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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천재 고려 - 최강대국에 맞선 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
이익주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익주의 『외교 천재 고려』는 미중 패권 사이에 선 지금 읽어야 하는 고려 외교사에 관한 책이다. 현대의 무역 전쟁에 과거의 국가사가 굳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현재와 매우 비슷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만한 지점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송, 명, 요, 금, 원나라 사이에 끼어 있던 고려의 사정은 현재 대한민국보다 훨씬 열악했기에, 우리 조상들의 행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미중 패권 사이에 선 지금 읽어야 할 고려 외교사, 이익주의 『외교 천재 고려』는 고려의 건국부터 멸망까지의 역사 가운데 외교와 관련된 부분만을 선별해 서술한 작품이다. 송과 남송,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 명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못지않은 강대국들과 시기를 함께한 고려 500년의 역사. 약소국이었지만 강대국에 끌려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국의 존재와 이익을 지키는 방향으로 실리 외교를 이어온 고려인들. 책은 그들의 선택을 통해 우리가 오늘의 위기를 돌파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외교 천재 고려』에서 저자 이익주는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까닭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과거를 단순히 외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교훈을 길어 올리며, 역사가 발전한다는 믿음을 세우고, 역사적 사고력을 기르며,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모든 목적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국제관계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지금의 위기를 빠져나갈 실마리를 찾는 것. 즉 역사는 “올바로 보고, 올바르게 인식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장 실익 있는 대응을 하기 위한” 사고의 틀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실리적인 외교를 매 순간 이어온 고려의 행태를 파헤친다. 또한 500년이라는 비슷한 존속 기간을 지닌 고려와 조선의 외교 관점을 나란히 놓고, 평행선 위에 선 듯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한두 왕조의 결과를 꼼꼼히 비교한다. 특히 고려 초기의 찬란한 시절이 아니라 가장 어려웠던 원 간섭기의 왕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점이 인상적이다. 성군이라기보다 나라의 존속을 위해 협상가가 되어야 했던 왕과 신료들의 모습은 오늘의 국정을 이끄는 관료들과 겹쳐 보인다.
또한 이 작품이 돋보이는 지점은 단순히 고려와 강대국의 관계만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국과 타국의 관계까지 함께 끌어들여 확장된 대외 질서 속에서 고려를 바라보게 한다. 주관적 역사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국제 관계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인식하게 만드는 서술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겉보기에 무관해 보이는 베트남 지역의 정세가 고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사례는 특히 인상적이다. 고려는 단지 존속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국제 정세의 틈을 활용해 실질적인 이익까지 얻어냈다.
이러한 사례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약소국이었던 고려는 강대국 사이에서 줄을 서기보다 판을 읽으려 했다. 한 나라의 왕마저 체면보다 실리를 택하고, 때로는 자존심까지 낮추어야 했던 선택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었다. 그 태도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처한 외교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얕은 판단으로 한 국가의 편에 서며 스스로를 약소국으로 규정하는 일도, 국력을 과신해 정면충돌을 택하는 일도 모두 위험하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고려의 상황은 그 극단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분명히 보여준다.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고려 말의 사정을 이 책은 깊이 조명한다. 저자는 당시 왕들의 선택이 얼마나 영민했는지를 보여준다. 대외적으로는 외교가 통하지 않는 원의 침략이 이어졌고, 내부적으로는 무신 정권으로 왕권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생존을 위해 원에 투항하고 영토를 내주었으며, 곳곳에서 민란도 일어났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한 세기 가까이 버텨낸 고려가 ‘고려’라는 국호를 유지한 채 원 간섭기를 벗어나는 장면은, 멸망 직전이었지만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나라를 살리기 위해 원의 공주와 국혼을 이어온 고려의 왕들은 단순히 혼인을 통해 안위를 도모한 존재가 아니었다. ‘국부’라는 지위를 통해 원 정치에 일정 부분 개입할 여지도 있었지만, 이를 함부로 행사하지 않고 상황을 읽으며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다. 외국 공주와의 혼인은 개인적 욕망이나 체면이 아니라 국가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다. 체면보다 국익을 택한 이 선택은 굴종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힘의 구조를 냉정히 읽어낸 결정이었기에 고려는 끝내 ‘고려’라는 국호를 지킬 수 있었다.
고려 말의 상황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드라마로 익숙한 기황후 편이다. 고려를 위해 정의로웠던 기황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의 일가는 자국을 괴롭히며 사익을 취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권력욕이 역설적으로 고려의 최대 적이던 원의 붕괴를 재촉했다는 사실이다. 제1황후에 오른 지 3년 만에 주원장에 의해 쓸쓸한 최후를 맞은 그녀는 끝내 고려의 편에 선 적은 없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야망이 고려의 적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아이러니한 인물로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남긴 채 역사에 기록되었다.
결국 『외교 천재 고려』가 보여주는 것은 약소국의 생존 방식이다. 고려는 강대국 사이에서 감정적 대응이나 일방적 굴종을 택하지 않았다. 때로는 자존심을 낮추고, 때로는 개입을 자제하며, 상황에 따라 계산된 선택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국혼과 같은 결정 역시 체면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를 읽어낸 전략이었다. 그 결과 100년에 가까운 원 간섭기 속에서도 국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외교가 도덕적 우열이나 명분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구조를 읽어내고 선택을 조정하는 판단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이익주의 『외교 천재 고려』는 미중 패권 사이에 선 지금 읽어야 하는 고려 외교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는 책이다. 방대한 고려사를 나열하는 대신 외교라는 한 줄기로 정리해 국가의 선택 과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문적인 사료와 분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관을 덧붙이지 않아 설득력을 갖춘다. 학문적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서술은 평이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결국 이 책은 과거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교를 판단의 기술로 이해하게 만드는 역사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