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 베를린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채혜원 지음 / 마티 / 2021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로움’은 한 존재가 관계 맺지 못함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다. 그것은 흔히 ‘함께 있지 못함’에서 비롯된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공동체보다 개인을 중시하는 분위기 안에서 외로움이 시대의 분위기를 형성할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기도 한 걸 보면, 지금 가장 사회에 만연한 감정은 외로움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외롭다는 건 비단 혼자 있을 때만 드는 생각은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불현듯 혼자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 심지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내가 혼자라는 소외감이 찾아온다. 외로움은 물리적 관계로 인해 생기고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심리적인 관계가 멀어짐에 따라 발생한다. 개인주의나 파편화가 외로움의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쓴 채혜원 작가는 ‘여성의 외로움’에 초점을 둔다. 여성은 왜 종종 ‘혼자라는 생각’을 할까. 그 답은 사회 공동체적 무관심에 있다. 공감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갈수록 외로움은 더욱 진해진다. 최근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얼마나 ‘공감’하고 있을까. 객관적인 수치와 지표를 들지 않더라도, ‘차별’이나 ‘혐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여성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은 충분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금, 여성이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 책은 상당한 시의성을 띤다. 특별히 어떤 여자도 혼자가 아니다 (No woman* is alone)”라는 서문의 제목은 마음의 울림을 준다.
.
“This book is dedicated to ‘International Women* Space’ and all my sisters in Germany and Korea.”
“사랑하는 International Women* Space 동료와 독일 & 한국에 있는 나의 모든 자매들에게 바칩니다.”
.
‘자매들’이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따뜻하다. 그리고 괜히 뭉클하다. ‘혼자라는 감각’에 가득 둘러싸여 살던 이들에게는 울컥, 무언가 올라오는 연대감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등장하는 Woman*/Women*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작가는 책 안에서 ‘여성’의 뒤에 별표(*)를 붙인다. 이는 International Women* Space, 줄여 IWS라고 불리는 독일의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의 표현을 따온 것으로 독일어 줄임말 FLTI(여성, 레즈비언, 트랜스, 섹슈얼 및 인터섹스, 남녀가 아닌 제3의 성별을 뜻하는 논바이너리 등을 모두 포함)를 의미하는 용어다.
여성으로서의 연대는 ‘여성’의 범위를 설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여성의 범위를 정하는 일’은 ‘나는 여성이고 너는 아니야’라는 식의 폭력이 아니다. ‘너도 여성이고 나도 여성이니 우리 함께하자’라는 뜻이다. 여성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아닌 ‘확장’하는 데에서 연대는 출발한다. 자신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집단이라니. 나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한 모임이다. 그리고 이것은 외로움에서 한 걸음 멀어지는 시작이다.
이 책은 저자가 5년 동안 베를린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담백한 문체로 담아낸다. 베를린에서 여성으로서 생활하는 이야기는 사회 전반적인 상황부터 일상적이고도 개인적인 감상까지를 두루 포함한다. 특별히 인상적이라고 할 만한 부분은 ‘페미니즘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페미니즘 공간’이 조금 낯설게 들린다. 하지만 동네에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페미니스트 동기들과 함께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무해한 공간이라니. 어떤 논제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곳이 여성에게는 필요하다.
페미니즘 공간에 대한 여러 사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카페 크랄레(Cafe Cralle)에 쓰인 문구였다.
.
“자본주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 등을 떠나 모든 이들을 위한 아름다운 장소를 지향한다. 이에 어떤 형태의 차별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
‘어떤 형태의 차별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 긴급하게 필요하다. 가끔은 숨이 막힐 정도로 잦은 차별을 목도하면서, ‘차별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강력한 대응이 있다면 사라지지 않았을 사람들을 보며, 여성들은 안전지대를 원한다. 성차별이 없고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등에게 친화적이기도 한 공간 안에서 어느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결속되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얼마나 되었던가. 반면, 차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왔던가. 이 두 가지 질문은 다른 의미로 각자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다.
차별 없는 곳은 ‘아름다운 장소’다. 카페 크랄레는 이렇게 정의한다. 차별을 몰아내는 강력함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아름다운 공간 안에서 비로소 여성은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느낀다.
안전한 공간이 있다면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장소와 사람을 주로 다룬다. 저자가 속한 IWS(International Women* Space)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그 안에서의 연대 역시 내용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책 안의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에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정은 ‘편안함’이다.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지친 기색을 보여도, 웃는 얼굴 너머에 슬픔이 그득하게 들어차 있어도 그들은 한결같이 나를 환대해줬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며 피부감각으로 매일 느꼈다. 난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 중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매일 혼자라는 감각에 침잠하는 사람들을 구조하듯, 책 안에서는 공동체가 주는 특별한 감정을 강조한다. 가볍게 손 내밀거나 스쳐 지나가는 문구가 아니다. 허상의 누군가가 다수를 향해 읊조리는 위로도 아니다. 내 옆에 실체의 사람이 항상 있고, 그가 상황과 여건에 상관없이 내 편이라는 사실은 무엇보다 큰 위안이 된다. 그 사람은 나와 함께 발맞추어 걸어가고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때로 주저앉는 나를 위로하면서.
이 책의 표지는 다양한 색의 띠가 가로세로로 교차하는 패턴을 사용했다. 어느 책의 표지보다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누구의 색이라도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를 나타낸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와 ‘너’가 교차하고 때로 마주치는 한 지점에서 연결은 이루어진다. 그것이 무수히 많이 생성된다면 ‘연대’가 되고 연대가 지속되는 사회야말로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 지금은 껄끄러운 사람들이 가득한 ‘억지의 공동체’가 아닌, 모두를 환영하고 포용하는 차별 없는 공동체가 등장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 책은 오래전에 이미 나왔어야 하지만,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는 ‘넓고 느슨한 무지개색 공동체’의 형성에 하나의 불씨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독자로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흔히 좋은 글이 가득 담긴 책을 보면 ‘형광펜으로 모든 면을 색칠하고 싶다’라는 표현을 쓴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그런 책이다. 어느 문장 하나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내가 부자라면 잔뜩 책을 사서 여기저기 뿌리고 싶은 책이다. ‘이거 읽어 보셨어요? 참 좋은데.’라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고 싶기도 하다. (좀 이상해 보이려나) 결국은 책을 읽은 이들과 함께 비로소 손잡고 ‘혼자’라는 감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읽는 내내 마음을 채운다. 아마도 독자들 모두가 이런 생각을 은연중에 하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상황과 베를린의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논조로 저자는 책을 쓰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베를린에서 배워야 할 점이 많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을 위한 ‘차별 없는’ 공간과 마음껏 서로를 보아도 누구 하나 간섭하지 않는 상황이 우리나라에서는 드물다. 하지만 지역의 어딘가에는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제법 있다. 이건 우리가 작은 연대를 할 수 있다는 신호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나의 색을 정하든 정하지 않든 그것은 상관없다. 공동체에 속하는 것, 그들과 함께 나아가는 것이 연대의 시작이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모임이 쉽지 않지만, 마음의 연대 역시 최선이 될 수 있다. 우리, 지금부터 연대를 하자. 그리고 여전히 사회에 만연한 woman*을 향한 차별에 대항하지는 못하더라도, 차별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어가자. ‘아무 이유 없이’ 나를 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개인은 ‘혼자’에서 멀어진다. 그러니까 이제 다같이 한 걸음만 디뎌보자고 말하는 이 책에서 우리는 베를린이 아닌 한국을 읽어야 한다.
나를 지키며 집단으로 스며드는 일. 나를 지키는 집단으로 스며드는 일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본 리뷰는 개인 ㅍ이지에 업로드한 글의 전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ijeya.com/2021/05/04/마티-채혜원-『혼자가-아니라는-감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