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송에 기반을 둔 들뢰즈의 철학이 존재론으로 인식을 정초하려 한다면, 리꾀르는 가다머와 독일 정신과학의 전통을 수용하여 인식으로 존재를 정초하려한다.리꾀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가 아니라 인간의 시간 경험이다.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가 주체 이전의 존재라면, 시간 경험은 '나'라는 차원에서 주어진 존재의 딜레마다. 리꾀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던진 인간 시간경험의 아포리아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는 이야기의 구성원칙인 미메시스를 사회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가다머의 해석학적 틀을 사회로 활짝 열고, 문학과 역사를 통한 새로운 주체, 그리고 독특한 사회철학으로 사유를 전개시킨다. 오만한 근대적 주체가 아닌 타자를 받아들이는 겸손한 주체는 문학과 역사로 경험을 공유하면서 공동체와 사회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기관없는 신체, 욕망은 리꾀르의 말대로 문학적 창조물에 불과한 것인지....
언제나 popular하게 철학하는 저자는 이전의 저작에 이어 들뢰즈로 대표되는 존재론자론에 기반을 둔 윤리학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스토아 철학, 선을 중심으로 자연과 하나가 될 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니체적 '주인의 도덕'은 저자에게도 육화되기는 어려운듯 보인다. 책 내용에서는 옳고 좋은 말만 하던 저자가 뒤에 부록에 가서는 '소인배'같은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원한에 사로잡힌 사람은 결코 자연과 합일할 수 없고, 대인이 될 수 없으며, 니체적 초인이 될 수는 더더욱 없다. 과연 이정우씨의 마지막 부록을 읽고 누가 그를 대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가 소인배들이라고 치부한 교수들은 입다물고 있는데, 원한에 사로잡혀서 공적인 글에서 사적인 분풀이를 하고 있는 저자는 과연 스토아 철학에 충실한 사람인가? 어떠한 철학을 하든지 간에 '언행일치'가 중요하다.한 가지만 더 지적하자. 늘 저자는 동아시아의 사유와 프랑스 철학을 잘 섞어서 새로운 철학 캌테일을 만들어 보이겠노라고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신중하지 못한 태도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보통 진정한 '대가'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역작에 집중하여, 이러한 사유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그제서야 부끄럽고 솔직하게 밝힌다. 이정우씨는 아직 자신의 야심찬 계획을 준비만 하고서도 이러한 대가들보다 더 큰 소리로 자신을 과시한다. 학자로서 너무나도 경솔한 언행이 아닐 수 없다.
담론의 공간과 가로지르기를 통해 프랑스 철학을 알기 쉽게 해설해온 저자는 그 난해하다는 의미의 논리를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여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의미의 논리 전반부인 정적 발생만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나마 이부분도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도, 아니 최소한 대학생들이라도 이 책을 통해서 '버스나 전철에서도'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그럼에도 의미의 논리 중 첨예한 부분인 후반부의 동적 발생을 다루지 못한 점은 매우 아쉽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저작에도 이 부분은 다루고 있지 않은데, 저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서는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들뢰즈가 동적 발생을 다룬 부분은 현상학이나 해석학에서 주장하는 주체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반증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표면 효과라는 장에서의 계열들의 발산과 그 '수동적 종합'으로서의 주체는 사실 주체 철학을 크게 뛰어넘지 못한다. 계열의 잉여(앙띠-외디프의 표현을 따르자면)인 '수동적 종합'이라는 개념 자체가 후설의 발생적 현상학의 영향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동적발생을 다루고 있는 부분은 자연이라는 존재에서 인간의 의식이 탄생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인식을 통해 존재를 구성하려는 현상학이나 해석학과 더욱 뚜렷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고 할 수 있다.스토아 철학에만 너무 기대고 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뢰즈의 철학을 너무너무 알기 쉽게 해설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앞으로도 philosophe populaire로서 큰 활약을 기대한다.
90년대 들어서 우리나라의 철학풍토는 독일 위주의 철학에서 프랑스와 영미권 철학까지 폭넓은 관심을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의 현실 중 가장 큰 문제점은 제대로 된 원전 번역이 부족하다는 점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원전의 내용을 충실하면서도 자연스런 우리 말로 알기 쉽게 해설한 책들이 부족하다는 점이다.그렇기 때문에 소장학자들이 뜻을 모아 이러한 책을 편찬했다는 점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 철학이 크게 유행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현재의 풍성한 프랑스 철학 이전에 이루어졌던 철학들과, 또 프랑스 철학과 함께 이루어졌던 영미권 철학들도 골고루 살펴봐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우리는 프랑스 철학의 독특함도 이해하고, 프랑스 철학이 파악하지 못하는 부분도 보게 되며, 나아가 한국의 현실 속에서 보다 풍성한 사유의 보고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특히 현상학과 해석학, 비판철학 부분은 충실한 해설이 돋보이며, 프랑스 철학 중 데리다 부분은 난해한 그의 사상을 명쾌하게 풀어쓰고 있기에 더욱 돋보인다. 물론 푸코와 레비스트로스 부분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들뢰즈를 다루지 못한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의 젊은 철학전공자들이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충실한 원전 소개서를 냈다는 데에는 큰 의의가 있다.
우리가 흔히 서양의 중세를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바로 기사들과 봉건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봉건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뒤비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봉건제를 문학적인 상상력과 감칠맛나는 문장력, 빼어난 서술구조로 보여준다. 그는 일반 민중들을 착취하고 지배계층-기사,영주와 성직자-이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한 세 위계의 담론들을 면밀하게 분석하면서, 그 조화롭고 아름다운 장막 뒤에 숨겨진 폭력적이고 고뇌에 찬 민중의 삶을 드러내 보인다. 그는 글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성직자뿐이 없던 시기에,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일반 민중들의 외침을 복권한다.그는 마르크 블로크가 설정한 봉건사회 성립의 시기를 보다 뒤에 위치시킨다. 11세기, 노르만족과 마쟈르족, 이슬람 세력의 유럽 강탈과 유린이 끝난 후, 이들을 방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성주들과 기사들은 왕이나 제후를 명목상으로만 인정하면서 자의적으로 일반 민중들에게 폭력으로 위협하면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른바 봉건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봉건제는 따라서 법제사가들이 보듯이 합리적인 계약도 아니었고, 블로크가 보듯이 완만하게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전통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이었다. 하지만 세 위계 담론을 내세운 왕권의 정착과 더불어 봉건사회가 쇠퇴해 가는 가운데서도, 일반 민중은 여전히 착취당하면서도 고분고분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 자들이었다. 세 위계는 바로 이것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뒤비는 중세의 이러한 모습을 제시하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평화로운 세상인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