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은 주로 장편 소설로 널리 알려진 공포 소설가다. 사실 ‘공포 소설가’라고만 그를 소개하는 것은 항상 부족하고 최상급의 수식어를 과하게 붙이고 싶다. 킹의 소설은 미디어 장르에 걸맞는 분명함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소설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영화의 원작인 경우가 많다. 그는 이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킹의 단편과 중편 역시 다양한 매력이 있다. 그를 탁월한 소설가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 모두가 공감할 만한 것은 그가 장편과 단편, 길이에 상관없이 높은 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창작자라는 점이다. 국내외 독자들의 반응에 힘입어 출판사 여러 곳에서 킹의 단편집을 출간했다. 많은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찾아 있는 중에 어느 이야기를 읽고도 불만이 없었으니, 나도 이제 그의 팬이 된 걸지도 모른다.
『피가 흐르는 곳에』는 킹의 짧은 이야기를 ‘더 읽고 싶다’라고 생각한 즈음에 출간되었다. 물론 단편이라고 할 만큼의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는 않다. 묵직한 무게의 소설이 네 편, 페이지로는 600쪽이 넘는다. 중단편집이라는 소개에 걸맞게 두꺼운 책을 받아보며 한 것 기대했다. ‘많은 기대’는 종종 실망이 되기도 하지만, 킹의 소설은 얼마만큼의 기대를 하든 그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짧은 소설을 즐겨 읽고, 킹은 장편을 잘 구성하는 작가인데, 중편이면 그래도 원만한 합의를 하며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합의는 취향이 아니라 ‘부족한 시간’과 하는 것이다. 내 취향은 이미 킹에 흡수되었다.)
이 책의 표지에는 크고 붉은 쥐와 그 주변에 흩어진 혈액, 그리고 묘지가 그려져 있다. 각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요소를 하나씩 뽑아 표지에 배치한 것인데 출판사에서 좋은 선택을 했다. 가장 크게 강조되는 건 쥐, 그리고 피이다. 이 둘은 각각 「쥐」와 「피가 흐르는 곳에」에서, 그리고 무덤 이미지는 「해리건 씨의 전화기」에서 선택한 듯하다. ‘피가 흐르는 곳에’의 원제는 ‘If it bleeds’이다. 원제에서는 피가 흐르는 행위에, 그리고 번역된 제목에서는 피가 흐르는 ‘장소’에 주목했음을 볼 수 있다. 국내 독자들의 정서에 맞춰 직관적으로 잘 번역된 제목이다. 표제작인 「피가 흐르는 곳에」가 ‘특종을 잡을 수 있는 장소’를 배경으로 하기에 이 점이 독자들에게 잘 다가오도록 좋은 의역을 했다.
실린 작품은 순서대로 「해리건 씨의 전화기」, 「척의 일생」, 「피가 흐르는 곳에」, 「쥐」이다. 네 개의 이야기에서 기승전결의 구성이 잘 드러난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무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는 ‘분명한 공포’에 중점을 두어 독자를 사로잡는다면, 「척의 일생」은 공포보다는 한 사람의 생애에 중심을 둔다. 결말에 은근한 무서움이 깃든 두 번째 이야기를 지나면 길고 환상적인 추리 스릴러 장르의 표제작 「피가 흐르는 곳에」가 기다리고 있다. 마무리는 소설을 쓰기 위해 으스스한 장소에 진입하는 작가의 이야기인 「쥐」이다. 각 소설은 ‘청각’, ‘예지(叡智)’, ‘변장’, ‘거래’에서 오는 공포를 주된 테마로 잡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양한 감각의 공포를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다.
첫 소설인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책의 뒤표지에 쓰인 문구로 한 번에 요약할 수 있다.
“그 아이디어는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했던 어린 시절의 내 머릿속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묘지에서 전화벨이 울린다는 설정 말이다.”
이 문장은 작품을 간결히 설명한다. 「해리건 씨의 전화기」는 상당히 직관적인 공포가 소설 전반에 분위기처럼 깔려 있다. 고전적으로 다루어지던 ‘죽은 자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는 자칫 관습적으로 보일 수 있는 주제지만, 작가는 전화벨이 울리는 지점을 두려움의 기폭제로 삼는다. 청각적으로 고조되는 긴장은 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된다. 공포영화에서 긴장감을 주기 위해 삽입하는 효과음의 역할을 텍스트와 상황 설정으로 잘 구성해낸 예이다.
주인공 크레이그는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 가운데에 있다. 이 욕망은 그가 지속해서 해리건 씨에게 전화하는 이유를 만든다.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의 휴대전화로 전화한다. 그리고 죽은 해리건 씨로부터 답신을 받는다. 해리건 씨가 살아생전에 크레이그에게 정을 느꼈고, 두 사람이 나이를 떠나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은 초반부에 묘사된다. 세세한 사례를 통해 둘의 유대감이 가장 단단해지는 순간, 해리건 씨가 죽는다. 해리건 씨의 죽음은 소설 안에서 큰 전환점인 동시에, 비로소 공포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복수를 위해 전화기를 이용하던 크레이그는 어떤 시점에서 그것에 회의감을 느낀다. 그리고 오래된 아이폰을 바다에 던진다.
아이폰의 세대 변화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드러냈다는 것도 이 소설의 소소한 특징이다. 오래된 기계에 마치 사람의 영혼이 깃든 것처럼 보이고, 사용될 리 없는 휴대전화가 울린다는 점이 자연 현상을 거스르는 으스스함을 준다. 크레이그가 신문사의 기술자인 프랭크 제퍼슨과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는 ‘잇새에 낀 오도독뼈처럼 영혼이 기계에 끼어 이을지 모른다’라는 킹 특유의 재치를 볼 수 있다. 기술적인 오류가 아닌 진짜 영혼이 아이폰에 갇혀 있다면, 그리고 그 기계가 지금 자신의 손에 있다면, 그것만큼 무서운 일은 또 없다. 이렇게 킹은 정교한 인과관계와 플롯, 개그를 통해 신선한 권선징악을 그려냈다. 강렬한 재치와 넘치는 속도감은 이 소설이 책의 가장 첫 이야기가 되어야만 했음을 알려준다.
다음 소설인 「척의 일생」은 앞서 보인 환상적인 공포를 중화하려는 듯, 아주 차분하고 꼼꼼한 느낌의 문장으로 쓰였다. 온 동네에 갑자기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광고가 걸린다. 이 상황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 「척의 일생」은 일상적이지 않은 상황을 제시하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이후 그 광고의 주인공인 ‘척’의 일생이 그의 시점에서 역순행적으로 그려지는데, 되감기는 시간 안에는 제목 그대로 한 사람의 일대기가 담겨 있다. 직선으로 구성했다면 밋밋했을 ‘인생’을 죽음 앞의 노년에서 유년으로 되감는 구성에 주목할 만하다.
척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를 통해 ‘금지된 구역’인 다락방을 접한다. 그곳에 올라가면 한 사람의 죽음이 보이고, 그 죽음은 결국 그대로 이루어진다. 척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여러 사례를 통해 그 괴담은 점점 분명해지고 할머니의 죽음으로 증명된다. 이후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척은 할아버지의 장례 이후, 궁금함을 참지 못한 채 다락방에 올라간다. 그리고 죽기 직전의 한 사내를 본다. 이 장면은 소설의 초반, 척이 죽어가던 장면과 겹치며 수미쌍관을 이룬다. 앞과 뒤가 맞물리는 결말을 통해 작품의 배경으로 깔린 으스스함이 완성된다. 금기를 깬 척은 자신의 마지막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이루어졌다.
「척의 일생」을 완독하면 수많은 생각이 겹친다. 한 사람의 생에 집중한 공포소설이라니. 마치 다큐멘터리와 공포영화의 조합처럼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킹은 ‘이것도’ 해낸다. 가장 원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유년기의 금기사항을 들어 ‘다락방’을 죽음이 깃든 공간으로 만드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삶에서 죽음까지의 사유를 담는 이야기라 서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아마 바로 앞의 소설이 「해리건 씨의 전화기」여서 잔잔하게 보이는 듯하지만) 은근한 방법으로 고전적인 소재를 회귀의 시간대에 잘 결합한 작품이다.
「피가 흐르는 곳에」는 가장 긴 분량의 소설이자, 이 책의 허리에 해당한다. 그만큼 무게감 있고, 작정하고 단단한 플롯을 잡은 작품이다. 이 소설 역시 어느 정도의 수미쌍관을 보이는데, 하나의 사건이 모두 해결된 후, 홀리의 구술일지가 랠프 앤더슨 형사에게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홀리의 음성은 매우 다급하며, 위급한 계획의 직전에 그녀가 놓여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다음 장면 역시 충격적이다. 한 학교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킹의 소설에서 종종 보이는 초반부의 강렬함과 속도감이 잘 집약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아주 독특하다. ‘온도스키’라는 사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실 온도스키는 여러 정황으로 알 수 있듯 사람이 아니다. 그런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추적하는 홀리의 시도는 독자들의 주목을 받는다. 온도스키라는 비현실적이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장애물을 앞에 두고 그녀가 어떻게 상대를 제압할 것인가에 집중하는 것이다. 분명 홀리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온도스키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 성공하겠지만, 그 과정과 결말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이 작품에서는 “피가 흐르는 곳에 특종이 있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책의 제목을 연상시키는 이 문장은 ‘If It bleed’라는 제목을 왜 ‘피가 흐르는 곳에’로 번역했는지를 잘 설명한다. 기자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 말은 특종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그들 속에서 홀로 남의 공포와 두려움을 먹는 기자 온도스키의 캐릭터를 부각한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이유로, (어쩌면 큰 비극을 찾는다는 방향 자체는 같을 수 있겠지만) 그곳에 간 온도스키가 하는 행동에 주목하도록 한다. 특종에는 관심이 없는 그가 특종을 잡는 이유는 결국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온도스키에게는 ‘피가 흐르는 곳에 ’두려움‘이 있다’라는 문장이 더욱 와닿았을지 모른다. 이렇듯 온도스키의 신비함은 ‘기자-테러범-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그의 캐릭터가 변모하는 모든 순간에 녹아든다.
「피가 흐르는 곳에」에는 홀리의 추적에 크게 변곡점을 주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할아버지 벨(댄 벨)과 그의 ‘철저하게 게이인’ 손자 벨(브래드 벨)이다. 그들은 홀리를 제외하고 온도스키의 이상함을 알아채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들은 자칫 ‘환상적인 존재’에 머무르며 이야기에서 붕 뜬 느낌을 줄 수 있는 온도스키의 무게를 잡는다. 주인공 혼자 가상의 존재를 추적하는 것보다는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가 있다면 이야기의 당위성이 확보된다. 그 ‘동료’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댄 벨과 브래드 벨이다. 할아버지 벨은 긴 시간 온도스키의 정체를 파헤치며 모은 모든 자료를 홀리에게 보인다. 그 후 홀리의 조사에는 전과 다른 속도가 붙는다.
온도스키는 결국 ‘감정적으로’ 대응한 탓에 홀리에게 붙잡힌다. 그리고 끔찍한 결말을 맞는다.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독자들은 조금 의아할 수 있다. 온도스키의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보통 사람보다 길게 살 수 있었는지, 얼굴을 완벽하게 바꾸는 방법은 무엇이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 잘 알려진 이물의 이름이 나오지도 않는다. 그는 그냥 ‘죽는다’. 그러나 이것을 미완성의 결말이라고 하기에는 이르다. 온도스키의 정체가 반드시 밝혀지는 것이 최선일까.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를 없애는 데에 있다. 추가의 비극을 막는 데에 있다.
온도스키가 누구인지, 왜 그런 특별한 능력을 얻었는지 암시하는 부분은 있다. 그가 추락한 후 홀리는 무언가를 찾는다. “그녀가 찾는 것은 온도스키가 아니라(…)특이하게 생긴 벌레다”. 홀리가 찾는 벌레는 온도스키를 잔혹한 테러범으로 만들었다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벌레가 사라졌다는 것은 온도스키가 완전히 인간 외적 존재가 아니라 벌레의 조종을 당한 숙주였음을 보인다. 온도스키의 정체가 환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오히려 사실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리고 동시에 어디에선가 또 그와 같은 범죄자가 발생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런 존재가 더 있겠느냐고?”라는 물음도 범죄의 연속성을 드러낸다. 범죄는, 그리고 온도스키는 하나가 아니다.
이렇게 사실적인 추리소설을 한 편 읽고 나면 비교적 환상적인 공포가 기다린다. 「쥐」는 장편 소설을 쓰기 위해 한 통나무집을 찾는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는 단편만 여러 편을 쓰다가 장편을 쓰는 상황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장소를 골랐지만, 어쩐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연출된다. 폭풍이 불어온다는 일기예보, 그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노인 ‘빌’의 소문은 초반의 긴장감을 높이며 소위 말하는 ‘금기’의 영역을 드류가 침범했음을 알린다. 게다가 드류는 그 집에서 감기에 걸린다. 이 소설은 공간에서 오는 공포를 적절히 활용했다. 그뿐 아니라 ‘이물과의 계약’이라는 특수한 요소를 삽입해 보다 친근하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제목이 「쥐」라는 점에서 쥐가 등장하리라는 예상은 쉽지만, 생각보다 쥐는 늦게 모습을 보인다. 중간까지는 듀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초중반의 플롯이 탄탄하게 짜였다는 점이 후반에서 쥐와 듀스의 거래에 힘을 실어준다. 듀스에게는 자신의 소설을 완결 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있었다. 그랬기에 홀로 장편을 쓰기 위해 집을 떠났고, 감기에 걸린 상태로 집필을 이어나갔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소설을 쓰는 데에 집착한다. 듀스의 감기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는 쥐를 발견하고 쥐와 대화를 한다. 당연히 쥐와의 대화는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킹은 이 지점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린다.
「피가 흐르는 곳에」에서도 볼 수 있듯 이 책에서는 아주 환상적인 장면도 사실적으로 쓰인다. 척이 자신의 마지막을 보는 순간, 그리고 온도스키가 죽는 순간, 쥐와 듀스가 거래하는 순간은 모두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양 담담하게 서술된다. 이 책에서는 어떤 일도 사실적이다. 그리고 모든 ‘사실’이 하나씩 맞물려 공포를 형성한다. 실제와 가상을 넘나드는, 때로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의 연속이 두려움을 만든다. 스탬퍼 부부의 죽음이 그렇다. 예측이 가능하고 주인공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계약 조건은 ‘천사’와 하는 약속이겠지만, 이건 ‘악마’와의 거래다. 듀스는 자신의 장편 소설을 위해 한 사람,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의 목숨이 대가로 지불되는 것을 본다. 그는 다시 통나무집에 찾아가 쥐를 찾고 그와 대화를 나눈다. 역시, 쥐는 악마였다.
스티븐 킹의 소설이 보이는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실제와 가상, 아마도 그 이상의 지점에도 그의 작품은 위치한다. 그를 무엇이라 소개할지 모르겠다는 망설임은 단순히 그가 훌륭한 작가라서, 최상급의 수식어를 더는 찾지 못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실제로 스티븐 킹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수식어를 쓰면 저 말이 필요하고, 그 말을 가져다 쓰면 또 채워야 할 공간이 보인다. 우리는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색채를 꾸준히 유지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곧 장르다’라는 말을 한다. 킹이 바로 그렇다. 공포소설에는 ‘스티븐 킹’이라는 장르가 있다.
『피가 흐르는 곳에』는 그런 킹의 소설에 유감없이 감탄할 수 있었던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의 소설은 매번 놀랍지만, 모두 다른 유의 놀라움이다. 상상치 못한 기발함에 감탄하거나(「해리건 씨의 전화기」), 구성에 재미를 느끼거나(「척의 일생」), 치밀함에 빠져들거나 (「피가 흐르는 곳에」), 공간에 몰입한다(「쥐」). 그의 소설에는 한 가지, 또는 여려 갈래의 모험이 있다. 오싹함은 덤이고 공포는 선물이다. 저항 없이 빨려드는 감각에 책을 더 읽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읽으면 가장 많이 쓸 수밖에 없는 말이 있다. (아마 바로 이전에 쓴 그의 책 감상에서도 마지막으로 이 문장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는 스티븐 킹이다.’ 다른 말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본 리뷰는 개인 블로그의 리뷰 전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읽기 : https://m.blog.naver.com/sol_narae98/22248042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