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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나의 얼굴을 - 제2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임수지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11월
평점 :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된 제2회 아르떼 문학상 수상작이다. 처음 이 책을 보면 세 가지 면에 당황할 수 있다. 하나는 세계적인 트렌드인 문체이며, 다른 하나는 서사의 부재로 부재의 서사를 그린 부분이다. 세 번째로는 묘사에 대한 디테일이 흔하지 않을 만큼 세밀하다는 낯섦이다. 그러나 이는 철저한 저자의 의도된 기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작품의 결이 달라 보일 정도로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가장 익숙한 이야기로 독자에게 자신의 과거를 꺼내게 만드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2회 아르떼 문학상 수상작인 임수지의 장편소설 『잠든 나의 얼굴을』 줄거리는, 대학을 졸업한 후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진에게 고모의 전화가 오면서 시작된다. 삼 일, 혹은 그것보다 조금 더 길게 스노보드를 타고 오겠으니 할머니를 돌봐달라는 내용이다. 그러나 고모는 나흘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이 주일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할머니의 닦달에 전화를 걸어보지만 해지된 번호라는 음성만 들려올 뿐이다. 고모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심사위원 전원 만장일치로 제2회 아르떼 문학상을 수상한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의 큰 특징은 독자가 외부에서 내용을 바라보도록 두지 않는 점이다. 그렇다고 온전히 책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독자가 의도치 않게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소환해 그 기억 속으로 빠지게 만든다. 이를 위해 저자는 현미경으로 확대한 듯한 정밀한 디테일, 서사의 부재, 그리고 화자의 목소리 톤을 뒤섞는 기술을 사용했다. 가장 일상적인 가족의 이야기로 독자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의 힘이다.
세 가지 중 먼저 정밀한 디테일부터 보자. 이 작품의 묘사는 독자들이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을 만큼 세밀해서, 글보다 영상이 먼저 떠오를 정도다. 이 과도한 세밀함이 장면을 파편처럼 흩어놓기 때문에 독자는 자연스럽게 자기 기억의 이미지로 빈틈을 채워 넣게 된다. 그 결과 독자는 글 속 장면이 아니라 자기 과거를 먼저 재생하게 된다. 이를테면 작중에서 아파트 단지 입구를 묘사할 때 세밀함이 지나치게 분해되어 쏟아지다 보니, 어느 순간 내 머릿속엔 우리 집 단지 입구가 먼저 떠오르는 식이다.
결국 이 디테일은 한마디로 기억의 단층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어색함과 긴장, 낮은 눈높이, 타인의 집에서 살아남으려는 감정으로 채워지고, 성인이 되어 다시 바라본 풍경은 낡음과 사라짐, 흩어짐, 돌봄의 유령 같은 잔해들로 보인다. 이 변화가 곧 세월의 잔상인데, 작가는 이 디테일을 마치 그릇처럼 쓴다. 묘사가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 공간에 독자는 자기 어린 시절의 계단 냄새, 방 구조, 가족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흘려 넣게 된다. 그러면 소설의 공백이 독자의 과거를 불러내는 통로로 변한다.
다음으로 독자의 기억을 재생시키는 장치로는 서사의 부재가 있다. 일반적으로 서사가 없다는 것은 소설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보편성을 향해 문을 여는 핵심 기술로 쓰인다. 이야기는 고모의 전화를 받고 시골로 내려가는 초반부에서 사실상 멈춘다. 이후에는 사건도, 갈등도 거의 전개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 비어 있는 자리가 독자가 자신의 기억을 밀어 넣을 수 있는 틈을 만든다.
강력한 서사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서사의 밀도를 높이지만, 동시에 특정 인물의 삶에 독자를 고착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희미한 서사는 나진의 인생을 전면에서 지우고, 대신 독자 자신의 과거를 앞으로 호출한다. 있어야 할 서사를 제거함으로써 생긴 공백은 하나의 빈 그릇처럼 기능하며, 독자는 그 안에 자기 가족의 풍경, 어린 시절의 냄새, 집의 구조 같은 사적 기억을 자연스럽게 흘려 넣게 된다. 이때 부재의 서사는 개인의 기억을 꺼내는 통로가 된다.
다음으로 화자의 목소리 톤과 서술 방식 자체가 독자에게 자신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가족과 과거 회상이 교차하는 장면들은 독자가 서사 속으로 깊이 빠져들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오래된 기억 조각들을 소환하도록 이끈다. 이를 위해 화자는 긴 설명도 하지 않고 감정의 폭주도 허락하지 않는다. 너그러움이나 감성적 울림을 앞세우지 않는 건조한 톤을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독자가 이야기의 내부가 아니라 자기 내면의 장면으로 천천히 걸어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사람과 물건의 관계다. 사람이 집을 떠나면 그 사람의 물건도 함께 사라지고, 새로운 물건이 놓이면 그 사람의 자리가 생긴다. 고모가 결혼하거나 여행을 갈 때마다 그녀의 물건은 흔적 없이 빠져나가고, 나진의 책상과 침대가 들어오면 그녀가 이 공간에 정착해야 한다는 구조가 생긴다. 반대로 죽음으로 인한 부재는 물건을 지우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물건이 그대로 집에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물건은 사라짐과 정착의 기준이자, 관계의 흔적을 정리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쓰인다.
이 관계는 물건에만 머물지 않고, 공간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나타난다. 특히 방은 사람의 위치와 시간이 겹치며 의미가 계속 달라지는 공간이다. 나진의 첫 방은 가족이 잠시 내준 임시방이었다. 고모가 결혼하자 나진은 고모방으로 옮겨가고, 이후 고모가 돌아왔을 때 방을 돌려줘야 하나 고민하지만, 고모는 임시방으로 들어가며 공간의 쓰임이 다시 정리된다. 어린 시절 나진에게 임시방은 낯설고 무서운 공간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편해진다. 이처럼 방은 사람의 자리와 관계의 변화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임수지의 『잠든 나의 얼굴을』은 소설에서 자칫 극약이 될 치명적인 기술들을 과감하게 들여오면서도 문학성을 끝까지 밀어올린 작품이다. 제목의 ‘잠든 나의 얼굴’은 내가 보지 못하는 나, 그러나 누군가는 알고 있는 나의 얼굴을 뜻한다. 그 누군가를 떠올리는 순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얼굴로 흘러간다. 우리의 가장 취약하고 완전한 순간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결국 가족이라는 관계가 남기는 흔적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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