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해지는 이유를 가장 쉽게 이해하려면 취약성과 스트레스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된다. 취약성이란 어떤 사람이 우울증에 걸릴 위험이 얼마나 높은가 하는 것으로, 가족력과 유전, 어린 시절 경험 등에 좌우된다. 그리고 스트레스는 살면서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가리킨다. 취약성 요인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을 일으키기 쉽다. 사람마다 우울증을 일으키는 스트레스의 정도가 달라서, 견딜 수 있는 정도 이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 그때부터 우울증이 찾아오는 것 같다. 비슷한 정도의 스트레스를 받아도 끄떡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취약성은 나이가 들수록 커지고, 관절염이나 심장병 같은 만성 신체질환을 앓는 경우에도 커진다. - P29

우울은 불행한 감정과는 다르다. 우울은 불행보다 훨씬 더 깊고 큰 절망감으로, 세상을 보는 눈에 색을 덧입히고 일상생활을 해나가기 어렵게 만든다. - P31

리처드는 심리치료사 한 명과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간단한 목표를 세우고 개선을 위해 노력한다. 이런 방법을 ‘행동 활성화 behavioural activation‘라고 한다. 사람이 우울해지면 즐거운 일, 아침에 일어나고 옷입기 같은 일상적인 일, 공과금 납부 같은 중요한 일을 가리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이론에 따른 것이다. 회복하려면 활동을 조금씩 다시 시작해야 한다. 활동 수준이나 삶에 관여하는 정도는 우리의 기분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기분이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행동을 개선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것이다. 이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많다. - P38

사람은 우울해지면 과거를 곱씹지만 잘 살고 있으면 과거 생각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다. 현재의 기분을 나아지게 하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꼭 파고들 필요는 없다. 자신이 우울증에 취약하다고 해서 약하거나 열등한 인간은 결코 아니라는 걸 아는 게 더 중요하다. 때로 잊기 쉬운 사실이지만, 잊지 않아야만 살아갈 수 있다. - P39

불안과 두려움을 같은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둘은 꼭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는다. 두려움은 특정 자극이 유발하는 부정적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쉽게 말해 그 감정을 일으키는 원인이 뚜렷하다. 반면 불안은 신변에 뭔가 위험이 느껴지지만 그 원인이 뚜렷하지 않다. 불쾌한 감각이 몸에 느껴지고 일상적인 일들이 걱정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불안의 대상은 우리가 아직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지만 아직 때 짚어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일 수도 있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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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학자들 가운데는 ‘영지주의‘라는 범주 자체를 ‘대안적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으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영지주의를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갈래로 이해한다. 역사적 불운 탓에 ‘정통‘ 주류 그리스도교에 패배해 밀려났지만, 당대에는 그리스도교의 또 다른 생생한 모습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거의 없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자라난 유기적인 결과물로 보기에 영지주의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리스도교 영지주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는 사실상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그리스,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의 종교가 뒤섞인 혼합물에 가까웠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뉴에이지‘ 영성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가령 나아세니파Naassene sect는 ‘그리스도‘를 숭배했지만 이를 디오니소스와 아티스Artis 숭배와 혼합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를 자처하는 영지주의 종파들이 사용한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 신비주의 문헌들을 비롯한 경전들은 그들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후대에 발명된 것으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와 어떤 믿을 만한 역사적 연결성도 없었다. 심지어 비그리스도교인들도 그 차이를 손쉽게 간파했다. 위대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205년~270년)는 영지주의를 신랄하게 논박하면서도 이를 그리스도교의 일종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 P90

시몬의 이야기에는 훗날 더 발전된 형태의 영지주의 분파들이 주장할 여러 공통 요소가 담겨있다. 신적 영역에서의 원초적 타락, 하느님보다 열등한 존재에 의한 창조, 영적인 회상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힘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구원론 등이 그것이다. 발렌티누스나 바실레이데스 등 2세기의 대표적 영지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참된 신은 이 세상과 접점이 없으며, 물질세계는 악이거나 신보다 열등한 존재가 만든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 P91

한다. 영지주의는 대개 인간 본성을 ‘소마‘(육체), ‘프쉬케‘(혼), ‘프뉴마‘(영)의 세 가지 요소로 구분하여 이해했다.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육체와 혼은 데미우르고스가 창조한 것으로, 아르콘들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영은 물질세계 너머의 영적, 신적 세계에서 나온 것으로 이 세상에 묶이지 않는다. 대다수 인간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소마티코이‘(육적 인간)은 영혼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죽고 나면 물질세계로 돌아간다. ‘프쉬코이‘(혼적 인간)에게는 의지와 지성이라는 보다 우월한 능력이 있지만, 데미우르고스의 피조물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몇몇 학파는 혼적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원칙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프네우마티코이‘(영적 인간)뿐이다. 영적인 존재만이 영원의 불꽃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영은 망각에서 깨어날 때까지 자아와 우주라는 미로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타락한 영의 내적 각성 여부가 구원을 결정한다. 그때까지 영은 자아의 심연 안에 잠들어 있다. 육체뿐 아니라 아르콘이 만든 혼 또한 영의 각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 P93

그러나 바로 303년, 교회에 대한 최후의 박해, 가장 끔찍한 박해가 황제의 주도로 일어났다. 바로 제국 동부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detian(245년~316년)가 칙령을 내려 모든 그리스도교인에게 로마의신들에 대한 제사를 강요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전 시대의 반그리스도교 정책을 재개한 이유는 황제가 디디마에 있는 아폴론 신의 사제를 찾아 신탁을 구하자,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 때문에 신이 침묵한다는 답변을 얻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이방 종교가 가져온 불경을 근절해 로마 신들의 호의를 되찾고자 결심했다. 특히 그리스도교인들을 극도로 증오하던 (어머니가 이교사제였다고 전해지는) 포악한 부제 갈레리우스Galerius(250년~311년)가 맹렬한 기세로 박해에 앞장섰다. - P110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생전에 또 하나의 사도로 추앙받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제국을 통합하려는 그의 노력을 일종의 전 세계를 향한 복음 선포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적어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믿는 바를 열의 있게 추진했다. 그러나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사랑과 자비의 모범은 아니었다. 그는 뜻을 관철하기 위해 군사력 동원하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326년에는 의붓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와 황후 파우스타Fausta의 죽음에 직접 개입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적어도 정책적인 면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부합하도록 운영하고자 나름대로 큰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과부와 고아들을 돌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십자가형을 비롯한 몇몇 야만적 형벌을 폐지했다. 나아가 교회에 노예 해방을 공증할 수있는 법률적 권한을 부여하는 등 노예 해방 절차를 완화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임종 직전까지 세례를 미루었다. 황제의 직무와 책임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신자의 삶과 병행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337년 중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비로소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자색 용포를 벗고 예비 신자의 흰색 의복을 입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두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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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는 국지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황제의 명에 따라 제국차원에서 교회를 말살하려는 시도가 3세기에 일어났다. 이러한 박해는 때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례 없는 강도로 단련된 신앙이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235년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us Thrax 황제의 교회 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250년 데키우스Dedius 황제는 모든 시민에게 공증인 앞에서 이교 제단에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칙령을 선포했다. 이를 거부한 몇몇 명망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했다. 257년 발레리아누스Valerian 황제가 재개한 박해는 더 혹독했다. 희생자 가운데는 카르타고의 위대한 주교 키프리아누스Cyprian(200년~258년)와 로마의 주교 식스투스 2세Sixtus II(?~258년)도 있었다. 순교자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순교자가 죽음 앞에서 보인 결연함은 교회의 정체성 깊숙한 곳에 새겨졌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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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권력, 영광
팀 앨버타 지음, 이은진 옮김 / 비아토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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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 독일인이 한국 개신교는 개신교가 아니라는 말을 내게 했다. 한국 개신교는 독일 루터교에서 상당히 벗어났음을 강조하는 상당히 오만한 루터교도스러운 말이었지만, 그의 말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한국의 개신교는 일단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개신교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문화적 토양에서 자란 미국 개신교는 한편으로는 고유한 특성을 지니게 되었지만 큰 틀에서 미국 개신교와 유사하고, 성장전략, 교회 내 프로그램, 유행하는 설교 스타일 등이 미국에서 수입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재 미국에서 소위 복음주의 교회가 극우화되어 정치도구화 되는 과정을 르포트타주의 형식으로 구성한 이 책이, 우리나라 개신교인들에게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는 이 구성을 기독교에서 주님(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받아들이는 주기도문 혹은 주의 기도의 한 구절인 ‘나라와 권세와 영광‘에서 착안하였다. 1부에서는 어떻게 개신교 특히 복음주의자라고 하는 개신교가 극우화되기 쉬운 토양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2부에서는 개신교가 어떤 방식으로 정치 권력을 획득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3부에서는 이렇게 극우정치와 유착된 교회가 회복 가능한 것인지 살핀다. 다만 저자가 다양한 사람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토대로 책을 구성한 탓에 저 구분이 명확하지는 않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에 권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긴장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교회가 지니는 모순적인 특징 때문일 것이다. 교회는 세속적이면서도 동시에 신성한 공간이다. 필멸하는 인간이 신의 도움으로 이 땅에서 신적인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긴장관계를 견디지 못했는지 기꺼이 권력을 차지하려는 길을 택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유럽출신의 백인 기독교인들이 미국을 지배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이 이루어진 이상적인 미국을 숭배한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기꺼이 권력에 이용당한다. 1950년 파웰이 기꺼이 레이건과 한 몸이 되기로 작정한 이후, 복음주의자들은 극우에 충실히 봉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오바마 당선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복음주의자들은, 도덕적으로 상당히 결함이 있고, 심지어 ˝한 번도 신에게 용서를 빌어본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트럼프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앨버타가 인터뷰한 내용 중, 미국의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다면 ‘트럼프 지지, 공화당, 우파, 낙태반대, 동성애혐오‘라고 답할 것이라는 자조섞인 대답을 하는 부분이 있다. 이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미국에서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50년 전에는 미국인의 9퍼센트만이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보고되었지만, 그 비율은 현재 33퍼센트로 늘어났다. 저자는 극우화된 기독교의 회복 가능성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 거기에 부정적인 이유는, 남아서 항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떠난다는 현실 때문에 그렇다. 미국 개신교의 다층적인 지적 스펙트럼은 반지성주의적인 경향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다. 신학교에는 성서학을 충실히 다룰 수 있는 학생들이 점점 입학하지 않고 있으며, 목사들의 교양 수준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

이런 미국의 현실을 먼 산 구경하듯이 하기 힘든 이유는 최근 한국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전광훈 등 극우 목사들이 정치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목사들은 소위 세속적인 일에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런데 이는 기독교의 극우화에 큰 억제제는 안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치 독일 시대에 교회가 기꺼이 파시즘과 결합하여 온갖 악행을 저지른 데에 대한 처절한 반성에서 나온 바르트의 신학과 같은 측면이 아니라, 그저 바깥은 어찌 되든 교회 울타리를 최대한 높이 쌓으면 해결된다는 순진한 태도에서 기인한 반응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간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는 개신교계 사람들은 교단 내에서 영향력이 없는 이들이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고, 기꺼이 혐오하는 이들은 대형교회 목사들이고, 교단에서도 영향력이 큰 이들이다. 신학교에서는 이미 공공연하게 검열이 이루어지고,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기꺼이 트럼프의 죄를 사해주었던 것처럼, 윤석열의 내란에 기꺼이 세례를 주려고 한다. 교회란 무엇일까. 교회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예수가 그렇게 강조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고민하고, 그에 대한 실천적인 답이 무엇인지 그 어느 때보다 궁리해야 할 때라는 것은, 이 책을 읽는 개신교인들이면 대부분 공감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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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낙태부터 기후 변화, 종교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논란이되는 모든 주제를 해결하는, 본격적인 정치신학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이 신적 사랑의 정치,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치에 헌신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예수께 나아오는 것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수 있고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을" 세상을 옹호하는 것도 의미한다고 확신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성탄 찬송가 가사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의 이름으로 모든 압제가 그치리라." 기독교의 소망은, 압제의 주체가 정치적 행위자이든 현 어둠의 권세이든, 모든 압제가 사라지고 만왕의 왕이신 분과 화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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