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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평점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문학동네 해문 클럽 2기 두 번째 책은 이언 매큐언의 소설 『레슨』이다.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그의 반자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삶을 그대로 옮겨 적은 책은 아니다. 오히려 표면적인 서사는 그가 선택하지 못한 삶을 상상하며 쓴 소설에 가깝다. 다만 그 삶을 이끌어가는 연대기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몹시 자전적이다. 어린 시절 피아노 선생님께 당한 성추행과 성폭행으로 인해 인생 전체가 비틀린 한 남자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건네는지 차근차근 짚어보려 한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 줄거리는 주인공 롤런드가 어린 시절 피아노 레슨에서 여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열린다. 서른일곱 살, 결혼한 그는 어느 날 아내가 메모 한 장만 남기고 사라져 홀로 아이를 돌보는 편부가 된다. 아내의 실종은 경찰 수사로 번지고, 그는 느닷없이 살인 용의자로까지 몰린다. 그 뒤로 이야기는 전쟁과 문학, 사랑과 실패, 부모 됨과 시대의 격랑 속에서 롤런드가 어떻게 살아남아가는지를 따라가며 그의 인생 파편들을 한 겹씩 드러낸다.
이언 매큐언의 『레슨』에는 몇 가지 함정이 숨어 있다. 이건 빈틈이 아니라, 대작가만이 쓸 수 있는 정교한 트릭에 가깝다. 먼저 원제 Lessons는 복수형이다. 이를 단순히 ‘삶이 주는 교훈들’로 읽어버리면 반자전적 서사의 깊이가 납작해진다. 매큐언은 첫 장면부터 피아노 레슨에서 롤런드가 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하는 순간을 심어두고, 그 뒤 그의 모든 선택과 삶의 파편들이 그 장면에서 번져 나오게 한다. 일도, 사랑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도. 결국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 그 자체이다.
두 번째로, 이 작품은 롤런드 한 사람의 서사로만 읽으면 이야기가 지나치게 좁아진다. 그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세계사적 사건들이 쉼 없이 등장하고, 인물과 배경도 끝없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의 삶에 시대의 사건들이 계속 스며드는 구성은 의도된 것이다. 저자가 부커 상까지 받은 대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소설의 중심축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이언 매큐언이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였는지, 그 연대기적 시선을 롤런드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펼쳐내는 소설이다.
저자는 롤런드의 삶을 따라가면서 체르노빌 사고, 베를린 장벽 붕괴, 사담 후세인 체포, 브렉시트, 코비드 19까지 현대사의 굵직한 장면들을 촘촘히 배치한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배경이 아니라, 롤런드라는 한 개인의 감정과 선택, 실패와 망설임을 비추는 조명처럼 작동한다. 거대한 시대의 파고가 한 인간의 리듬에 어떻게 흔적을 남기는지, 그리고 그 흔적이 다시 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어떻게 바꾸는지. 결국 『레슨』은 롤런드라는 인물을 빌려 세계사의 흐름을 통과한 한 사람의 내면 연대기를 써 내려간 작품에 가깝다.
매큐언은 『레슨』을 두고 스스로 반자전적이라 말했지만, 그 말은 흔히 떠올리는 내 삶의 절반을 옮겨 적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그의 성장기에 실제로 존재했던 군인 아버지, 전쟁 직후의 영국, 냉전기의 공기 같은 요소들은 작품에 자연스레 스며 있다. 이런 배경만 보면 전형적인 자전적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작품의 핵심은 그 표면적 사실에 있지 않다. 매큐언이 시대를 받아들이고 두려움을 견디고 세계를 이해하려 했던 내적 감각, 그 오래된 시선이 롤런드라는 인물 안에서 다시 자라난다는 데 더 가깝다.
그래서 『레슨』의 반자전성은 사실의 공유가 아니라 시선의 공유이다. 체르노빌 사고, 핵 위협, 베를린 장벽 붕괴, 브렉시트, 코비스 19 같은 거대한 사건들이 롤런드 앞에 놓이는 방식은, 매큐언이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오며 쌓아온 감정의 지층에서 나온다. 그의 삶이 그대로 복제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결국 이 작품은 현실의 작가와 허구의 인물이 서로의 그림자를 나누는 소설이다. 그래서 더 깊고, 그래서 더 정확한 의미에서 반자전적이다.
세 번째는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다. 롤런드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그는 인생의 여러 챕터에서 계속 실패를 반복한다. 그 밑바탕에는 어린 시절 당한 성폭행이 놓여 있다. 언뜻 보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한 남자의 삶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작가 자신을 겹치면 스케일이 달라진다. 인간은 누구나 삶에서 올바른 선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도 반복한다. 잘났든 모자라든, 결국 각자의 그릇만큼 잘못된 선택을 할 뿐이다.
롤런드 또한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상식에서 벗어난 선택들로 흔들린다. 하지만 결말에서 그는 이 트라우마의 본질을 마주한다.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경험으로서 자기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이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다. 단순히 어떤 사건이 남긴 교훈이 아니다. 손녀와의 대화에서 ‘좋은 이야기를 억지로 교훈으로 만들려 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장면도 이를 드러낸다. 흔들린 삶을 성급히 해석하고 교훈으로 압축하기보다, 그 흔들림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남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위의 세 가지 시선으로 작품을 들여다보면 이 소설의 구조가 폭발이 아니라 퇴적임을 알게 된다. 롤런드는 늘 흔들리고, 시대는 그의 인생을 계속 훑고 지나가며, 삶의 잔걱정들은 끝도 없이 쌓인다. 독자는 이 과정을 통해 한 가지를 깨닫는다. 개인은 누구나 세계의 흔들림 앞에서 완벽히 버티지 못한다는 것. 결국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파편과 시대의 진동 속에서 흔들리는 일은 롤런드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모습임을 이 작품은 말해준다.
피아노 레슨이 만들어낸 인생의 파편들이 축적된 이언 매큐언의 『레슨』은 특별한 누군가의 일대기가 아니다.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향한 이야기다. 누구나 제 몫의 아픔이 있고, 저마다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다. 극단적 선택이 늘어나는 지금의 시대에 롤런드는 조용히 말한다. 괜찮다고. 끝까지 흔들리며 걷다 보면, 그 과정에 쌓인 것들이 어느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고. 그것은 결코 작은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뒤지는 삶의 결과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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