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는 연결과 소통, 그리고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다. 스트라우트 월드의 결정체라 불리는 이 작품에는 그동안 그녀의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흔하디흔한 우리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녀가 던지는 메시지는 놀라울 만큼 또렷하다. 기록되지 않은 삶, 이해할 수 없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 인생이 기록된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타인과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는 밥 버지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메인 주의 작은 마을에 사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실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여러 인물의 삶이 짧은 에피소드처럼 이어진다. 병든 아내를 돌보는 남편, 외로움 속에서 노년을 건너는 사람,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는 인물, 가족과 멀어졌지만 끝내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사람들. 이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며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서로의 삶을 스쳐 지나간다.
『이야기를 들려줘요』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설정한 인물들은 삶의 끝에서 더는 도망칠 수 없는 육십 대 이상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수많은 불륜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로 전락하지 않는다. 만약 주인공들이 서른이나 마흔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선택의 서사가 되었을 것이다. 아직 빠져나갈 수 있고, 고칠 수 있고, 재배치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들의 불륜은 실수나 모험이 되고, 소통은 노력의 문제로 바뀌며, 오해는 수습되고, 죄는 갚을 수 있는 빚이 되며, 관계에는 리셋 버튼이 남는다.
근데 지금 인물들은 그 버튼이 닳아 사라진 나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선택이 아니라 잔존으로 이어진다. 왜 그랬는지가 아니라, 그렇게 된 채로 어떻게 하루를 넘기는가의 문제다. 설명은 중요하지 않고, 수정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남아 있는 태도만이 문제 되며, 옆에 앉을 것인가, 등을 돌릴 것인가만 남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지나온 연령대를 설정함으로써 더 이상 의미를 과장하지 않는다. 관계를 미화하지도, 죄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끝까지 남아 있는 방식만을 묻는다.
작품 속에는 죄를 먹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대표적인 인물로 밥 버지스가 등장한다. 이 설정의 원형은 서양 민속에 등장하는 죄 먹는이다. 사람이 죽으면 누군가가 와서 그 집의 빵이나 음식을 먹는데, 그 음식에 죽은 이의 죄가 옮겨붙어 있다고 믿었다. 먹는 사람은 그 죄를 대신 짊어지는 존재였고, 그래서 그는 마을에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멀리해야 할 인물로 여겨졌다. 축복과 저주의 중간쯤에 놓인 자리다. 이 작품에서 바로 그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밥 버지스이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죄를 먹는 사람’은 도덕적 판결을 내리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의 고백과 후회, 부끄러움, 끝내 말하지 못한 진실을 조용히 받아내는 쪽에 가깝다. 누군가는 말해야 살아갈 수 있고, 누군가는 들어줘야 그 말이 세상에 남는다. 스트라우트는 그 듣는 자리를 ‘죄를 먹는 사람’이라 부른다. 타인의 이야기를 삼켜 자기 안에 남기는 사람. 그래서 이 말에는 윤리보다 체온이 있고, 심판보다 생활이 먼저 떠오른다. 죄를 먹는 사람이란 결국 타인의 무게를 대신 들고, 아무 말 없이 늙어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고 밥이 착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들어주기는 하지만, 잘 듣는 사람은 아니다. 타인의 말을 자기 언어로만 듣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죄를 먹는다'는 표현은 더 불편해진다. 그는 말을 그대로 삼키지 않고, 씹어서 소화한다. 다시 말해 자기 식으로 재배열한다. 그 결과 밥은 완벽한 공감자도, 순수한 수용자도 아니다. 그의 듣기는 늘 어긋나 있다. 그는 상대의 말보다 먼저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는 자기 상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맞춰 말을 이해한다. 그러면 저자는 왜 밥을 이런 인물로 설정했을까?
이 질문은 곧 이해와 소통이 왜 이렇게 자주 어긋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바벨탑 이후의 언어는 민족 단위로만 갈라진 것이 아니라, 개인 단위로 더 잘게 쪼개진 것은 아닐까. 이런 세계에서 밥은 번역가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기 방언밖에 쓰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말하는 이의 핵심은 흘러가고, 밥 안에서 재구성된 의미만 남는다. 듣는 쪽은 구원받았다고 느끼지만, 완전히 이해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가 짊어지는 것은 타인의 진실이 아니라, 번역된 뒤 남은 잔여물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게 무가치해지진 않다. 오히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인간관계의 정확한 모습이다. 저자는 끝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냉정함을 유지한다. 진짜 공감 같은 건 없지만, 이런 식의 연결로 각자의 상처를 메꾸면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밥이 죄를 먹는다는 건, 타인의 죄를 깨끗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언어로 오독된 채로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함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간이자 우리의 나아가야 할 모습으로.
이 소설을 읽으며 남는 감각은 분명하다. 인간이 연결을 시도하는 이유는 혼자 있기엔 너무 조용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미 망가졌고, 그럼에도 침묵은 더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말로 떠들고, 자기 식으로 오해하면서도 같은 공간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 언어는 혼자서는 미완이고, 둘이 되면 더 미완이 되지만,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더 미완인 상태를 선택한다. 정확성보다 동행이 필요하며, 그 동행은 이해를 약속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안도를 주기 때문이다.
연결과 소통, 그리고 바벨탑 이후의 인간을 일상의 장면으로 그려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가 전하는 말은 단순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말이 통할 수 있다는 희망도, 관계가 회복된다는 약속도 아니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남아 있어도 된다는 것, 온전한 공감이 사라진 뒤에도 같은 공간에 머무는 법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 작품의 체온이고,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의 작품 속 얼어붙은 심장에 온기를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