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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처음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사물의 시선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한 명의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되고 죽기 전까지 스치는 수많은 사물, 그들에게 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조명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당시의 나는 중학생이었고 이야기를 끈기 있게 풀어갈 능력과 문장의 힘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을 쓰는 데에 그다지 흥미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몇 페이지 분량의 글을 끄적이다가 쓰기를 멈추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문장만 가득 적혔을 그 이야기는 온라인 세상 어딘가에서 데이터의 파편으로 떠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소설이 불현듯 떠오르는, 재미있는 작품을 얼마 전에 만났다.
루스 오제키의 장편소설 『우주를 듣는 소년』은 만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소년 베니를 주인공으로 한다. 커다란 책의 무더기 가운데에 가만히 앉아 있는 소년. 이 책의 표지 그림을 보면 꽤나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이 든다. 아이는 우주의 빛깔로 반짝이는 고요한 공간에서 조용히 책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소설의 분위기는 이와 조금 다르다. 이야기의 시작은 소년 베니의 아버지 켄지가 사고로 사망하는 시점이다. "책은 어딘가에서 시작해야 하고, 이 책은 여기서 시작한다"라는 도발적인 문구와 함께. 하루아침에 비극적으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 애너벨, 그날 이후 사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소년 베니는 이전과 전혀 다른 매일을 산다.
이 책은 메타적인 위치에 있다. 이야기를 서술하는 주체이자, 그것이 쓰이는 매체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다. 베니의 인생을 쓰는 동시에 그와 대화한다. 베니는 모든 사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에 책이 쓰는 자신의 삶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본다. 베니는 인간이 아닌 것과 대화한다. 그는 아버지의 사망 이후 나타난 이 현상으로 인해 혼란과 오해 속에서 산다. 베니의 능력을 정신과적 문제로 판단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조현병으로 여기고 소아정신과에 격리하지만, 그곳에서 베니는 좋은 친구들을 사귄다. 그를 불신하거나 동정하는 사람들,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세상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그를 따라가며 독자들은 걱정 어린 응원을 던지게 된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의 작가 루스 오제키는 일본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문화적 다양성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문예창작학과의 교수로 있으며 선불교의 승려라는 독특한 이력도 있다. 『우주를 듣는 소년』은 이런 작가의 삶을 총망라한 이야기다. 주인공 베니의 아버지 켄지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다. 선불교 승려인 아이콘의 책 《정리의 마법》은 베니의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소설의 문장과 진행은 충분히 밀도 있으며 성과 젠더, 노동과 여성, 이민자와 인종의 관계를 유쾌하지만 날카롭게 파고든다.
🔖 그리고 따지고 보면 책의 존재 이유도 그거다.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인간들의 이야기를 표지와 표지 사이에 최대한 오랫동안 안전하게 간직하는 것. -55쪽
책의 존재 이유란 무엇일까. 오직 기록하는 유일한 동물로서 인간에게 책이 필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한 사람이 겪은 충격적인 사건, 그 이후의 장면을 빠짐없이 담고자 끊임없이 떠드는 단 한 권의 책. 그 음성을 빌려 작가인 루스 오제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책의 존재 이유라고. 사람에게 이야기가 없다면, 모든 매체의 기록과 저장은 무의미하다. 우주를 듣는 소년. 그는 사물의 소리를 듣지만, 결국 그것 또한 인생의 이야기다. 이 긴 분량의 책을 소개하기에 주어진 분량이 너무나 짧다. 그러나 단 하나는 확언할 수 있다. 칠백여 쪽인 이 책의 분량은 도무지 충분하지 않다.
한 아이가 내디딘 발자취의 조각. 그의 상처와 치유, 세계의 오해와 이해에서 오는 깨달음을 따라 더욱 여행하고자 할 우리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