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박자의 마디
내털리 호지스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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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내털리 호지스의 『엇박자의 마디』는 언어로 연주하는 음악 에세이다. 저자는 바이올리니스트였으나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작가로 전향한 인물이다. 이 책은 그녀가 왜 사랑하는 연주를 내려놓아야 했는지,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음악은 포기했지만 오히려 일상에서 더 가깝게 음악을 이어갔는지를 그린 작품이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을 감성에 기대지 않고 철저히 과학의 언어로 분해해 증명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글자를 따라가기보다 감각을 따라 읽을 때 더 많은 것이 드러나는 그녀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자.



언어로 연주하는 음악 에세이 『엇박자의 마디』는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자 2세 내털리 호지스의 음악 인생 이야기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바이올린을 그만둬야 했던 엄마의 영향으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러나 무대공포증을 이기지 못해 결국 연주를 내려놓았고 한동안 음악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바이올린을 잡는다. 이 모든 과정을 감성이 아니라 인지과학, 음악학, 현상학이 뒤섞인 시선으로 분석하며, 자신의 삶에서 엇박자가 난 순간들을 어떻게 넘어서려 했는지를 그렸다.


내털리 호지스의 『엇박자의 마디』라는 제목을 풀어보면, ‘엇박자’는 고통의 형태이고 ‘마디’는 그 고통이 드러나는 순간이자 단위를 뜻한다. 즉 리듬이 삐끗하는 순간, 정박에서 살짝 벗어나는 균열의 지점에서 다가오는 공포를 어떻게 자기 리듬으로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양자역학과 뇌과학을 도입해 자신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특히 긴장으로 인한 실수, 혼자 해내야 하는 즉흥연주, 사전 연습 없이 타인과 함께하는 즉흥연주에 대한 분석이 두드러진다. 그럼 이제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실수에 대한 부분이다. 그녀는 더 잘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수로 이어져 연주를 망쳤다. 이를 시간 개념과 연결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몰입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음악의 시간에 몰입하면 손과 몸, 연주 실력, 박자 감각이 조화를 이뤄 화성이 되지만, 외부가 인식되는 자아의 시간으로 넘어오는 순간 불협화음, 즉 실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긴장’이라는 말 한마디로 넘기지만, 그녀는 이를 철저히 시간 감각의 철학으로 풀어낸다.


또한 시간의 간극으로 인해 실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의 간극은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외부를 인식하는 동시에 박자감을 놓치는 순간을 의미한다. 반드시 한 박자 뒤에 활을 켤 손이 움직여야 하지만, 긴장으로 인해 그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하면, 머릿속에 단어는 떠오르는데 입으로 바로 말이 나오지 않는 순간과 비슷하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결국 그녀는 활을 손에서 내려놓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 즉흥연주를 권한다. 악보가 정해져 있지 않다면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성격상 즉흥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그녀는 즉흥연주의 대가인 피아니스트 가브리엘라 몬테로를 뇌과학과 물리학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과연 즉흥연주가 정말 즉흥일까? 그녀는 그 답을 양자물리학의 경로 적분에서 찾는다. 즉흥연주에서 다음 음을 선택하는 것은 입자가 다른 곳으로 이동할 확률, 즉 본능적으로 ‘가능한 경로를 찾는 능력과 같다고 본다.



결국 그녀는 모든 두려움을 잊고 상대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 둘이서 하는 즉흥 연주 공연을 한다. 이를 위하여 그녀는 춤을 배운다. 그 과정에서 파트너와 물리적 접촉을 하지 않고고 직감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에 맞추는 연습을 한다. 이를 저자는 동시성과 얽힘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동시성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몸과 리듬을 유지하면서도 같은 시간의 흐름 안에 들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얽힘은 물리적으로 접촉하지 않아도, 상대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해 예측 없이 맞물리는 조응의 순간을 말한다.


즉흥 연주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지점에서 비로소 성립한다. 상대를 통제하지 않고, 자신을 의식하지 않으며, 두 사람이 하나의 리듬으로 묶이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이를 통해 연주가 혼자 하는 기술이 아니라 둘이서 만들어내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모든 과정을 인지심리학과 물리학으로 분석해가며 결국 자신의 무대 공포증을 이기고, 무려 둘이 함께하는 즉흥 연주 공연을 완수한다. 직업으로서의 음악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음악을 일상으로 다시 들인 순간이었다.



무대 공포증을 이기지 못하는 순간은 그녀가 단순히 바이올린을 포기하는 순간이 아니라, 삶 전체의 리듬이 무너지는 첫 큰 마디였다. 그 엇박자의 마디를 경험한 그녀는 끊임없이 그 지점을 들여다본다. 몸의 리듬이 끊기고, 마음의 리듬이 비틀리고, 세계와 이어지는 템포가 단절되던 그 순간들을. 일반적으로 이런 삼단 붕괴가 일어나면 사람은 자신만의 동굴에 갇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이겨낼 원리를 찾기 위해 끝없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그녀가 되찾고 싶었던 것은 음악이 아니라, 자기 삶의 리듬이었다. 무대 위에서 계속 삐끗거리던 시간은 단지 연주의 실패가 아니라 자신이 세계와 어긋나는 감각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두려움이 솟구치는 순간을 분석하고, 몸이 틀어지는 원인을 추적하고, 다시 맞물릴 수 있는 리듬을 찾기 위해 끝없이 반복한다. 이 과정 자체가 그녀에게는 음악이었고,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단지 음악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 어긋나는 순간을 어떻게 다시 붙잡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언어로 연주하는 음악 에세이 내털리 호지스의 『엇박자의 마디』는 물리학과 연결되어 있어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핵심 원리만 도입했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 글을 따라가는 데 도움을 준다. 조금 더 쉽게 읽는 팁을 말하자면, 그녀의 글은 문장이라기보다 악기에 가깝고, 음파처럼 먼저 울린 뒤 의미가 따라온다. 그러니 단어 하나하나의 뜻에 집중하기보다 감각으로 읽으면, 그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훨씬 선명하게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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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나의 얼굴을 - 제2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임수지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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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된 제2회 아르떼 문학상 수상작이다. 처음 이 책을 보면 세 가지 면에 당황할 수 있다. 하나는 세계적인 트렌드인 문체이며, 다른 하나는 서사의 부재로 부재의 서사를 그린 부분이다. 세 번째로는 묘사에 대한 디테일이 흔하지 않을 만큼 세밀하다는 낯섦이다. 그러나 이는 철저한 저자의 의도된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작품의 결이 달라 보일 정도로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가장 익숙한 이야기로 독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꺼내게 만드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2회 아르떼 문학상 수상작인 임수지의 장편소설 『잠든 나의 얼굴을』 줄거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진에게 고모의 전화가 오면서 시작된다. 삼 일, 혹은 그것보다 조금 더 길게 스노보드를 타고 오겠으니 할머니를 돌봐달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고모는 나흘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이 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할머니의 닦달에 전화를 걸어보지만 해지된 번호라는 음성만 들려올 뿐이다. 고모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제2회 아르떼 문학상을 수상한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의 큰 특징은 독자가 외부에서 내용을 바라보도록 두지 않는 점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책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독자가 의도치 않게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소환해 그 기억 속으로 빠지게 만든다. 이를 위해 저자는 현미경으로 확대한 듯한 정밀한 디테일, 서사의 부재, 그리고 화자의 목소리 톤을 뒤섞는 기술을 사용했다. 가장 일상적인 가족의 이야기로 독자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힘이다.


세 가지 중 먼저 정밀한 디테일부터 보자. 이 작품의 묘사는 독자들이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을 만큼 세밀해서, 글보다 영상이 먼저 떠오를 정도다. 이 과도한 세밀함이 장면을 파편처럼 흩어놓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기 기억의 이미지로 빈틈을 채워 넣게 된다. 그 결과 독자는 글 속 장면이 아니라 자기 과거를 먼저 재생하게 된다. 이를테면 작중에서 아파트 단지 입구를 묘사할 때 세밀함이 지나치게 분해되어 쏟아지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엔 우리 집 단지 입구가 먼저 떠오르는 식이다.



결국 이 디테일은 한마디로 기억의 단층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어색함과 긴장, 낮은 눈높이, 타인의 집에서 살아남으려는 감정으로 채워지고, 성인이 되어 다시 바라본 풍경은 낡음과 사라짐, 흩어짐, 돌봄의 유령 같은 잔해들로 보인다. 이 변화가 곧 세월의 잔상인데, 작가는 이 디테일을 마치 그릇처럼 쓴다. 묘사가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에 독자는 자기 어린 시절의 계단 냄새, 방 구조, 가족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흘려 넣게 된다. 그러면 소설의 공백이 독자의 과거를 불러내는 통로로 변한다.



다음으로 독자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장치로는 서사의 부재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사가 없다는 것은 소설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보편성을 향해 문을 여는 핵심 기술로 쓰인다. 이야기는 고모의 전화를 받고 시골로 내려가는 초반부에서 사실상 멈춘다. 이후에는 사건도, 갈등도 거의 전개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 비어 있는 자리가 독자가 자신의 기억을 밀어 넣을 수 있는 틈을 만든다.



강력한 서사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서사의 밀도를 높이지만, 동시에 특정 인물의 삶에 독자를 고착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희미한 서사는 나진의 인생을 전면에서 지우고, 대신 독자 자신의 과거를 앞으로 호출한다. 있어야 할 서사를 제거함으로써 생긴 공백은 하나의 빈 그릇처럼 기능하며, 독자는 그 안에 자기 가족의 풍경, 어린 시절의 냄새, 집의 구조 같은 사적 기억을 자연스럽게 흘려 넣게 된다. 이때 부재의 서사는 개인의 기억을 꺼내는 통로가 된다.


다음으로 화자의 목소리 톤과 서술 방식 자체가 독자에게 자신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가족과 과거 회상이 교차하는 장면들은 독자가 서사 속으로 깊이 빠져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오래된 기억 조각들을 소환하도록 이끈다. 이를 위해 화자는 긴 설명도 하지 않고 감정의 폭주도 허락하지 않는다. 너그러움이나 감성적 울림을 앞세우지 않는 건조한 톤을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독자가 이야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장면으로 천천히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사람과 물건의 관계다. 사람이 집을 떠나면 그 사람의 물건도 함께 사라지고, 새로운 물건이 놓이면 그 사람의 자리가 생긴다. 고모가 결혼하거나 여행을 갈 때마다 그녀의 물건은 흔적 없이 빠져나가고, 나진의 책상과 침대가 들어오면 그녀가 이 공간에 정착해야 한다는 구조가 생긴다. 반대로 죽음으로 인한 부재는 물건을 지우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물건이 그대로 집에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물건은 사라짐과 정착의 기준이자, 관계의 흔적을 정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쓰인다.



이 관계는 물건에만 머물지 않고, 공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방은 사람의 위치와 시간이 겹치며 의미가 계속 달라지는 공간이다. 나진의 첫 방은 가족이 잠시 내준 임시방이었다. 고모가 결혼하자 나진은 고모방으로 옮겨가고, 이후 고모가 돌아왔을 때 방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하지만, 고모는 임시방으로 들어가며 공간의 쓰임이 다시 정리된다. 어린 시절 나진에게 임시방은 낯설고 무서운 공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편해진다. 이처럼 방은 사람의 자리와 관계의 변화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은 소설에서 자칫 극약이 될 치명적인 기술들을 과감하게 들여오면서도 문학성을 끝까지 밀어올린 작품이다. 제목의 ‘잠든 나의 얼굴’은 내가 보지 못하는 나, 그러나 누군가는 알고 있는 나의 얼굴을 뜻한다. 그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얼굴로 흘러간다. 우리의 가장 취약하고 완전한 순간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결국 가족이라는 관계가 남기는 흔적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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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에세이
발터 벤야민 지음, 새뮤얼 타이탄 엮음, 김정아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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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에세이』는 이야기의 의의와 역할, 그리고 사라짐의 역사를 말한다. 이야기는 한 사람의 체험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지혜였고, 이야기꾼은 그 지혜를 옮겨 심는 존재였다. 그러나 근대가 사람을 고립된 개인으로 만들고 삶을 정보로 잘게 쪼개면서 이들은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로 인해 집단적 경험도 함께 끊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인류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이 형식은 현대의 이야기꾼 웹 소설이라는 모습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지금 이들이 우리 곁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살펴보자.


『이야기꾼 에세이』는 발터 벤야민이 1936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근대 사회에서 ‘이야기’라는 형식이 어떻게 변화하고 소멸했는지를 다룬다. 그는 구전 전통 속에서 경험과 지혜를 전하는 역할을 했던 ‘이야기꾼’을 중심에 놓고, 소설의 등장, 정보의 확산, 근대적 개인의 부상이 이야기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 글은 이야기와 소설의 차이, 경험의 전달 방식, 기억과 전승의 역할 등을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으로 탐구한다.


『이야기꾼 에세이』에서 발터 벤야민은 이야기꾼의 정의를 한 사람의 체험을 넘어선 경험을 건져 올려 지혜로 바꾸는 존재라고 한다. 개인과 공동체가 겪어온 시간의 결을 묶어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이들이며, 삶의 무게를 말 한 줄로 정리해 건네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설명이 아니라 전승이다. 이야기는 이 전승을 통해 변주되며 살아남고, 듣는 이가 다시 이어 말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야기꾼은 바로 이 열린 서사의 흐름을 유지시키는 매개자다. 그러나 이들은 근대 이후 점차 사라진다.



근대 이후 그들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경험지의 실종 때문이다. 전략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진지전에 의해, 경제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신체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배고픔에 의해, 인륜 영역의 경험지가 거짓이라는 것은 권력자들에 의해 까발려지면서 경험지를 잃어버렸다. 이후 인간은 정보만 소비하는 존재가 되었고 더는 집단의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문자로 된 소설은 왜 이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벤야민이 보기엔 소설이 이야기꾼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다. 이야기는 공동체가 축적해온 경험을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엮어내는 전승의 형식이지만, 소설은 고립된 개인이 만든 완결된 텍스트다. 서사가 끝나도 계속 변주되지만, 소설은 종이 위에 고정되는 순간 서사가 닫힌다. 이 닫힌 구조는 독자가 끼어들 틈을 거의 남기지 않고, 세대 간에 움직이며 변형될 여지도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소설은 본질적으로 순환의 회로 바깥에 머무르며, 서사의 생명력을 갖지 못한다.


또한 근대 이후 인간은 경험지를 잃고 정보만 소비하는 존재가 되었다. 소설은 이 흐름 속에서 점차 정보의 형식에 가까워졌고, 경험의 농도보다는 재현과 설명을 우선하는 장르가 되었다. 이야기가 삶의 잔여물을 지혜로 압축해 건네는 작업이라면, 소설은 삶을 미학적으로 구성해 해석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소설은 전승의 구조를 수행할 수 없고, 결국 이야기꾼의 역할을 대신하지 못한다. 이런 구조적 차이는 장르가 세상과 맺는 관계 자체에서 비롯된다.


근대는 경험을 해체했지만, 인간이라는 종은 경험 없이 살 수 없다. 이 모순이 내면에 커다란 공백을 남겼다. 삶은 정보로 가득한데 마음은 여전히 이야기적 경험을 갈망하는 아이러니가 생긴 것이다. 정보는 즉각 사라지지만 경험은 시간을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시대이다. 바로 이 공백이 다시 열린 서사를 불러들이는 힘이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잃었으면서도 끊임없이 그 구조를 찾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서사가 제공하는 작은 질서와 위안을 무의식적으로 탐색하고 있다.


이런 결핍은 결국 새로운 이야기 형식을 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요구가 닿은 자리가 바로 웹이라는 공간이다. 웹 소설은 경험 그 자체를 담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야기의 구조를 거의 완전하게 복원했다. 외전 요청, 다음 회차의 가능성, 댓글로 이어지는 참여는 독자가 서사의 회로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방식이다. 근대가 지워버린 순환하는 경험의 형식이 여기서 기묘하게 되살아난다. 웹 소설이 주는 건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현실에서 사라진 감각을 대신 체험하게 하는 대체 경험성이다.


재미는 껍데기일 뿐이다. 독자는 웹 소설을 통해 좌절–보상–성장–위기 같은 감정의 리듬을 반복적으로 통과하며, 잃어버린 경험의 흐름을 감정의 회로로 흉내 낸다. 현실이 더 이상 경험을 축적하게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웹 소설은 이야기의 잔해를 감정의 패턴으로 모방해 살아남게 만든다. 이 반복이 중독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험의 공백을 메우려는 인간의 오래된 충동이 웹이라는 좁은 통로에서 비틀린 방식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비틀린 흐름 속에서라도 다시 경험을 되찾으려 몸을 기울인다.



경험의 공백을 메우려는 인간의 충동은 결국 벤야민이 애도했던 자리를 다시 불러낸다. 이야기꾼이 사라진 시대에 웹은 ‘이야기의 형식’을 되살렸고, 그 형식은 셰에 라자드가 밤마다 이어가던 아라비안나이트의 구조와 닮아 있다. 끝이 열려 있고, 다음 이야기가 가능하며, 듣는 이의 개입을 허용하는 서사. 경험의 깊이는 아니지만 경험의 움직임을 다시 작동시키는 방식. 웹 소설이 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의 서사는 그 오래된 구조를 웹이라는 좁은 통로에서 되살려 새로운 회로를 만든 것이다.



『이야기꾼 에세이』에서 발터 벤야민은 근대가 이야기꾼을 잃고, 사람들이 더 이상 경험을 전승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애도한 것은 바로 그 단절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종이를 떠난 뒤 웹으로 옮겨가 감정의 리듬을 반복하며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이어붙이고 있다. 이야기꾼은 죽었어도 이야기는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란 형식보다 욕망이 먼저였고, 그 욕망은 현대의 이야기꾼 웹 소설이라는 형태로 자연스레 귀환했다.


#이야기꾼에세이

#발터벤야민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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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김나현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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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는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우리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정말 자신 있게 자신의 삶에서 완벽하게 스스로 시나리오 작가, 감독, 주인공을 모두 소화하고 있을까? 얕게 생각한다면 여기에 'Yes'라고 대답할 수 있지만 책을 읽은 후에는 아무도 여기에 'Yes'라는 대답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표지의 귀여움과는 달리 마지막 반전에서 뒤통수를 맞으면서 독자는 자신의 인생을 리와인드 하게 된다.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을 그린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 줄거리는 여배우가 되어 첫 주연을 맡은 나을에게 학폭 증언 사례가 터지면서 시작한다. 학창 시절 나을은 아버지가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 이런 그녀 앞에 시우라는 예쁜 아이가 전학을 오게 되고 서로 친하게 지낸다. 둘의 엄마인 소영과 하영 또한 학창 시절부터 친구이다. 그러나 나을의 잘못에 대한 벌을 시우가 받으며 시우는 눈앞에서 사라진다. 각자의 삶에 크나큰 비밀을 품고 있는 그녀들의 얽힌 인생은 결말에서 크나큰 반전을 이룬다.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을 그린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는 우리에게 살아간다는 건 연기하는 일이고, 연기하는 동안 우리는 그 대본의 일부가 된다고 말한다. 이를 말하기 위하여 전면에 나을을 내세운 뒤, 그녀의 엄마 소영과 친구 하영, 그리고 하영의 딸 시우의 독백으로 이어진다. 이 독백의 묘미는 모두 다른 나이 대의 위치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소설은 네 명의 인물을 등장시키지만, 결국 하나의 인격이 시대와 이름을 바꿔가며 스스로를 연기하는 이야기처럼 읽힌다.



그럼 먼저 등장인물들의 역할부터 살펴보자. 모든 사건의 기원인 하영과 소영은 학창 시절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났지만 서로에게 의지하고 집착하는 관계가 된다. 처음엔 완벽하게 두 명의 인물로 느껴지지만 페이지가 넘어가고 각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이들은 외형만 다를 뿐, 한 인간의 내면에서 충돌하는 통제하려는 나와 보호받고 싶은 나로서의 두 욕망의 충돌로 읽힌다. 소영은 자기 불안을 다스리려는 방식으로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



하영의 경우는 더욱 복잡하다. 극단적인 두려움으로 몰린 상태에서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소영에게 의지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녀는 딸을 살리기 위한 강한 엄마가 되기 위하여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려고 작정한다. 작품 속 주인공이 손가락을 하나 잘라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완벽한 그녀가 되기 위하여 자신도 동일한 행동을 할 정도로. 이런 그녀의 행위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것을 지키면서 구원을 얻기 위한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현실적인 부분인 고등학교 3학년 때 똑같이 임신하여 같은 나이의 딸을 낳는 설정은 단순히 개연성이 없다고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비개연성의 파편들이 오히려 하나의 인물이라는 해석으로 수렴된다. 이는 표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서로의 얼굴이 겹쳐 통과되어 하나가 되는 장면에서. 결국 소영과 하영은 자아의 욕망이 서로를 미러링 하며 부딪히는 내면의 전투가 아닐까? 그렇기에 서로를 소름 끼쳐 하면서도 결코 떨어질 수 없으며 상대의 소름 끼치는 실체를 알아도 같이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다음으로 나을과 시우는 모성 세대가 남긴 내면의 분열을 각자의 방식으로 반복하고 정화하는 인물이다. 이 둘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로 겪는 경험은 그녀들의 어머니인 소영과 하영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시우의 경우는 시나리오 속의 여주인공의 삶을 훔친 엄마 하영의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타인의 시선 속 나’로 살아간다. 그러나 나을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삶에서 시련이 닥쳐오면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타인의 시선, 시간의 통증을 견디며 자기 리듬으로 살아가는 자아로 남는다.



사실 작품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가진 이는 나을이다. 그녀의 위치였던 학폭 사건의 희생자도, 스타의 자리도, 사랑마저도 모두 시우에게 넘어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을은 끝내 타인의 서사로 자신을 규정하지 않는다. 남의 시선이, 남의 말이, 남의 행동이 규정한 각본 위에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대에 남아 있는 자체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 아마 대부분 이런 상황에 닥치면 "그래서 어쩌라고?"이지만 나을이 보여준 것은 "그럼에도 산다"였다.



이것이 바로 이전 세대가 서로를 통제하고 복제하며 누가 더 주인공인가를 다퉜다면 나을은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이 선언이 바로 타인의 시나리오에서의 삶을 벗어난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게 너에게 일어날 일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불행에도 이런 초연함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시간을 견뎌낸다. 플라톤적 수용의 경지를 넘어, 존재의 시간성을 인정하며. 역설적으로, 그녀가 타인의 각본을 인정한 순간 비로소 자기 각본이 생겨버린 순간인 셈이었다.


결국 소영은 통제와 복제, 자기 파괴로, 하영은 믿음과 몰입, 자기 상실로, 시우는 욕망과 회복, 자기 초월로, 나을은 수용과 지속, 자기 확립으로. 결국 이 넷을 한 인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허구의 과장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이름을 바꿔가며, 타인의 시나리오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사랑하고, 통제하고, 무너지고, 견디며 같은 욕망을 반복한다. 소영이 하영이고, 하영이 시우이며, 시우가 나을인 것은 이들이 닮아서가 아니라, 인간이 원래 그런 순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김나현의 『모든 시간이 나에게 일어나』의 남의 시나리오에 따른 삶에 구속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타인이 건네는 격려 한 마디에 사로잡힘마저도 엄밀히 말하면 타인의 시나리오로 둔갑하게 됨을 책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처음의 질문을 다시 한번 물어보려고 한다. 당신은 온전히 자신만의 시나리오로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여기에 정확하게 답을 할 수 없는 이라면 타인이 쓴 대본 위의 삶을 그린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모든시간이나에게일어나

#김나현

#은행나무

#은행잎2기

#은행잎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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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신
리즈 무어 지음, 소슬기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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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 현대적 의미의 디오니소스적 응보를 그린 스릴러 소설이다. 이 작품은 펜테우스의 신화를 현대적으로 옮겨와, 스스로 대자연의 신이 되고자 한 피터 반라 가문에 내린 대자연의 응징을 다룬다. 겉으로는 실종과 추적의 스릴러처럼 흘러가지만, 그 긴장감 속에는 여성의 삶을 옭아맨 시대의 폭력이 숨겨져 있다. 리즈 무어는 장르의 외피를 빌려 직접적인 페미니즘의 목소리를 감추면서, 오히려 더 깊은 자리에서 인간의 오만과 여성의 상처를 드러낸다.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 피터 반라 가문의 딸 바버라의 사라짐으로 시작된다. 이 가문은 피터 반라 1세가 숲을 매입해 꼭대기에 집을 짓고 ‘에머슨 캠프’라 이름 붙인 곳에서 자신들만의 성을 세우며 역사를 시작했다. 현재는 3세가 그곳에 살고 있으며, 4세였던 베어는 어린 시절 숲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아들을 대신하듯 태어난 딸이 바로 바버라다. 첫아이를 잃은 앨리스에게 다시 닥친 두 번째 상실, 과연 이 아이들을 사라지게 한 것은 누구이며, 왜 10년의 시간 간격을 두고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된 것일까?



현대적 의미의 디오니소스적 응보를 그린 스릴러 소설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 큰 틀에서 세 가지 축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첫째, 그리스 신화 펜테우스의 서사 구조를 따라 드러나는 인간의 오만과 그에 대한 대자연의 응보. 둘째, 오로지 절대자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여진 여성들의 상처와 침묵 속에 깃든 페미니즘의 목소리. 셋째, ‘에머슨 캠프’라는 이름의 아이러니, 즉 자기 신뢰를 말한 철학자의 이름 아래 정반대의 삶을 이어가는 왕국의 사람들이다. 이제 각각의 이야기를 조금 더 세세하게 들여다보자.



먼저 신화적 서사를 따라 드러나는 인간의 오만과 그에 대한 대자연의 응보부터 살펴보자. 작품의 원제에는 숲을 뜻하는 단어 뒤에 복수형 S가 붙어 있다. 이는 한 구역의 그것이 아니라, 모든 숲, 즉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아우르는 대자연 전체를 가리킨다. 저자는 그 단 한 글자 S로 숲의 규모를 확장하며, 제목 속에 이미 세계의 스케일을 담아두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숲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진정한 숲의 신과 스스로 신이 되려는 인간이라는 두 힘이 대립하는 신화적 무대로 기능한다.



작품 속 신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말하는 존재처럼 대자연 그 자체를 뜻한다. 그 대척점에는 반라 가문이 있다. 피터 반라 1세는 스스로 신이 되기 위해 모두의 숲을 돈으로 사들여 자신만의 영역으로 바꾸고, 그 위에 성전을 세운다. 길도 차도 없는 깊은 숲속에 세운 그 집은 마치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시켜, 그의 오만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이후 반라 2세와 3세는 이곳에 살던 사람들을 사실상 자신의 노예로 삼으며, 지배와 징벌만이 존재하는 테바이로 완성한다.


이 가문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름이다. 단 한 명의 남자 후손만 낳는 룰을 암묵적으로 수행하며, 그 남자 후손의 이름은 모두 피터 반라이다. 1세, 2세, 3세, 4세. 이 장치는 이들을 모두 한 인물, 즉 펜테우스로 묶는다. 이들은 외부에서 돈을 벌어와 그들의 성전에서 권위를 세운다. 그들의 집에서 일하지만 단 한 번도 현관을 통과해 본 적 없는 일꾼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파티에 초대해 이용한 뒤 존재를 지우는 일, 존재의 지움을 당하는 아내까지, 그 모든 행위가 그들이 세운 신전의 윤리를 드러낸다.



다음으로 신에게 오로지 복종하는 존재로 재창조되는 그의 아내 앨리스는 무려 열두 살이나 많은 남자인 피터 반라 3세와 결혼한다. 앨리스에게 그는 가슴 두근거림이었지만, 그에게 앨리스는 외부의 명성을 위해 옆구리에 걸기 좋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집안에 큰 피해를 주고 아들을 잃은 뒤 무너진 아내와의 이혼 대신 바람을 택하는 피터. 그에게 이혼은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인간적인 신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처음부터 관계가 아주 나빴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신혼의 달콤함이 아니었다. 가스라이팅을 위한 초반의 러브 밤(love bombing)에 불과했다. 약 2년간 이어진 그의 러브 밤은 아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퍼붓던 데메테르를 오직 피터만 바라보는 메데이아로 바꾸어 놓는다. 이후 남편은 폭군으로 변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잃고 복종만 할 뿐이다. 모든 윤리를 저버린 남편의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시선만 돌린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앨리스와 목소리를 잃은 다른 여성들은 당시(1950~70년대)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참담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성인 여성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피터 반라 4세인 베어의 실종 이후 대용품으로 태어난 바버라. 그리고 반라 가문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에게 입이 막힌 테시 조까지. 그러나 이들은 이미 메데이아로 변한 앨리스처럼 지내지 않는다.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사투를 벌인다. 이들의 모습은 숲의 신의 비호를 받으며 신인 척하는 인간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결과, 바버라는 오빠 베어처럼 또다시 사라지고 경찰이 투입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저자가 깔아 놓은 블랙 코미디이다. 바로 피터 반라가 가장 좋아하는 에머슨의 『독립독행(자기 확신)』이라는 책에서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에머슨의 『자기 확신』은 “신은 외부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라는 사상이다. 그런데 피터 반라 가문은 이를 “내가 곧 신이다”로 뒤집어 숲을 사유화하고, 그 위에 독립독행과 에머슨 캠프를 세운다. 본래 인간의 내면을 해방시키려던 철학이 권력과 소유의 언어로 변한 셈이다. 이 뒤틀린 신앙심이야말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블랙코미디이다다.



현대적 의미의 디오니소스적 응보를 그린 스릴러 소설 리즈 무어의 『숲의 신』은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한 끝에 스스로의 피로 제단을 쌓는 이야기다. 저자는 숲이라는 원초적 공간 안에서 오만과 폭력, 구원과 희생을 교차시키며 인간 문명이 감히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그어 둔다. 그 경계선을 짓밟는 순간, 신은 더 이상 외부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가장 잔혹한 얼굴로 되살아난다. 이 책은 스릴러물이지만 오히려 묵직한 철학적 메시지가 강한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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