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최초의 은수자들은 3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험한 땅으로 향했던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뿐 아니라 적대와 박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 이후 수도자의 수는 교회가 사회적 명망을 얻는 것에 비례해 증가했다. 수도 생활을 향한 4세기와 5세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열정은 ‘사막이 도시가 되었다‘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 P119

한 이야기를 보자. 악마들이 사탄의 궁전에서 사탄에게 경배하며 그들이 최근 행한 악행을 보고한다. 첫 번째 악마는 폭동과 전쟁을 일으켜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이 한달이나 걸렸다는 사실에 악마를 태형에 처한다. 두 번째 악마는 바다에 폭풍을 일으켜 배들을 침몰시키고 여러 선원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데 20일이 걸렸다는 사실에 사탄은 두 번째 악마 또한 혹독한 형벌에 처한다. 세 번째 악마는 결혼식에 나타나 불화를 조장하고 결국 신랑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보고하지만, 이 또한 열흘이 걸렸다는 사실에 사탄은 세 번째 악마의 나태함을 크게 꾸짖으며 채찍질한다. 네 번째 악마가 사탄에게 보고한다. 자신은 40년 동안 사막에서 수도자 한 명을 끈질기게 유혹한 끝에 마침내 그가 밤에 음란한 생각을 품게 했다고 보고한다. 이를 들은 사탄은 왕좌에서 일어나 네 번째 악마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그리고 왕관을 씌워주며 자신의 곁에 앉도록 한 뒤 말한다.

참으로 용맹한 일을 했구나. - P124

그리스도교 국가, 곧 대다수 거주민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할뿐 아니라 국교가 그리스도교이거나 그리스도교였던 국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은 아르메니아다. 300년경 아르메니아 왕가가 세례를 받은 후 아르메니아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로마 제국이 밀라노 칙령을 공표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 약13년 전의 일이다. - P129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하는 이야기들은 과장되었을 수 있다. 토착 종교는 꽤 오랜 세월 아르메니아에 존속했다. 그러나 그리고르의 주도로 아르메니아에는 일정한 조직과 위계를 갖춘 국가교회인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설립되었다. 각지에 교회가 건축되었고, 옛 신전들은 교회로 개조되었다. 수도원들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울러 에치미아진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증거들은 아르메니아에서 그리스도교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는 것을 시사한다. - P132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다른 ‘오리엔트 교회들‘과 함께 아르메니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제국 교회와 상통 관계를 단절했고, 506년에는 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분열로 인해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는 고립된다. 7세기,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자 교회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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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종려주일에 예수는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다니아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여 로마제국의 통치에 대항하는 공개 시위를 감행했다(마르코 11:1). 제국의 승전에 반대하는 입성으로, 그는 나귀를 타고 동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들어왔는데, 이는 말을 타고 서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들어온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입성에 대한 상징적인 반대 시위였다. 빌라도는 해안 도시 가이사리아의 본부에서부터 필요하면 유월절 군중을 진압하려고(overpower) 들어왔다. 예수는 갈릴래아로부터 그 똑같은 군중에게 가능한 한 힘을 주려고(empower) 들어왔다. - P25

예수의 대답, 즉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래, 너희가 갖고 있는 카이사르의 은전은 너희가 갖고 있다가 세금을 내라" 혹은 "아니야, 카이사르의 은전은 되돌려주고-그럼 너희는 세금을 낼 수 없으니-세금은 내지 말라"는 뜻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카이사르의 은전을 용납하지 못하면, 어떻게 카이사르의 세금을 낼 수 있는가? 질문자들과(and)/이나(or) 관찰자들이 "그(예수)에게 경탄해 마지않았다"는 것은 당연하다(12:17c).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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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친밀감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런 친밀한 관계에서 정서적 · 신체적·성적으로 다칠 위험이 가장 클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 과감히 믿었던 사람에게서 씻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 그런 정서적 외상emotional trauma을겪고 나면 우울증에 취약해지기 쉽다. 어른이 되었을 때 정서적 회복력이 떨어져 인간관계를 맺고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정서적 외상은 자아상에 부정적 영향을 끼침으로써 나중에 자해 행동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P73

세심한 걸까, 아니면 너무 예민한 걸까? 나는 겉으로는 강철처럼 단단한 척했지만 그건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속은 두부처럼 물렁했다. 상처를 너무 쉽게 받았고, 세상 사람들 특히 가족과 상대하면서 입은 상처가 마음에 흉터로 남았다. 남들의 말이나 행동에 담긴 뜻을 늘 지나치게 고민하는 버릇이 있었다. 힘든 대화를 하고 나면 악의 없는 말에 상처받고 이미 지나간 말을 오랫동안 곱씹곤 했다. 주변 사람들의 기분 변화를 무척 예민하게 알아챘지만, 혼자 생각에 잠겨 내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분석하느라 정작 남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친구가 안경을 새로 맞췄다거나 머리 스타일을 바꿨다거나 하는 외모 변화는 못 알아보기도 했다. 남들의 환심을 사려고 기분을 맞춰주려 애쓰면서도, 그 때문에 내 뜻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곤 했다. 초조한 마음에 말을 내뱉고는 나중에 후회하고, 또 그 행동을 마음속으로 골똘히 분석하기를 거듭했다. 민감한 성격 특성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기 때문에 ‘매사에 너무 진지하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사람이 심하게 우울해지면 남들에 대한 걱정이 편집증적 사고로 확대될 수 있다. 남들이 자신을 정말로 싫어하고 뒤에서 자신을 실제로 흉본다고 믿기 시작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면 더 그렇게 되기 쉽다. - P74

한번은 어느 지인이 나에게 왜 어머니를 자주 보지 않느냐고 물었다. 엄마와 내가 같이 있으면 서로 힘든 사이라는 걸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한다‘고들 보통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세상에 넘친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들겨맞고 괴로워하고 상처받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간혹 분위기가 좋을 때는 엄마가 나처럼 생기고 나처럼 말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한 정신으로는 내가 도저히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끝없는 전투를 치렀다. 서로 상대에게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그 앙갚음으로 서로를 계속 벌주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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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리 이자는 일반적으로 일정 기간 금액이 고정되는 지대와 달리, 또 생산에서 생기는 이윤과도 달리, 대출자에게 계속 증가하는 불로소득을 안겨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지속 불가능한 일이다.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낮지 않은 한, 부채는 결국 상환 불가능한 수준까지 늘어날 것이다. 어떤 물건이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마지막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자연을 보면, 어떤 개체는 일정 기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증가세가 둔화하다가 마침내 멈추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암세포의 증식처럼 예외도 있다. - P105

정부 부채는...... 보통의 납세자들에게서 부유한 증권 보유자들에게로 소득을 상향 재분배하는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과세하는 대신 돈을 빌리고 그들에게 이자를 낸다. 소비자 신용도 부자들을 더 부유하게 만든다. 임금 정체로 고통받으면서 비자카드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려는 사람들은 매달 해야만 하는 결제를 통해 채권자들의 지갑을 부풀릴 뿐이다. - P111

전통적인 경제이론에서는 저축이 투자(대출)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난센스다. 대출은 주로 신용화폐의 창조에 의존한다." 대출 여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채무 불이행의 위험과 차입자가 충분한 담보를 가졌는지 여부다." 이 ‘신용화폐‘의 생산비용은 무시해도 될 정도라서, 이 경우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까지도 분명히 노력 없이 생기는 돈이다. 은행이 다른 사람들의 저축을 차입자에게 대출함으로써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입자가 은행으로 하여금 신용화폐(이자 형태로 불로소득을 얻는 원천)를 창조하게 함으로써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 P118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평등한 존재인 것처럼 서로 빌려주고 빌리는 계약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사고에서 빌려주고 빌리는 것이 실제 동등한 관계라는 가정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맞다. 우리는 모두 빌리고 빌려줄 권리를 갖고 있고, 그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평등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채가 경제적 불평등에 의존한다. 어떤 사람들은 대출할 수 있는 여분의 화폐를 갖고 있든지, 아니면 은행처럼 신용화폐를 창조할 권리를 갖고 있든지, 하여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힘을 갖고 있지 않은가? 고리대는 그와 같은 불평등을 활용한다. - P122

많은 경우에 부유한 채권자들은 남는 돈을 지출할 생각은 없고 단지 대출해서 불로소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은행은 기존화폐의 사용을 연기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용화폐를 창조하는 데서 이익을 얻는다. 은행은 절제해야 할 대안적 행위가 없다.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행위, 게다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행위에 대해 보상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보상은 대식가에게 밥을 먹는다는 이유로 보상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쨌든 실제로 이자는 사람들이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에 호소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대출자와 차입자의 상대적 힘이다. - P123

우리가 위의 옹호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들은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하지 못한다. 대출자들이 이자를 부과하는 것은 이자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거나 경제 전체에 좋다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할 수 있어서 이자를 부과한다. 물론 대출자들은 통상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이자를 부과한다. 어떤 옹호론을 내세우건,
그것은 우리가 내린 불로소득의 정의에 부합한다. - P129

저축예금을 이용하든 신용화폐를 창조하든 신용의 배분을 통제하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는다. ‘경제의 지휘부‘를 통제하면서 경제발전의 양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은행에 이러한 권한을 허용하는 경우, 권한에 따르는 책임은 예금자(채권자)와 주주에게 돌아간다. 민간은행은 이익이 나고 주식 가치가 계속 상승하는 한 대출이 어디로 가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건 상관하지 않는다. 금융‘투자‘는 실물투자‘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오늘날 금융 엘리트들은 개인·기업·정부를 대상으로 이자를 추출하는 것이 부를 창출하는 한 형태라고 여긴다. 이들에게 돈은 돈일 뿐이니, 출처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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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으로 말하면, 무정부 상태는 절망적이다. 왜냐하면 무정부 상태에서악당들이 항상 약자를 먹이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세계를 인간들이 다스리길 원하신다). 그러나 권위에는 문제가 많다. 통치의 소명은 권력 남용의 유혹을 받는 자리이기 때문이다(그래서하나님은 권위를 받은 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은 성경 전체에 반복해서 나타나지만, 열린 결말의 이야기이니만큼 창조주의마지막 말씀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말씀은 창세기 1장과 2장, 시편 8편(인간의 소명), 창세기 12-22장(아브라함의 소명),
특별히 시편 2, 72, 132편, 사무엘하 7장과 이사야의 메시아 구절들(다윗 자손의 소명) 안에 이미 설정된 조건들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책임을 물으신다면, 그 일은 한 인간을 통해, 한 이스라엘 사람을 통해, 다윗 왕가의 한 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성경에 깊이 뿌리내린 문제 중 하나라고 말할 수있고, 이에 대해 신약성경이 명확하게 답을 제시하고 있다. - P101

시편 72편은 이 구원하고 치유하는 정의의 주제를 가장 명확하게 진술한 시로서, 창조주 야훼께서 왕에게 그분의 정의, 즉 불의를 바로잡는 그분의 성품을 주셔서, 그 왕이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왕의 정의는 전 세계에 평화와 번영의 통치를 가져올 것이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성전을 가득 채우게 하고자 성전을 건축했던 것처럼, 이 지혜롭고 치유하는 정의의 통치로 인해 온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게 될것이다. - P102

눈에 띄게 등장한 바 있다. 그리고 로마서 8장의 유명한 구절에는 "죽음 ••• 생명 ••• 천사들 ••• 통치자 •••현재 ••• 미래 ••• 권세 •••높음 ••• 깊음"이 나오고, 바울은 여기다가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라는 문구를 추가한다. 이것은 빠뜨린 것이 없도록 대비하는 조치일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세계에 속한 피조물들이지 그세계와 별개인 신적 또는 반(半)신적 존재가 아님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이다. 각각의 용어들의 특정한 의미를 알아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바울이 이런 목록들을 여기저기에 섞어 쓴다는 것은, 그의 주된 관심사가 모든 종류의 ‘권세‘ 위에 있는 예수의 주권을 강조하는것이지, 각각의 용어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나 별개의 범주를 제시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 P106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통치자‘가 받게 되는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등장하는 문맥에서는 요한복음 특유의 복잡한 논의가 펼쳐진다. 이 논의는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한 일부 헬라인들이 예수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면서 시작된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요청을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12:23)라는 신호로 여기신다. 이것은 분명히 ① 그분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왔다는 뜻이다. 그분은 이 고난을 당연히 꺼리신다(12:27). ② 이 고난과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③ 예수께서는 ‘영광을 받음‘, 즉 죽음을 통해 "이 세상의 통치자"가 그의 세력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 또는 이방 세계를 틀어쥔 힘을 깨뜨리실 것이고, 그러면 이방세계는 참 하나님을 예배할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헬라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 이끌리게될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온다! 이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날 것이다! 또 내가 이 땅에서 들려 올라갈 때,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 - P111

예수께서는 십자가 처형이 세상 권세를 이기는 승리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물론 요한의 생각도 같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 생각이 너무나 놀랍고 새로운 것이었기에 요한은 단지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수의 비전을 드러냈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 역사적으로 훨씬 타당하다. 복음서 이야기의 많은 대목이 메시아이신 예수에 관해 다룬다. 메시아가 해야 할 핵심적인 일 중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과 그분의 세상을 위협하는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것이었다. 요한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 처형으로 그 일을 이루신다." 요한은 이후로는 이 주제를 부각시키지 않지만, 독자는 요한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이 주제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서술 방식은 요한 특유의 스타일이다. "세상의 통치자"를 대표하는 빌라도는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여 예수를 죽게 한다. 그러나 빌라도에게 그 권한을 위임하신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를 따르는이들이 세계 선교를 시작하게 하심으로써 세상의 판결을 뒤집으다. 요한은 이 모든 과정을 사랑이 극적인 행동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제시하는데, 성경에서 이 사랑은 메시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다. 육신이 되신 말씀이요 참 사람이신 분이 두 가지 소명, 즉 하나님의 목적을 실행할 인간의 소명과 치유의 구원의 사랑으로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고자 돌아오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하나로 결합하셨다. - P112

하나님의 계획은 (바울이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메시아 안에서 온 우주를, 즉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죄인을 ‘권세‘의 노예로 삼았던 ‘죄‘를 용서함으로써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의 벽을 허무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을 알리는 복음 중심의 중요한 표지였다(엡2:11-22). (이것은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 암시하신 것과도 유사하다. 곧 헬라인들이 당장은 그분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없지만, 그분의 죽음으로 뭇 민족들을 갈라놓고 있던 어둠의 세력인 ‘세상의 통치자‘가 쫓겨나면 그들이 그분에게 이끌리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토라 자체, 즉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이스라엘 울법이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과 믿는 이방인을 갈라놓고 있는 한, 그것은 새 창조라는 창조주의 목적에 반대하는 어둠의 세력에 장악된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일단 제쳐두어야 했다. - P116

바울서신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여러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스라엘의 목적과 그 헌장인 토라의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토라가 (또는 그런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토라를 사용해야 할 사람들이) 그 목적이 실현되지 못하게 막을 조짐을 보인다면, 그것은 폐지되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을 도덕적 나침반이 없는 상태로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우상숭배자였지만 이제는 아닌 사람들을 더 큰 다민족적 현실로 초대하여, 고대 세계에서 유대인과 이교도를 구분했던 제약들(할례, 음식법, 안식일)이 더 이상 그들을 규정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이 내용을 보다 온전히 설명하려면 갈라디아서 전체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것은 복잡하고 도전적인 것이기도 하다. - P117

요한계시록은 예수 승리의 결과를 각기 다른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 출신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을 찬양하며 목청껏 노래하고 외치는 거대한 모임으로 묘사한다. ‘권세‘의 분열적 지배를 깨뜨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그 일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고, 이사야 40-55장이 말하는 내용이며, 언약에 충실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친히 그분 백성의 죄와 세상의 죄를 함께 나누고 짊어지심으로써 거두신 사랑의 승리라고 선언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죄를 담당하심으로써 ‘권세가 인간의 권위를 찬탈하는 통상적 수단을 빼앗아 모든 인간이 마침내 그들의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존재가 될 자유를 얻게 하셨다. 한 분 하나님의 예배자가 되어 그분의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 직분을 수행할 자유를 주신 것이다. - P119

죄에서 해방된 인간이 왕 같은 제사장의 정당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복잡한 인간 사회의 힘줄과 인대인 통치 구조 또한 원칙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 - P120

예수에 관한 사건들을 통해 일어난 급진적인 변혁에는 세 가지 공통 요소가 있었다. 첫째, 이 변혁은 오랫동안 예언된 대로, 그 초점을 유대 민족과 그들의 고국에서 전 세계의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가족으로 바꾸었다. 이런 초점의 변화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조정이 따라와야 한다. 둘째, 이 변혁은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방식으로 새 창조가 가능해졌다는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이는 메시아의 승리가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그분의 영을 선물로 주심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 승리는 하나님의 새 세상이 탄생할 수 있는 전조를 열어주었으며, 특히 모든 종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의 형성 속에서 정확하게 드러났다. 셋째, 이 변혁은 이사야의 ‘종‘의 모습에서 살짝 드러났던 급진적인 사상을 소개했다. 그 사상은 궁극적 승리와 그 구현 방식이 폭력이 아니라 고난받는 사랑이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분명히 한 묶음이다. - P122

하나님은 그분의 세상이 제대로 운영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그 ‘제대로‘의 기준이란 시편72편에 따른 것이다. 즉 메시아의 통치가 지혜롭고 치유하는 정의를 가져오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고, 악당들에 맞서고, 압제하는 자들을 타도하여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도록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는, 예수와 그분을 처음 따르는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의의 상태를 지적하며 회개하고 행실을 바로잡으라고 사람들을 촉구하도록, 성령의 위임을 받은 메시아의 사람들이 준비된다. - P127

지금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피에 굶주린 ‘십자군 전쟁‘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상상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단순하거나 위험천만한 혼동을 경험한다. 어떤 이들은 현재에는 도피주의적 경건을, 미래에는 머나먼 ‘천국‘을 선택하고, 현세의 지저분한 일들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세상사에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성직자를 동원해 자신들의 폭탄과 총알을 축복하게 한다. - P128

기독교 민족주의‘가 어떤 수준에서든 폭력과 폭력수단을 미화하는 문화와 손을 잡는 경우, 교회가 너무 분열되어 문제의 권세를 향해 진리를 집단적으로 증언하지 못하는 경우,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지속적 주장과 단일한 다민족 예배공동체라는 목표를 사람들이 무시하고 사실상 인종별로 분리된 집회를 선호하는 경우, 진리가 나의 진리‘와 ‘너의 진리‘로 해체되거나 정치 지도자들이 너무나 명백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아 더 이상 진리가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경우, 이 모든 경우에는 그 ‘체제‘ 내에서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복음주의적 (evangelish, evangelical)이라고 생각하건 상관없이 복음(euangelion)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 P137

교회는 예수께서 하늘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개념에 오랜 기간 꽤 만족했지만, 십자가와 부활과 영의 예수께서 이미 땅의 모든 권세를 보유하고 계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그 논의를 시작하는 좋은 방법은 시편 72편을 살펴보는 것일 테다. 시편 72편은 하나님의 진정한 왕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돌보고 억압과 폭력에서 그들을 구해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교회는 하나님과 화해한 ‘권세‘, 즉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치유하는 지혜와 정의를 세상에 비추는 참된 인간들이 서로 협력하여 세운 지혜로운 사회 구조를 향해,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교회는 그 일을 할 때마다 계속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다른 이들에게 설교한 후 정작 자신이 맡은 동일한 과업에서 실패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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