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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테의 수기 ㅣ 펭귄클래식 97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0월
평점 :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는 일은 어쩌면 ‘이해’보다 ‘체험’에 가까운 독서였다. 문장을 따라가며 의미를 붙잡으려 할수록, 오히려 그 언어는 손가락 사이로 흩어졌다. 시인이자 사상가로서 릴케는 문장을 ‘설명’의 도구로 쓰지 않는 듯하다. 그는 문장을 통해 내면의 혼돈을 시각화한다. 그 결과 독자는 뜻을 해석하기보다, 문장의 파동을 견디며 서서히 감정의 심층으로 내려가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완독하기까지 두 달이 넘는 시간을 들였다.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아 다른 책들로 도피하기도 했고, 이해할 수 없는 단락들 앞에서는 인터넷의 도움도 빌렸다. 그러나 그 모든 지체조차도 이 책의 독서 경험 속 일부처럼 느껴졌다. 릴케의 언어는 즉각적인 감흥이 아닌 지연된 울림을 남긴다. 읽을 당시엔 막막하지만, 며칠 후 문득 떠오르는 문장 하나가 다시 마음을 울리는 식이다.
펭귄클래식 버전으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은 김재혁 번역가의 언어 감각이었다. 시인이 시인을 옮긴다는 표현이 이렇게 실감 난 적은 드물다. 번역은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재창조의 행위임을 보여준다. 릴케 특유의 고요하고 내면적인 리듬이 한국어 문장 속에서도 유려하게 숨 쉰다. ‘한국의 릴케’라 불릴 만하다는 찬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말테의 수기>는 결코 친절한 책이 아니다. 독자를 시험하고, 때로는 좌절시킨다. 끝에선 미묘한 위안을 건넨다. 결국 이 책은 ‘읽히는 책’이 아니라 ‘견뎌야 하는 책’이다. 그러나 그 고된 독서 끝에 남는 것은 피로가 아니라 경이감이다. 문장의 한 줄, 한 문단이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깊이 투시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책. 릴케는 독자를 이해시키지 않고, 그의 고독 속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독자는 결국, 그 초대를 거절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책이야말로 내가 읽어냈다고, 견뎌냈다고 자랑할 만한 책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