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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이야기 ㅣ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고딕 이야기』는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이시리즈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개스켈은 샬럿 브론테의 첫 전기를 쓴 작가이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답게 작품 속엔 산업화, 사회 계급, 종교, 페미니즘이 차분히 얽혀 있다. 19세기 초 작품답게 직선으로 내리꽂는 문체보다는 은근하게 감싸고 도는 문장이 대부분이다. 여성 작가임에도 단단한 문체 덕분에 읽는 동안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점도 흥미롭다. 잠시 그녀가 만든 고딕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고딕 이야기』는 「실종」, 「늙은 보모의 회상」, 「대지주 이야기」,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 「굽은 나뭇가지」, 그리고 「궁금하다, 사실인지」까지 총 일곱 편의 단편을 들려준다. 제목답게 초자연적 현상과 설명되지 않는 경이로움, 특정한 이유로 귀환한 유령이 등장하지만, 개스켈이 진짜로 말하려는 건 공포가 아니다. 각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결과를 집요하게 뒤따라가며, 결국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유령이 아니라 사람임을 그린다.
『고딕 이야기』 속 고딕은, 낡은 성이나 폐가, 유령 같은 겉모습보다 정서의 분위기를 먼저 세우는 장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에서 인간의 공포와 죄책, 욕망이 드러나고, 초자연적 현상은 그 감정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래서 고딕의 핵심은 귀신이나 괴물이 아니라 감춰진 과거와 억눌린 욕망이 되돌아오는 순간에 있다. 무너져가는 집이나 반복되는 발소리 같은 호러적 요소는 결국 인간 내면의 균열을 비유하는 장치일 뿐이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살펴 보자. 먼저 「늙은 보모 이야기」이다. 보모는 자신이 기르던 소녀를 데리고 어느 저택으로 들어간다. 이 저택은 날씨가 궂은 날이면 다 부서진 오르간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처음부터 서늘한 분위기를 가진 곳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사라지고, 혼비백산해 찾았을 때는 거의 얼어 죽기 직전이었다. 깨어난 소녀는 자신을 불러낸 또 다른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날 이후 눈보라가 치는 바깥에서 한 아이가 소녀를 부르고, 소녀는 그 아이가 얼어 죽지 않도록 집 안으로 들이려 한다.
하지만 보모를 비롯하여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막으려 든다. 모든 현재는 과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저택에는 한때 음악을 사랑하던 남자와 그의 두 딸이 살았다. 그는 외국인 음악가를 들여왔고, 두 딸은 동시에 그에게 마음을 품었다. 남자는 한 딸과 비밀리에 결혼해 아이를 낳았지만, 겉으로는 다른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오해와 질투, 그리고 ‘몰래 아이를 낳은 딸’에 대한 아버지의 수치심이 만들어낸 과거가 드러나면서, 결국 가장 추악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서늘하게 떠오른다.
결국 밖에서 소녀를 불러낸 여자와 아이는 남들 몰래 태어난 아이와 엄마의 유령이다. 이 이야기의 진짜 핵심은 유령이 아니라, 사랑과 질투, 수치심이 뒤엉켜 만들어낸 ‘가문의 침묵’이 어떻게 공간을 점령하느냐이다. 저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숨겨진 과거를 품은 폐쇄적 구조이고, 눈보라 속에 나타나는 모녀 유령은 비극을 재현하려는 존재가 아니라 그 침묵을 깨기 위해 되돌아온 기억의 형상이다. 저자는 과거의 밀봉된 악행을 드러내기 위하여 현재에 그들의 유령을 불러낸 셈이다.
결국 보모와 소녀가 겪는 공포는 초자연적 현상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봉인된 감정이 틈을 열고 새어 나올 때 생기는 균열에서 비롯된다. 소녀를 유혹하듯 부르는 외부의 기척은 과거가 현재를 향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이고, 저택의 삭은 구조와 눈보라는 그 균열을 시각적으로 확장한다. 개스켈은 이 균열을 따라가며 결국 공포의 근원을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놓아두고, ‘유령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유령을 만들어낸 인간의 선택이 무섭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다음 이야기로는 「빈자 클라라 수녀회」이다. 브리짓 피츠제럴드는 강단 있는 하녀로, 주인을 섬기면서 딸 메리를 키운다. 메리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겠다며 집을 떠나고, 처음엔 편지가 오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소식이 끊긴다. 세월이 흘러 주인이 죽어 저택만 남은 뒤에도 브리짓은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객 무리가 왔고, 그중 한 남자가 메리가 아끼던 개를 총으로 쏴 죽인다. 딸과 가장 가까웠던 존재가 눈앞에서 쓰러지자 브리짓은 절망 속에서 저주를 내뱉는다.
브리짓의 저주는 시간이 흘러 그 남자의 후손인 루시에게 도달한다. 루시 곁에는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악한 분신이 붙어다니며 그녀의 삶을 조금씩 무너뜨린다. 변호사인 ‘나’가 이 기이한 사건의 원인을 추적해 브리짓에게 닿았을 때, 브리짓은 자신이 퍼뜨린 말의 그림자가 어떤 파국을 만들었는지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죽음으로서 자신이 만든 사악한 분신을 없애면서 저주를 푼다. 결국 공포의 근원은 초자연이 아니라 절망한 인간이 내뱉은 말 한마디라는 것을 작품은 말한다.
이 이야기의 공포는 도플갱어나 저주 같은 초자연이 아니라, 한 인간이 감당하지 못한 상실이 어떻게 세상에 번져나가는가에 있다. 브리짓이 개를 잃고 내뱉은 저주는 딸을 잃은 슬픔과 죄책감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파열음이고, 개스켈은 이 감정의 파편이 시간을 건너 타인에게 가닿는 과정을 고딕적 장치로 변환한다. 결국 분신은 악령이 아니라 브리짓의 슬픔이 만들어낸 잔향이며, 그녀가 죽음으로 상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손녀 루시에게 씌워진 저주도 사라진다.
저자는 『고딕 이야기』에서 호러적 요소를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인물들이 외면해온 감정과 기억을 밀어 올리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갑작스러운 사라짐, 저주, 눈보라 속에 스치는 형상 같은 것들은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 과거의 비극을 호출하는 신호에 가깝다. 유령은 벌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잊힌 진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폐가나 잠긴 방은 가문의 죄와 억눌린 욕망이 굳어버린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녀가 펼쳐 보이는 초현실 속에서 인간 내면의 민낯을 마주해 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