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이스 캐롤 오츠의 <좀비>는 얇지만 불쾌하게 오래 남는다. 읽는 동안의 긴장 때문이 아니다. 책을 덮은 뒤에도 그 서늘한 잔상이 뇌리에서 휘발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잔혹해서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비명이 거세된 채 너무나 건조해서 소름 끼친다.


<좀비>는 한 연쇄살인범의 1인칭 기록 형식을 취한다. 주인공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그에게는 지적 과시도, 악마적인 카리스마도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타인을 ‘완전히 소유하고 싶다'라는 지독하고도 공허한 열망이다. 그는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의지가 박탈된 존재인 '좀비'를 원한다.


오츠는 인간의 근저에 있는 비루한 욕망을 극한으로 증폭시킨다. 여기서 공포는 선명한 선혈이 아니라, 일그러진 사고의 구조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타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지 못하는 정신, 관계를 상호성이 아닌 일방적 소유로 이해하는 태도. 그리하여 <좀비>는 연쇄살인 기록이면서도, 동시에 뒤틀린 ‘사랑’에 관한 기괴한 보고서처럼 읽힌다.


문득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겹쳐 보인다는 점은 흥미롭다. 두 작품 모두 살인자의 1인칭 독백이라는 형식을 빌려 독자를 범인의 내면에 강제로 유폐시킨다. 감정을 배제한 건조한 문장, 그리고 신뢰할 수 없는 화자라는 장치를 통해 독자의 인식을 교란하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이 작품엔 구원의 가능성도, 서사적 미화의 여지도 없다. 소설은 철저히 불편하고 서늘하며, 끝까지 인간을 변명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의 뇌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오츠는 그들의 사유 체계를 첨예하게 분해한다.


<좀비>가 이토록 인상적인 이유는 명확하다. 이 소설은 범죄를 구구절절 설명하려 하거나 이해시키려 들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괴물은 선천적인 도태의 결과인가, 아니면 우리가 외면해 온 욕망의 그림자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주 순양함 무적호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타니스와프 렘, 그가 이 소설을 어떻게 썼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1964년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외계 행성과 과학 기술에 대한 묘사는 섬뜩할 정도로 정교하다. 인류가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레기스 3 행성의 황량한 풍경과 거대 기계들의 질감을 이토록 시각적으로 구현해 낸 것을 보면, 그는 분명 그 행성에 직접 가본 것이 틀림없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SF라는 장르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서늘하고도 지적인 정점에 서 있는 작품이며, 그의 경이로운 상상력은 시대를 앞선 예지력에 가깝다.


이러한 정교함의 근저에는 렘의 압도적인 지성이 자리 잡고 있다. IQ 180으로 알려진 그의 천재성은 작품 속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외계 행성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현상을 두고 생물학자, 물리학자 등 각계 지성인들이 펼치는 논리적 가설과 치열한 논쟁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문학적 체험이 된다. 복잡한 과학적 설정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율해 낸다. 그의 뇌가 그려낸 지적 설계도 앞에서는 그저 깊은 존경심을 보낼 수밖에 없다.


렘은 이 소설을 통해 SF의 익숙한 문법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미지의 존재를 인간의 논리로 해석하려는 시도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 ‘인류 중심적 허상’인지를 서늘하게 증명해 낸다. 인류는 거대한 우주 앞에서 한 톨의 모래보다 작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미지의 존재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은 독보적이다. 지능이 결여된 대상에게 ‘복수심’을 품고 사투를 벌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해, 지능이 없는 존재가 어떻게 지능을 가진 인간을 무력화시키고 인식론적 붕괴로 몰아넣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흡사 자연재해에 대항해 복수를 꿈꾸는 무력한 몸짓과도 같다.


무적호 대원들이 겪는 좌절은 물리적 패배보다 근원적인 고립감에 기인한다. 미지의 존재는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반응’하거나 ‘배제’할 뿐이다. 소통의 의지조차 거세된 그 압도적인 타자성 앞에서 인류의 모든 과학과 언어는 무력한 소음으로 전락한다. 우주가 인간을 위해 설계된 무대가 아니라는 진실은 렘의 문장을 타고 독자의 내면을 파고든다.


이 차가운 하드 SF 걸작을 통해, 우리는 우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거대한 거울을 들고 우리 자신의 반영을 찾고 있을 뿐이라는 고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렘의 천재성이 빚어낸 독보적인 역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교양’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책을 만났다.


<행복의 기원>은 행복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처방전을 건네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가 신성시해온 행복이라는 성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 안을 생물학적으로 부검해낸다. 행복이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찰나의 휘발성 사건에 불과하다는 고백. 다정한 위로보다 서늘한 해부에 가깝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행복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포문을 연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숭고한 존재가 아니라, 오직 생존과 번식이라는 준엄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라는 전제. 이 관점에서 우리가 느끼는 희열과 성취감은 고차원적인 가치가 아니라, 다음 생존 단계로 우리를 밀어 넣기 위한 뇌의 ‘보상 체계’로 전락한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추동하기 위한 교묘하고도 강력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개는 다분히 냉정하고 건조하다. 저자는 헛된 희망을 고양하는 대신 기대의 거품을 걷어낸다. 행복은 지속될 수 없는 상태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느끼도록 설계 되었다는 설명. 긍정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선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철저한 냉정함이 나에겐 단단한 위안의 지지대가 됐다.


저자는 평생 행복을 연구했지만 본인이 더 행복해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 솔직함이 이 책의 미덕이다. 과장도 없고, 감정의 미화도 없다. 대신 구조를 보여준다. 우리가 왜 끊임없이 비교하고, 왜 만족하지 못하고, 왜 목표를 달성한 뒤에도 금세 공허해지는지를 설명한다. 알고 나면 불행에 대해 너그럽게 변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한다. 정점에 오른 순간에도 공허를 느낀다. 만족을 모른 채 다음을 갈구하는 것은 나의 의지박약이나 성격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효율적인 ‘생존의 기능’이다. 불행은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다. 더 나은 조건을 탐색하게 만드는 정교한 신호탄인 셈이다. 자신의 유전자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구조적 필연성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감정적 파동 앞에서 비로소 너그러워진다. 감정의 부침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설계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행복의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불행의 이유도 이해하게 된다. 불행은 오류가 아니라 기능이다. 더 나은 조건을 탐색하게 만드는 신호. 그렇게 생각하면, 감정의 파동은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일부가 된다. 이 책을 읽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감각은 생긴다. 일종의 내면의 완충재를 얻은 기분이다.


<행복의 기원>은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식의 근거 없는 낙관을 단호하게 경계한다. 문장은 직선적이며,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이성적이다. 그러나 어려운 개념의 늪에 빠지지 않는 저자 특유의 재치와 데이터에 기반한 명징한 서술은, 진화심리학의 진입장벽을 낮춘다. 이미 관련 분야를 접한 독자에게는 익숙한 틀일 수 있으나, ‘행복’이라는 추상적 단어를 ‘과학’으로 다시 정의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보다 명쾌한 입문서는 드물 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을 이미 접해본 독자라면 다소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내용은 비교적 기본적인 틀 안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그만큼 입문서로는 적절하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과장 없이, 과학의 언어로 다시 정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으로 보인다.


행복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방이 아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정교한 태엽 장치다. 이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곧바로 더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전보다 덜 흔들리게 된다. 내면의 완충재를 얻은 듯한 이 평온한 감각.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화의 진실을 마주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이 책이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물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진주 문예 세계문학선 134
존 스타인벡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스타인벡을 이 작품으로 입문한 나는 결국 그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쉬운 단어들과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로 빚어낸 그의 세상은, 키노가 바닷속에서 거대한 진주를 발견했듯 내게도 하나의 거대한 발견이나 다름없었다. 그 발견의 기록을 여기 남긴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인간은 매번 다른 욕망을 투사한다. 스타인벡의 <진주>는 고요한 수면 아래 매복해 있던 인간의 욕망을 길어 올려, 그것이 어떻게 한 존재의 세계를 끝내 파쇄하는지 응시하는 잔혹한 우화다.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인간은 매번 다른 욕망을 투사한다. 이 짧은 텍스트가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성을 획득하는 지점은, 거대한 진주가 가져온 것이 '부'가 아니라 '부의 가능성'이 파생시킨 악의 연쇄 작용임을 집요하게 증명 해내기 때문이다.


주인공 키노는 처음부터 탐욕의 노예가 아니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바다의 호의를 구하던 소박한 가장이자, 대지의 질서에 순응하던 자였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응축해 놓은 듯한 진주를 손에 쥐는 순간, 그의 귓가엔 '가족의 노래' 대신 '진주의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진주는 단순한 보석이 아니다. 그것은 교육, 존엄, 신분 상승이라는, 가난한 자에게는 평생 허락되지 않았던 '미래'라는 이름의 약속이었다.


비극은 그 약속이 키노만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시작된다. 스타인벡은 노골적인 악마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공동체 전체를 서서히 뒤틀리게 만드는 구조적 탐욕을 조명한다. 축복을 계산으로 바꾸는 이웃들, 값을 담합하는 상인들, 위선적인 의사까지. 진주의 광휘는 역설적으로 인간 내면의 가장 깊은 심연을 비추는 조명이 되어, 평온하던 마을을 욕망의 전장으로 변모시킨다.


이 작품이 지독하게 서늘한 이유는 키노의 파멸이 내부와 외부의 협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주를 지키려는 집착은 점차 가족을 지키려는 사랑과 분리되지 않은 채 뒤엉키고, 선의로 시작된 욕망은 어느새 폭력의 얼굴을 한다. 스타인벡은 담담한 필치로 독자에게 묻는다. 가난한 자가 품은 희망은 왜 필연적으로 오만이 되어야 하며, 왜 공동체는 타인의 광휘를 끄기 위해서만 결집하는가.


결국 <진주>는 자본주의적 위계가 설계한 거대한 함정에 관한 기록이다. 가난은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견고한 구조의 결과물이다. 그 구조 속에서 소외된 자가 '꿈'을 꾸는 행위는 이미 파멸을 전제한 도박이다. 키노의 비극은 한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가난한 이에게 허락된 희망의 한계를 시험하는 사회적 폭력에 가깝다.


문체는 간결하되 상징은 신화적이다. 바다는 생명의 자궁이면서 동시에 운명의 무덤이다. 진주는 구원이자 저주다. 마지막 순간, 키노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진주를 다시 바다로 던져버릴 때, 독자는 참담한 진실을 목도한다. 파괴된 것은 진주라는 물질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가장 근원적인 꿈이었음을.


우리는 왜 타인의 희망이 빛나는 순간, 그것을 함께 축복하지 못하고 시기하고 기어이 횡령하려 드는가. 빛나는 것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그 빛이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태워버릴지는 끝내 인간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 소설은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진주의 빛으로 밝혀 드러낸다. 인간이라는 종이 가진 슬픈 본성을 향해 묵직한 돌직구를 던지며 글은 맺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일리언 클레이
에이드리언 차이콥스키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4>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자명해 보이는 이 작품의 초반은 전형적인 디스토피아의 공기를 풍기며 시작한다. 주인공 아턴 다데브는 위험한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외계 행성으로 추방된다. 종신형과 다름없는 형벌. 그는 문명으로부터 격리된 채, 낯선 행성에서 노동자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한 정치적 탄압의 서사에 머물지 않는다.


낯선 행성에 유배된 인간들. 그곳의 흙은 우리가 알던 흙이 아니다.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고, 사유하는 듯 응답한다. <에일리언 클레이>는 외계 생명체의 위협을 다루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이 가진 인식의 오만을 해부하는 소설에 가깝다.


차이콥스키는 이 작품에서 ‘타자성’을 밀어붙인다. 외계 행성의 새로운 진화 방식과 자연의 구조라는 가장 원초적인 것들을 통해 세계관을 뒤틀어 놓는다. 환경은 무대가 아니라 의지를 가진 존재처럼 기능한다.


소설의 설정은 비교적 단순하다. 정치적 이유로 변방 행성에 보내진 인물들, 폐쇄된 사회, 그리고 점점 드러나는 행성의 비밀. 우리는 세계를 이해한다고 믿지만, 그 이해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각과 언어 안에 갇혀 있지 않은가. 외계의 생명은 반드시 ‘생명체’의 형태를 가져야 하는가. 혹시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토양 자체가 이미 의식의 다른 형태라면?


이 소설의 긴장은 괴물의 출현이 아니라, 해석의 실패에서 비롯된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규명하려 하고 분석하려 하지만, 그 시도는 자주 빗나간다. 그 오차가 쌓이며 공포가 형성된다.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큰 위협이 된다. 묘한 흥분을 일으킨다.


차이콥스키 특유의 과학적 상상력과 건조한 유머가 뒤섞여 있다. 설명은 치밀하지만 과잉되지 않고, 세계관은 방대하지만 인물의 감정선이 중심을 잃지 않는다. 다만 초반부는 설정 설명이 다소 길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축적이 후반부의 전개를 설득력 있게 만든다.


다만 아쉬움이 없는 작품은 아니다. 일부 인물들은 기능적으로 소비되고 만다. 서사의 중심에서 깊게 뿌리내리기보다는 설정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몇몇 문장은 번역의 문제인지, 혹은 원문의 구조 때문인지 매끄럽지 않게 읽힌다. 행성의 비밀이 드러나는 과정 또한 기대에 비해 다소 급하게 마무리된다.


'클레이', 점토는 형태를 보이지 않는다. 빚는 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이 행성의 환경 역시 그렇다. 인간은 그것을 정복하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재구성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문명을 세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개척은 진보인가, 침범인가.


<에일리언 클레이>는 화려한 우주 전쟁이나 장대한 스페이스 오페라와는 거리가 있다. 대신 인식의 균열, 세계관의 전복, 그리고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조용히 드러낸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은 정말로 ‘우리의 것’인가.

아니면 우리는 이미, 그 땅에 의해 빚어지고 있는 존재는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