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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의 문화적 기원 -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총서
로제 샤르티에 / 일월서각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프랑스 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그것이 계몽사상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혁명으로 파악되었다면, 그것은 계몽된 지식인의 근대적 민주사회에 대한 표본이었다. 그것이 구체제의 경제적 모순 심화에 의한 파열과 부르주아계급의 역동적 계급투쟁으로 파악되었다면, 그것은 산업화가 진전된 상황에서 미래의 계급투쟁을 위한 역사적 무기였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모두 우리에게 어떠한 사건에 대한 기원을 소개함으로써, 이를 통해 미래를 결정짓고자 한다. 즉 그것이 부르주아적 민주주의건 계급투쟁이건 혁명을 준비한 계몽된 혁명주체를 상정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원인, 기원들은 정말일까?
저자는 다니엘 모르네가 쓴 "프랑스 혁명의 지적기원"이라는 대작의 모든 주장들을 전면적으로 부인하지는 않는다. 겸손하게도, 너무나도 확고하고 매끈한 모르네의 주장들에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작지만 치명적인 질문들을... 계몽 사상은 과연 얼마나 혁명대중에게 파급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서적보급의 계량적 접근, 계몽 사상이 지닌 혁명성에 대한 검토, 계몽된 인민이란 어떤 이들을 지칭하는가, 또 이들의 이성적 사회 즉 공적이고 이성적인 여론의 주체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통해 단순한 사상의 출현과 그 협소한 보급상황으로 사상과 사건의 인과관계가 쉽사리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무리없이 설득하고 있다.
그러면 프랑스 혁명의 기원이란 무엇인가? 기원에 대한 기독교의 세속화과정인가? 가장 기독교적이라 여겨져왔던 프랑스왕의 탈신성화와 대중의로부터의 고립화 과정인가? 18세기 급작스러운 심성의 변화와 새로운 정치문화의 탄생 때문인가? 그러나 이러한 혁명이전의 현상들 또한 혁명의 직접적 원인으로 연결짓기에는 사상의 기원설과 마찬가지로 여러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저자는 현명하게도 푸코를 빌어 기원이라는 이름의 괴물을 피하고자 한다. 영국혁명과의 비교를 통해 여러 공통점들을 나열해보긴 하지만, 그것들을 기원이라 명명하는 데 주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혁명이 그 기원과 너무다른 모습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차라리 원인없이 불쑥 솟아오르는 사건의 우발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미 마르크 블로크가 "봉건사회"에서 아랍속담을 인용해 말했듯이 "한 사람은 아버지보다 동시대인들을 더 많이 닮기 때문"이리라...
하버마스의 공론장 영역 개념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푸코와 부르디외의 사유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책은 나아가 스스로 하나의 "사건"이고자 한다. 수많은 혁명의 논의들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그러나 전혀 다른 해석을 내 놓음으로써, 저자 스스로 서문에서 밝히듯 보르헤스Borges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번역에는 p.25에 "피에르 메나르 드 보르쥬"로 오역). 몇몇 이해를 방해하는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로 인해 독자가 샤르티에의 이 겸손한 대작을 맛보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