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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제국사 1469-1716
존 H. 엘리엇 지음, 김원중 옮김 / 까치 / 2000년 11월
평점 :
절판
통통한 볼에 웃음을 머금은 페르난도와 이사벨 공동왕, 이들의 부조상을 시작으로 르네상스 제국 에스파냐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펼쳐진다. 15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250여년간, 저자가 그리고 있는 에스파냐는 이 나라의 별칭대로 한나절 태양과 같은 일생을 보여준다. 맑게 솟아오르는 태양처럼 상쾌함을 주는 희망에 찬 공동왕의 시대, 정오의 태양만큼이나 높이 솟은 16세기 전반기 카를 5세의 제국, 아버지만큼은 아니지만 제국의 가장 뜨거운 열기를 내뿜은 오후 2시의 태양과도 같은 펠리페 2세의 통치, 지루하고 허무한 오후 3-4시와도 같은 펠리페 3세의 통치와 지기 전 빨갛게, 그래서 더욱 강렬하고 아름다운 저녁 태양과도 같은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의 에스파냐, 마지막으로 저녁 어스름으로 사라지는 카를로스 2세... 그로테스크한 표정들로 가득한 엘 그레코의 그림은 피날레를 장식하며, 그 속에서 에스파냐인들은 태양 없는 밤을 배회하는 영혼들처럼 찬란했던 자신들의 육체를 맥없이 바라보고 있다.
분명히 이 저작은 정치, 사회, 경제 분야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이며, 역자의 소개대로 에스파냐 제국에 대한 충실한 개설서다. 문화와 예술, 사람들의 심성에 대해서는 별 다른 기술이 없으며, 흥미거리라도 제공하는 야사도 없다. 하지만 이 저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작품이며 우리에게 무한한 열정을 제공한다. 노동의 윤리보다는 유희와 전사의 윤리에 익숙했던 카스티야 중심의 에스파냐 제국, 그래서 이 제국은 중세적 가치가 맺은 가장 큰 열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 정치적 삶에 있어 현실과 이상의 분리에 가장 극적으로 저항했던 르네상스 제국, 소설과도 같은 역사를 지닌 하나의 예술작품과도 같은 제국이다. 그 역사가 저물 무렵 현명하게도 세르반테스의 에스파냐는 푸코의 지적대로 현실과 이상의 분리를 처절하게 경험한다.
엘리엇의 역사서술은 역사가 자닐 수 있는 긍정적 가치들을 한껏 드러낸다. 문학적 기교를 부리지 않으면서 하나의 문학이 되며, 역사가 기본적으로 지며야 할 사실적 엄정함도 잃지 않는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듯이 보이는 저자의 관점은 희한하게도 독자에게 수 많은 호기심을 일깨우며 에스파냐 역사의 다종다양한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개설이지만 종합이며 과학적이지만 문학적이다. 구조에 대한 탐구이면서 이야기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는다.
얄팍한 예술평과 야사로 점철된, 화려하나 무미건조한 역사책들과 달리, 충실함과 건강함의 미덕으로 빛을 발하는 이 책은 두 가지 차원에서 현재 한국 서양사를 자극한다. 그 하나는 르네상스 시기 유럽에 대한 보다 전반적인 이해와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에스파냐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과 관련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