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 작가의 신간이 나온다. 이 소식을 듣고 괜히 설렜다. 하지만 동시에 놀랐다. 나는 그의 소설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남주 작가의 팬이나 열혈독자, 그리고 그의 소설을 알기만 하는 일반인 사이의 어중간한 위치에 내가 끼어 있다. 작가의 신간을 빼먹지 않고 읽는 부류는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단편집의 출간에 갑자기 마음이 붕 뜬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독자로서 조남주 작가를 알게 된 건 2016년, 『82년생 김지영』이 시작이었다. 이후 2017년, 「현남 오빠에게」를 읽었다. 2018년, 작은 책자로 나온 「가출」을 읽었다. 2019년, 『사하맨션』을 읽다 말았다. (도서전에서 받은 사인본이었는데, 동시에 파본이었다. 그 뒤로 언젠간 새로 사야지,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 못했다) 그리고 2020년에는 작가의 작품을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한마디로 띄엄띄엄이다. 심지어 읽다 말기도 했다. 어떤 책도 설레며 기다린 후에 읽지 않았다. 서점에서 보이니까 샀고, 그래서 읽은 것뿐이었다. 내가 그의 소설을 보는 빈도는 이러했다. 그러니 신간에 특별히 마음이 동할 이유는 없었다.
이런 나의 의아함과는 관계없이 손가락은 움직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신간이 신청되어 있었다. 읽고 서평을 쓰겠습니다. 약간 흥분한 사람의 어조로, 하지만 단정하게 출판사로 문자를 보냈다. 기왕 읽게 된 거, 나는 마음보다 몸이 빨리 반응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생각보다 오래 고민이 이어졌다. 나는 왜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읽었는가. 그리고 그 경험은 어떠했는가. 조남주 작가의 신간 소식에 마치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한 이유는 무엇일까.
책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혹시 너무 무턱대고 준비도 되지 않은 채로 읽겠다는 답을 드렸나.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은 도착했고, 나는 첫 페이지를 폈다. 하루 반나절의 고민이 무색하게, 나는 작가의 작품에 몸이 반응한 이유를 찾아냈다.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모든 작품을 펴던 나의 심정은 거의 비슷했다. 기대도 흥분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소설을 읽기 전뿐이었다. 조남주 작가의 작품은 맹숭하게 책을 편 나조차 어쩔 도리 없이 몰입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순간 과거의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김지영과 이름 없는 ‘나’(「현남 오빠에게」의 서술자), 그리고 또 다른 ‘나’(「가출」의 서술자), 사하맨션의 사람들에게 몰입했던 순간이 이 단편집을 읽는 내 위에 겹쳐졌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읽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완독한 나는 하염없이 며칠간 젖어 있었다. 내 인생의 연장 어디쯤 존재할 것 같은 그녀들이 마음에서 하나둘 고개를 내밀었다.
노란색 가제본(0판 1쇄) 도서에 찍힌 제목은 『우리가 쓴 것』이었다. 단편의 제목을 딴 것이 아닌, 오로지 책에 붙은 새로운 이름이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을 여러 번 읽은 독자라면 ‘우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 것이다. ‘여성’. 나는 주로 성인 여성의 삶을 그린 그의 소설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우리’라고 부를 만큼의 다양성이 있을까. 잠깐 걱정이 되었다.
“청소년에서 노년에 걸친 다양한 / 여성들의 삶을 새롭게 보기 위한 / 다시 이야기하기, 다르게 이야기하기”
청소년에서 노년에 걸친 다양한 이야기. 이 책의 취지가 한눈에 보였다. 수록 작품의 정보를 보니 2012년부터 2021년까지의 시간이 쓰여 있었다. 꽤 오랜 흐름을 담았다. 발표 지면 역시 다양했다. 갑자기 많은 작품을 읽지 않고 작가의 작품을 단정해버린 것 같아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유명하고도 강한 영향력을 가진 책으로만 조남주 작가를 알고 있던 건 아닐까. 이렇게 많은 단편과 더 많은 장편이 있을 텐데. 나는 작가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9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 기간 안에 작가는 어떤 작품으로 여성의 삶을 쓰고 싶어 했을까. 이 책은 왠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수업으로, 귀동냥으로 SNS로 나는 조남주 작가에 관한 많은 소식을 접했다. 그는 어쩌면 최근 수년간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는 작가다. 그래서 종종 ‘나는 그 작가를 굉장히 잘 알고 있어’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가만히 옆을 보니 하늘까지 솟은 거짓 생각이 보였다. 누군가 ‘조남주 작가 책 추천 좀 해주세요’라고 하면 『82년생 김지영』이요, 라고 답할 수밖에 없으면서. ‘그래서 그 작가가 무엇을 쓰는데요?’라고 물어오는 사람에게 ‘여성에 대한 거겠죠’라고 말할 수밖에 없으면서.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첫 작품부터 다시 알아가자. 작가를 둘러싼 프레임을 벗겼다. 처음 이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나머지 작품을 읽었다. 나는 조남주 작가의 영역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싶었다. 갑자기 불쑥 튀어나와 나를 찌르는 판단이 없기를 바랐다. 이런 나의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해 조금씩 나누어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기억력의 한계 때문인지 집중력이 부족해서인지 유독 인물 관계와 내용을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천천히 복기하고 있자면 참 난감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꽤 자주 이런 일이 있다. 나만의 특수한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조남주 작가의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는 한 번도 이전의 내용을 잊은 적이 없었다. 유난히 바쁜 시기에 읽어 자주 읽기를 중단해야 했지만, 다음 내용을 읽는 데에 불편함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어디에서 읽든 쉽게 몰입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전까지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했든 나는 이미 소설 속 주인공에 빙의해 있다. 그것이 조남주 작가가 쓰는 모든 작품의 특징이다.
나는 아동기,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살고 있다. 아직 중년, 노년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중년과 노년기의 인물을 다룬 작품은 주인공의 성별을 막론하고 쉽사리 공감하지 못했다. 종종 여성 인물에는 어머니의 삶을 대입하고는 했지만, 그것도 완전히 정확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부끄럽게도 한동안 그런 작품을 애써 피한 경험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쓴 것』은 노년기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꽤나 많이 있음에도 전혀 읽는 데에 걸림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겪은 어떤 삶보다 더 공감되는 노년기 여성 인물을 만났을 때는 당황하기까지 했다. 마치 ‘여성이라면’ 가지고 있는 어떤 연대의 끈을 확인시켜주려는 듯, 모든 인물은 내 머릿속에서 하나로 이어졌다. 여성이 연결되는 데에 나이는 문제 되지 않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미스 김은 알고 있다」와 「현남 오빠에게」였다. 아무래도 내 가까운 미래, 또는 현재와 관련 있는 소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는 마치 미스터리 스릴러 같다. “미스 김은 그러니까, 미스 김이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미스 김은 “직함도 없고, 부서도 없고, 딱히 전담하는 업무도” 없다. 유독 ‘미스 김’이 직장인 여성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고작 성별의 정보값만 주어진 채 사회 곳곳에 위치한 여성들. 어느 순간 대체되거나 사라지는 그들을 가장 잘 표현하는 장치는 ‘그들의 도움도 지워버리는 것’이다.
당신들은 여성은 홀대하지만, 이 사회는 여성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고 분명하게 말하는 소설에서 미스 김과 함께 그의 손이 닿은 모든 것이 지워지는 순간, 회사는 혼란스러워진다. 후임자인 ‘나’는 ‘자기’라고 불리는 자신의 상황이 미스 김과 닮아있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전한다. 그리고는 회사 안에서 미스 김의 흔적이 사라지는 과정을 담담히 서술한다. 미스 김이 누군가에게 선물한 국어사전이 사라지고 미스 김이 만든 주소록이 엉망이 된다. 미스 김이 복사기를 받쳐 놓은 ‘택배 박스 조각’ 역시 자취를 감춘다. ‘나’는 회사가 보안을 강화하는 논쟁적인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자신이 미스 김의 ‘택배 박스 조각’을 간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결국 ‘나’도 미스 김과 다르지 않음을, 하지만 있는 힘껏 미스 김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미스 김’과 ‘자기’는 흔적을 남긴다.
「현남 오빠에게」는 앞서 말했듯 이미 읽은 작품이다. 가스라이팅을 비롯한 남성이 여성에게 무의식중 행하는 어떤 행동을 여성의 입장으로 쓰고 있다. 남자인 너와 여자인 나는 분명히 다른 생각으로 상황을 본다, 고 소설 속 강현남은 말한다. 대체로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고 교묘히 왜곡해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식으로 밀고 나가기도 했다. 강현남과 ‘나’의 관계는 놀랍게도 특별하지 않다. (대체로 조남주 작가의 소설은 평범한 여성의 입장에서 서술되지만, 남자들은 이를 굉장히 특수하고 논쟁적인 상황으로 보는 듯하다) 대부분의 여성이 어쩌면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담백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동시에 이 편지를 받은 강현남이 얼마나 극도의 울분에 사로잡힐지 안다. ‘이 여자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신을 ‘제멋대로 판단’했다고 노발대발할 장면이 그려진다.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그는 ‘한남’이다.
「매화나무 아래」와 「오로라의 밤」은 ‘중년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인다. 「매화나무 아래」의 동주는 금주, 은주 언니의 뒤를 따라 태어났지만 ‘말녀’라는 이름으로 환갑이 넘도록 산다. ‘말녀’에는 여자아이를 그만 낳고 남자아이를 낳고 싶다는 뿌리 깊은 남자아이 선호사상이 담겨 있다. 환갑이 넘어 개명하는 데에 주위의 만류가 싶하지만, 동주는 끝내 자신의 이름을 갖는다. ‘말녀’라는 동생의 이름에 강하게 항의하던 ‘금주’ 언니와 동주의 노년을 그린 이 작품은 정말 담백하고 조금은 아름답게 그녀들을 보여준다. “이제 알겠다. 금주 언니야, 나도 이제야 알았어.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다.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라는 동주의 마지막 독백은 그녀의 노년을 함축하는 어떤 깨달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오로라의 밤」에서는 ‘준철’이라는 남성을 사이에 두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지내던 두 여성이 등장한다. 준철의 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인물이 연대하는 묘한 기류를 만든다. ‘나’의 시어머니가 말하는 “내가 준철 에미가 아니고, 너도 준철이 집사람이 아니잖아”라는 문장은 두 여성이 모종의 이유로 연결되고 있다는 강한 암시를 준다. 김미현 평론가의 말처럼 작품 속 오로라는 “여성의 과거를 화려한 색으로 비춰주면서” “새로운 미래”의 “역동적 에너지“를 상징한다. 이 작품은 밋밋하지 않은 색의 공감을 형성한다. 며느리와 시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성’과 ‘여성’이라는 연대 의식을 조성함으로써 작가는 ‘여자의 적은 여자이다’라는 말을 부정한다. 고부는 갈등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아니다. 결국 ‘여성의 편은 여성이다’.
「가출」은 노년 남성의 상황을 딸의 시선으로 그린다. 하지만 가출한 남성의 삶은 생각보다 중심에 위치하지 않는다. ‘실종’이 아니라 ‘가출’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노년의 생에서 보이는 상실감을 조명한 이 작품에서 독자는 두루 모든 이를 둘러본다. 유독 많은 인물이 나오는 이 작품의 색은 단순하고 약간은 흐리다. 아버지가 보내는 생존의 신호는 절박하지 않다. 약한 연결로 아버지와 딸은 이어진다. ‘나는 여기에 잘 살아있단다’라는 메시지가 간간이 들려 온다. 「가출」은 노년의 누군가가 저지른 과감한 일탈이 아닌, 생에서 한 번쯤 맛보고 싶은 잔잔한 자유를 그린 작품이다.
「오기」는 악플러를 고소하던 작가에게 벌어진 일을 주제로 한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 우연히 과거에 자신을 가르친 선생의 삶과 겹쳐져 벌어진 오해였다. 최근 여러 작가가 성 소수자인 지인의 삶을 작품에 담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일이 있었다.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소설이긴 하지만,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타인의 삶을 작품에 담아내는 과정에서 작가는 굉장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나의 삶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 누군가의 보편적인 상처를 건드린다면 어떨까. 그것이 우연히 지인의 상황과 겹친다면, 이것도 작가의 잘못일까. 아니 그전에, 잘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일까. 자신의 삶이 작품에 도용되었다고 여긴 선생은 작가에게 악플을 단다. 악플러가 잘못인가, 작가가 잘못인가, 아니면 보편적인 상처를 두 사람에게 준 이들의 잘못인가, 그것을 방관한 사회의 잘못인가. 어떤 상처도 보편적이어서는 안 된다. 아마도 아픔이 일반화된 사회가 가장 조용하고 광범위한 가해자일 것이라고,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한 학교에서 벌어진 학생 간 ‘불법 촬영’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을 읽으며 내가 졸업한 한 중학교의 사건이 떠올랐다. 남학생 네 명이 여학생의 사지를 붙잡고 복도에서 치마 속을 촬영한 충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학부모들은 그 일을 사춘기 남학생들의 ‘몹쓸 짓’으로 여겼다. 그 학교는 남다른 전과를 가진 학생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그 불법 촬영은 길을 가면 평범히 볼 수 있는 남자애들이 벌인 짓이었다. 나는 그런 ‘평범한’ 남자애들을 가르친 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저들은 뜻도 모른 채 속어로 쓰는 말을 많이 알 수 있었다. 남학생들은 예외 없이 보나 마나 남자인 자기 친구를 욕하며 꼬박꼬박 ‘년’자를 붙인다. 엄마를 ‘창녀’로 칭하는 줄임말을 쓰거나 ‘니’와 ‘애미’를 연달아 말하며 남의 엄마를 욕보이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이 작품에는 그런 청소년들의 현실이 여실히 담겨 있다. 여자아이는 그런 남자애들에게 어떻게 대항해야만 하는지, 피해자와 가해자의 부모는 어떻게 다른 태도를 취하는지.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현실적이어서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현실’을 다루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손녀’인 주하가 겪는 또래의 사건이 수평적으로 펼쳐지는 동시에 주하의 할머니, 엄마, 본인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담론 역시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러 세대를 이어 온 여성과 가장 최근 청소년의 이야기가 맞물리며 결국은 하나의 사회를 묘사한다.
「첫사랑 2020」은 코로나 시대의 현실을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시점으로 풀어낸다. 역병의 시대에도 아이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초점을 맞췄다. 이야기의 무게는 가장 가벼웠지만, 최신의 사회 흐름을 반영했기에 공감도는 가장 높았다. KF94 마스크를 아껴서 선물하고 선생님에게 헤어짐을 고백하며 우는 두 아이가 귀여운 한편 안쓰럽게 보이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