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 영화 <오디세이> 원작, 호메로스 전문가의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호메로스 지음, 이준석 옮김 / 아카넷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서양 문학이 축적해 온 모든 서사의 원류이다. 신들의 압도적인 변덕 아래 던져진 한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지켜내는 숭고한 실존적 연대기. 10년의 트로이 전쟁 이후 또다시 10년에 걸친 방랑의 길을 걷는 오디세우스의 여정. 모험담의 외피를 찢고 '인간의 존재'를 묻는 치열한 철학적 궤적까지 갖췄다.


작품의 중심에 선 오디세우스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영웅이다. 교활하고 오만하다. 때로는 자신의 지혜를 과신하다가 폴리페모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신들의 저주를 자초하는 결함투성이의 인물이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포착한 이 결함이야말로 그를 박제된 신화 속 영웅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만든다. 칼립소와 키르케가 제시하는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멸의 영생'을 단호히 거절하고, 주름지고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필멸의 아내 페넬로페와 척박한 고향 이타카를 택하는 그의 결단은 숭고하다. 신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기억을 긍정하는 자기 선언같다.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규범은 제우스가 수호하는 율법인 '크세니아'다. 낯선 나그네를 환대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이 고대의 약속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절대적인 척도다. 폴리페모스와 라이스트뤼고네스족 같은 괴물들이 방문자를 잡아먹으며 크세니아를 유린했다면, 오디세우스의 궁전을 점령한 구혼자들 역시 주인의 부재를 틈타 그의 가산을 탕진하며 크세니아를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악용한다.


따라서 오디세우스의 복수극은 단순한 사적 응징을 넘어선다. 그것은 혼란으로 물든 자신의 집과 세계관에 신들의 질서와 인간의 존엄을 다시 세우는 거룩한 정화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페넬로페와 나누는 재회는 20년의 세월 동안 흩어졌던 자아가 마침내 자기 자신이라는 온전한 항구로 닻을 내리는 순간이다.


2,800년의 시간을 건너온 이 오래된 서사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거친 파도와 망각의 유혹 속에서 매일같이 휘청인다. 저마다의 이타카를 향해 노를 젓는 또 다른 오디세우스들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유혹과 상실의 풍랑 속에서, 당신은 끝내 지켜내야 할 자신만의 고향을 잃지 않고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험한 숫자들 - 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왜곡하는가
사너 블라우 지음, 노태복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모든 실존과 가치가 수치로 환원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시험 점수와 신용 등급, 미디어가 쏟아내는 수많은 도표와 그래프는 일상을 지배하는 절대적 척도로 군림한다.


사너 블라우는 <위험한 숫자들>을 통해 "추상적 개념이라도 일단 측정하고 나면 훨씬 더 객관적으로 느껴지는 효과가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숫자가 주는 정밀함이라는 착시에 중독되어 있으며, 이 책은 그 맹목적인 신앙의 균열을 응시하도록 이끄는 해독제다.


숫자의 가장 위험한 점은 거짓말을 한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숫자는 너무나 그럴듯하게 진실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대중은 통계를 중립적인 과학의 결과물로 쉽게 받아들인다. 실상 모든 데이터는 연구자의 주관적 의도와 설계된 프레임의 산물이다. 절대적인 진리로서의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숫자는 절대 현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언론과 정치권력, 거대 기업들은 대중의 이러한 맹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작가의 지적처럼 세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언어는 영어가 아닌 '숫자'이며, 그 언어를 조작하고 통계를 재구성하는 행위야말로 대중을 통제하고 여론을 장악하는 기술인 것이다.


결국 숫자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실을 가리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단순히 통계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숫자가 어떻게 권력의 언어가 되는가를 보여준다. 정치인은 자신에게 유리한 수치를 내세우고, 언론은 복잡한 현실을 하나의 숫자로 압축하며, 기업은 소비자의 행동을 수치화해 예측하고 통제한다. 숫자는 감정이 없고 객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강력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우리 역시 이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점수를 확인하고, 순위를 비교하고, 조회수를 세고, 팔로워 숫자를 바라본다. 숫자로 자신과 타인을 끊임없이 평가한다. 숫자가 우리를 통제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숫자에 의해 평가받기를 원하기도 한다.


<위험한 숫자들>은 숫자를 믿지 말라고 말하는 책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숫자를 무조건 의심하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숫자를 믿기 전에 그 수가 만들어진 과정을 한 번 더 바라보라고 요구하는 책에 가깝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통계와 수치에 관한 이야기를 폭넓게 다루는 만큼 개별 사례의 깊이가 다소 얕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이미 통계학이나 데이터 해석에 익숙한 독자라면 새롭게 느낄 내용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이 전문적인 통계학을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접근성은 오히려 장점에 가깝다.


사너 블라우는 숫자의 이면을 파헤치면서도 복잡한 수학적 난관에 독자를 빠뜨리지 않는다. 일상을 지배하던 익숙한 척도를 전복시키는 시각의 전환만큼은 확고한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뉴스에서 그래프 하나를 보더라도 이전처럼 지나치지 않게 됐다. 이 숫자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무엇을 측정한 것인지, 측정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누가 이 숫자를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를 한 번쯤 생각하게 된다.


화려한 그래프 뒤에 숨은 의도를 의심하고 숫자의 외피를 걷어내는 태도. 그것은 타인의 셈법에 휘둘리지 않고 자립적인 판단으로 나아가기 위한 실존적 방패가 될 것이다. 무비판적 수용의 안락함에서 벗어나자. 비판적 독해의 긴장감을 일깨우자. 이 책은 데이터 과잉의 시대를 통과하는 독자에게 유효한 이정표로 남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책 유일의 퓰리처상 수상작.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기에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일까. 궁금증을 품고 펼친 <쥐>는 예상보다 훨씬 복잡하고 집요한 작품이었다. 아트 슈피겔만은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의 가장 참혹한 사건을 만화라는 형식 안으로 끌어들인다. 나치를 고양이로, 유대인을 쥐로, 폴란드인을 돼지로 그려낸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화처럼 보였다. 그러나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동물들의 얼굴 뒤에 실제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점점 선명해진다.


작품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인간을 동물로 그려놓고 오히려 인간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쥐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배신하고,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다. 그들은 그저 살아남아야 했던 인간이다.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한 역사적 비극이 추상적인 숫자와 기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비겁함을 가진 수많은 개인의 삶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슈피겔만은 아버지 블라덱의 회고를 바탕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기록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아버지와 현재의 아버지를 한 화면에 겹쳐놓는다. 젊은 시절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블라덱은 영리하고 끈질긴 생존자였지만, 현재의 그는 인색하고 고집스럽고 까다로운 노인이다.


슈피겔만은 아버지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것이 <쥐>가 가진 중요한 정직함 중 하나다.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숨기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과 짜증까지 그대로 그려낸다. 과거의 비극을 아름답게 포장하기보다 그 비극이 한 인간에게 남긴 흔적을 끝까지 바라본다. 그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이 기록을 믿게 된다.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조차 미화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최대한 솔직하게 기록하려 했다는 믿음이 생긴다.


슈피겔만은 자신의 이야기도 숨기지 않는다. 아버지의 회고록만 있었다면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에 관한 증언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증언을 듣는 자기 모습까지 작품 안에 집어넣는다. 아버지의 기억을 기록하는 일이 결국 자신의 가족사를 마주하는 일이 되었다. <쥐>는 그렇게 역사와 기억 사이에 서 있는 아들의 초상이 된다.


만화적 형식 역시 놀랍다. 슈피겔만은 만화가 가진 칸과 칸 사이의 공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현실의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제한된 선과 흑백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오히려 그 절제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를 다루면서도 독자에게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울라고 말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증오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거대한 비극을 앞세워 자신의 도덕적 메시지를 주입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한 아버지가 살아남았고, 한 아들이 그 이야기를 들었으며, 그 기억을 다시 만화로 옮겼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그 담담함 때문에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쥐>가 위대한 이유는 홀로코스트를 만화로 그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만화라는 형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 자체를 확장했기 때문이다. 역사와 허구, 기억과 기록,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하나의 작품 안에서 겹쳐놓으며 만화가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문학적 형식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아트 슈피겔만은 이 작품을 완성하는 데 14년을 보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그린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과거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기록이었고, 이미 지나가 버린 세대와 뒤늦게 대화를 시도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기억을 끝까지 들어주는 일.

그리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일.


<쥐>는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방법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기억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슈피겔만은 아버지의 기억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기억을 자신의 삶과 충돌시키며 다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14년에 걸쳐 완성된 이 만화가 끝내 보여주는 것은 비극 속에서 살아남은 한 인간이 평생 짊어져야 했던 생존의 흔적이다. 고양이가 사라진 뒤에도 쥐의 삶은 끝나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낙원 동서문화사 세계문학전집 51
존 밀턴 지음, 이창배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펼치자마자 쏟아지는 방대한 각주의 폭탄을 지나 마주한 1, 2편의 지옥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처참하게 추락한 유황 바다 한가운데서 타락천사 군대를 일으켜 세우는 사탄의 영웅상과 그의 불꽃 같은 연설을 읽으며, 무신론자인 나조차도 감탄을 넘어 가슴속으로 사탄에게 '아멘'을 외치고 싶어지는 묘한 모순을 경험했다.


"천국의 노예가 되느니 지옥의 지배자가 되겠다!"


굴복하지 않는 의지와 장엄한 카리스마를 지닌 <실낙원>의 사탄은 단지 '절대 악'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고귀하고 치명적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밀턴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편에 서서 글을 썼다"라고 말했던 이유를 온몸으로 체감했다. 실제로 밀턴은 자기 자신을 사탄에 대입해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다 모든 것을 잃은 그의 비극적인 말년이 사탄이라는 인물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천국에서 가장 빛나던 대천사 '루시퍼'가 빛을 잃고 지옥의 '사탄'이자 바알세붑을 비롯한 타락천사 군대의 수장이 되는 이 오프닝은, 인류 문학사가 만들어낸 가장 입체적이고 위대한 다크 히어로의 탄생기였다.


악역에게 입체성을 부여하고 치명적인 매력을 구현한 작품은 <실낙원>이 최초라고 한다. 이 작품 이후로 우리는 매력적인 악당들이 즐비한 세상에 살게 되었다. 악에게 서사와 매력을 부여하는 다크 히어로, 그 거대한 빌런의 계보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성경의 뼈대 위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들을 작가의 방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타락천사'라는 하나의 족보로 묶어버린 밀턴의 발상은 현대 장르 문학이 자랑하는 멀티버스 세계관 통합의 교과서가 되었다.


밀턴은 신의 섭리가 정당함을 입증하겠다며 '자유의지'라는 방패를 들어 신을 변호하려 했지만, 이성적인 독자의 눈에 신은 여전히 정교한 개미지옥을 만들어둔 창조주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작가의 종교적 의도가 무색해질 만큼, 그가 휘두른 천재적인 필력은 종교적 시스템이 가진 부조리를 날것 그대로 폭로하고 반역자 사탄과 아담, 그리고 하와에게 가장 인간적이고 영웅적인 생명력을 부여했다.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실낙원>을 읽으며 역설적이게도 더 선명한 무신론에 가까워지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종교를 떠나, 이 책은 내 인생 최고의 책 중 하나로 각인되었다.


<실낙원>을 읽으며 성경 원문을 직접 확인해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창세기 속 천지창조의 과정,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낙원 추락의 이야기들은 불과 A4 용지 몇 장이었다. 족보와 결과만 툭툭 던지는 압축된 텍스트에 불과했다. 밀턴은 이렇게 적은 정보를 가지고 600페이지에 달하는 웅장한 우주적 대서사시를 창조한 것이다. 그의 성경에 대한 지식이나 문학에 대한 지식들이 디테일을 더하면서 설득력이 생긴다. 이건 단순한 작가의 영역을 넘어선, 광기에 가까운 천재성이다.


더 소름 돋는 것은 이 작품이 쓰인 배경이다. 밀턴은 청교도 혁명 실패 후 정치적 수배자로 몰려 모든 것을 잃었고, 두 눈이 완전히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의 폐허 속에서 딸들에게 원어 성경을 읽게 하며 구술로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한다. 성경 원어(히브리어, 그리스어)와 고대 신화, 지리학을 완벽하게 암기해 머릿속 데이터베이스에서 실시간으로 읊어낸 그의 지성, 그리고 시력을 잃고 권력이 사라진 암흑 속 삶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그의 집념은 그 자체로 지옥 유황 바다에서 불꽃을 태우던 사탄의 카리스마와 완벽하게 겹쳐진다.


37일간의 길고 장엄했던 독서. 1시간에 20페이지를 채 나가기 힘들 만큼 밀도가 높았던 독서 경험은 12장의 마지막 문장에서 완벽한 피날레를 맞이했다.


에덴동산의 닫힌 문 뒤로 불칼이 번뜩이고, 자신들의 낙원을 뒤로한 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아득하고 막막한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아담과 하와의 마지막 모습.


낙원을 잃어버린 그들의 앞날에는 가시덤불과 피땀 흘리는 노동, 그리고 죽음이라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신의 절대적인 통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인간의 첫걸음은 종교를 떠나 아련하면서도 숭고했다. <실낙원>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가 인간의 조상이라면, 나는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그만큼 존엄하고 아름다운 인간상으로 그려졌다.


J.R.R. 톨킨이 <실마릴리온>으로 거대한 신화를 창조하고, 프랭크 허버트가 <듄>으로 우주적 서사를 썼다 한들, 그 어떤 현대의 거장도 존 밀턴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들은 모두 밀턴이 최초로 개척해 놓은 거대한 지반 위에 집을 지은 후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기반으로 이러한 서사시를 쓸 수 있는 대시인의 자격은 쉽게 주어지지 않기에.


내가 읽은 것은 단순한 옛날 종교 소설 한 권이 아니었다. 무신론자의 냉정한 눈으로 봐도, 후대 인류의 모든 상상력과 서사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높고 거대한 뿌리 그 자체였다.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신을 더 믿지 않게 되었지만, 인간의 지성과 언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극치를 목격했다.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존 밀턴의 <실낙원>이 그 중 하나였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과 활자가 파멸되는 무덤 속에서 피어난 숭고하고, 지적인 예찬 같다. 35년 동안 폐지 압축공으로 일하며 세계의 위대한 사상들을 육체로 체화시킨 한 지식인의 초상을 그린다. 소설이 지닌 본질은 단순히 시대적 억압에 대한 고발이나 비극적인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거친 지하실 바닥에서 피어나는 철학의 향기다. 파괴되는 책 꾸러미 틈새로 스며드는 실존적 고독의 질감이 일품이다.


작품을 지배하는 공기는 끝없이 고독하다. 고독의 심연은 역설적으로 활자가 주는 황홀경으로 가득 차 있다. 한탸는 책과의 철학을 위해 고의로 자신을 고독 속에 가둔다. 압축기 속에서 괴테와 실러, 니체와 공자의 문장들이 쥐어짜지고 뭉개지는 잔혹한 순간들조차, 한탸에게는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공감각적 축제와 같다. 잉크 냄새와 눅눅한 종이 더미는 그의 폐부에서 신성한 향유로 변모한다. 파쇄되는 책 한 권 한 권은 우주의 비밀을 속삭이는 계시가 된다.


예수, 쇼펜하우어가 등장하는 한탸의 밀실 같은 내면에서 거대한 사유의 울림으로 치환되는 이 정신적 도취는, 세상 그 어떤 거부보다 풍요로운 지적 성채를 구축한다. 작가는 피비린내 나는 압축기의 소음과 책더미 위로 번지는 지저분한 파리 떼, 쥐들의 전쟁터 같은 가혹한 현실을 과장 없이 받아 적는다. 이토록 비루한 노동의 현장과 숭고한 정신의 도취를 이중성 없이 유려한 문장으로 묶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소설이 지닌 미학적 성취다.


한탸의 삶은 현실에서 흔히 보이는 알코올 중독자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맥주 거품 속에 환영을 띄워 보내는 그의 찌질하고 나약한 일상은, 근대적 효율성과 거대한 톱니바퀴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 앞에서 처절하게 균열을 일으킨다. 거대한 사회주의적 집단 노동과 거대 압축기라는 대량 생산의 시스템 앞에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예술품으로 정성스레 대하며 자신만의 고결함을 유지하려 했던 한탸의 아날로그적 노동은 순식간에 낙후된 폐기물로 전락한다. 흐라발은 이 종말의 서사를 섣불리 감상적으로 슬퍼하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그저 타인이라는 지옥 속에서 끝내 자신의 신념을 유폐한 채 살아가는 인간의 나약함과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가는 지식인의 몰락을 차갑고 투명한 산문으로 관조할 뿐이다.


지식의 구조를 탐측하고 효율성을 숭배하는 이 차가운 세계를 향해 던지는 예리하고 서늘한 비수. 활자의 숲과 영원히 하나가 되기를 갈구하는 숭고한 찬가다. 그의 정신 분열적인 행동들에는 지식을 향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존엄과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독자는 한탸의 현실 속 고독을 뼈아프게 목도하는 동시에, 종이와 보후밀 흐라발의 문장이 지닌 중력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게 된다. 짧지만 강하게 불타오르는 작품을 만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