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학자들 가운데는 ‘영지주의‘라는 범주 자체를 ‘대안적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으로 대체하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은 영지주의를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갈래로 이해한다. 역사적 불운 탓에 ‘정통‘ 주류 그리스도교에 패배해 밀려났지만, 당대에는 그리스도교의 또 다른 생생한 모습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거의 없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자라난 유기적인 결과물로 보기에 영지주의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리스도교 영지주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는 사실상 그리스도교와 유대교, 그리스,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의 종교가 뒤섞인 혼합물에 가까웠다. 오히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뉴에이지‘ 영성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가령 나아세니파Naassene sect는 ‘그리스도‘를 숭배했지만 이를 디오니소스와 아티스Artis 숭배와 혼합했다. 게다가 그리스도교를 자처하는 영지주의 종파들이 사용한 복음서, 사도들의 행적, 신비주의 문헌들을 비롯한 경전들은 그들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후대에 발명된 것으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와 어떤 믿을 만한 역사적 연결성도 없었다. 심지어 비그리스도교인들도 그 차이를 손쉽게 간파했다. 위대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Plotinus(205년~270년)는 영지주의를 신랄하게 논박하면서도 이를 그리스도교의 일종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 P90
시몬의 이야기에는 훗날 더 발전된 형태의 영지주의 분파들이 주장할 여러 공통 요소가 담겨있다. 신적 영역에서의 원초적 타락, 하느님보다 열등한 존재에 의한 창조, 영적인 회상을 통해 세상을 지배하는 힘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구원론 등이 그것이다. 발렌티누스나 바실레이데스 등 2세기의 대표적 영지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참된 신은 이 세상과 접점이 없으며, 물질세계는 악이거나 신보다 열등한 존재가 만든 피조물이라고 주장했다. - P91
한다. 영지주의는 대개 인간 본성을 ‘소마‘(육체), ‘프쉬케‘(혼), ‘프뉴마‘(영)의 세 가지 요소로 구분하여 이해했다.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육체와 혼은 데미우르고스가 창조한 것으로, 아르콘들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영은 물질세계 너머의 영적, 신적 세계에서 나온 것으로 이 세상에 묶이지 않는다. 대다수 인간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소마티코이‘(육적 인간)은 영혼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죽고 나면 물질세계로 돌아간다. ‘프쉬코이‘(혼적 인간)에게는 의지와 지성이라는 보다 우월한 능력이 있지만, 데미우르고스의 피조물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몇몇 학파는 혼적 인간의 구원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원칙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프네우마티코이‘(영적 인간)뿐이다. 영적인 존재만이 영원의 불꽃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영은 망각에서 깨어날 때까지 자아와 우주라는 미로에 갇혀 있다. 그러므로 타락한 영의 내적 각성 여부가 구원을 결정한다. 그때까지 영은 자아의 심연 안에 잠들어 있다. 육체뿐 아니라 아르콘이 만든 혼 또한 영의 각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 P93
그러나 바로 303년, 교회에 대한 최후의 박해, 가장 끔찍한 박해가 황제의 주도로 일어났다. 바로 제국 동부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detian(245년~316년)가 칙령을 내려 모든 그리스도교인에게 로마의신들에 대한 제사를 강요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전 시대의 반그리스도교 정책을 재개한 이유는 황제가 디디마에 있는 아폴론 신의 사제를 찾아 신탁을 구하자,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 때문에 신이 침묵한다는 답변을 얻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 이방 종교가 가져온 불경을 근절해 로마 신들의 호의를 되찾고자 결심했다. 특히 그리스도교인들을 극도로 증오하던 (어머니가 이교사제였다고 전해지는) 포악한 부제 갈레리우스Galerius(250년~311년)가 맹렬한 기세로 박해에 앞장섰다. - P110
콘스탄티누스는 이미 생전에 또 하나의 사도로 추앙받았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제국을 통합하려는 그의 노력을 일종의 전 세계를 향한 복음 선포와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적어도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이 믿는 바를 열의 있게 추진했다. 그러나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이 말하는 사랑과 자비의 모범은 아니었다. 그는 뜻을 관철하기 위해 군사력 동원하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326년에는 의붓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와 황후 파우스타Fausta의 죽음에 직접 개입했음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나 적어도 정책적인 면에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을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부합하도록 운영하고자 나름대로 큰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 과부와 고아들을 돌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십자가형을 비롯한 몇몇 야만적 형벌을 폐지했다. 나아가 교회에 노예 해방을 공증할 수있는 법률적 권한을 부여하는 등 노예 해방 절차를 완화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임종 직전까지 세례를 미루었다. 황제의 직무와 책임을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신자의 삶과 병행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337년 중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게 되었을 때 비로소 콘스탄티누스는 황제의 자색 용포를 벗고 예비 신자의 흰색 의복을 입었다.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숨을 거두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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