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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1994년 6월
평점 :
절판
어느 날엔가 서점가에 포근히 미소짓는 편안함에 끌려 선뜻 쥐어든 책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였다. 학교다닐 적에 암송했던 장짓문에 비치는 그리메 마냥 은은한 기운에 차마 그 책을 놓을 수가 없어 있는 돈 탈탈 털어 사가지고도 그저 책을 쓰다듬으며 흐뭇해 하던 기억이 이 책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친구들이랑 서점에 갈라치면 이 책 괜찮다며 꼭 집어들어 소개하던 책이었는데, 어느샌가 빌려주고도 돌려받지 못한 불귀의 객이 된 이래 속상함을 달래는 사이 잊고있던 책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TV에서 대문짝(정말 대문짝만하게 인쇄한 플랜카드를 걸었다. 허걱. --;;;)만하게 찍혀 있는 걸 보고 기쁘면서도 시새움이 일었다. 내가 고이고이 간직했던 소장품을 경매장에서 보게 된 기분이랄까. 게다가 불귀의 객은 접어두고 다시 한번 그 책을 품어보리라 결심하고 서점엘 갔더니, 권장도서라며 아예 옆구리에 반짝거리는(보기 싫으니 더 눈에 뛰는) 딱지가 붙어 있는 바람에 청개구리같은 심술이 잃어 결국 사지도 않고 돌아서 버렸다.
이쁜 책 못나게 버려났다며 연신 투덜투덜거리면서도, 내심 이렇게 좋은 책이 많이 팔린다면 좋은 일이지 흐뭇해하면서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 책내용을 되짚어 봤다.
생각해 보니 이 책을 읽은 지도 5년이나 지나버렸더니 어떤 건물과 도자기가 나왔고,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당최 떠오르질 않는다. 다만 이 책을 읽은 뒤에 여행갔던 부석사에서 받았던 수줍음과 도자기를 비롯한 우리네 유물을 보는 따스한 시선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이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한국미를 가슴으로 보았을 때 느껴지는 그 따스함과 그 아름다움으로 간직되어버린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기억나는 구절이 있었으니, 읽을 때마다 연신 침을 흘리게 만들었던 초맛에 대한 기억이다. 나역시 초맛을 무척 즐겨서였을까, 다른 유물들은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건만, 작가가 어디 핀란드던가 여튼 유럽 어느 나라에서 먹어봤다는 초절임 생선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내 기필코 그 나라에 가서 그 초절임 생선을 먹어보리라 다짐하던 기억마저 생생하게 떠올라 버렸다. 생각나니 초무침 나물이라도 먹고 싶어지는 것이... --;;; 내 머리는 단아한 기둥과 장지문에 비치는 은은한 그리메를 그리면서도, 내 위장은 초맛같은 먹거리에 환장하여 기억력마저도 증진시켜 놓고 있었다.
맛을 즐기는 사람에겐 조금의(?) 부작용-책을 떠올릴 때마다 침분비가 활발해진다는-이 따르긴 하지만 책은 잊어도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선을 가질 수 있기에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이다. 읽기 힘들고 어렵다면 한편한편에 담긴 사연과 이야기를 소설책 보듯 읽어도 좋지 않을까. 어떻게 보든 책에 나온 우리네 아름다움에 한번이라도 현혹되고나면, 한국의 아름다움에 즐거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느 순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는 책이다.
내용은 잊었어도, 한국의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는 책이기에 섭섭하지도 속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언제 어느때고 한국의 아름다움을 만나게 되면, 나는 잊었어도 나의 시선은 이 책을 보며 함께 했던 작가의 시선을 어느새 닮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