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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서은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평점 :

오랜만에 ‘교양’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책을 만났다.
<행복의 기원>은 행복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처방전을 건네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가 신성시해온 행복이라는 성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그 안을 생물학적으로 부검해낸다. 행복이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아니라 찰나의 휘발성 사건에 불과하다는 고백. 다정한 위로보다 서늘한 해부에 가깝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행복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포문을 연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숭고한 존재가 아니라, 오직 생존과 번식이라는 준엄한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설계된 ‘생물학적 기계’라는 전제. 이 관점에서 우리가 느끼는 희열과 성취감은 고차원적인 가치가 아니라, 다음 생존 단계로 우리를 밀어 넣기 위한 뇌의 ‘보상 체계’로 전락한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추동하기 위한 교묘하고도 강력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개는 다분히 냉정하고 건조하다. 저자는 헛된 희망을 고양하는 대신 기대의 거품을 걷어낸다. 행복은 지속될 수 없는 상태이며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을 느끼도록 설계 되었다는 설명. 긍정의 힘을 믿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선고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철저한 냉정함이 나에겐 단단한 위안의 지지대가 됐다.
저자는 평생 행복을 연구했지만 본인이 더 행복해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 솔직함이 이 책의 미덕이다. 과장도 없고, 감정의 미화도 없다. 대신 구조를 보여준다. 우리가 왜 끊임없이 비교하고, 왜 만족하지 못하고, 왜 목표를 달성한 뒤에도 금세 공허해지는지를 설명한다. 알고 나면 불행에 대해 너그럽게 변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한다. 정점에 오른 순간에도 공허를 느낀다. 만족을 모른 채 다음을 갈구하는 것은 나의 의지박약이나 성격적 결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지극히 정상적이고도 효율적인 ‘생존의 기능’이다. 불행은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다. 더 나은 조건을 탐색하게 만드는 정교한 신호탄인 셈이다. 자신의 유전자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구조적 필연성을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감정적 파동 앞에서 비로소 너그러워진다. 감정의 부침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설계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행복의 기원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불행의 이유도 이해하게 된다. 불행은 오류가 아니라 기능이다. 더 나은 조건을 탐색하게 만드는 신호. 그렇게 생각하면, 감정의 파동은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일부가 된다. 이 책을 읽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을지 몰라도, 적어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감각은 생긴다. 일종의 내면의 완충재를 얻은 기분이다.
<행복의 기원>은 마음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는 식의 근거 없는 낙관을 단호하게 경계한다. 문장은 직선적이며,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이성적이다. 그러나 어려운 개념의 늪에 빠지지 않는 저자 특유의 재치와 데이터에 기반한 명징한 서술은, 진화심리학의 진입장벽을 낮춘다. 이미 관련 분야를 접한 독자에게는 익숙한 틀일 수 있으나, ‘행복’이라는 추상적 단어를 ‘과학’으로 다시 정의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보다 명쾌한 입문서는 드물 것이다.
물론 진화심리학을 이미 접해본 독자라면 다소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내용은 비교적 기본적인 틀 안에서 전개된다. 그러나 그만큼 입문서로는 적절하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과장 없이, 과학의 언어로 다시 정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출발점으로 보인다.
행복은 영원히 머물 수 있는 방이 아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정교한 태엽 장치다. 이 원리를 이해한다고 해서 곧바로 더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이전보다 덜 흔들리게 된다. 내면의 완충재를 얻은 듯한 이 평온한 감각.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화의 진실을 마주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이 책이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선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