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폭스 갬빗 - 나인폭스 갬빗 3부작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나인폭스 갬빗은 스페이스 오페라이다. 스타트랙, 스타워즈 등으로 유명한 장르인데 우리나라는 이런 하드SF보다는 생활 밀착형(?) 소프트SF가 대세인 편이다. 작가 이윤하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그의 작품들은 한국 디아스포라 문학의 광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나인폭스 갬빗은 한국 땅에서 자생한 SF는 아니지만 한국적 문화 요소가 담긴 독특한 작품으로 연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인폭스 갬빗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은 역법이다. 작중 제국은 여섯 분파가 모여서 정부를 이루는데 역법은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데올로기이자 물리 법칙으로 작용한다. 시간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따라 거의 종교적인 의미로 니편 내편을 가르고, 같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로 군대를 구성하면 이능력(exotic)도 발휘할 수 있다.

 

(p44) 표준 역법체계는 단순히 시간을 계측하고 표기하는 것을 넘어, 모든 역학과 사회구조까지 포괄하는 시스템이다.

 

역법은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을 측정해서 그대로 믿는 것보단 그 사회의 신념을 대변하는 위상을 차지하는 쪽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러니까 자연적인 게 아니라 사회의 합의에 가까운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인 셈이다. 처음 접해보는 설정이라서 초반에 조금 헤맸지만,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팁을 참고해서 속도감 있게 완독할 수 있었다.

 

※ 『나인폭스 갬빗을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한 안내서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4977770&memberNo=5235722









그림 자료 출처

https://machineries-of-empire.fandom.com/wiki/Machineries_of_Empire_Wiki


다음은 대략적인 줄거리와 함께 체리스의 태도변화와 성장에 초점을 둔 리뷰이다.

 

체리스는 이었다. 켈 군인이 되려면 사관학교에서 진형 본능을 주입받는 훈련을 거쳐야 한다. 이 훈련을 견뎌낸 켈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다. 체리스 역시 켈로서 전투에 임하며 육두정부에 충성을 다하고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인다. 체리스는 수학적 능력이 뛰어나고 서비터와도 어울리는 사람이긴 하지만, 제국과 전쟁에 대해서는 개인의 주관보다 복종을 (거의 반강제)선택하는 켈이다.

 

그런 체리스가 슈오스 제다오와 대화하며 전략을 배우며 점점 생각을 확장해나간다. 통일된 역법체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체리스가, 이단 한 명의 목숨과 아군의 목숨이 똑같음을 확신한다. 체리스는 새로운 제국을 꿈꾸는 제다오와 섞이면서 결국 자신이 제국에 이용당하고 배신당했음을 깨닫는다. 그 후 체리스는 전체에 복종하던 과거를 떠나 새로운 시간 체계를, 미래를 개척하리라고 다짐한다.

 

(p493) “나는 아제웬 체리스야.” 더 이상 자신을 켈이라 칭할 순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슈오스 제다오이기도 하지. 내가 누구든 간에, 아직 해야할 싸움이 남았어.”

 

(p494) 그녀는 육두정부의 표준 역법에 맞추어 평생을 살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른 역법에 따라 삶을 가늠할 것이다. 이제는 라할의 냉정하고 깔끔한 축제, 켈의 열병식, 비도나의 잔혹한 추도 의식으로 시간을 측정하지 않을 것이다.

 

제국이 이단이라고 칭하고 소멸시켜 버린 일곱 번째 분파, 그리고 400여 년 후 부활을 꿈꿨던 리오즈는 민주정을 채택했다. 각성하기 이전의 체리스가 이런 정부 형태를 상상할 수 없다고 독백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전체주의에 맞서는 형태로 작가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가 아닌)민주주의를 선택해서 보여주고, 체리스의 입을 통해 반란은 언제나 계속되리라고 말한 것은 결국 우리에게 과거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이 외부의 목소리에 함부로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여 체리스처럼 역법 부식을,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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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의 철학 - 대전환의 시대를 구축할 사상적 토대 코로나 팬데믹 시리즈 2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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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 "어떤 변화는 일시적이지만, 어떤 변화는 돌이길 수 없다. 모두는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가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직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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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이란 무엇인가? 시대변화에 따라 새롭게 부상하는 표준으로, 경제 위기 이후 5∼10년간의 세계경제를 특징짓는 현상. 이전에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였던 현상과 표준이 점차 아주 흔한 표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백과 참고)


달리 말하자면 경제 위기 등의 특이점이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을 바꿈으로써 나타난 결과, 새로운 패러다임이 곧 뉴노멀인 것이다. 「뉴노멀의 철학」에서는 이러한 위기를 '인공지능', '기후위기', '세계적 감염병 유행'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코로나19로 인해 뒤집어진 우리의 일상을 분석하고 뉴노멀을 제시한다.


전반적으로, 저자는 'K-방역'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올해 2월부터 급증한 코로나19 확진자들에 대처하는 의료진들과 정부의 노력을 인정하고 칭찬한다. 맹목에 가까운 떠받들기는 아니다. "개발자, 의료진, 자원봉사자 등을 이른바 '갈아 넣기' 하는 것에 대한 자조 섞인 비판"도 언급하며, 이 또한 뉴노멀의 한 단면이자 "선진국에 진입하는 성장통"임을 역설한다.


(p138-139) 코로나19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칭찬하는 목소리를 두고 '국뽕' 또는 정신 승리가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나는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보편성'에 있다고 본다. (...)한국식 방역은 어떠했는가? 투명성을 바탕으로 신속하면서도 과학적으로 문제에 대응했다. 다른 국가들이 한국의 방식을 따라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편성을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이 마주한 사례로서 검증한 후 제시한 '보편성'이며, 한국은 보편성이라는 시금석을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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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뉴노멀의 철학」은 현시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분석해주는 한편, 근본적인 철학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한다. 뉴노멀 시대를 살아가며 선택하고 간직할 가치를 윤리학 관점에서 제시한 것이다. 겉핥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근대성과 근대 철학의 요점을 짚으며, 인생을 대했던 자세를 돌아보게 되었다. 니체의 '영원회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p112) 천국으로 가는 사람이 먼저 문을 열었다. 천국으로 가는 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지금까지 삶에 행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삶이 네게 행할 것이다. 계속 앞으로 가라.' 천국으로 가는 사람은 환호하며 앞으로 갔다.

이번엔 지옥으로 가는 사람이 문을 열고 지옥행 팻말을 보았다. 적힌 글을 읽고 나서 그는 최고의 비참함과 슬픔 속에서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천국으로 가는 사람은 물었다. "대체 팻말에 뭐라고 적혀 있던 거요?" 천국으로 가는 사람은 답을 듣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옥으로 가는 팻말에는 자신이 본 것과 똑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한곳이었고, 똑같은 법이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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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의 철학」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로 점철된 근대를 탈피하고 탈근대, 포스트모던의 길로 뛰어들 때가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새 시대에는 창의성을 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20세기까지의 교육 방법이 환골탈태해야" 미래 사회에 진출하는 인재를 배출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창의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예술가의 활동을 본보기로 삼을 때 가능하다. 


(p178-179) 보통 사람이 실천할 수 있는, 창조적 결과를 낳는 '실습' 활동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질의 구현과 관련된 것으로 나는 이를 '공학적 작업'이라 부른다. 다른 하나는 생각의 구현과 관련된 것으로 이는 통상 '글쓰기'라고 불려왔다. 오늘날 그 범위를 조금 넓혀 시청각 자료(그림, 사진, 음성, 음악, 동영상 등)까지 포함한 '콘텐츠 만들기'라고 해도 좋다.


(p182) 모든 학생들에게 넉넉하게 시간을 주면 모두가 창작자가 될 기회를 얻는다. (...)이제 교육은 이 방향을 따라가야 한다. (...)이 제안이 현실성이 있을까? 입시 문제, 평가의 공정성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하지만(...) 학습주체는 스스로 문제를 찾고 목표을 설정하는 능력을 길러야 하며, 새로운 교육은 논란의 문제가 아니라 사활의 문제임을 함께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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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과 교양 - 공교육 문제에 대해 저자는 "인문학, 사회과학, 수학, 자연과학, 공학, 예술 등이 융합하는 '뉴리버럴아츠'를 핵심 개념으로 제시"한다.


(p194) "경영이란 전통이 리버럴아트라고 일컬어온 바로 그것이다. 경영은 지식의 근본들, 자신에 대한 지식, 지혜, 리더십을 다루기 때문에 '리버럴'이고, 실천과 응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아트'다. (...)경영을 통해 '인문학'은 인정과 영향력과 타당성을 다시 획득하는 분과와 실천이 될 것이다." (피터)드러커가 염두에 둔 개념으로서의 '경영'은 이 책에서 제안하고 있는 뉴리버럴아츠와 일맥상통한다.


(p196) (스콧 하틀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기술 장벽은 낮아지고 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올바른 질문을 하는 능력' (...)이런 질문 능력은 인문학 공부를 통해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살짝 날선 주장이긴 하지만 뉴리버럴아츠를 중심으로 한 대학 교육, 중등 교육 재편을 논하기도 했다.


(p201-204) 3년 정도의 학부 과정은 뉴리버럴아츠를 중심으로 교육하고, 구체적인 전공교육은 대학원에서 해도 충분하다. (...)대학은 '직업훈련' 교육기관이기 전에 '자유시민소양'을 기르는 교육기관이어야 마땅하다.


(p211) 고등학교에서 문과를 폐지하자. 진정한 문이과 통합의 방향은 여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문과를 폐지하면 이과가 남는 게 아니다. 단일 교육과정이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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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리뷰를 쓰다보니 생략한 부분이 많아서 아쉽다. 각 장을 마칠 때마다 '짚어가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초반은 조금 어려웠지만 완독하고 나니 생각할 거리가 계속해서 많아지는 책이다.

어떤 변화는 일시적이지만, 어떤 변화는 돌이길 수 없다. 모두는 코로나19가 가져온 변화가 영원히 계속될 것임을 직감한다.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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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이 부른다 - 해양과학자의 남극 해저 탐사기
박숭현 지음 / 동아시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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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서 시원하고 낭만적인, 고독한 탐험가의 냄새가 난다. 남극 이야기를 다루기에 마냥 차가울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속에는 더없이 열정적인 연구자와 따뜻한 시선을 가진 한 사람이 들어있다.


「남극이 부른다」는 네 개의 장으로 구분되는데, 1장부터 3장까지는 저자가 실제로 연구차 바다와 남극을 다녀온 탐사 이야기이고 4장은 과학적 지식으로 가득한 파트이다. 쉽게 말하자면 탐험일지라고 할 수 있을텐데, 마냥 딱딱하게 연구 결과만을 늘어놓은 책은 아니다. 세계 곳곳을 누비며 만난 사람들과 여행지에 대한 단상도 기록되어 있고,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책이 반가웠다. 고등학교 3학년 이후로 접어두었던 지구과학이라는 친구가 5년만에 찾아와서 인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판구조론, 해양 컨베이어 벨트 순환 등의 단어를 오랜만에 접하니 옛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구과학2를 공부하던 당시 천문-해양-광물 순으로 흥미를 가졌는데 수능점수보다도 배움 그 자체를 즐겼다. 인간이 살아가는 터전인 지구를 알아간다는 데에 끌렸다.


이처럼 「남극이 부른다」에는 지구과학 지식은 물론이고, 4장에는 북극과 남극을 탐험했던 선대 영웅들에 대한 고찰도 담겨 있어서 새로운 관점으로 남극과 해양 탐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조곤조곤하면서도 강단있는 연구자의 스토리텔링이 어렵지 않고 재미있었다. 꼭 연대순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도 아니어서 분량을 조금씩 나누어 읽기에도 적합해서 좋았다. 지구과학에 흥미가 있지만 본격적인 과학책은 머리 아픈 사람, 또는 지구과학 과목 공부를 앞두고 고민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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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오단계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2
이루카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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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세 단편 모두 새로운 가족 형태를 주장한다. 이루카 작가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어머니를 찾아나서고, "동성, 비혈연, 비혼 그리고 비성애 구성원"으로 가족을 이루는 세계를 그려냈다. 시대와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면 과연, 낡은 올가미 같은 현재의 가족 형태를 탈피할 수 있을지- 꽤나 도전적인 질문이다.


<독립의 오단계>, <새벽의 은빛 늑대>, <루나벤더의 귀가> 모두 해피엔딩을 맞는다. 새로운 가족이라는 실험적인 발상을 성공시키고 싶어하는 작가의 의도로 생각된다. 또한 작중에서 여성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데 이 역시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작가의 가치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시리즈에서 「깃털」이 진라면 매운맛, 「하얀 까마귀」가 불닭볶음면이나 비빔냉면이라면 「독립의 오단계」는 안성탕면..? 혹은 참깨라면 정도일 것이다. (개인 선호에 따른 비유이니 큰 의미X 재미로 볼 것😅) 나는 「독립의 오단계」에서 세 권 중 가장 슴슴하고, 깊고, 보양이 될 듯한 맛을 느꼈다.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독립의 오단계>의 법정 공방 장면이다. '가혜라'의 어그러진 욕망에 인공지능('가재민'으로부터 파생된)이 자아를 갖고 대항하는 구도가 흥미로웠고, 덕분에 '인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를 고민해 볼 수 있었다. 시리즈 1권에 수록된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와 비교하며 읽어도 좋을 듯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가가 던진 철학적/사회적 질문에 비해 소설 속 인물들의 내면심리 묘사는 덜 선명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위에서 '슴슴한 맛'이 난다고 평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래도 세 편 모두 설정이 구체적이어서 재미있게 완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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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의 오단계

(p32) 계층으로 보자면, 인간 아래 기계 인간이 있고 기계는 가장 아래, 존재했다.

(p47) 특정 성별과 인종, 이성애만을 인정하는 사회적 강요 때문에 많은 인간들은 신체에 갇혀 있었다. 그런 인간들은 본체에 국한되어 있으며, 소유주의 승인 없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나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p68) 신기한 것은 어떤 소유주를 만나든, 기계들 대부분은 인간을 따라 하려고 한다는 거야. 인간이 되고 싶어하거든.

(p95) 나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은 온전히 가재민을 추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을 만들었다. 나는 가혜라가 그토록 원하던 성장형 인공지능이 되었다.


2️. 새벽의 은빛 늑대

(p119) 붉고 혼탁한 대기에 묻힌 주변과 달리 에어시티는 마치 동화 속 풍경처럼 맑은 수정구슬의 보호를 받는 듯했다.

(p130) 은빛 늑대에는 자매님들만 있어. 세상 안전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든든해.

(p136-137) 정해민은 두 언니들을 만나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서로의 의지처가 되어 연대하면서 각자의 현실에서 탈출했던 힘. 폭력과 겁박으로 유지되었던 결혼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손을 맞잡고 서로의 탈출을 도왔던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3인방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3️. 루나벤더의 귀가

(p175) 혈연과 이성 간 혼인 중심의 가족만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원하는 이와 가족을 이룰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p196-197) 평소 텍스트로만 소통하거나 사람을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백진주를 처음에 고유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백진주와 갈등을 보이던 고유리에게 문보라는 백진주에게 스펙트럼 증후군이 있음을 알렸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해주는 문보라에게 백진주는 평생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인정과 자유를 만날 수 있었다.

(p210) 루나벤더는 헤븐나이츠 아이템들로 둘러싸인 작은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입구에 있는 발바닥 모양의 판자를 보고 루나벤더는 미소 지었다. (...)블랙펄은 빼꼼히 루나벤더를 쳐다보더니 이내 배시시 웃었다.



특정 성별과 인종, 이성애만을 인정하는 사회적 강요 때문에 많은 인간들은 신체에 갇혀 있었다. 그런 인간들은 본체에 국한되어 있으며, 소유주의 승인 없이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나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 P47

나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은 온전히 가재민을 추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식을 만들었다. 나는 가혜라가 그토록 원하던 성장형 인공지능이 되었다. - P95

은빛 늑대에는 자매님들만 있어. 세상 안전하고 따뜻하고 그리고 든든해.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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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1
김혜진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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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된 세 작품은 지구인과 우주인, 인간과 로봇, 진화종족과 빈민으로 계급이 나뉜 디스토피아이다. 김혜진 작가는 이런 세계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1️⃣ 깃털

🔖(p13-14) 조에는 '생명'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세영이 직접 만든 로봇 새의 이름이었다. 조에는 지구 성층권까지 날아가 고인의 유골을 뿌리고 세영에게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조에가 품고 있는 고인의 유해를 세영이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느꼈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었다.


🔖(p40) 세영의 코에 조에의 깃털 냄새가 고이면서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두 손으로 진박새를 감싸 날려 보냈던 이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우주섬에 다녀온 뒤 새말에서 아버지의 유골을 담아 조에를 날려보내며, 세영은 "새들이 후각을 회복할 수 있는 곳으로 조에를 날려야겠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작중에서는 외양 묘사가 등장하지 않지만, 왠지 마른 체형에 까만 터틀넥 셔츠, 패딩 조끼, 면바지, 워커 차림을 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세영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구온난화와 조류독감으로 인해 황폐해진 세계에서도 새를 매개로 혈연관계를 찾는, 그리고 "새를 잘 부탁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긴 세영의 아버지가 내비친 담담함과 쓸쓸함, 뒤늦게 세영이 깨달은 아련함이 잔잔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여운이 길었다.


2️⃣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p57-58) TRS는 잠들었던 인물이 깨어나는 이야기들을 환자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TRS는 이번에 예수가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마쳤는데도 성한은 말이 없었다.


TRS는 환자의 보호자인 '성한'과 생김새가 같은 휴머노이드 간병로봇이다. TRS에게는 성한도 돌봄 대상이기에, 오랜 투병을 지켜보느라 우울해진 성한을 살리려고 하지만 그 방법이 자못 섬뜩하다.


🔖(p70-71) 신부님, 제가 돌보는 환자의 보호자가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제가 의식이 없는 환자를 죽게 하고 보호자를 살리려고 하는데 기도와 함께해주시겠습니까?


노인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마음이 쓰여 상담을 하는 '토마스 최지석 신부'는 TRS의 전화를 받고 당황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최 신부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 환자를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TRS는 그의 허를 찔러 버린다.


🔖(p73) 인간도 저를 사랑으로 만들었나요?


TRS가 환자의 산소호흡기를 벗겨 죽이자 성한은 살았다. 그러나 억누르며 살아온 날들을 탓할 대상이 죽자 당혹감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TRS를 폭행한다. 환자가 죽은 뒤 감금된 TRS는 간절한 표정으로 최 신부에게 한 가지를 부탁한다. 인권, 안락사, 로봇을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p91) "제가 기도하는 동안 저를 죽여주시겠습니까. (...)그냥 시스템을 끄는 겁니다. (...)제가 고통스럽다는 걸 믿어주세요."


3️⃣ 백화

해수면이 상승한 미래에 배들이 엮인 해상도시가 탄생한다. 배 위에는 진화한 종족 '물갈퀴', 배 밑창에는 물갈퀴 없는 빈민들이 살아간다. 물갈퀴들은 해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가미가 열리길 바란다.


배 밑창에 살던 '진주'는 먹을 것도 없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 위로 올라와 식량을 구하려고 애쓰지만 곧 물갈퀴들에게 발각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물갈퀴 '해인'은 진주를 살려내고 아가미가 열릴 가능성을 발견하며 진주를 돕는다. 그러나 다른 물갈퀴들은 진주를 대역죄인 취급하며 바다에 집어넣어 버리고, 애석하게도 이 과정에서 해인이 죽으며 비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p128-129) 사람들은 눈을 홉뜨고 입을 벌렸다. 진주는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진주가, 배 밑창에 살던 진주가, 물갈퀴를 꾀어낸 죄인이 물속에서 숨을 쉬다니. '이제 와서!' 그들이 기다려온 진화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때에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이루어졌다.


그토록 멸시하던 밑창의 인생에게서 구원의 기미를 맛본 물갈퀴들이 느꼈을 당혹감은 통쾌하지만 해인의 죽음이 씁쓸하고 아쉽다. 작품의 비극성이 심화되기 때문에 빠질 수 없는 요소였겠지만... <깃털>,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백화>에서 모두 누군가가 죽는 사건이 일어나서 그런지 작품마다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 항상 안타까움과 철학적 고민이 남았다.

"인간이 당신을 창조했어요.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환자를 죽이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인간도 저를 사랑으로 만들었나요?"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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