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는 국지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황제의 명에 따라 제국차원에서 교회를 말살하려는 시도가 3세기에 일어났다. 이러한 박해는 때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전례 없는 강도로 단련된 신앙이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235년 막시미누스 트락스Maximinus Thrax 황제의 교회 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250년 데키우스Dedius 황제는 모든 시민에게 공증인 앞에서 이교 제단에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칙령을 선포했다. 이를 거부한 몇몇 명망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순교했다. 257년 발레리아누스Valerian 황제가 재개한 박해는 더 혹독했다. 희생자 가운데는 카르타고의 위대한 주교 키프리아누스Cyprian(200년~258년)와 로마의 주교 식스투스 2세Sixtus II(?~258년)도 있었다. 순교자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순교자가 죽음 앞에서 보인 결연함은 교회의 정체성 깊숙한 곳에 새겨졌다. - P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