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임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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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신간 『바임』은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 그림 같다. 그의 기존 문학이 수채화 특유의 맑고 투명한 층위를 겹쳐놓은 이미지였다면, 이번 작품은 불투명한 미래를 유화처럼 두껍고 거칠게 덧칠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선명함 대신 흐릿함으로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현실보다 초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그 모호함이 오히려 우리 삶과 더 닮아 있어 오래 남는다. 포세가 새롭게 쌓아 올린 이 낯선 질감 속으로 잠깐 빠져보자.



총 세 파트로 나누어진 욘 포세의 『바임』 줄거리는 단추 하나를 달기 위해 길을 나선 야트게이르가 오래전 사랑했던 여인을 예기치 않게 다시 마주치며 시작된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그의 삶에 다시 들어오고, 야트게이르는 그 흐릿한 인연을 받아들인다. 이어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파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이어지며 야트게이르·엘리네·프랑크 세 인물의 이름과 관계가 교차한다. 이야기는 바다와 항구를 오가며 세 사람의 인연이 어디에 닿는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 그림 같은 느낌이 강한 욘 포세의 『바임』은 ‘바임 3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다. 『샤이닝』 이전의 작품들이 투명하게 번지는 수채화 같았다면, 죽음을 강하게 다루기 시작한 그 지점부터 포세의 문장은 불투명해졌고 이 소설에서 그 효과가 가장 짙게 드러난다. 문장의 불투명함이 깊어지면서 그가 오래 다루어온 침묵과 여백도 함께 농도가 짙어졌다. 서사보다는 감각을 따라 읽어야 하는 작품인 만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은유들을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천천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첫 에피소드의 단추, 바늘, 실이다. 언뜻 보면 어리숙한 주인공을 드러내려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초반 분량과 세 인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부분이 이후 이야기를 암시하는 은유였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오히려 포세가 독자에게 남겨둔 거의 유일한 힌트라고 해도 된다. 단추는 제자리를 잃은 야트게이르를, 바늘은 야트게이르와 프랑크 두 세계를 오가며 관통하는 엘리네를, 실은 남아서 모든 것을 묶어내는 프랑크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이 소설은 이 삼분 구조가 전체 서사를 움직이는 키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각 파트마다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등장한다. 파트 1에서는 엘리네가 야트게이르의 삶을 다시 두드리고, 파트 2에서는 죽은 야트게이르가 친구 엘리아스의 집 문을 두드리며, 파트 3에서는 엘리네가 프랑크를 향해 문을 두드린다. 이 작품에서 문은 삶과 죽음, 바다와 육지,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경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존재는 그 경계를 넘어오거나, 넘어가거나, 다시 돌아오려는 자들이다. 결국 문 두드림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오려는 징표이며, 경계가 흔들릴 때마다 나타난다.


세 번째로 바임에서 가장 이상하게 흔들리는 건 인물의 이름이다. 세 주인공 모두 하나의 고정된 이름을 갖지 못하고,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심지어 작중에서 본명은 누구도 부르지 않으며, 실제 이름이 오히려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름의 고정성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는 뜻이다. 즉,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삶에서 만난 타자가 불러주는 이름이 실제 이름이 되는 세계다. 작중에서는 이름이 누구와 연결되느냐, 어떤 자리에 놓이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이는 삶이 고정된 정체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재배치되고 흔들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진짜 이름은 거의 힘을 갖지 못하고, 대신 타인이 붙여주는 이름, 상황 속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이름이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현대인이 역할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바임의 이름들은 인물의 내면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에게 다가가고 누구로부터 떠나며 어떤 세계에 발을 들이는지를 나타내는 표식에 가깝다. 이름은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닷가 마을이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적 상징이 아니라, 경계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포세만의 장치다. 삶과 죽음, 육지와 바다, 붙잡힘과 떠남이 맞닿는 이 접점은 인물들의 흔들리는 존재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바다는 이들이 표류하듯 살아가는 상태와 겹치고, 항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잠시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반복해 등장한다. 포세에게 해안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인물들이 흔들리고 머물렀다가 다시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세계의 구조 그 자체이다.



이 지점까지 오면 바임이 왜 그렇게 흐릿한 결을 품는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삶의 모든 과정은 안개처럼 번지는데 유독 죽음만은 또렷하다는 점이다. 무덤의 묘비에는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이름으로 흔들리던 인물들의 본명이 남고,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던 진짜 이름이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초현실에 가까울 정도로 모호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정박한 자기 배 옆에서 죽음을 맞는 야트게이르의 장면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다. 마치 삶은 흐려지고 죽음만은 형태를 갖는 세계처럼.


죽음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이 작품의 시간 역시 흐릿하기 때문이다. 『바임』의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서 떠다니고, 인연은 맺어지는 순간보다 흐르는 과정이 더 길다. 만나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만 그 어떤 장면도 명확히 고정되지 않는다. 오직 죽음만이 흐름을 멈추고 형태를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관계는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지 않고 오래 번지는 잔향처럼 남고, 인물들은 이름처럼 존재도 안정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 흔들림의 끝에서 비로소 죽음이라는 단단한 지점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욘 포세의 『바임』은 선명하게 설명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흐릿한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죽음의 형태만 또렷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처럼 번지고 덧칠된 문장 속에서 인물들은 이름도 삶도 쉽게 붙들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이해하는 순간보다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장면들이 더 오래 손에 걸리고, 포세가 그린 세계는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은 채 묵묵히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다 읽고 난 뒤에 더 깊게 밀려오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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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생존 -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
알렉스 라일리 지음, 엄성수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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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알렉스 라일리의 『극한 생존』은 지구상 가장 혹독한 환경에서 피어난 생명의 경이로움에 현미경을 들이댄 작품이다. 물·산소·빛이 전무한 환경, 생명체가 견디기 어려운 고압과 고온, 그리고 치명적인 방사능 속에서도 버티며 살아가는 존재들까지 다양한 동식물이 예로 제시된다. 라일리는 단순히 이런 기이한 생물들이 지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이제 각 사례가 드러내는 층위와, 그 뒤에 숨은 그의 메시지를 살펴보자.


생명의 경이로움을 글자로 옮긴 알렉스 라일리의 『극한 생존』은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물이나 산소, 먹이가 거의 없는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체들과 그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다룬다. 2부는 극저온, 극고압, 극저압, 극고온 같은 물리적 한계를 버티는 동물들의 세계로 이어지고, 마지막 3부에서는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이나 강한 방사선 환경, 체르노빌 같은 오염 지역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을 소개한다. 이 기묘한 존재들은, 생명이란 말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 다시 묻게 된다.


알렉스 라일리의 『극한 생존』은 매 페이지마다 신비한 생명체를 불러내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 둔다. 이 책은 단순한 소개를 넘어서, 그 존재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과정과 그들이 어떤 진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까지 차근히 짚는다. 그 생존 메커니즘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가능성까지 품고 있고, 생김새와 습성은 흔히 떠올리는 ‘외계인 도감’과 닮아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가볍게 빠져들 수 있는 이 흥미로운 여정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존재는 물 없이 살아가는 물곰, 그러니까 완보동물이다. 이름은 낯설지만 지구 어디에나 있고, 심지어 우리가 사는 베란다에도 조용히 붙어 있다. 너무 작고 사람에게 해가 없어서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이 생물은 물이 없어도, 먹이가 없어도 버틴다. 방사선에 노출되어도 멀쩡히 돌아온다. 그래서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이 작은 동물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인한 생명체로 인정받았고, 실제로 우주까지 다녀온 고대 무척추동물이 되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우주여행.


이들은 물기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살아가지만, 극한의 열과 추위(남극), 강한 방사선, 높은 압력(해저)에서도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다. 물이 사라지면 휴면에 들어가 체내 수분의 98퍼센트까지 밀어내고 단단한 껍질 같은 툰 상태로 변한다. 이렇게 몇 달, 몇 년을 버티다가 물 한 방울만 주어지면 다시 살아난다. 이 과정은 잠에서 깨는 것보다 ‘부활’에 가까워서, 18세기 이후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둘러싼 논쟁의 한가운데에 이 작은 동물이 천천히 고개를 내밀게 되었다.



이렇게 물이 없어도 버티는 존재가 완보동물만은 아니다. 남서아프리카 나미브사막의 웰위치아 미라빌리스, 그 사막에 사는 일부 딱정벌레, 가시도마뱀 역시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 특히 딱정벌레와 가시도마뱀은 안개를 모아 몸으로 물을 끌어들이는데, 이는 인간이 안개를 모으기 훨씬 전부터 이어져 온 생존 기술이다. 미국 남서부의 메리엄캥거루쥐나 킬리피시도 장시간 물 없이 살아남는다. 이들의 존재 자체도 기이하지만, 그 몸이 작동하는 방식은 더더욱 신비로워 독자를 책 속으로 고스란히 끌어당긴다.



2장으로 넘어오면 더 기묘한 생명들이 등장한다. 바로 산소 없이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멋쟁이거북, 코끼리물범, 피놀로리쿠스 친치아이, 유공충, 붕어 종의 일부, 벌거숭이두더지쥐까지 생각보다 긴 목록이 나온다. 이들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흥미로운 사실에 주목했다. 몇몇 종은 암에 대한 강한 내성을 지니고, 어떤 종은 손상된 신경 세포를 다시 자라나게 한다. 이들의 메커니즘을 정확히 밝힌다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해온 여러 질병과 맞서는 새로운 치료법이 나올지도 모른다.



책에 등장하는 생명체들은 일상에서 쉽게 볼 수는 없지만, 한 번쯤은 접한 적이 있다. 바로 우리가 상상 속에서 그려온 외계인이다. 형태를 가늠하기 어려워 상상으로만 만들어낸 기묘한 신체들. 그러나 리사 칼테네커의 『에일리언 어스』에 따르면, 실제 외계 생명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떠올리는 거대한 몸집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미세하고 조용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극한 생존』에 등장하는 동물들과 닮아 있는 것이다. 저자가 이 연상을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상상의 영역이 겹쳐지며 꽤 흥미로운 지점이 된다. 



『극한 생존』은 등장하는 동식물이 워낙 다양해, 이들의 종류와 특성만 따라가도 지식에 대한 갈증이 충분히 채워진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순한 소개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지구가 생겨난 뒤, 남세포 같은 미생물들이 산소를 만들어내며 수많은 생명체가 모습을 갖추었고, 그들이 이미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견뎌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기온 상승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찾아올 여섯 번째 대멸종의 문턱에 서 있다. 



매번 대멸종 때마다 95퍼센트 이상의 종이 사라졌지만, 그 틈에서 살아남은 일부는 다시 진화했고, 새로운 생명들이 모습을 틔우며 오늘의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이 과정이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은 당연히 사라질 것이다. 앞에서 보아온 생명체들과 달리 인간에게는 극한의 환경을 견딜 방어막이 거의 없다. 산소가 끊기고, 물과 먹이가 사라지고, 우주에 흐르는 방사선이 지표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면 인간은 그저 우아하게 멸종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알렉스 라일리의 『극한 생존』은 이처럼 상상을 넘어서는 생명체들의 목록을 늘어놓으며 묻는다. 생명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 그리고 인간은 그 경계 바깥에 선 예외는 아닌가. 이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존재들은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몸으로 살아가는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생명의 경이로움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이 책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기적에 가까운지, 그리고 그 기적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조용히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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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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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문학동네 해문 클럽 2기 두 번째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레슨』이다.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그의 반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삶을 그대로 옮겨 적은 책은 아니다. 오히려 표면적인 서사는 그가 선택하지 못한 삶을 상상하며 쓴 소설에 가깝다. 다만 그 삶을 이끌어가는 연대기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몹시 자전적이다.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께 당한 성추행과 성폭행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비틀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건네는지 차근차근 짚어보려 한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 줄거리는 주인공 롤런드가 어린 시절 피아노 레슨에서 여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열린다. 서른일곱 살, 결혼한 그는 어느 날 아내가 메모 한 장만 남기고 사라져 홀로 아이를 돌보는 편부가 된다. 아내의 실종은 경찰 수사로 번지고, 그는 느닷없이 살인 용의자로까지 몰린다. 그 뒤로 이야기는 전쟁과 문학, 사랑과 실패, 부모 됨과 시대의 격랑 속에서 롤런드가 어떻게 살아남아가는지를 따라가며 그의 인생 파편들을 한 겹씩 드러낸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에는 몇 가지 함정이 숨어 있다. 이건 빈틈이 아니라, 대작가만이 쓸 수 있는 정교한 트릭에 가깝다. 먼저 원제 Lessons는 복수형이다. 이를 단순히 ‘삶이 주는 교훈들’로 읽어버리면 반자전적 서사의 깊이가 납작해진다. 매큐언은 첫 장면부터 피아노 레슨에서 롤런드가 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순간을 심어두고, 그 뒤 그의 모든 선택과 삶의 파편들이 그 장면에서 번져 나오게 한다. 일도, 사랑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도. 결국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 그 자체이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은 롤런드 한 사람의 서사로만 읽으면 이야기가 지나치게 좁아진다.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세계사적 사건들이 쉼 없이 등장하고, 인물과 배경도 끝없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삶에 시대의 사건들이 계속 스며드는 구성은 의도된 것이다. 저자가 부커 상까지 받은 대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소설의 중심축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이언 매큐언이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였는지, 그 연대기적 시선을 롤런드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펼쳐내는 소설이다.


저자는 롤런드의 삶을 따라가면서 체르노빌 사고, 베를린 장벽 붕괴, 사담 후세인 체포, 브렉시트, 코비드 19까지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촘촘히 배치한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배경이 아니라, 롤런드라는 한 개인의 감정과 선택, 실패와 망설임을 비추는 조명처럼 작동한다. 거대한 시대의 파고가 한 인간의 리듬에 어떻게 흔적을 남기는지, 그리고 그 흔적이 다시 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어떻게 바꾸는지. 결국 『레슨』은 롤런드라는 인물을 빌려 세계사의 흐름을 통과한 한 사람의 내면 연대기를 써 내려간 작품에 가깝다.


매큐언은 『레슨』을 두고 스스로 반자전적이라 말했지만, 그 말은 흔히 떠올리는 내 삶의 절반을 옮겨 적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그의 성장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군인 아버지, 전쟁 직후의 영국, 냉전기의 공기 같은 요소들은 작품에 자연스레 스며 있다. 이런 배경만 보면 전형적인 자전적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작품의 핵심은 그 표면적 사실에 있지 않다. 매큐언이 시대를 받아들이고 두려움을 견디고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내적 감각, 그 오래된 시선이 롤런드라는 인물 안에서 다시 자라난다는 데 더 가깝다.


그래서 『레슨』의 반자전성은 사실의 공유가 아니라 시선의 공유이다. 체르노빌 사고, 핵 위협, 베를린 장벽 붕괴, 브렉시트, 코비스 19 같은 거대한 사건들이 롤런드 앞에 놓이는 방식은, 매큐언이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오며 쌓아온 감정의 지층에서 나온다. 그의 삶이 그대로 복제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결국 이 작품은 현실의 작가와 허구의 인물이 서로의 그림자를 나누는 소설이다. 그래서 더 깊고, 그래서 더 정확한 의미에서 반자전적이다.



세 번째는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다. 롤런드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는 인생의 여러 챕터에서 계속 실패를 반복한다. 그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 당한 성폭행이 놓여 있다. 언뜻 보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남자의 삶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작가 자신을 겹치면 스케일이 달라진다. 인간은 누구나 삶에서 올바른 선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도 반복한다. 잘났든 모자라든, 결국 각자의 그릇만큼 잘못된 선택을 할 뿐이다.


롤런드 또한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상식에서 벗어난 선택들로 흔들린다. 하지만 결말에서 그는 이 트라우마의 본질을 마주한다.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경험으로서 자기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이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다. 단순히 어떤 사건이 남긴 교훈이 아니다. 손녀와의 대화에서 ‘좋은 이야기를 억지로 교훈으로 만들려 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장면도 이를 드러낸다. 흔들린 삶을 성급히 해석하고 교훈으로 압축하기보다, 그 흔들림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남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위의 세 가지 시선으로 작품을 들여다보면 이 소설의 구조가 폭발이 아니라 퇴적임을 알게 된다. 롤런드는 늘 흔들리고, 시대는 그의 인생을 계속 훑고 지나가며, 삶의 잔걱정들은 끝도 없이 쌓인다. 독자는 이 과정을 통해 한 가지를 깨닫는다. 개인은 누구나 세계의 흔들림 앞에서 완벽히 버티지 못한다는 것. 결국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파편과 시대의 진동 속에서 흔들리는 일은 롤런드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모습임을 이 작품은 말해준다.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이 축적된 이언 매큐언의 『레슨』은 특별한 누군가의 일대기가 아니다.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향한 이야기다. 누구나 제 몫의 아픔이 있고, 저마다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다. 극단적 선택이 늘어나는 지금의 시대에 롤런드는 조용히 말한다. 괜찮다고. 끝까지 흔들리며 걷다 보면, 그 과정에 쌓인 것들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것은 결코 작은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뒤지는 삶의 결과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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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박자의 마디
내털리 호지스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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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내털리 호지스의 『엇박자의 마디』는 언어로 연주하는 음악 에세이다. 저자는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작가로 전향한 인물이다. 이 책은 그녀가 왜 사랑하는 연주를 내려놓아야 했는지,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음악은 포기했지만 오히려 일상에서 더 가깝게 음악을 이어갔는지를 그린 작품이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을 감성에 기대지 않고 철저히 과학의 언어로 분해해 증명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글자를 따라가기보다 감각을 따라 읽을 때 더 많은 것이 드러나는 그녀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언어로 연주하는 음악 에세이 『엇박자의 마디』는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 내털리 호지스의 음악 인생 이야기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바이올린을 그만둬야 했던 엄마의 영향으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러나 무대공포증을 이기지 못해 결국 연주를 내려놓았고 한동안 음악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바이올린을 잡는다. 이 모든 과정을 감성이 아니라 인지과학, 음악학, 현상학이 뒤섞인 시선으로 분석하며, 자신의 삶에서 엇박자가 난 순간들을 어떻게 넘어서려 했는지를 그렸다.


내털리 호지스의 『엇박자의 마디』라는 제목을 풀어보면, ‘엇박자’는 고통의 형태이고 ‘마디’는 그 고통이 드러나는 순간이자 단위를 뜻한다. 즉 리듬이 삐끗하는 순간, 정박에서 살짝 벗어나는 균열의 지점에서 다가오는 공포를 어떻게 자기 리듬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양자역학과 뇌과학을 도입해 자신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긴장으로 인한 실수, 혼자 해내야 하는 즉흥연주, 사전 연습 없이 타인과 함께하는 즉흥연주에 대한 분석이 두드러진다. 그럼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실수에 대한 부분이다. 그녀는 더 잘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수로 이어져 연주를 망쳤다. 이를 시간 개념과 연결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몰입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음악의 시간에 몰입하면 손과 몸, 연주 실력, 박자 감각이 조화를 이뤄 화성이 되지만, 외부가 인식되는 자아의 시간으로 넘어오는 순간 불협화음, 즉 실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긴장’이라는 말 한마디로 넘기지만, 그녀는 이를 철저히 시간 감각의 철학으로 풀어낸다.


또한 시간의 간극으로 인해 실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의 간극은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외부를 인식하는 동시에 박자감을 놓치는 순간을 의미한다. 반드시 한 박자 뒤에 활을 켤 손이 움직여야 하지만, 긴장으로 인해 그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머릿속에 단어는 떠오르는데 입으로 바로 말이 나오지 않는 순간과 비슷하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결국 그녀는 활을 손에서 내려놓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즉흥연주를 권한다. 악보가 정해져 있지 않다면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성격상 즉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녀는 즉흥연주의 대가인 피아니스트 가브리엘라 몬테로를 뇌과학과 물리학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과연 즉흥연주가 정말 즉흥일까? 그녀는 그 답을 양자물리학의 경로 적분에서 찾는다. 즉흥연주에서 다음 음을 선택하는 것은 입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확률, 즉 본능적으로 ‘가능한 경로를 찾는 능력과 같다고 본다.



결국 그녀는 모든 두려움을 잊고 상대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 둘이서 하는 즉흥 연주 공연을 한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춤을 배운다. 그 과정에서 파트너와 물리적 접촉을 하지 않고고 직감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에 맞추는 연습을 한다. 이를 저자는 동시성과 얽힘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동시성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몸과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같은 시간의 흐름 안에 들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얽힘은 물리적으로 접촉하지 않아도, 상대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해 예측 없이 맞물리는 조응의 순간을 말한다.


즉흥 연주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상대를 통제하지 않고, 자신을 의식하지 않으며, 두 사람이 하나의 리듬으로 묶이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이를 통해 연주가 혼자 하는 기술이 아니라 둘이서 만들어내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과정을 인지심리학과 물리학으로 분석해가며 결국 자신의 무대 공포증을 이기고, 무려 둘이 함께하는 즉흥 연주 공연을 완수한다. 직업으로서의 음악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음악을 일상으로 다시 들인 순간이었다.



무대 공포증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은 그녀가 단순히 바이올린을 포기하는 순간이 아니라, 삶 전체의 리듬이 무너지는 첫 큰 마디였다. 그 엇박자의 마디를 경험한 그녀는 끊임없이 그 지점을 들여다본다. 몸의 리듬이 끊기고, 마음의 리듬이 비틀리고, 세계와 이어지는 템포가 단절되던 그 순간들을. 일반적으로 이런 삼단 붕괴가 일어나면 사람은 자신만의 동굴에 갇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이겨낼 원리를 찾기 위해 끝없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그녀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음악이 아니라, 자기 삶의 리듬이었다. 무대 위에서 계속 삐끗거리던 시간은 단지 연주의 실패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와 어긋나는 감각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두려움이 솟구치는 순간을 분석하고, 몸이 틀어지는 원인을 추적하고, 다시 맞물릴 수 있는 리듬을 찾기 위해 끝없이 반복한다. 이 과정 자체가 그녀에게는 음악이었고,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지 음악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 어긋나는 순간을 어떻게 다시 붙잡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언어로 연주하는 음악 에세이 내털리 호지스의 『엇박자의 마디』는 물리학과 연결되어 있어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핵심 원리만 도입했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 글을 따라가는 데 도움을 준다. 조금 더 쉽게 읽는 팁을 말하자면, 그녀의 글은 문장이라기보다 악기에 가깝고, 음파처럼 먼저 울린 뒤 의미가 따라온다. 그러니 단어 하나하나의 뜻에 집중하기보다 감각으로 읽으면, 그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훨씬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엇박자의마디

#내털리호지스

#문학동네

#에세이

#에세이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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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나의 얼굴을 - 제2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임수지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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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된 제2회 아르떼 문학상 수상작이다. 처음 이 책을 보면 세 가지 면에 당황할 수 있다. 하나는 세계적인 트렌드인 문체이며, 다른 하나는 서사의 부재로 부재의 서사를 그린 부분이다. 세 번째로는 묘사에 대한 디테일이 흔하지 않을 만큼 세밀하다는 낯섦이다. 그러나 이는 철저한 저자의 의도된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작품의 결이 달라 보일 정도로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가장 익숙한 이야기로 독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꺼내게 만드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2회 아르떼 문학상 수상작인 임수지의 장편소설 『잠든 나의 얼굴을』 줄거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진에게 고모의 전화가 오면서 시작된다. 삼 일, 혹은 그것보다 조금 더 길게 스노보드를 타고 오겠으니 할머니를 돌봐달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고모는 나흘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이 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할머니의 닦달에 전화를 걸어보지만 해지된 번호라는 음성만 들려올 뿐이다. 고모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제2회 아르떼 문학상을 수상한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의 큰 특징은 독자가 외부에서 내용을 바라보도록 두지 않는 점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책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독자가 의도치 않게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소환해 그 기억 속으로 빠지게 만든다. 이를 위해 저자는 현미경으로 확대한 듯한 정밀한 디테일, 서사의 부재, 그리고 화자의 목소리 톤을 뒤섞는 기술을 사용했다. 가장 일상적인 가족의 이야기로 독자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힘이다.


세 가지 중 먼저 정밀한 디테일부터 보자. 이 작품의 묘사는 독자들이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을 만큼 세밀해서, 글보다 영상이 먼저 떠오를 정도다. 이 과도한 세밀함이 장면을 파편처럼 흩어놓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기 기억의 이미지로 빈틈을 채워 넣게 된다. 그 결과 독자는 글 속 장면이 아니라 자기 과거를 먼저 재생하게 된다. 이를테면 작중에서 아파트 단지 입구를 묘사할 때 세밀함이 지나치게 분해되어 쏟아지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엔 우리 집 단지 입구가 먼저 떠오르는 식이다.



결국 이 디테일은 한마디로 기억의 단층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어색함과 긴장, 낮은 눈높이, 타인의 집에서 살아남으려는 감정으로 채워지고, 성인이 되어 다시 바라본 풍경은 낡음과 사라짐, 흩어짐, 돌봄의 유령 같은 잔해들로 보인다. 이 변화가 곧 세월의 잔상인데, 작가는 이 디테일을 마치 그릇처럼 쓴다. 묘사가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에 독자는 자기 어린 시절의 계단 냄새, 방 구조, 가족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흘려 넣게 된다. 그러면 소설의 공백이 독자의 과거를 불러내는 통로로 변한다.



다음으로 독자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장치로는 서사의 부재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사가 없다는 것은 소설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보편성을 향해 문을 여는 핵심 기술로 쓰인다. 이야기는 고모의 전화를 받고 시골로 내려가는 초반부에서 사실상 멈춘다. 이후에는 사건도, 갈등도 거의 전개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 비어 있는 자리가 독자가 자신의 기억을 밀어 넣을 수 있는 틈을 만든다.



강력한 서사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서사의 밀도를 높이지만, 동시에 특정 인물의 삶에 독자를 고착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희미한 서사는 나진의 인생을 전면에서 지우고, 대신 독자 자신의 과거를 앞으로 호출한다. 있어야 할 서사를 제거함으로써 생긴 공백은 하나의 빈 그릇처럼 기능하며, 독자는 그 안에 자기 가족의 풍경, 어린 시절의 냄새, 집의 구조 같은 사적 기억을 자연스럽게 흘려 넣게 된다. 이때 부재의 서사는 개인의 기억을 꺼내는 통로가 된다.


다음으로 화자의 목소리 톤과 서술 방식 자체가 독자에게 자신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가족과 과거 회상이 교차하는 장면들은 독자가 서사 속으로 깊이 빠져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오래된 기억 조각들을 소환하도록 이끈다. 이를 위해 화자는 긴 설명도 하지 않고 감정의 폭주도 허락하지 않는다. 너그러움이나 감성적 울림을 앞세우지 않는 건조한 톤을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독자가 이야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장면으로 천천히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사람과 물건의 관계다. 사람이 집을 떠나면 그 사람의 물건도 함께 사라지고, 새로운 물건이 놓이면 그 사람의 자리가 생긴다. 고모가 결혼하거나 여행을 갈 때마다 그녀의 물건은 흔적 없이 빠져나가고, 나진의 책상과 침대가 들어오면 그녀가 이 공간에 정착해야 한다는 구조가 생긴다. 반대로 죽음으로 인한 부재는 물건을 지우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물건이 그대로 집에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물건은 사라짐과 정착의 기준이자, 관계의 흔적을 정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쓰인다.



이 관계는 물건에만 머물지 않고, 공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방은 사람의 위치와 시간이 겹치며 의미가 계속 달라지는 공간이다. 나진의 첫 방은 가족이 잠시 내준 임시방이었다. 고모가 결혼하자 나진은 고모방으로 옮겨가고, 이후 고모가 돌아왔을 때 방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하지만, 고모는 임시방으로 들어가며 공간의 쓰임이 다시 정리된다. 어린 시절 나진에게 임시방은 낯설고 무서운 공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편해진다. 이처럼 방은 사람의 자리와 관계의 변화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은 소설에서 자칫 극약이 될 치명적인 기술들을 과감하게 들여오면서도 문학성을 끝까지 밀어올린 작품이다. 제목의 ‘잠든 나의 얼굴’은 내가 보지 못하는 나, 그러나 누군가는 알고 있는 나의 얼굴을 뜻한다. 그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얼굴로 흘러간다. 우리의 가장 취약하고 완전한 순간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결국 가족이라는 관계가 남기는 흔적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잠든나의얼굴을

#임수지

#아르떼문학상수상작

#은행잎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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