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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그 악어가 그립다
박인식 / 문예마당 / 1998년 1월
평점 :
품절


나는 책을 보면 언제나 유혹을 느낀다. 길거리를 지나치는 무수한 사람들 속에서도 너무 매력적이라 차마 눈길을 뗄 수 없는 이성을 만나듯이 말이다. 물론 알면 알 수록 좋은 사람이라는 게 있듯, 두고두고 읽을 수록 새록새록 깊이가 느껴지는 책도 있지만, 인상이라는 것도 무지 중요한 거다. 마치 근사한 이성에 대해 이야기하듯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 친구들은 그저 허허 웃고 말지만, 그럼에도 나에게 있어 책이란 놈은 정말이지 더할나위 없이 유혹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일단 유혹에 빠지면 헤어나질 못해 기어이 책값을 치른 후에야 서점을 나선다. 그런 나에게 그 어떤 책보다 강렬한 매혹으로 다가온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그저 허여멀건한 바탕에 장난같은 나선형 모양의 그림이 왜 그리도 눈에서 떨어지지 않던지.

집으로 돌아와 책을 단숨에 다 읽고나서야, 왜 그렇게 이 책에 끌렸는 지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내가 그토록 찾아 헤멘 이상형과도 같은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동경하던 삶이 펼쳐져 있고, 내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던 열정을 일깨우는 책이었다. 그래서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닌, 모험심이나 호기심에서도 아닌 그저 이끌림만으로 중국이라는 미지를 서성거리는 남루한 나그네의 여정에, 기억조차 없는 아득한 그리움에 너무도 목말라야 했다. 언제나 떠남을 꿈꾸면서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미적거리다 기어이 있는 자리에 남아버린, 그래서 자리를 떠나지 않는 삶이 좋은 거라 자위하면서 묻어버린, 떠남에 대한 열정에 가슴아파야 했다.

이 책은 일반 기행문과는 그 성격이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이 글의 작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 돌아오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떠난다. 하지만 나그네는 그저 길에 이끌려 저 산 너머, 바다 건너에 매혹되어 떠난다. 그래서 삶이 하나의 여행이고 소소한 일상들이 여정인 모습이 바로 나그네다. 그래서 이 글에는 떠남에 대한 매혹, 여정에의 이끌림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게다가 나그네가 이끌린-아니 빨려들어간 중국이란 땅과,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흡입력을 가진, 중국이란 땅이 가진 마력을 묻어낸다.

작가의 약력과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건 숫제 바다가 아닌 육지를 떠도는 마도로스다. 그래서 그의 글이 비록 거친 물살을 가르고, 태풍을 두려워하며, 무풍(無風)을 헤쳐나가지는 않더라도 바다꾼의 항해일지를 연상시킨다. 비릿한 바다내음에 한번쯤 마도로스의 꿈을 꾸었다면, 혹은 눅진한 산내음에 가슴 설레어 했다면 반드시 끌려들어갈 마력을 지닌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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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포트 블루 1
오사무 이시와타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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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건강함 그 자체를 표현했다고 할 만큼 바르고 건실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윤리 교과서에나 나옴직한 훈시조의 내용은 절대 아니다. 그랬다면, 읽다 말고 바로 다른 만화를 집어 들었을 거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상을 가지고 노력하면 못 할 게 없다는 지극히 진부하고 고전적인 명언들이 그렇게나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일 수 없었다고나 할까.

초등학교 4학년인 개구진 골목대장 맛스구(眞直)와 얌전한 우등생 소라치(空知)는 우연히 맛스구의 아버지가 제작에 참가한 로켓 발사 현장에 참가한 뒤 우주 비행사가 될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저도 우주 비행사가 될 거라며 두 사람과 어울리게 된 말괄량이 후우꼬들이 꿈을 키워나가며 여러 친구들과 만나고 꿈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노력해 나가는 내용이다. 특히 주인공 마가미 맛스구(眞上 眞直)는 이름­위(하늘)를 향해 곧바로 나아간다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꿈을 향해서도 사람에 대해서도 일관된 열정과 따스함을 간직하고 있는 캐릭터다. 또한 자신의 꿈에 관한 한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의 열정과 신념을 가지고 올곧게 노력해 나가면 반드시 이룰 수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는 캐릭터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숨가쁘게 펼쳐지는 우주적인 위기가 가져다 주는 박진감 넘치는 재미에, 휴머니즘 넘치는 인물들이 그려내는 에피소드들도 작품에 감동을 더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감동에 흥분되면서도, 가슴 한켠이 조금은 답답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이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위해 노력하며 현실로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날의 순수했던 열정을 떠올리며 함께 흥분하며, 지친 일상에 다시금 의욕을 갖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감동을 안고 만화방을 나설 때엔 이제는 퇴색해버린 어린 날의 순수했던 꿈과 희망에 씁쓸해야만 했다.

하지만 뒤늦게 읽게 된, 작가의 전작 B.B.(Burnig Blood)는 현실 앞에서 그 젊음을 분출할 길이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고뇌가 생생한 작품이었다. 어른들이야 젊은이들을 보며 좋을 때라고 하지만, 막상 젊은이들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피가 끓는 정열을 어찌 하지도 못한 채 불안함과 막막함으로 힘겨워 하는 모습이 격정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패스포트 블루에서 꿈을 꾸는 젊은이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격려가 넘쳐난다면, B.B는 젊은이들의 오갈 데 없는 막막함과 암울함이 배어있는 작품이었다.

컬리가 짐작컨대 패스포트 블루는 대강 작가가 40대쯤에, 그리고 B.B.는 20대쯤에 그려진 작품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패스포트 블루에서 보여주는 넉넉함과 강인함은 오랜 시간 동안 갈고 닦여진 작가의 역량이 아닐까, 작가 역시 젊었을 적에는 피해갈 수 없는 출구 없는 격정에 휘말렸구나 하는 생각에 위안을 받는다. 힘겨울 때 가장 큰 위로는, 나의 힘겨움이 나만이 외롭게 겪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나처럼 힘들어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기에...

그러나 굳이 B.B.를 보며 동질감에 위로받지 않더라도, 패스포트 블루만으로도 독자로 하여금 따스한 감동으로 감싸주는 작품이다. 게다가 우주라는 새로운 영역이 가져다 주는 신비함과 환상적인 모습은, 비록 가혹하기 그지없는 환경이라 해도 꼭 한번은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매력적이다. 우울하고 지루한 날에 권해주고 싶은, 흥미진진한 드라마와 열심히 살고 싶다는 의욕에 넘치게 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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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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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엔가 서점가에 포근히 미소짓는 편안함에 끌려 선뜻 쥐어든 책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였다. 학교다닐 적에 암송했던 장짓문에 비치는 그리메 마냥 은은한 기운에 차마 그 책을 놓을 수가 없어 있는 돈 탈탈 털어 사가지고도 그저 책을 쓰다듬으며 흐뭇해 하던 기억이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친구들이랑 서점에 갈라치면 이 책 괜찮다며 꼭 집어들어 소개하던 책이었는데, 어느샌가 빌려주고도 돌려받지 못한 불귀의 객이 된 이래 속상함을 달래는 사이 잊고있던 책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TV에서 대문짝(정말 대문짝만하게 인쇄한 플랜카드를 걸었다. 허걱. --;;;)만하게 찍혀 있는 걸 보고 기쁘면서도 시새움이 일었다. 내가 고이고이 간직했던 소장품을 경매장에서 보게 된 기분이랄까. 게다가 불귀의 객은 접어두고 다시 한번 그 책을 품어보리라 결심하고 서점엘 갔더니, 권장도서라며 아예 옆구리에 반짝거리는(보기 싫으니 더 눈에 뛰는) 딱지가 붙어 있는 바람에 청개구리같은 심술이 잃어 결국 사지도 않고 돌아서 버렸다.

이쁜 책 못나게 버려났다며 연신 투덜투덜거리면서도, 내심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이 팔린다면 좋은 일이지 흐뭇해하면서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책내용을 되짚어 봤다.

생각해 보니 이 책을 읽은 지도 5년이나 지나버렸더니 어떤 건물과 도자기가 나왔고,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당최 떠오르질 않는다. 다만 이 책을 읽은 뒤에 여행갔던 부석사에서 받았던 수줍음과 도자기를 비롯한 우리네 유물을 보는 따스한 시선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이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한국미를 가슴으로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 따스함과 그 아름다움으로 간직되어버린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기억나는 구절이 있었으니, 읽을 때마다 연신 침을 흘리게 만들었던 초맛에 대한 기억이다. 나역시 초맛을 무척 즐겨서였을까, 다른 유물들은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건만, 작가가 어디 핀란드던가 여튼 유럽 어느 나라에서 먹어봤다는 초절임 생선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내 기필코 그 나라에 가서 그 초절임 생선을 먹어보리라 다짐하던 기억마저 생생하게 떠올라 버렸다. 생각나니 초무침 나물이라도 먹고 싶어지는 것이... --;;; 내 머리는 단아한 기둥과 장지문에 비치는 은은한 그리메를 그리면서도, 내 위장은 초맛같은 먹거리에 환장하여 기억력마저도 증진시켜 놓고 있었다.

맛을 즐기는 사람에겐 조금의(?) 부작용-책을 떠올릴 때마다 침분비가 활발해진다는-이 따르긴 하지만 책은 잊어도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선을 가질 수 있기에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이다. 읽기 힘들고 어렵다면 한편한편에 담긴 사연과 이야기를 소설책 보듯 읽어도 좋지 않을까. 어떻게 보든 책에 나온 우리네 아름다움에 한번이라도 현혹되고나면, 한국의 아름다움에 즐거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는 책이다.

내용은 잊었어도, 한국의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는 책이기에 섭섭하지도 속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언제 어느때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면, 나는 잊었어도 나의 시선은 이 책을 보며 함께 했던 작가의 시선을 어느새 닮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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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키튼 18 - 꿈을 캐는 사람 (완결)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가쓰시카 호쿠세이 스토리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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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내의 등뒤로 보이는 무슨 유적과도 같은 풍경 그리고 새카만 바탕에 'MASTER KEATON'이라는 제목이 주는 미묘한 늬앙스에 중세를 비롯한 역사적인 미스테리를 쫓는 내용겠거니 지레 짐작을 하며 집어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완전 헛다리를 짚은 것은 아니었지만 정답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대학의 고고학 시간강사인 키튼은 부업으로 보험조사원으로 활동한다. 고고학자로서 도나우강 유역이 문명발상지 중에 하나였음을 이론적으로 확립하고자 하는 학문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은 변변한 대학의 강사자리 따내기도 힘들다.

반면 부업인 보험조사원으로서의 키튼은 탁월하다. 보험금을 지급해야할 경우 조금의 의문이라도 있을 경우 보험수취인의 정당성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이 바로 보험조사원인데, 이 보험이라는 것이 대개 막대한 보상을 바탕으로 성립되는 계약인만큼 보험금을 지급받기 위한 범죄(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고를 가장한 타살)가 많은 만큼 보험조사원은 탐정이상의 사건판단능력과 현실대처능력이 필요하다.

즉 말이 보험조사원이지 일종의 해결사다. 그런데 이 어눌하게 생긴 키튼 아저씨, 알고보니 영국 특수부대 SAS의 서바이벌 교관 출신이었다. 즉 어릴적 컬리가 열광해마지 않던 맥가이버와 진배없는 현실대처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고대는 물론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마저 어우러져 언제나 훌륭하게 문제를 해결해낸다.

키튼은 사건의 현장에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지만 대학사회에 존재하는 인습-뇌물을 비롯한 논문 대필 외…- 앞에서는 끝끝내 적응하지 못해 언제나 주변만을 맴돈다. 그래서 만화책 속의 키튼이라는 인물을 따라가다보면 문득 어른이 되어버린 피터팬의 모습이 떠오른다. 후크선장과 당당히 대적할만큼 담대하고 강하지만, 어른들의 세계에 난무하는 권모술수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피터팬. 그럼에도 키튼과 스쳐지는 인물들은 대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인정한다.

현실 앞에서는 나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사람들을 위한 일에는 언제나 발벗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키튼 그리고 그를 아껴주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른이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이라도 마음 한구석에는 어린 시절의 피터팬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마스터 키튼에는 굉장히 특별한 일상들이 펼쳐지지만, 그러한 특별함 속에 담겨있는 가장 일상적인 사람들의 고민과 아픔이 담겨있기에 너무나도 일상적이다. 그래서 마스터 키튼은 아주 일상적인 특별함(Special)으로 가득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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