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디 할머니 - 소설가가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 베스트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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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불리는 박완서의 단편 소설집 『쥬디 할머니』는 저자의 타계 15주년을 기리며 한국 대표 소설가 31인이 뽑은 명단편 10편을 묶은 책이다. 한국 소설가 가운데 드물게 감정적 호소나 저자의 판단을 앞세우지 않는 보여주기 기법을 구사해, 독자가 각자의 상황에 맞게 이야기를 받아들이도록 한다. 한국전쟁이라는 직접적 체험에서 출발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대적 스펙트럼을 아우르며, 이 단편집은 읽는 이에게 뒤늦은 반전처럼 얼얼한 감각을 남긴다.


박완서의 『쥬디 할머니』는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에서 선별해 엮은 단편소설집이다. 각 편마다 등장인물도 다르고 시대적 배경 역시 지금의 현대인이 보기에는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놀랍게도 그 시간의 벽을 가뿐히 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분명 먼 과거의 이야기임에도, 지금 바로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각 편마다 반전이 숨어 있고, 독자의 판단에 맡기듯 던져진 에피소드들은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철학 소설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오늘은 책의 타이틀이기도 한 「쥬디 할머니」와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을 나란히 놓고 살펴보려 한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할머니이지만, 자기 신화를 만들어낸 여성과 타인에 의해 여성성이 관리되고 박탈되며 강요되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쥬디 할머니가 여성성을 ‘과시’로 관리했다면, 할미꽃의 할머니는 여성성을 ‘통제’로 관리당한다. 이 두 작품을 함께 읽다 보면 여성성은 과연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언제나 타인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닿게 된다.


먼저 「쥬디 할머니」는 고운 할머니라는 외피 뒤에 남의 소실이자 자식을 버린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인물이며, 과거를 아는 사람과 마주친 뒤 기존의 울타리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택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그녀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쥬디 할머니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말 ‘안에서’ 살아야만 했던 사람에 가깝다. 그녀가 자랑으로 삼았던 자식과 손녀들의 사진은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울타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울타리는 거짓말이면서 동시에 생존 장치다.


마지막에 쥬디의 사진을 버리는 장면은 단순한 각성이 아니다. 이전의 설정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농장으로 향하는 선택 역시 속죄도, 도피도 아니다. 그저 또 다른 거짓말을 시작하러 가는 일에 가깝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간은 진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이 사라지는 순간, 삶 자체가 무너진다. 이 작품은 거짓말로 쌓아 올린 울타리를 과연 스스로의 손으로 부술 수 있겠느냐고. 인간은 언제까지, 어디까지 자신을 속이며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우리가 「쥬디 할머니」를 읽고 느끼는 불편함은 단순히 반전에 대한 소름이나 인물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거짓 울타리는 극단적이지만, 방식만 다를 뿐 그 구조 자체는 우리 역시 일상에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그녀가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장면이 유독 무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역시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결국 문제는 울타리를 쳤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울타리가 전부라고 믿고 있는지의 차이이다.


다음으로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알지 못했던 두 노파의 이야기다. 첫 번째 노파는 마을에 들이닥친 미군들로부터 처녀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그들의 성욕 풀이 대상이 되기를 택한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녀의 옷을 벗기다 젊은 여자가 아님을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터뜨린 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채 선물까지 쥐여 주며 ‘마마상 찹찹’이라 부르고 돌려보낸다. 그녀가 보호받은 이유는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여자가 아니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노파는 남편을 잃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연히 들른 김병사와 마주한다. 당시 부대에는 총알이 숫총각만 찾아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노파는 이를 듣고 자신을 이용하라고 말한다. 머뭇거리는 병사를 노파는 거의 덮치다시피 하고, 그 순간 그가 느낀 공포는 폭력이 아니라 노년의 몸에도 여전히 욕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노파의 희열은 사랑이나 구원이 아니라, ‘나는 아직 여자다’라는 선언에 가깝다. 두 노파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었던 셈이다.



저자는 이들에게 ‘노파’나 ‘할머니’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호칭은 성별과 욕망, 위험성을 지워버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존중의 언어라기보다 관리의 언어에 가깝다. 한쪽은 여자가 아니어야 살 수 있었고, 다른 한쪽은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아 타인을 파괴했으니, 중성적인 호칭은 오히려 거짓말이 된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도 ‘여자’라는 존재만큼은 끝까지 남겨 두었고, 이 작품은 마지막으로 묻는다. 과연 이들에게 중성을 덧씌울 권리는 누구에게 있었을까?


박완서의 단편 소설집 『쥬디 할머니』 속 단편들은 하나의 주제나 태도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스스로 신화를 써 내려가며 살아남고, 누군가는 여자가 아니어야 보호받으며, 또 누군가는 끝까지 여자이기를 붙잡다가 위험해진다. 박완서는 이 선택들 가운데 어느 것도 옳거나 구원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판단을 거둔 자리에 인물만 남겨두고, 그들이 살아남은 방식과 무너진 지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집은  무엇이 옳았는지를 묻기보다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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