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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의 세 사람
메가 마줌다르 지음, 이수영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테러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죽는다. 이 책의 시작은 피와 사람과 비명이 한데 엉기는 재앙이다. 남편을 잃은 여성이 오열한다. 그리고 이 장면을 영상으로 본 한 젊은 여성이 누구나 이런 상황에서 느낄 만한 분노를 품는다. 그리고 무능한 정부를 향해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정부에서 월급을 받는 경찰들이 구경만 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안 이 죄 없는 여자는 모든 걸 잃었다.” 당연히 이 글에는 특정 정당이나 정부에 대한 극심한 반감이 담겨 있지는 않다. 참혹한 시대상을 자조하는, 테러에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모두를 향한 말이다. 그리고 이런 글은 하루에도 수만 개씩 어딘가에서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 글을 올린 여성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는다. 그녀는 체포된다. 테러범과 내통했다는 이유에서다.
모든 일은 페이스북 게시글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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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카타의 세 사람
책의 감상을 말하기 전에 조금 생뚱맞겠지만, 번역과 표지의 변화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이 책의 원제는 ‘A BURNING’이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테러’라는 사건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번역서의 제목은 『콜카타의 세 사람』이다. 원제와 달리 번역된 제목은 주요 인물 세 사람에 주목한다. 타오르는 불길과 붉은색이 강하게 배치된 원작의 표지와 달리 국내 번역서는 몽환적인 색감의 표지를 택했다. 이런 변화를 눈여겨보면 번역과 출간에 있어 어느 지점에 주목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국내 번역서로 출간하며 출판사에서 제목에 과감한 선택을 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원작과 번역서에 끌리는 정도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시도는 (적어도 ‘나’라는 독자에게는) 성공적이었다.
『콜카타의 세 사람』을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표지와 제목 때문이었다. 인물의 심리에 주목했을 것 같은 제목과 표지 색상의 묘한 배치가 인상적이었다. 심리 소설과 ‘테러’라는 자극적인 소재, 그리고 세 인물의 인생이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바뀐다는 소개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주된 요인이었다. 『콜카타의 세 사람』은 하나의 텍스트에서 무엇을 강조하느냐, 그리고 무엇을 덜어내느냐에 있어 신중하고도 적절한 선택을 거쳐 나온 책이다.
만약 이 장편에서 가장 분명한 형식을 하나 꼽으라면 ‘세 인물의 교차하는 시선’이다. ‘테러’는 이 소설에서 가장 큰 사건이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주요 인물 세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주인공 ‘지반’의 삶은 완전한 파국을 맞는다. 소설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반 한 사람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됐다면 어땠을까. 단순히 한 사람의 고통과 억울함을 서술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내용의 소설도 작가의 역량과 플롯의 배치에 따라 얼마든지 개성 있는 작품으로 쓰일 수 있지만, 하나의 일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데에서 오는 맛은 확실히 줄어든다. 생각해보면 ‘테러’야말로 가장 다각도에서 보아야 하는 사건이다. 이해관계의 극단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 또는 집단의 비뚤어진 감정의 끝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죽는 이 일에 얽힌 시점은 무수히 많다. 작가는 그중 세 명을 선택한다.
이 세 사람은 어느 것 하나도 같지 않다. 그들은 각각 페이스북에 종종 글을 쓰는 젊은 여성(지반), 체육 교사이며 후에 정치인이 되는 남성(체육 선생), 배우가 되기를 꿈꾸는 트랜스젠더 여성(러블리)이다. 『콜카타의 세 사람』은 이 세 명의 시점이 교차 서술되는 구조다. 그리고 각각의 이름(또는 호칭)이 해당 단락의 소제목이다. 철저하게 각 사람의 시점에서, 빠른 전환이 이루어지는 소설의 진행은 속도감과 함께 입체적인 현실감을 준다. 이토록 다른 세 사람의 운명은 ‘테러’라는 하나의 점으로 이어진다. 지반을 가르쳤던 체육 선생, 그리고 지반의 친구인 러블리에게 전에 없던 ‘이해관계’가 생기는 시점은 ‘테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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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에서 정치인으로, 친구에서 배우로
개인의 심리 변화에 주목한 이 소설은 끈끈한 인과로 구성된다. 하나의 사건 앞에는 반드시 그 일이 벌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보인다. 다만, 지반이 테러범과 한패로 몰리는 것에만 원인이 없다. 지반은 단지 ‘페이스북 게시물’로 인해 테러범과 한 패로 몰린다. 지반에게 벌어지는 사건에만 뚜렷한 이유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처한 상황이 말도 안된다는 것을 반증한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지반은 마치 점점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것처럼 사건의 중심으로 끌려들어간다.
이 소설의 장르는 완전한 정치물이다. 하지만 초반에서 중간까지, 그리고 후반의 도입까지도 전혀 정치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체육 선생이 한 정치인의 눈에 들어 그의 정당에 들어가는 과정에서만 잠깐 정치적인 내용이 언급될 뿐이다. 지반도, 러블리도 전혀 정치와는 관계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의 그물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물살이가 된다. 하나의 개인을 여론이 거대한 정치의 프레임 안에 가두는 과정이 점진적으로 드러난다. ‘천천히, 단계적으로, 점차’로 표현되는 모든 순서와 절차에 따라 사건은 심화된다. 인물들은 철저히 수동적으로 변한다. 결말에서는 체육 선생에게도, 러블리에게도, 지반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들에게서 자율성을 앗아가는 건, 선생을 정치인으로 만들고 친구를 배우로 만드는 ‘권력’이다. 이 소설은 권력의 위계를 속속들이 반영한다. 단순히 정치적인 위계뿐 아니라 남성과 여성 간에 형성되는 젠더 권력, 퀴어와 그들을 배척하는 사회적 분위기 사이의 권력 차이가 뚜렷하다.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수록 지반과 러블리가 각각 여성과 트랜스젠더라는 점에 자연스레 집중한다.
지반은 테러범으로 몰려 여성 수용소에 갇힌다. 그곳의 죄수들을 소개하는 듯한 초반의 묘사는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여자가 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동일 범죄에 성별에 따라 다른 형량을 적용하는 것을 꼬집는 부분이다. 수용소의 한 여성은 남편에게 염산 테러를 당했지만, “어떻게 해선지 그녀가 감옥에 있다”. 권력에 따라 형량이 달라지는 대표적인 사례로 작가는 여성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조명한다. 어째서 ‘정당한 형량’은 언제나 여성들에게만 적용될까. 지반의 의문은 독자들의 질문이다. 남성에게는 언제나 의문투성이인 형량이 내려지는 것을 단적으로 비판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러블리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인도에서 트랜스 여성은 ‘히즈라’라고 불리며 ‘신과 가까운 존재’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은 히즈라에게 복을 빌어달라는 요청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히즈라와 복을 별개로 여긴다. 러블리가 한 아이에게 복을 빈 다음, 그 아기의 어머니가 “손을 닦고 또 닦는” 것은 사람들이 히즈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도의 현실이다. 히즈라를 신과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것은 그들을 ‘숭배’ 또는 ‘경배’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들을 배척하고 낙인찍는 행위에 가깝다. 히즈라를 사회에서 격리하는 동시에 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요청은 기만적이다. 그러나 연기 학원비를 벌기 위해 러블리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복을 빌어준다.
러블리는 ‘자매들’이 형성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가족이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자 스스로 그들을 떠났다. 러블리의 도피는 수많은 퀴어가 막다른 골목에서 선택하는 ‘탈출’이다. 퀴어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한 공동체를 자력으로 구성해야 한다. 배척이 도사리는 사회의 어느 곳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러블리는 ‘러블리’라는 이름을 만든다.
지반과 러블리의 상황을 충분한 분량으로 제시하는 초반은 만연한 사회적 위계 차이를 나타내는 한편, 둘의 관계에 끈끈한 유대감이 있음을 보여준다. 연대 이상으로 그들을 결속하는 감정이 있다. 아무도 깰 수 없을 것 같은 그 관계를 증명하는 듯, 러블리는 법정에서 지반이 결백함을 증언한다. 소설의 중반까지 둘의 우정은 언제고 깨지지 않을 것 같다. 지반의 어머니는 법정에서 지반을 위해 증언하겠다는 러블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반이 나한테 당신이 아기와 신부 축복을 잘한다고 말한 적 있어요. 오늘 당신은 이 어미에게 가장 큰 축복을 내려줬네요.” 지반의 어머니는 이전까지 러블리가 복을 비는 행위를 그녀와 분리해서 보았던 사람들과 다른 태도를 보인다. 러블리는 지반의 어머니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전해 듣고 눈물을 흘린다.
그들의 다른 편에는 삼인칭으로 서술되는 ‘체육 선생’의 시점이 있다. 체육 선생의 이야기는 지반과 러블리와 달리 삼인칭으로 쓰인다. 그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인물이다. 남성이고, 정치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쓰며, 결국 정치인이 된다. 그는 지반을 가르친 선생이었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결정적으로 지반의 상황을 왜곡한다. 체육 선생은 전형적인 남성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권력을 탐할 타당한 이유가 조금은 있었다. ‘선생’이라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사람들은 그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체육’을 가르친다는 점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선생으로서 살 때는 전혀 몰랐던 권력의 맛을 느낀다. 그리고 발을 뺄 수 없는 늪지대에 몸을 담근다.
이 세 인물이 한 장면에 담기는 것은 법정에서다. 지반의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 러블리와 선생의 입장은 정반대다. 러블리는 극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지반을 강하게 변호한다. 하지만 체육 선생은 교묘하게 지반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다. 체육 선생뿐 아니라 지반의 이야기를 왜곡한 푸르넨두라는 이름의 기자도 지반의 상황을 악화하는 데에 지대한 역할을 한다. 온갖 이해관계가 한눈에 보이는 법정 장면은 독자들에게 인물들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그 후 입장이 완전히 달라지는 건 러블리다. 의외의 전개다. 러블리의 증언은 결정적이었지만, 그만큼 그녀의 앞날에 걸림돌이 된다. 러블리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는다. 테러리스트를 옹호한다는 시선은 그녀가 배우 일을 하는 데에 불리할 수 있다. 사실, 확실히 불리하게 흘러간다. 히즈라이기 때문에 견뎌야만 했던 부당함을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지반을 버리면 찾아온다. 슬프게도, 이런 상황에서 친구를 선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앞서 지반의 어머니가 유일하게 러블리를 의지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이 상황이 안타깝다. 정치와 위계가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의 인간적인 관계를 한순간에 흩어버리는 과정이 너무나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힌 체육 선생은 지반의 자비 청원을 무시한다. 그리고 ‘테러범에게 합당한 형벌을 내린 정당’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워 자신이 따르던 정치인 비말라 팔을 총리 자리에 앉힌다. 러블리 역시 지반을 모르는 사람처럼 여기며 탄탄대로를 걸어간다. 이 두 사람의 성공과 대비되는 건 지반의 비참한 죽음이다. 자비 청원이 무시되고, 유일하게 믿던 변호사마저 정치인이 된 체육 선생의 사주에 넘어간다. 소설을 읽으며 지반이 언젠가는 해방될 것이라 믿던 독자들은 점점 가망이 없어짐을 느끼다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지반의 죽음을 보며 충격에 빠진다.
체육 선생에서 정치인으로, 친구에서 배우로 두 인물의 사회적 지위가 바뀌는 동안,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이해관계에 얽혀 허우적대는 동안, 누군가가 지반에게 테러범이라고 저격하는 글을 쓰는 동안, 무고한 젊은 여성은 나라에게 죽임을 당한다. 물론 진짜 테러범은 합당한 중형을 선고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반은 확실한 누명을 썼다. 어디부터 잘못되었다고 할지 모를 만큼 끔찍한 여론몰이 속에서. 해결할 수 없이 견고한 위계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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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으며
이 소설은 거의 가장 완벽한 흐름과 호흡, 그리고 결말을 갖고 있다. 만약 작가가 구조와 복선과 결말까지의 모든 과정을 계산했다면 그 어떤 작품보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모든 요소를 배치했음을 알 수 있다. 사소한 시점과 인칭부터 다각화된 인물과 입체적인 설정까지 어느 것 하나 모자라지 않는다. 메시지가 명확하고 그것을 위한 형식과 심리 묘사가 정확한 궤도에 오른 기차처럼 순리대로 진행된다. 영상 콘텐츠와의 결합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본다면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결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완성도 높은 소설이 작가 메가 마줌다르의 첫 장편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설렘에 널뛰는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지만, 정말 이 책이 처음이었다. 지금 이 작품에 쏟아지는 여러 찬사를 읽어보니 모두가 한마음으로 충격과 놀람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 작게는 개인의 상황, 크게는 ‘인도’라는 국가의 상황, 더 크게는 모든 이해관계를 감싸는 이 소설은 매 문장이 결말을 향한다. 명사수가 쏜 한 발의 화살처럼 날아가 정확히 과녁의 10점을 맞춘다.
『콜카타의 세 사람』은 ‘over’로 요약할 수 있다. 과연 무엇이 넘칠까. 소설 속 상황이 기대 이상이다. 이 소설이 한 작가의 첫 장편이라는 게 상상 이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자를 이렇게 놀라게 하는 작품이 있다면 ‘game over’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 소설의 감상을 물어온다면 우선 다음과 같이 시작해야겠다.
모든 것이 넘치도록 완벽한 소설이었다.
본 리뷰는 개인 홈페이지의 리뷰를 전문 발췌한 것입니다.
원문 보기 : https://ijeya.com/2021/08/30/북하우스-메가-마줌다르-『콜카타의-세-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