후회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것을 헤아릴 용기를 미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놓친 것들은 정말로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가기 때문에 뒤에 남겨진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는 마치 나를 따라오려 애쓰는 기억들로부터 한 발짝 더 도망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 신입생이던 나는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단 한 번 간 적이 있다. 춤추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위축되었다. 내가 춤을 추면 모두가 웃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구석에 앉아 그들의 에너지 넘치는 움직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가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춤을 놓쳤고, 더구나 함께 어우러질 기회도 놓쳤다. 그리고 그 뒤로 나는 수많은 것을 놓쳐왔다. 도전할 기회, 새로운 시도, 그리고 나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들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늦은 나이에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공부도 하고, 여행도 가고, 골프도 배우며 삶의 다채로운 경험을 쌓는다. 그러나 나는 '놓쳤던 것들'과 '아직도 놓치고 있는 것들'을 떠올리며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글쓰기가 내게 남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글은 내가 놓쳤던 순간들을 다시 찾아가는 길이 되어 준다. 춤추지 못했던 나의 열아홉 살을 글 속에서 춤추게 만들 수 있고, 지금의 나를 스스로 용서하며 새로운 경험으로 이끌 수 있다.


레베카 솔닛 (Rebecca Solnit)은 『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에서 말했다. "길을 잃는 것은 익숙함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나는 익숙한 길 위에 머물며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 시작하지 않은 대화나 떠나지 못했던 여행들. 그때의 나는 길을 잃는 대신 익숙한 자리에서 멈추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야 깨닫는다. 길을 잃는다는 것이 단순히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을. 내가 놓친 순간들은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멀리 나아가도록 만들어준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마리나 반 주일렌 (Marina van Zuylen)은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 - 완벽하지 않아 완전한 삶에 대하여』에서 말했다. "일상의 작은 순간들이 우리의 서사를 형성한다"고. 내가 놓쳤던 많은 것들은 내게서 흘러간 사소한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은 여전히 나의 일부로 남아 있다. 그것들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내가 발견해야 할 가능성의 문이었다. 떠나지 못했던 여행지는 내 안에서 여전히 풍경으로 존재하고, 춤을 추지 않았던 열아홉 살의 나는 내 글 속에서 다시 춤을 춘다.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는 그녀의 일기에서 일상 속 작은 감정들과 순간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일기 속에 놓쳤던 대화와 감정, 그리고 지나가버린 순간들을 기록하며 자신을 새롭게 정의하려 했다. 그녀의 일기 중 한 부분에서, 그녀는 “나는 매일 내 삶의 작은 조각들을 기록한다. 그것들이 나를 잊지 않게 한다”라고 적었다. 나 역시 내가 놓쳤던 것들을 글로 남기며, 그것들이 단순한 후회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들은 나를 이루는 조각들이었고, 나는 그 조각들을 통해 나의 전체를 이해하고자 한다.







앙겔라 메르켈 (Angela Merkel)은 『자유』에서 "자유는 단순히 선택의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책임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내가 놓쳤던 수많은 것들은 단순히 선택되지 않은 가능성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가 책임져야 할 나 자신의 과거다. 메르켈이 말했듯, 자유의 본질은 후회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힘에 있다. 나는 내가 놓친 것들을 회피하거나 잊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그것들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로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고자 한다.







글을 쓰는 것은 잃어버린 순간들을 찾아 나서는 것과 비슷하다. 지나간 시간들의 공백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남겨진 흔적을 발견하려 애쓴다. 떠나지 못했던 길을 상상 속에서 걸어보고, 하지 못했던 말들을 글로 다시 떠올린다. 그래서 글쓰기는 내가 놓쳤던 것들과 조용히 연결되는 과정이다.


어쩌면 놓쳤던 것들은 내 삶의 어딘가에 남아, 내가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글은 내가 잃어버린 것들과 다시 만나는 방식이며, 동시에 새로운 길을 여는 용기다. 나는 글을 쓰며 그 공백을 메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공백에 담긴 이야기를 읽어내려 노력한다. 그러한 노력은 잃어버렸던 시간들을 다시 불러오고, 내가 잊고 있던 흔적들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래서 나는 막연히 계속 읽으면서 쓰기로 했다. 글을 쓰는 동안, 놓쳤던 것들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느끼며 놓친 것들과 다시 연결될 수 있기를 조용히 바라면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12-04 0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12-04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199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년의 고독』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세계에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이지만, 동시에 현대 독자에게는 다소 어렵고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이다. 마르케스는 마콘도라는 허구의 마을을 통해 고향 아라카타카의 기억을 되살리고,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과 시간, 고독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의 문장은 한편의 음악처럼 리드미컬하며,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장르 속에서 현실과 신화를 유기적으로 엮어낸다. 그러나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느꼈던 경탄은 시간이 지나며 복잡한 감정으로 변했다. 『백년의 고독』이 주는 무게감은 감탄과 피로감을 동시에 안겨주기 때문이다.


마르케스는 인터뷰에서 “나는 내 고향의 이야기꾼들로부터 모든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의 할머니가 들려준 기묘하고 신화적인 이야기들은 마콘도의 탄생에 중요한 영감을 주었다. 이 책에서 마콘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고독, 인간의 역사를 상징하는 살아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마르케스가 마콘도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가 오늘날 독자들에게 여전히 강렬하게 다가올까? 『백년의 고독』이 한때 혁명적이고 신선한 문학적 실험으로 평가받았다면, 지금은 고전으로서의 무게에 눌려 "문학사적 의무감"으로 읽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는 끝없는 반복과 순환 속에서 고독의 본질을 탐구한다. 첫 번째 아우렐리아노와 마지막 아우렐리아노의 이야기가 거울처럼 닮아 있는 것처럼, 가족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 순환은 비극적이다. 우르술라는 가족을 하나로 묶으려 노력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고독의 무게에 짓눌려 헛되이 끝난다. 아우렐리아노는 전쟁과 사랑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하며, 레메디오스는 초월적 아름다움 속에서 현실과 단절된다. 이들 각자의 고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가족과 문명이 공유하는 고독이다.


그러나 다시 읽을수록 느끼는 것은 이 책의 과잉된 상징성과 무게감이다. 돼지꼬리를 가진 아이, 끝없이 내리는 비, 초현실적 아름다움을 가진 레메디오스 등 마르케스의 상상력은 때로 독자를 압도하고 이야기의 경이로움을 더하지만, "왜 이렇게까지 많은 걸 담으려 했을까?"라는 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마르케스는 라틴아메리카라는 대륙의 모든 무게를 마콘도와 부엔디아 가문에 담으려 했고, 그 야망은 대단했지만 때로 독자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진 힘은 여전히 강렬하다. 마르케스의 문장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다. 마르케스의 문장은 이야기를 넘어, 독자를 마콘도의 세계로 깊숙이 이끈다. 부엔디아 가문의 이야기는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보편적 운명을 탐구한다. 마콘도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하나의 원처럼 연결되고, 고독은 그 중심에 자리 잡는다. 고독은 우리를 분리시키지만, 동시에 우리를 연결하는 힘이기도 하다.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으로 세계 문학사의 한 장을 썼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 책이 고전으로 남는 이유는 단지 작품의 완성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세계 문학의 중심에 설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케스라는 이름 자체가 만들어낸 상징적 무게 역시 이 책을 고전으로 남게 한다. 그러나 미래의 독자들이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또 다른 질문이다. 언젠가 『백년의 고독』이 현대 독자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고독이라는 주제의 보편성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우리가 고독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년의 고독』은 마콘도라는 세계를 함께 살아가게 하는 경험이다.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를 떠나지만, 그들이 남긴 고독과 시간의 흔적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느낀다. 마콘도는 정말 사라졌을까? 아니면 그것은 우리가 다시 발견하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세계로 남아 있을까? 첫 장에서 예고된 마콘도의 몰락은 마지막 장에서 완성되지만, 그 순간 독자는 책의 첫 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 마르케스는 이 순환 구조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시간과 고독을 새롭게 체험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서가 아니라, 독자 스스로가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과 반복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문학적 장치다. 그렇기 때문에『백년의 고독』은 이렇게 단순히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마콘도의 시간이 원형으로 흐르듯, 이 책은 끝없이 반복적으로 읽히는 순환 속에 존재하니까. 그리하여, 이야기는 닫히지만, 그 고독과 기억은 독자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며 새로운 해석을 기다린다고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