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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성찰된 시간 ㅣ 동문선 현대신서 65
프랑수아 도스 지음, 김미겸 옮김 / 동문선 / 2001년 4월
평점 :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폴 리쾨르의 역사철학을 지지하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리쾨르의 기본적인 입장을 살펴보는 것으로 도스의 주장을 대신하는 것이 가능하다. 지나간 과거, 그것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 부재, 곧 죽음이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으며, 날 것 그대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ㅡ그것이 소설이 되었든 역사가 되었든간에ㅡ는 이 이해불가능한 그 무엇을 이해가능한 어떤 의미로 탈바꿈 시킨다. 이미지와도 같이 이야기는 부재를 존재로 대치시키는 힘을 지닌다. 여기에서 역사가 이야기와 만나야 할 당위성이 마련된다. 이렇게 해서 이야기는 분열되는 사회를 다시 묶는 힘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과학법칙과 같은 전제군주가 아니며, 죽음과 허무를 마주한 울타리이기에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이러한 기본 전제 위에 이야기체 역사서술, 특히 미시사가 저자에 의해 옹호된다. 작은 하나의 사건은 계량되고 방부처리되는 물리적 입자가 아니라, 그 속에서 전반적인 역사의 흐름들이 교차하는 유기적이고 살아 있는 세포가 된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말해 보편과 특수의 해석학적 순환을 의미하며, 이는 당연히 벽돌쌓기와 같은 작업을 거부한다.
이제 도스의 철학적 위치는 별 무리 없이 드러난다. 이는 이 저작에서 그가 옹오해 마지 않는 사람들의 나열로 간단히 확인되다. 하이데거, 가다머, 리쾨르. 즉 그는 현상학적 해석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그가 인용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 제 1권 전반부에 대한 요약에 불과하다는 점을 통해 잘 드러난다. 니체와 베르그손의 후예들이 주장하는 분열과 단절의 역사, 차이화 하는 순수차이로서의 사건들에 대한 역사는 이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의 입장과 대조된다. 또한 하나의 공동체를 조직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경직된 법칙과도 같은 구조를 배척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와도 명백한 선을 긋는다. 이러한 입장들은 다시 클리포드 기어츠의 해석인류학, 카를로 진즈부르크 등 이탈리아 및 독일 역사가들의 미시사 이론과 궤를 같이한다.
하지만 도스는 너무 전투적이고 자극적이다. 그래서 모든 사유들의 결을 위험하게 단순화하고 왜곡한다. 이는 다시 독자들에게 리쾨르를 단순하고도 기형적으로 소개하기 쉽다. 이러한 위험성은 제2장에 할애된 사회물리학적 야망에서 가관을 이룬다. 시대적 맥락을 무시한 채, 실증성을 강조하는 입장과 법칙을 강조하는 입장이 도매금되고 있으며, 19세기 실증주의적 과학주의가 20세기 구조주의와 되섞인다. 또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브로델의 장기지속의 역사이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다뤄지고, 아날 그룹 내부에서의 혁신, 즉 브로델과 그 이후의 역사가들의 차이도 무시되고 있다. 이는 다시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의 차이에 대한 무시로 이어지며, 해석학이 아닌 모든 철학은 결국 사회물리학의 야망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다. 마치 혼자 담장 안에 갇혀 사방을 적으로 만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니체와 베르그손, 또 한편으로는 후설 이후의 현대철학이 기본적으로는 의미와 현상, 즉 삶의 장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철학이라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레비스트로스와 푸코가 사회물리학의 야망 속에 갇혀 있을 리 만무하며, 제4장에서 말하듯 리쾨르의 해석학과 미시사만이 열린체제 속에서 의미체계를 다룬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이미 저자가 도매금한 푸코의 아날 제3세대는 해석학의 열림 그 자체를 넘어선다. 왜냐하면 열고 닫을 아무런 담장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또 아날 제3세대 이후의 역사가들에 비해 저자가 옹호하는 해석학의 구도는 보다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위험 외에도 저자의 생각방식은 전혀 리쾨르적이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몇 달 전 사망한 리쾨르에게 프랑스 신문들이 부여한 칭호는 바로'대화의 철학자'이다. 실제로 그의 철학은 다른 철학을 도매금하고 몰아붙여 공격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들과 소통하는 와중에 자신의 철학적 주장들이 가만히, 하지만 뚜렷하게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도스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짧디 짧은 책 한 권에 이야기체 역사서술과 미시사만을 옹호하기 위해 다른 모든 이론들을 구겨놓고 가두어 놓는다. 그래도 이는 이론적으로 그러니 다행이다. 앞서 번역된 '조각난 역사'에서처럼 '정치적 폭력'은 아니니 말이다.
번역에 대해 말하자면, 인명과 개념에 대한 오류는 그렇다 치더라도, 직역으로 인한 이해불가능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한다. 한국사람이 번역을 보고 불어문장을 짐작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