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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ㅣ SF가 우릴 지켜줄 거야 1
김혜진 지음 / 허블 / 2020년 7월
평점 :

수록된 세 작품은 지구인과 우주인, 인간과 로봇, 진화종족과 빈민으로 계급이 나뉜 디스토피아이다. 김혜진 작가는 이런 세계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1️⃣ 깃털
🔖(p13-14) 조에는 '생명'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로 세영이 직접 만든 로봇 새의 이름이었다. 조에는 지구 성층권까지 날아가 고인의 유골을 뿌리고 세영에게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조에가 품고 있는 고인의 유해를 세영이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본다고 느꼈고 거기에서 위안을 얻었다.
🔖(p40) 세영의 코에 조에의 깃털 냄새가 고이면서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두 손으로 진박새를 감싸 날려 보냈던 이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우주섬에 다녀온 뒤 새말에서 아버지의 유골을 담아 조에를 날려보내며, 세영은 "새들이 후각을 회복할 수 있는 곳으로 조에를 날려야겠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작중에서는 외양 묘사가 등장하지 않지만, 왠지 마른 체형에 까만 터틀넥 셔츠, 패딩 조끼, 면바지, 워커 차림을 하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세영의 모습이 그려졌다.
지구온난화와 조류독감으로 인해 황폐해진 세계에서도 새를 매개로 혈연관계를 찾는, 그리고 "새를 잘 부탁합니다"라는 유언을 남긴 세영의 아버지가 내비친 담담함과 쓸쓸함, 뒤늦게 세영이 깨달은 아련함이 잔잔한 분위기를 자아내서 여운이 길었다.
2️⃣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p57-58) TRS는 잠들었던 인물이 깨어나는 이야기들을 환자에게 들려줄 수 있었다. (...)TRS는 이번에 예수가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마쳤는데도 성한은 말이 없었다.
TRS는 환자의 보호자인 '성한'과 생김새가 같은 휴머노이드 간병로봇이다. TRS에게는 성한도 돌봄 대상이기에, 오랜 투병을 지켜보느라 우울해진 성한을 살리려고 하지만 그 방법이 자못 섬뜩하다.
🔖(p70-71) 신부님, 제가 돌보는 환자의 보호자가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제가 의식이 없는 환자를 죽게 하고 보호자를 살리려고 하는데 기도와 함께해주시겠습니까?
노인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마음이 쓰여 상담을 하는 '토마스 최지석 신부'는 TRS의 전화를 받고 당황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최 신부는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 환자를 죽이지 말라고 하지만 TRS는 그의 허를 찔러 버린다.
🔖(p73) 인간도 저를 사랑으로 만들었나요?
TRS가 환자의 산소호흡기를 벗겨 죽이자 성한은 살았다. 그러나 억누르며 살아온 날들을 탓할 대상이 죽자 당혹감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TRS를 폭행한다. 환자가 죽은 뒤 감금된 TRS는 간절한 표정으로 최 신부에게 한 가지를 부탁한다. 인권, 안락사, 로봇을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p91) "제가 기도하는 동안 저를 죽여주시겠습니까. (...)그냥 시스템을 끄는 겁니다. (...)제가 고통스럽다는 걸 믿어주세요."
3️⃣ 백화
해수면이 상승한 미래에 배들이 엮인 해상도시가 탄생한다. 배 위에는 진화한 종족 '물갈퀴', 배 밑창에는 물갈퀴 없는 빈민들이 살아간다. 물갈퀴들은 해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아가미가 열리길 바란다.
배 밑창에 살던 '진주'는 먹을 것도 없고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 위로 올라와 식량을 구하려고 애쓰지만 곧 물갈퀴들에게 발각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물갈퀴 '해인'은 진주를 살려내고 아가미가 열릴 가능성을 발견하며 진주를 돕는다. 그러나 다른 물갈퀴들은 진주를 대역죄인 취급하며 바다에 집어넣어 버리고, 애석하게도 이 과정에서 해인이 죽으며 비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p128-129) 사람들은 눈을 홉뜨고 입을 벌렸다. 진주는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진주가, 배 밑창에 살던 진주가, 물갈퀴를 꾀어낸 죄인이 물속에서 숨을 쉬다니. '이제 와서!' 그들이 기다려온 진화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때에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서 이루어졌다.
그토록 멸시하던 밑창의 인생에게서 구원의 기미를 맛본 물갈퀴들이 느꼈을 당혹감은 통쾌하지만 해인의 죽음이 씁쓸하고 아쉽다. 작품의 비극성이 심화되기 때문에 빠질 수 없는 요소였겠지만... <깃털>,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백화>에서 모두 누군가가 죽는 사건이 일어나서 그런지 작품마다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 항상 안타까움과 철학적 고민이 남았다.
"인간이 당신을 창조했어요. 그래요, 그러니까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환자를 죽이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인간도 저를 사랑으로 만들었나요?"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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