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카타의 세 사람
메가 마줌다르 지음, 이수영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테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는다. 이 책의 시작은 피와 사람과 비명이 한데 엉기는 재앙이다. 남편을 잃은 여성이 오열한다. 그리고 이 장면을 영상으로 본 한 젊은 여성이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느낄 만한 분노를 품는다. 그리고 무능한 정부를 향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정부에서 월급을 받는 경찰들이 구경만 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안 이 죄 없는 여자는 모든 걸 잃었다.” 당연히 이 글에는 특정 정당이나 정부에 대한 극심한 반감이 담겨 있지는 않다. 참혹한 시대상을 자조하는, 테러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모두를 향한 말이다. 그리고 이런 글은 하루에도 수만 개씩 어딘가에서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 글을 올린 여성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는다. 그녀는 체포된다. 테러범과 내통했다는 이유에서다.

모든 일은 페이스북 게시글에서 시작되었다.

.

콜카타의 세 사람

책의 감상을 말하기 전에 조금 생뚱맞겠지만, 번역과 표지의 변화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이 책의 원제는 ‘A BURNING’이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테러’라는 사건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번역서의 제목은 『콜카타의 세 사람』이다. 원제와 달리 번역된 제목은 주요 인물 세 사람에 주목한다. 타오르는 불길과 붉은색이 강하게 배치된 원작의 표지와 달리 국내 번역서는 몽환적인 색감의 표지를 택했다. 이런 변화를 눈여겨보면 번역과 출간에 있어 어느 지점에 주목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국내 번역서로 출간하며 출판사에서 제목에 과감한 선택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원작과 번역서에 끌리는 정도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시도는 (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는) 성공적이었다.

『콜카타의 세 사람』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표지와 제목 때문이었다. 인물의 심리에 주목했을 것 같은 제목과 표지 색상의 묘한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심리 소설과 ‘테러’라는 자극적인 소재, 그리고 세 인물의 인생이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바뀐다는 소개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주된 요인이었다. 『콜카타의 세 사람』은 하나의 텍스트에서 무엇을 강조하느냐, 그리고 무엇을 덜어내느냐에 있어 신중하고도 적절한 선택을 거쳐 나온 책이다.

만약 이 장편에서 가장 분명한 형식을 하나 꼽으라면 ‘세 인물의 교차하는 시선’이다. ‘테러’는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주요 인물 세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주인공 ‘지반’의 삶은 완전한 파국을 맞는다.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반 한 사람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됐다면 어땠을까. 단순히 한 사람의 고통과 억울함을 서술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내용의 소설도 작가의 역량과 플롯의 배치에 따라 얼마든지 개성 있는 작품으로 쓰일 수 있지만, 하나의 일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데에서 오는 맛은 확실히 줄어든다. 생각해보면 ‘테러’야말로 가장 다각도에서 보아야 하는 사건이다. 이해관계의 극단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 또는 집단의 비뚤어진 감정의 끝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이 일에 얽힌 시점은 무수히 많다. 작가는 그중 세 명을 선택한다.

이 세 사람은 어느 것 하나도 같지 않다. 그들은 각각 페이스북에 종종 글을 쓰는 젊은 여성(지반), 체육 교사이며 후에 정치인이 되는 남성(체육 선생), 배우가 되기를 꿈꾸는 트랜스젠더 여성(러블리)이다. 『콜카타의 세 사람』은 이 세 명의 시점이 교차 서술되는 구조다. 그리고 각각의 이름(또는 호칭)이 해당 단락의 소제목이다. 철저하게 각 사람의 시점에서, 빠른 전환이 이루어지는 소설의 진행은 속도감과 함께 입체적인 현실감을 준다. 이토록 다른 세 사람의 운명은 ‘테러’라는 하나의 점으로 이어진다. 지반을 가르쳤던 체육 선생, 그리고 지반의 친구인 러블리에게 전에 없던 ‘이해관계’가 생기는 시점은 ‘테러’이다.

.

선생에서 정치인으로, 친구에서 배우로

개인의 심리 변화에 주목한 이 소설은 끈끈한 인과로 구성된다. 하나의 사건 앞에는 반드시 그 일이 벌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보인다. 다만, 지반이 테러범과 한패로 몰리는 것에만 원인이 없다. 지반은 단지 ‘페이스북 게시물’로 인해 테러범과 한 패로 몰린다. 지반에게 벌어지는 사건에만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처한 상황이 말도 안된다는 것을 반증한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지반은 마치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처럼 사건의 중심으로 끌려들어간다.

이 소설의 장르는 완전한 정치물이다. 하지만 초반에서 중간까지, 그리고 후반의 도입까지도 전혀 정치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체육 선생이 한 정치인의 눈에 들어 그의 정당에 들어가는 과정에서만 잠깐 정치적인 내용이 언급될 뿐이다. 지반도, 러블리도 전혀 정치와는 관계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의 그물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물살이가 된다. 하나의 개인을 여론이 거대한 정치의 프레임 안에 가두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천천히, 단계적으로, 점차’로 표현되는 모든 순서와 절차에 따라 사건은 심화된다. 인물들은 철저히 수동적으로 변한다. 결말에서는 체육 선생에게도, 러블리에게도, 지반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들에게서 자율성을 앗아가는 건, 선생을 정치인으로 만들고 친구를 배우로 만드는 ‘권력’이다. 이 소설은 권력의 위계를 속속들이 반영한다. 단순히 정치적인 위계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간에 형성되는 젠더 권력, 퀴어와 그들을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 사이의 권력 차이가 뚜렷하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수록 지반과 러블리가 각각 여성과 트랜스젠더라는 점에 자연스레 집중한다.

지반은 테러범으로 몰려 여성 수용소에 갇힌다. 그곳의 죄수들을 소개하는 듯한 초반의 묘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여자가 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동일 범죄에 성별에 따라 다른 형량을 적용하는 것을 꼬집는 부분이다. 수용소의 한 여성은 남편에게 염산 테러를 당했지만, “어떻게 해선지 그녀가 감옥에 있다”권력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작가는 여성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조명한다. 어째서 ‘정당한 형량’은 언제나 여성들에게만 적용될까. 지반의 의문은 독자들의 질문이다. 남성에게는 언제나 의문투성이인 형량이 내려지는 것을 단적으로 비판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러블리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인도에서 트랜스 여성은 ‘히즈라’라고 불리며 ‘신과 가까운 존재’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은 히즈라에게 복을 빌어달라는 요청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히즈라와 복을 별개로 여긴다. 러블리가 한 아이에게 복을 빈 다음, 그 아기의 어머니가 “손을 닦고 또 닦는” 것은 사람들이 히즈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도의 현실이다. 히즈라를 신과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그들을 ‘숭배’ 또는 ‘경배’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들을 배척하고 낙인찍는 행위에 가깝다. 히즈라를 사회에서 격리하는 동시에 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요청은 기만적이다. 그러나 연기 학원비를 벌기 위해 러블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복을 빌어준다.

러블리는 ‘자매들’이 형성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가족이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자 스스로 그들을 떠났다. 러블리의 도피는 수많은 퀴어가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하는 ‘탈출’이다. 퀴어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한 공동체를 자력으로 구성해야 한다. 배척이 도사리는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러블리는 ‘러블리’라는 이름을 만든다.

지반과 러블리의 상황을 충분한 분량으로 제시하는 초반은 만연한 사회적 위계 차이를 나타내는 한편, 둘의 관계에 끈끈한 유대감이 있음을 보여준다. 연대 이상으로 그들을 결속하는 감정이 있다. 아무도 깰 수 없을 것 같은 그 관계를 증명하는 듯, 러블리는 법정에서 지반이 결백함을 증언한다. 소설의 중반까지 둘의 우정은 언제고 깨지지 않을 것 같다. 지반의 어머니는 법정에서 지반을 위해 증언하겠다는 러블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반이 나한테 당신이 아기와 신부 축복을 잘한다고 말한 적 있어요. 오늘 당신은 이 어미에게 가장 큰 축복을 내려줬네요.” 지반의 어머니는 이전까지 러블리가 복을 비는 행위를 그녀와 분리해서 보았던 사람들과 다른 태도를 보인다. 러블리는 지반의 어머니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들의 다른 편에는 삼인칭으로 서술되는 ‘체육 선생’의 시점이 있다. 체육 선생의 이야기는 지반과 러블리와 달리 삼인칭으로 쓰인다. 그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인물이다. 남성이고, 정치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쓰며, 결국 정치인이 된다. 그는 지반을 가르친 선생이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결정적으로 지반의 상황을 왜곡한다. 체육 선생은 전형적인 남성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권력을 탐할 타당한 이유가 조금은 있었다. ‘선생’이라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사람들은 그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체육’을 가르친다는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선생으로서 살 때는 전혀 몰랐던 권력의 맛을 느낀다. 그리고 발을 뺄 수 없는 늪지대에 몸을 담근다.

이 세 인물이 한 장면에 담기는 것은 법정에서다. 지반의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 러블리와 선생의 입장은 정반대다. 러블리는 극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지반을 강하게 변호한다. 하지만 체육 선생은 교묘하게 지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다. 체육 선생뿐 아니라 지반의 이야기를 왜곡한 푸르넨두라는 이름의 기자도 지반의 상황을 악화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온갖 이해관계가 한눈에 보이는 법정 장면은 독자들에게 인물들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그 후 입장이 완전히 달라지는 건 러블리다. 의외의 전개다. 러블리의 증언은 결정적이었지만, 그만큼 그녀의 앞날에 걸림돌이 된다. 러블리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는다. 테러리스트를 옹호한다는 시선은 그녀가 배우 일을 하는 데에 불리할 수 있다. 사실, 확실히 불리하게 흘러간다. 히즈라이기 때문에 견뎌야만 했던 부당함을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지반을 버리면 찾아온다. 슬프게도, 이런 상황에서 친구를 선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앞서 지반의 어머니가 유일하게 러블리를 의지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이 상황이 안타깝다. 정치와 위계가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의 인간적인 관계를 한순간에 흩어버리는 과정이 너무나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체육 선생은 지반의 자비 청원을 무시한다. 그리고 ‘테러범에게 합당한 형벌을 내린 정당’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 자신이 따르던 정치인 비말라 팔을 총리 자리에 앉힌다. 러블리 역시 지반을 모르는 사람처럼 여기며 탄탄대로를 걸어간다. 이 두 사람의 성공과 대비되는 건 지반의 비참한 죽음이다. 자비 청원이 무시되고, 유일하게 믿던 변호사마저 정치인이 된 체육 선생의 사주에 넘어간다. 소설을 읽으며 지반이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라 믿던 독자들은 점점 가망이 없어짐을 느끼다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지반의 죽음을 보며 충격에 빠진다.

체육 선생에서 정치인으로, 친구에서 배우로 두 인물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는 동안,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이해관계에 얽혀 허우적대는 동안, 누군가가 지반에게 테러범이라고 저격하는 글을 쓰는 동안, 무고한 젊은 여성은 나라에게 죽임을 당한다. 물론 진짜 테러범은 합당한 중형을 선고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반은 확실한 누명을 썼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다고 할지 모를 만큼 끔찍한 여론몰이 속에서. 해결할 수 없이 견고한 위계 아래에서.

.

맺으며

이 소설은 거의 가장 완벽한 흐름과 호흡, 그리고 결말을 갖고 있다. 만약 작가가 구조와 복선과 결말까지의 모든 과정을 계산했다면 그 어떤 작품보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모든 요소를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사소한 시점과 인칭부터 다각화된 인물과 입체적인 설정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는다. 메시지가 명확하고 그것을 위한 형식과 심리 묘사가 정확한 궤도에 오른 기차처럼 순리대로 진행된다. 영상 콘텐츠와의 결합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본다면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결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완성도 높은 소설이 작가 메가 마줌다르의 첫 장편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설렘에 널뛰는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지만, 정말 이 책이 처음이었다. 지금 이 작품에 쏟아지는 여러 찬사를 읽어보니 모두가 한마음으로 충격과 놀람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작게는 개인의 상황, 크게는 ‘인도’라는 국가의 상황, 더 크게는 모든 이해관계를 감싸는 이 소설은 매 문장이 결말을 향한다. 명사수가 쏜 한 발의 화살처럼 날아가 정확히 과녁의 10점을 맞춘다.

『콜카타의 세 사람』은 ‘over’로 요약할 수 있다. 과연 무엇이 넘칠까. 소설 속 상황이 기대 이상이다. 이 소설이 한 작가의 첫 장편이라는 게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자를 이렇게 놀라게 하는 작품이 있다면 ‘game over’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 소설의 감상을 물어온다면 우선 다음과 같이 시작해야겠다.

모든 것이 넘치도록 완벽한 소설이었다.


본 리뷰는 개인 홈페이지의 리뷰를 전문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ijeya.com/2021/08/30/북하우스-메가-마줌다르-『콜카타의-세-사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은 주로 장편 소설로 널리 알려진 공포 소설가다. 사실 ‘공포 소설가’라고만 그를 소개하는 것은 항상 부족하고 최상급의 수식어를 과하게 붙이고 싶다. 킹의 소설은 미디어 장르에 걸맞는 분명함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소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의 원작인 경우가 많다.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킹의 단편과 중편 역시 다양한 매력이 있다. 그를 탁월한 소설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 모두가 공감할 만한 것은 그가 장편과 단편, 길이에 상관없이 높은 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작자라는 점이다. 국내외 독자들의 반응에 힘입어 출판사 여러 곳에서 킹의 단편집을 출간했다.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찾아 있는 중에 어느 이야기를 읽고도 불만이 없었으니, 나도 이제 그의 팬이 된 걸지도 모른다.

『피가 흐르는 곳에』는 킹의 짧은 이야기를 ‘더 읽고 싶다’라고 생각한 즈음에 출간되었다. 물론 단편이라고 할 만큼의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는 않다. 묵직한 무게의 소설이 네 편, 페이지로는 600쪽이 넘는다. 중단편집이라는 소개에 걸맞게 두꺼운 책을 받아보며 한 것 기대했다. ‘많은 기대’는 종종 실망이 되기도 하지만, 킹의 소설은 얼마만큼의 기대를 하든 그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짧은 소설을 즐겨 읽고, 킹은 장편을 잘 구성하는 작가인데, 중편이면 그래도 원만한 합의를 하며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합의는 취향이 아니라 ‘부족한 시간’과 하는 것이다. 내 취향은 이미 킹에 흡수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는 크고 붉은 쥐와 그 주변에 흩어진 혈액, 그리고 묘지가 그려져 있다. 각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요소를 하나씩 뽑아 표지에 배치한 것인데 출판사에서 좋은 선택을 했다. 가장 크게 강조되는 건 쥐, 그리고 피이다. 이 둘은 각각 「쥐」와 「피가 흐르는 곳에」에서, 그리고 무덤 이미지는 「해리건 씨의 전화기」에서 선택한 듯하다. ‘피가 흐르는 곳에’의 원제는 ‘If it bleeds’이다. 원제에서는 피가 흐르는 행위에, 그리고 번역된 제목에서는 피가 흐르는 ‘장소’에 주목했음을 볼 수 있다. 국내 독자들의 정서에 맞춰 직관적으로 잘 번역된 제목이다. 표제작인 「피가 흐르는 곳에」가 ‘특종을 잡을 수 있는 장소’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점이 독자들에게 잘 다가오도록 좋은 의역을 했다.

실린 작품은 순서대로 「해리건 씨의 전화기」, 「척의 일생」, 「피가 흐르는 곳에」, 「쥐」이다. 네 개의 이야기에서 기승전결의 구성이 잘 드러난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무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는 ‘분명한 공포’에 중점을 두어 독자를 사로잡는다면, 「척의 일생」은 공포보다는 한 사람의 생애에 중심을 둔다. 결말에 은근한 무서움이 깃든 두 번째 이야기를 지나면 길고 환상적인 추리 스릴러 장르의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가 기다리고 있다. 마무리는 소설을 쓰기 위해 으스스한 장소에 진입하는 작가의 이야기인 「쥐」이다. 각 소설은 ‘청각’, ‘예지(叡智)’, ‘변장’, ‘거래’에서 오는 공포를 주된 테마로 잡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양한 감각의 공포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첫 소설인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책의 뒤표지에 쓰인 문구로 한 번에 요약할 수 있다.


“그 아이디어는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했던 어린 시절의 내 머릿속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묘지에서 전화벨이 울린다는 설정 말이다.”


이 문장은 작품을 간결히 설명한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상당히 직관적인 공포가 소설 전반에 분위기처럼 깔려 있다. 고전적으로 다루어지던 ‘죽은 자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는 자칫 관습적으로 보일 수 있는 주제지만, 작가는 전화벨이 울리는 지점을 두려움의 기폭제로 삼는다. 청각적으로 고조되는 긴장은 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된다. 공포영화에서 긴장감을 주기 위해 삽입하는 효과음의 역할을 텍스트와 상황 설정으로 잘 구성해낸 예이다.

주인공 크레이그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 가운데에 있다. 이 욕망은 그가 지속해서 해리건 씨에게 전화하는 이유를 만든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의 휴대전화로 전화한다. 그리고 죽은 해리건 씨로부터 답신을 받는다. 해리건 씨가 살아생전에 크레이그에게 정을 느꼈고, 두 사람이 나이를 떠나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은 초반부에 묘사된다. 세세한 사례를 통해 둘의 유대감이 가장 단단해지는 순간, 해리건 씨가 죽는다. 해리건 씨의 죽음은 소설 안에서 큰 전환점인 동시에, 비로소 공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복수를 위해 전화기를 이용하던 크레이그는 어떤 시점에서 그것에 회의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래된 아이폰을 바다에 던진다.

아이폰의 세대 변화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드러냈다는 것도 이 소설의 소소한 특징이다. 오래된 기계에 마치 사람의 영혼이 깃든 것처럼 보이고, 사용될 리 없는 휴대전화가 울린다는 점이 자연 현상을 거스르는 으스스함을 준다. 크레이그가 신문사의 기술자인 프랭크 제퍼슨과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는 ‘잇새에 낀 오도독뼈처럼 영혼이 기계에 끼어 이을지 모른다’라는 킹 특유의 재치를 볼 수 있다. 기술적인 오류가 아닌 진짜 영혼이 아이폰에 갇혀 있다면, 그리고 그 기계가 지금 자신의 손에 있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일은 또 없다. 이렇게 킹은 정교한 인과관계와 플롯, 개그를 통해 신선한 권선징악을 그려냈다. 강렬한 재치와 넘치는 속도감은 이 소설이 책의 가장 첫 이야기가 되어야만 했음을 알려준다.

다음 소설인 「척의 일생」은 앞서 보인 환상적인 공포를 중화하려는 듯, 아주 차분하고 꼼꼼한 느낌의 문장으로 쓰였다. 온 동네에 갑자기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광고가 걸린다. 이 상황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 「척의 일생」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을 제시하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후 그 광고의 주인공인 ‘척’의 일생이 그의 시점에서 역순행적으로 그려지는데, 되감기는 시간 안에는 제목 그대로 한 사람의 일대기가 담겨 있다. 직선으로 구성했다면 밋밋했을 ‘인생’을 죽음 앞의 노년에서 유년으로 되감는 구성에 주목할 만하다.

척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통해 ‘금지된 구역’인 다락방을 접한다. 그곳에 올라가면 한 사람의 죽음이 보이고, 그 죽음은 결국 그대로 이루어진다. 척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여러 사례를 통해 그 괴담은 점점 분명해지고 할머니의 죽음으로 증명된다. 이후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척은 할아버지의 장례 이후, 궁금함을 참지 못한 채 다락방에 올라간다. 그리고 죽기 직전의 한 사내를 본다. 이 장면은 소설의 초반, 척이 죽어가던 장면과 겹치며 수미쌍관을 이룬다. 앞과 뒤가 맞물리는 결말을 통해 작품의 배경으로 깔린 으스스함이 완성된다. 금기를 깬 척은 자신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척의 일생」을 완독하면 수많은 생각이 겹친다. 한 사람의 생에 집중한 공포소설이라니. 마치 다큐멘터리와 공포영화의 조합처럼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킹은 ‘이것도’ 해낸다. 가장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년기의 금기사항을 들어 ‘다락방’을 죽음이 깃든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삶에서 죽음까지의 사유를 담는 이야기라 서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아마 바로 앞의 소설이 「해리건 씨의 전화기」여서 잔잔하게 보이는 듯하지만) 은근한 방법으로 고전적인 소재를 회귀의 시간대에 잘 결합한 작품이다.

「피가 흐르는 곳에」는 가장 긴 분량의 소설이자, 이 책의 허리에 해당한다. 그만큼 무게감 있고, 작정하고 단단한 플롯을 잡은 작품이다. 이 소설 역시 어느 정도의 수미쌍관을 보이는데, 하나의 사건이 모두 해결된 후, 홀리의 구술일지가 랠프 앤더슨 형사에게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홀리의 음성은 매우 다급하며, 위급한 계획의 직전에 그녀가 놓여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다음 장면 역시 충격적이다. 한 학교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킹의 소설에서 종종 보이는 초반부의 강렬함과 속도감이 잘 집약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아주 독특하다. ‘온도스키’라는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실 온도스키는 여러 정황으로 알 수 있듯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적하는 홀리의 시도는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다. 온도스키라는 비현실적이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장애물을 앞에 두고 그녀가 어떻게 상대를 제압할 것인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분명 홀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온도스키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성공하겠지만, 그 과정과 결말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 작품에서는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책의 제목을 연상시키는 이 문장은 ‘If It bleed’라는 제목을 왜 ‘피가 흐르는 곳에’로 번역했는지를 잘 설명한다. 기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 말은 특종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그들 속에서 홀로 남의 공포와 두려움을 먹는 기자 온도스키의 캐릭터를 부각한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이유로, (어쩌면 큰 비극을 찾는다는 방향 자체는 같을 수 있겠지만) 그곳에 간 온도스키가 하는 행동에 주목하도록 한다. 특종에는 관심이 없는 그가 특종을 잡는 이유는 결국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온도스키에게는 ‘피가 흐르는 곳에 ’두려움‘이 있다’라는 문장이 더욱 와닿았을지 모른다. 이렇듯 온도스키의 신비함은 ‘기자-테러범-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그의 캐릭터가 변모하는 모든 순간에 녹아든다.

「피가 흐르는 곳에」에는 홀리의 추적에 크게 변곡점을 주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할아버지 벨(댄 벨)과 그의 ‘철저하게 게이인’ 손자 벨(브래드 벨)이다. 그들은 홀리를 제외하고 온도스키의 이상함을 알아채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들은 자칫 ‘환상적인 존재’에 머무르며 이야기에서 붕 뜬 느낌을 줄 수 있는 온도스키의 무게를 잡는다. 주인공 혼자 가상의 존재를 추적하는 것보다는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가 있다면 이야기의 당위성이 확보된다. 그 ‘동료’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댄 벨과 브래드 벨이다. 할아버지 벨은 긴 시간 온도스키의 정체를 파헤치며 모은 모든 자료를 홀리에게 보인다. 그 후 홀리의 조사에는 전과 다른 속도가 붙는다.

온도스키는 결국 ‘감정적으로’ 대응한 탓에 홀리에게 붙잡힌다. 그리고 끔찍한 결말을 맞는다.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독자들은 조금 의아할 수 있다. 온도스키의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보통 사람보다 길게 살 수 있었는지, 얼굴을 완벽하게 바꾸는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 잘 알려진 이물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는 그냥 ‘죽는다’. 그러나 이것을 미완성의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온도스키의 정체가 반드시 밝혀지는 것이 최선일까.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를 없애는 데에 있다. 추가의 비극을 막는 데에 있다.

온도스키가 누구인지, 왜 그런 특별한 능력을 얻었는지 암시하는 부분은 있다. 그가 추락한 후 홀리는 무언가를 찾는다. “그녀가 찾는 것은 온도스키가 아니라(…)특이하게 생긴 벌레다”. 홀리가 찾는 벌레는 온도스키를 잔혹한 테러범으로 만들었다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벌레가 사라졌다는 것은 온도스키가 완전히 인간 외적 존재가 아니라 벌레의 조종을 당한 숙주였음을 보인다. 온도스키의 정체가 환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사실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어디에선가 또 그와 같은 범죄자가 발생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런 존재가 더 있겠느냐고?”라는 물음도 범죄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범죄는, 그리고 온도스키는 하나가 아니다.

이렇게 사실적인 추리소설을 한 편 읽고 나면 비교적 환상적인 공포가 기다린다. 「쥐」는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해 한 통나무집을 찾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는 단편만 여러 편을 쓰다가 장편을 쓰는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장소를 골랐지만, 어쩐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연출된다. 폭풍이 불어온다는 일기예보, 그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노인 ‘빌’의 소문은 초반의 긴장감을 높이며 소위 말하는 ‘금기’의 영역을 드류가 침범했음을 알린다. 게다가 드류는 그 집에서 감기에 걸린다. 이 소설은 공간에서 오는 공포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뿐 아니라 ‘이물과의 계약’이라는 특수한 요소를 삽입해 보다 친근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제목이 「쥐」라는 점에서 쥐가 등장하리라는 예상은 쉽지만, 생각보다 쥐는 늦게 모습을 보인다. 중간까지는 듀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초중반의 플롯이 탄탄하게 짜였다는 점이 후반에서 쥐와 듀스의 거래에 힘을 실어준다. 듀스에게는 자신의 소설을 완결 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있었다. 그랬기에 홀로 장편을 쓰기 위해 집을 떠났고, 감기에 걸린 상태로 집필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소설을 쓰는 데에 집착한다. 듀스의 감기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는 쥐를 발견하고 쥐와 대화를 한다. 당연히 쥐와의 대화는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킹은 이 지점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다.

「피가 흐르는 곳에」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책에서는 아주 환상적인 장면도 사실적으로 쓰인다. 척이 자신의 마지막을 보는 순간, 그리고 온도스키가 죽는 순간, 쥐와 듀스가 거래하는 순간은 모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양 담담하게 서술된다. 이 책에서는 어떤 일도 사실적이다. 그리고 모든 ‘사실’이 하나씩 맞물려 공포를 형성한다. 실제와 가상을 넘나드는, 때로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의 연속이 두려움을 만든다. 스탬퍼 부부의 죽음이 그렇다. 예측이 가능하고 주인공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계약 조건은 ‘천사’와 하는 약속이겠지만, 이건 ‘악마’와의 거래다. 듀스는 자신의 장편 소설을 위해 한 사람,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의 목숨이 대가로 지불되는 것을 본다. 그는 다시 통나무집에 찾아가 쥐를 찾고 그와 대화를 나눈다. 역시, 쥐는 악마였다.

스티븐 킹의 소설이 보이는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실제와 가상, 아마도 그 이상의 지점에도 그의 작품은 위치한다. 그를 무엇이라 소개할지 모르겠다는 망설임은 단순히 그가 훌륭한 작가라서, 최상급의 수식어를 더는 찾지 못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실제로 스티븐 킹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수식어를 쓰면 저 말이 필요하고, 그 말을 가져다 쓰면 또 채워야 할 공간이 보인다. 우리는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색채를 꾸준히 유지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곧 장르다’라는 말을 한다. 킹이 바로 그렇다. 공포소설에는 ‘스티븐 킹’이라는 장르가 있다.

『피가 흐르는 곳에』는 그런 킹의 소설에 유감없이 감탄할 수 있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의 소설은 매번 놀랍지만, 모두 다른 유의 놀라움이다. 상상치 못한 기발함에 감탄하거나(「해리건 씨의 전화기」), 구성에 재미를 느끼거나(「척의 일생」), 치밀함에 빠져들거나 (「피가 흐르는 곳에」), 공간에 몰입한다(「쥐」). 그의 소설에는 한 가지, 또는 여려 갈래의 모험이 있다. 오싹함은 덤이고 공포는 선물이다. 저항 없이 빨려드는 감각에 책을 더 읽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가장 많이 쓸 수밖에 없는 말이 있다. (아마 바로 이전에 쓴 그의 책 감상에서도 마지막으로 이 문장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는 스티븐 킹이다.’ 다른 말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본 리뷰는 개인 블로그의 리뷰 전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읽기 : https://m.blog.naver.com/sol_narae98/2224804208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허블의 새로운 소설집. 새로 알게 된 SF 작가.
오정연 작가의 7개 단편이 실린 소설집.

우주를 배경으로, 화성을 배경으로, 인공지능과 인간과 삶, 그리고 죽음을 면밀히 연결하는 작가의 문장이 아름답다. 하나의, 또는 여러 개의 분야를 깊이 알고 사랑하는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꼼꼼한 소설들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역시 표제작 「단어가 내려온다」. 사실 '가장'인상적이라는 말이 무의미하다. 모든 작품의 색이 진하다. 오랜만에 '이 작가를 알게 되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책.

「분향」이나 「마지막 로그」,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등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돋보였는데 하나의 테마나 공간을 정해두고 쓰기를 즐기는 작가 같다. 그 안에 녹아든 진지함이 마음에 들고 연작이나 비슷한 느낌의 작품을 많이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당연히 페이지가 휙휙 넘어가는 즐거움도 있고.

"행성을 하나로는 부족해서 두 개씩이나 말아먹겠다니 그거 정말 욕심이 끝도 없네요." -「행성사파리」 중

「행성사파리」는 설정이 인상적이다. 공간의 차이를 통해 시간을 변화시키는 작가의 상상에 일면 놀랐고 존재와 윤리에 대한 사유, 인간종과 동물종, 그리고 우리 행성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미아'의 삶과 행성사파리를 연관짓는 부분에서 개인과 우주를 연결하는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일식」도 기억을 보는 관점이 새로웠다. 지금껏 기억의 저장을 다루던 소설들과는 색다른 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인터뷰를 엮은 형식과 배경 이야기가 두루 잘 어울렸다.

당연히 작가는 제목과 인물의 이름을 설정하는 데에 능숙해야 하지만 오정연 작가는 그 당연한 것을 탁월하게 해낸다. 인물과 사건과 배경과 제목이 하나로 이어져 단단한 심지를 형성한다.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은 지금도 읊조리면 살짝 소름이 돋을 만큼 좋은 제목이다. 오래오래 사랑할 작가를 알게 되었다.





본 리뷰는 개인 SNS에 업로드한 리뷰를 일부 옮긴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www.instagram.com/p/CQco0Zctd3R/?utm_medium=copy_link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남주 작가의 신간이 나온다. 이 소식을 듣고 괜히 설렜다. 하지만 동시에 놀랐다. 나는 그의 소설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남주 작가의 팬이나 열혈독자, 그리고 그의 소설을 알기만 하는 일반인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내가 끼어 있다. 작가의 신간을 빼먹지 않고 읽는 부류는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단편집의 출간에 갑자기 마음이 붕 뜬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독자로서 조남주 작가를 알게 된 건 2016년, 『82년생 김지영』이 시작이었다. 이후 2017년, 「현남 오빠에게」를 읽었다. 2018년, 작은 책자로 나온 「가출」을 읽었다. 2019년, 『사하맨션』을 읽다 말았다. (도서전에서 받은 사인본이었는데, 동시에 파본이었다. 그 뒤로 언젠간 새로 사야지,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 못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작가의 작품을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한마디로 띄엄띄엄이다. 심지어 읽다 말기도 했다. 어떤 책도 설레며 기다린 후에 읽지 않았다. 서점에서 보이니까 샀고, 그래서 읽은 것뿐이었다. 내가 그의 소설을 보는 빈도는 이러했다. 그러니 신간에 특별히 마음이 동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나의 의아함과는 관계없이 손가락은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신간이 신청되어 있었다. 읽고 서평을 쓰겠습니다. 약간 흥분한 사람의 어조로, 하지만 단정하게 출판사로 문자를 보냈다. 기왕 읽게 된 거, 나는 마음보다 몸이 빨리 반응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생각보다 오래 고민이 이어졌다. 나는 왜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읽었는가. 그리고 그 경험은 어떠했는가. 조남주 작가의 신간 소식에 마치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책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혹시 너무 무턱대고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읽겠다는 답을 드렸나.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은 도착했고, 나는 첫 페이지를 폈다. 하루 반나절의 고민이 무색하게, 나는 작가의 작품에 몸이 반응한 이유를 찾아냈다.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모든 작품을 펴던 나의 심정은 거의 비슷했다. 기대도 흥분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소설을 읽기 전뿐이었다. 조남주 작가의 작품은 맹숭하게 책을 편 나조차 어쩔 도리 없이 몰입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순간 과거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김지영과 이름 없는 ‘나’(「현남 오빠에게」의 서술자), 그리고 또 다른 ‘나’(「가출」의 서술자), 사하맨션의 사람들에게 몰입했던 순간이 이 단편집을 읽는 내 위에 겹쳐졌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읽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완독한 나는 하염없이 며칠간 젖어 있었다. 내 인생의 연장 어디쯤 존재할 것 같은 그녀들이 마음에서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노란색 가제본(0판 1쇄) 도서에 찍힌 제목은 『우리가 쓴 것』이었다. 단편의 제목을 딴 것이 아닌, 오로지 책에 붙은 새로운 이름이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여러 번 읽은 독자라면 ‘우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 것이다. ‘여성’. 나는 주로 성인 여성의 삶을 그린 그의 소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우리’라고 부를 만큼의 다양성이 있을까. 잠깐 걱정이 되었다.

“청소년에서 노년에 걸친 다양한 / 여성들의 삶을 새롭게 보기 위한 / 다시 이야기하기, 다르게 이야기하기”

청소년에서 노년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 이 책의 취지가 한눈에 보였다. 수록 작품의 정보를 보니 2012년부터 2021년까지의 시간이 쓰여 있었다. 꽤 오랜 흐름을 담았다. 발표 지면 역시 다양했다. 갑자기 많은 작품을 읽지 않고 작가의 작품을 단정해버린 것 같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유명하고도 강한 영향력을 가진 책으로만 조남주 작가를 알고 있던 건 아닐까. 이렇게 많은 단편과 더 많은 장편이 있을 텐데. 나는 작가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9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기간 안에 작가는 어떤 작품으로 여성의 삶을 쓰고 싶어 했을까. 이 책은 왠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수업으로, 귀동냥으로 SNS로 나는 조남주 작가에 관한 많은 소식을 접했다. 그는 어쩌면 최근 수년간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작가다. 그래서 종종 ‘나는 그 작가를 굉장히 잘 알고 있어’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가만히 옆을 보니 하늘까지 솟은 거짓 생각이 보였다. 누군가 ‘조남주 작가 책 추천 좀 해주세요’라고 하면 『82년생 김지영』이요, 라고 답할 수밖에 없으면서. ‘그래서 그 작가가 무엇을 쓰는데요?’라고 물어오는 사람에게 ‘여성에 대한 거겠죠’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면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첫 작품부터 다시 알아가자. 작가를 둘러싼 프레임을 벗겼다. 처음 이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나머지 작품을 읽었다. 나는 조남주 작가의 영역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싶었다.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나를 찌르는 판단이 없기를 바랐다. 이런 나의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해 조금씩 나누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기억력의 한계 때문인지 집중력이 부족해서인지 유독 인물 관계와 내용을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천천히 복기하고 있자면 참 난감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꽤 자주 이런 일이 있다. 나만의 특수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조남주 작가의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는 한 번도 이전의 내용을 잊은 적이 없었다. 유난히 바쁜 시기에 읽어 자주 읽기를 중단해야 했지만, 다음 내용을 읽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디에서 읽든 쉽게 몰입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전까지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했든 나는 이미 소설 속 주인공에 빙의해 있다. 그것이 조남주 작가가 쓰는 모든 작품의 특징이다.

나는 아동기,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살고 있다. 아직 중년, 노년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중년과 노년기의 인물을 다룬 작품은 주인공의 성별을 막론하고 쉽사리 공감하지 못했다. 종종 여성 인물에는 어머니의 삶을 대입하고는 했지만, 그것도 완전히 정확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한동안 그런 작품을 애써 피한 경험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쓴 것』은 노년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꽤나 많이 있음에도 전혀 읽는 데에 걸림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겪은 어떤 삶보다 더 공감되는 노년기 여성 인물을 만났을 때는 당황하기까지 했다. 마치 ‘여성이라면’ 가지고 있는 어떤 연대의 끈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모든 인물은 내 머릿속에서 하나로 이어졌다. 여성이 연결되는 데에 나이는 문제 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미스 김은 알고 있다」와 「현남 오빠에게」였다. 아무래도 내 가까운 미래, 또는 현재와 관련 있는 소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는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 같다. “미스 김은 그러니까, 미스 김이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미스 김은 “직함도 없고, 부서도 없고, 딱히 전담하는 업무도” 없다. 유독 ‘미스 김’이 직장인 여성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고작 성별의 정보값만 주어진 채 사회 곳곳에 위치한 여성들. 어느 순간 대체되거나 사라지는 그들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장치는 ‘그들의 도움도 지워버리는 것’이다.

당신들은 여성은 홀대하지만, 이 사회는 여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고 분명하게 말하는 소설에서 미스 김과 함께 그의 손이 닿은 모든 것이 지워지는 순간, 회사는 혼란스러워진다. 후임자인 ‘나’는 ‘자기’라고 불리는 자신의 상황이 미스 김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전한다. 그리고는 회사 안에서 미스 김의 흔적이 사라지는 과정을 담담히 서술한다. 미스 김이 누군가에게 선물한 국어사전이 사라지고 미스 김이 만든 주소록이 엉망이 된다. 미스 김이 복사기를 받쳐 놓은 ‘택배 박스 조각’ 역시 자취를 감춘다. ‘나’는 회사가 보안을 강화하는 논쟁적인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이 미스 김의 ‘택배 박스 조각’을 간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나’도 미스 김과 다르지 않음을, 하지만 있는 힘껏 미스 김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미스 김’과 ‘자기’는 흔적을 남긴다.

「현남 오빠에게」는 앞서 말했듯 이미 읽은 작품이다. 가스라이팅을 비롯한 남성이 여성에게 무의식중 행하는 어떤 행동을 여성의 입장으로 쓰고 있다. 남자인 너와 여자인 나는 분명히 다른 생각으로 상황을 본다, 고 소설 속 강현남은 말한다. 대체로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고 교묘히 왜곡해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식으로 밀고 나가기도 했다. 강현남과 ‘나’의 관계는 놀랍게도 특별하지 않다. (대체로 조남주 작가의 소설은 평범한 여성의 입장에서 서술되지만, 남자들은 이를 굉장히 특수하고 논쟁적인 상황으로 보는 듯하다) 대부분의 여성이 어쩌면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담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동시에 이 편지를 받은 강현남이 얼마나 극도의 울분에 사로잡힐지 안다. ‘이 여자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신을 ‘제멋대로 판단’했다고 노발대발할 장면이 그려진다.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그는 ‘한남’이다.

「매화나무 아래」와 「오로라의 밤」은 ‘중년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인다. 「매화나무 아래」의 동주는 금주, 은주 언니의 뒤를 따라 태어났지만 ‘말녀’라는 이름으로 환갑이 넘도록 산다. ‘말녀’에는 여자아이를 그만 낳고 남자아이를 낳고 싶다는 뿌리 깊은 남자아이 선호사상이 담겨 있다. 환갑이 넘어 개명하는 데에 주위의 만류가 싶하지만, 동주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갖는다. ‘말녀’라는 동생의 이름에 강하게 항의하던 ‘금주’ 언니와 동주의 노년을 그린 이 작품은 정말 담백하고 조금은 아름답게 그녀들을 보여준다. “이제 알겠다. 금주 언니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라는 동주의 마지막 독백은 그녀의 노년을 함축하는 어떤 깨달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오로라의 밤」에서는 ‘준철’이라는 남성을 사이에 두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지내던 두 여성이 등장한다. 준철의 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인물이 연대하는 묘한 기류를 만든다. ‘나’의 시어머니가 말하는 “내가 준철 에미가 아니고, 너도 준철이 집사람이 아니잖아”라는 문장은 두 여성이 모종의 이유로 연결되고 있다는 강한 암시를 준다. 김미현 평론가의 말처럼 작품 속 오로라는 “여성의 과거를 화려한 색으로 비춰주면서” “새로운 미래”의 “역동적 에너지“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밋밋하지 않은 색의 공감을 형성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성’과 ‘여성’이라는 연대 의식을 조성함으로써 작가는 ‘여자의 적은 여자이다’라는 말을 부정한다. 고부는 갈등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아니다. 결국 ‘여성의 편은 여성이다’.

「가출」은 노년 남성의 상황을 딸의 시선으로 그린다. 하지만 가출한 남성의 삶은 생각보다 중심에 위치하지 않는다. ‘실종’이 아니라 ‘가출’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노년의 생에서 보이는 상실감을 조명한 이 작품에서 독자는 두루 모든 이를 둘러본다. 유독 많은 인물이 나오는 이 작품의 색은 단순하고 약간은 흐리다. 아버지가 보내는 생존의 신호는 절박하지 않다. 약한 연결로 아버지와 딸은 이어진다. ‘나는 여기에 잘 살아있단다’라는 메시지가 간간이 들려 온다. 「가출」은 노년의 누군가가 저지른 과감한 일탈이 아닌, 생에서 한 번쯤 맛보고 싶은 잔잔한 자유를 그린 작품이다.

「오기」는 악플러를 고소하던 작가에게 벌어진 일을 주제로 한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 우연히 과거에 자신을 가르친 선생의 삶과 겹쳐져 벌어진 오해였다. 최근 여러 작가가 성 소수자인 지인의 삶을 작품에 담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소설이긴 하지만,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타인의 삶을 작품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작가는 굉장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나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 누군가의 보편적인 상처를 건드린다면 어떨까. 그것이 우연히 지인의 상황과 겹친다면, 이것도 작가의 잘못일까. 아니 그전에,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일까. 자신의 삶이 작품에 도용되었다고 여긴 선생은 작가에게 악플을 단다. 악플러가 잘못인가, 작가가 잘못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상처를 두 사람에게 준 이들의 잘못인가, 그것을 방관한 사회의 잘못인가. 어떤 상처도 보편적이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아픔이 일반화된 사회가 가장 조용하고 광범위한 가해자일 것이라고,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한 학교에서 벌어진 학생 간 ‘불법 촬영’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졸업한 한 중학교의 사건이 떠올랐다. 남학생 네 명이 여학생의 사지를 붙잡고 복도에서 치마 속을 촬영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그 일을 사춘기 남학생들의 ‘몹쓸 짓’으로 여겼다. 그 학교는 남다른 전과를 가진 학생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그 불법 촬영은 길을 가면 평범히 볼 수 있는 남자애들이 벌인 짓이었다. 나는 그런 ‘평범한’ 남자애들을 가르친 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저들은 뜻도 모른 채 속어로 쓰는 말을 많이 알 수 있었다. 남학생들은 예외 없이 보나 마나 남자인 자기 친구를 욕하며 꼬박꼬박 ‘년’자를 붙인다. 엄마를 ‘창녀’로 칭하는 줄임말을 쓰거나 ‘니’와 ‘애미’를 연달아 말하며 남의 엄마를 욕보이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그런 청소년들의 현실이 여실히 담겨 있다. 여자아이는 그런 남자애들에게 어떻게 대항해야만 하는지, 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모는 어떻게 다른 태도를 취하는지.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현실적이어서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현실’을 다루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손녀’인 주하가 겪는 또래의 사건이 수평적으로 펼쳐지는 동시에 주하의 할머니, 엄마, 본인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담론 역시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세대를 이어 온 여성과 가장 최근 청소년의 이야기가 맞물리며 결국은 하나의 사회를 묘사한다.

「첫사랑 2020」은 코로나 시대의 현실을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시점으로 풀어낸다. 역병의 시대에도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이야기의 무게는 가장 가벼웠지만, 최신의 사회 흐름을 반영했기에 공감도는 가장 높았다. KF94 마스크를 아껴서 선물하고 선생님에게 헤어짐을 고백하며 우는 두 아이가 귀여운 한편 안쓰럽게 보이는 작품이었다.


이 감상을 적는 짧은 시간에도 카페에 앉은 남자 초등학생 다섯 명이 ‘야 근데 여자애들은 지나가다 치기만 해도 성폭행이라고 그러냐’라는 주제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평소였으면 체념과 동시에 분노가 솟구쳤겠지만, 이제 한편으로 놀랍다. 여전히 남자애들이 건드려도 여자애들은 침묵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시대다.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를 크게 외치지 않아 ‘네가 당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여자애’들은 살아야 한다. 나는 속으로 그 남학생들의 반 여학생들에게 응원을 보냈다. 더 큰 목소리를 내라고. 더 많이 소리치라고. 그건 틀린 게 아니라고.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읽어 다행이다. 이제 내가 사는 지금을 마냥 불편하게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나와 함께 이겨내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포기하지 않는 누군가의 걸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강현남에게 ‘이 개자식아!’라고 소리치는 ‘나’처럼 시원하게 소리치거나 ‘미스 김’을 기억하는 ‘나’처럼 애써 잊지 않아야 할 것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오로라가 황홀한 중에 상대와 손을 잡을 줄 알고 힘써 나의 진짜 이름을 되찾아야겠다.

이 책은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위해 쓰였다.


본 리뷰는 개인 페이지의 글을 수정하여 업로드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ijeya.com/2021/06/20/민음사-조남주『우리가-쓴-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 베를린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채혜원 지음 / 마티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로움’은 한 존재가 관계 맺지 못함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것은 흔히 ‘함께 있지 못함’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분위기 안에서 외로움이 시대의 분위기를 형성할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 걸 보면, 지금 가장 사회에 만연한 감정은 외로움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외롭다는 건 비단 혼자 있을 때만 드는 생각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불현듯 혼자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심지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내가 혼자라는 소외감이 찾아온다. 외로움은 물리적 관계로 인해 생기고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적인 관계가 멀어짐에 따라 발생한다. 개인주의나 파편화가 외로움의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쓴 채혜원 작가는 ‘여성의 외로움’에 초점을 둔다. 여성은 왜 종종 ‘혼자라는 생각’을 할까. 그 답은 사회 공동체적 무관심에 있다. 공감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갈수록 외로움은 더욱 진해진다. 최근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객관적인 수치와 지표를 들지 않더라도, ‘차별’이나 ‘혐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여성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금, 여성이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책은 상당한 시의성을 띤다. 특별히 어떤 여자도 혼자가 아니다 (No woman* is alone)”라는 서문의 제목은 마음의 울림을 준다.

.

“This book is dedicated to ‘International Women* Space’ and all my sisters in Germany and Korea.”

“사랑하는 International Women* Space 동료와 독일 & 한국에 있는 나의 모든 자매들에게 바칩니다.”

.

‘자매들’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따뜻하다. 그리고 괜히 뭉클하다. ‘혼자라는 감각’에 가득 둘러싸여 살던 이들에게는 울컥, 무언가 올라오는 연대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등장하는 Woman*/Women*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작가는 책 안에서 ‘여성’의 뒤에 별표(*)를 붙인다. 이는 International Women* Space, 줄여 IWS라고 불리는 독일의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의 표현을 따온 것으로 독일어 줄임말 FLTI(여성, 레즈비언, 트랜스, 섹슈얼 및 인터섹스, 남녀가 아닌 제3의 성별을 뜻하는 논바이너리 등을 모두 포함)를 의미하는 용어다.

여성으로서의 연대는 ‘여성’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여성의 범위를 정하는 일’은 ‘나는 여성이고 너는 아니야’라는 식의 폭력이 아니다. ‘너도 여성이고 나도 여성이니 우리 함께하자’라는 뜻이다. 여성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아닌 ‘확장’하는 데에서 연대는 출발한다. 자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집단이라니. 나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한 모임이다. 그리고 이것은 외로움에서 한 걸음 멀어지는 시작이다.

이 책은 저자가 5년 동안 베를린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담백한 문체로 담아낸다. 베를린에서 여성으로서 생활하는 이야기는 사회 전반적인 상황부터 일상적이고도 개인적인 감상까지를 두루 포함한다. 특별히 인상적이라고 할 만한 부분은 ‘페미니즘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페미니즘 공간’이 조금 낯설게 들린다. 하지만 동네에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페미니스트 동기들과 함께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무해한 공간이라니. 어떤 논제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여성에게는 필요하다.

페미니즘 공간에 대한 여러 사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카페 크랄레(Cafe Cralle)에 쓰인 문구였다.

.

“자본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 등을 떠나 모든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장소를 지향한다. 이에 어떤 형태의 차별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

‘어떤 형태의 차별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 긴급하게 필요하다. 가끔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잦은 차별을 목도하면서, ‘차별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강력한 대응이 있다면 사라지지 않았을 사람들을 보며, 여성들은 안전지대를 원한다. 성차별이 없고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등에게 친화적이기도 한 공간 안에서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결속되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반면, 차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왔던가. 이 두 가지 질문은 다른 의미로 각자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다.

차별 없는 곳은 ‘아름다운 장소’다. 카페 크랄레는 이렇게 정의한다. 차별을 몰아내는 강력함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아름다운 공간 안에서 비로소 여성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느낀다.

안전한 공간이 있다면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장소와 사람을 주로 다룬다. 저자가 속한 IWS(International Women* Space)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그 안에서의 연대 역시 내용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책 안의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편안함’이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지친 기색을 보여도, 웃는 얼굴 너머에 슬픔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어도 그들은 한결같이 나를 환대해줬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며 피부감각으로 매일 느꼈다. 난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 중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매일 혼자라는 감각에 침잠하는 사람들을 구조하듯, 책 안에서는 공동체가 주는 특별한 감정을 강조한다. 가볍게 손 내밀거나 스쳐 지나가는 문구가 아니다. 허상의 누군가가 다수를 향해 읊조리는 위로도 아니다. 내 옆에 실체의 사람이 항상 있고, 그가 상황과 여건에 상관없이 내 편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 큰 위안이 된다. 그 사람은 나와 함께 발맞추어 걸어가고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때로 주저앉는 나를 위로하면서.

이 책의 표지는 다양한 색의 띠가 가로세로로 교차하는 패턴을 사용했다. 어느 책의 표지보다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누구의 색이라도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를 나타낸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와 ‘너’가 교차하고 때로 마주치는 한 지점에서 연결은 이루어진다. 그것이 무수히 많이 생성된다면 ‘연대’가 되고 연대가 지속되는 사회야말로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지금은 껄끄러운 사람들이 가득한 ‘억지의 공동체’가 아닌, 모두를 환영하고 포용하는 차별 없는 공동체가 등장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 책은 오래전에 이미 나왔어야 하지만,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넓고 느슨한 무지개색 공동체’의 형성에 하나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독자로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흔히 좋은 글이 가득 담긴 책을 보면 ‘형광펜으로 모든 면을 색칠하고 싶다’라는 표현을 쓴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그런 책이다. 어느 문장 하나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내가 부자라면 잔뜩 책을 사서 여기저기 뿌리고 싶은 책이다. ‘이거 읽어 보셨어요? 참 좋은데.’라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싶기도 하다. (좀 이상해 보이려나) 결국은 책을 읽은 이들과 함께 비로소 손잡고 ‘혼자’라는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읽는 내내 마음을 채운다. 아마도 독자들 모두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상황과 베를린의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논조로 저자는 책을 쓰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베를린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위한 ‘차별 없는’ 공간과 마음껏 서로를 보아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 상황이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하지만 지역의 어딘가에는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제법 있다. 이건 우리가 작은 연대를 할 수 있다는 신호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의 색을 정하든 정하지 않든 그것은 상관없다. 공동체에 속하는 것, 그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 연대의 시작이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모임이 쉽지 않지만, 마음의 연대 역시 최선이 될 수 있다. 우리, 지금부터 연대를 하자. 그리고 여전히 사회에 만연한 woman*을 향한 차별에 대항하지는 못하더라도,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자. ‘아무 이유 없이’ 나를 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개인은 ‘혼자’에서 멀어진다. 그러니까 이제 다같이 한 걸음만 디뎌보자고 말하는 이 책에서 우리는 베를린이 아닌 한국을 읽어야 한다.

나를 지키며 집단으로 스며드는 일. 나를 지키는 집단으로 스며드는 일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본 리뷰는 개인 ㅍ이지에 업로드한 글의 전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ijeya.com/2021/05/04/마티-채혜원-『혼자가-아니라는-감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