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이야기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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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고딕 이야기』는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이시리즈 중 하나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개스켈은 샬럿 브론테의 첫 전기를 쓴 작가이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답게 작품 속엔 산업화, 사회 계급, 종교, 페미니즘이 차분히 얽혀 있다. 19세기 초 작품답게 직선으로 내리꽂는 문체보다는 은근하게 감싸고 도는 문장이 대부분이다. 여성 작가임에도 단단한 문체 덕분에 읽는 동안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점도 흥미롭다. 잠시 그녀가 만든 고딕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고딕 이야기』는 「실종」, 「늙은 보모의 회상」, 「대지주 이야기」,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 「굽은 나뭇가지」, 그리고 「궁금하다, 사실인지」까지 총 일곱 편의 단편을 들려준다. 제목답게 초자연적 현상과 설명되지 않는 경이로움, 특정한 이유로 귀환한 유령이 등장하지만, 개스켈이 진짜로 말하려는 건 공포가 아니다. 각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이 불러온 결과를 집요하게 뒤따라가며, 결국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유령이 아니라 사람임을 그린다.



『고딕 이야기』 속 고딕은, 낡은 성이나 폐가, 유령 같은 겉모습보다 정서의 분위기를 먼저 세우는 장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에서 인간의 공포와 죄책, 욕망이 드러나고, 초자연적 현상은 그 감정의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그래서 고딕의 핵심은 귀신이나 괴물이 아니라 감춰진 과거와 억눌린 욕망이 되돌아오는 순간에 있다. 무너져가는 집이나 반복되는 발소리 같은 호러적 요소는 결국 인간 내면의 균열을 비유하는 장치일 뿐이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를 살펴 보자. 먼저 「늙은 보모 이야기」이다. 보모는 자신이 기르던 소녀를 데리고 어느 저택으로 들어간다. 이 저택은 날씨가 궂은 날이면 다 부서진 오르간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처음부터 서늘한 분위기를 가진 곳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사라지고, 혼비백산해 찾았을 때는 거의 얼어 죽기 직전이었다. 깨어난 소녀는 자신을 불러낸 또 다른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날 이후 눈보라가 치는 바깥에서 한 아이가 소녀를 부르고, 소녀는 그 아이가 얼어 죽지 않도록 집 안으로 들이려 한다.



하지만 보모를 비롯하여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를 막으려 든다. 모든 현재는 과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 저택에는 한때 음악을 사랑하던 남자와 그의 두 딸이 살았다. 그는 외국인 음악가를 들여왔고, 두 딸은 동시에 그에게 마음을 품었다. 남자는 한 딸과 비밀리에 결혼해 아이를 낳았지만, 겉으로는 다른 딸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오해와 질투, 그리고 ‘몰래 아이를 낳은 딸’에 대한 아버지의 수치심이 만들어낸 과거가 드러나면서, 결국 가장 추악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서늘하게 떠오른다.



결국 밖에서 소녀를 불러낸 여자와 아이는 남들 몰래 태어난 아이와 엄마의 유령이다. 이 이야기의 진짜 핵심은 유령이 아니라, 사랑과 질투, 수치심이 뒤엉켜 만들어낸 ‘가문의 침묵’이 어떻게 공간을 점령하느냐이다. 저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숨겨진 과거를 품은 폐쇄적 구조이고, 눈보라 속에 나타나는 모녀 유령은 비극을 재현하려는 존재가 아니라 그 침묵을 깨기 위해 되돌아온 기억의 형상이다. 저자는 과거의 밀봉된 악행을 드러내기 위하여 현재에 그들의 유령을 불러낸 셈이다.



결국 보모와 소녀가 겪는 공포는 초자연적 현상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봉인된 감정이 틈을 열고 새어 나올 때 생기는 균열에서 비롯된다. 소녀를 유혹하듯 부르는 외부의 기척은 과거가 현재를 향해 밀고 들어오는 순간이고, 저택의 삭은 구조와 눈보라는 그 균열을 시각적으로 확장한다. 개스켈은 이 균열을 따라가며 결국 공포의 근원을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놓아두고, ‘유령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유령을 만들어낸 인간의 선택이 무섭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다음 이야기로는 「빈자 클라라 수녀회」이다. 브리짓 피츠제럴드는 강단 있는 하녀로, 주인을 섬기면서 딸 메리를 키운다. 메리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겠다며 집을 떠나고, 처음엔 편지가 오지만 어느 순간부터 모든 소식이 끊긴다. 세월이 흘러 주인이 죽어 저택만 남은 뒤에도 브리짓은 그 자리를 지킨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객 무리가 왔고, 그중 한 남자가 메리가 아끼던 개를 총으로 쏴 죽인다. 딸과 가장 가까웠던 존재가 눈앞에서 쓰러지자 브리짓은 절망 속에서 저주를 내뱉는다.



브리짓의 저주는 시간이 흘러 그 남자의 후손인 루시에게 도달한다. 루시 곁에는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악한 분신이 붙어다니며 그녀의 삶을 조금씩 무너뜨린다. 변호사인 ‘나’가 이 기이한 사건의 원인을 추적해 브리짓에게 닿았을 때, 브리짓은 자신이 퍼뜨린 말의 그림자가 어떤 파국을 만들었는지 깨닫는다. 결국 그녀는 죽음으로서 자신이 만든 사악한 분신을 없애면서 저주를 푼다. 결국 공포의 근원은 초자연이 아니라 절망한 인간이 내뱉은 말 한마디라는 것을 작품은 말한다.



이 이야기의 공포는 도플갱어나 저주 같은 초자연이 아니라, 한 인간이 감당하지 못한 상실이 어떻게 세상에 번져나가는가에 있다. 브리짓이 개를 잃고 내뱉은 저주는 딸을 잃은 슬픔과 죄책감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파열음이고, 개스켈은 이 감정의 파편이 시간을 건너 타인에게 가닿는 과정을 고딕적 장치로 변환한다. 결국 분신은 악령이 아니라 브리짓의 슬픔이 만들어낸 잔향이며, 그녀가 죽음으로 상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손녀 루시에게 씌워진 저주도 사라진다.



저자는 『고딕 이야기』에서 호러적 요소를 사람을 놀라게 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인물들이 외면해온 감정과 기억을 밀어 올리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갑작스러운 사라짐, 저주, 눈보라 속에 스치는 형상 같은 것들은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 과거의 비극을 호출하는 신호에 가깝다. 유령은 벌하기 위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잊힌 진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고, 폐가나 잠긴 방은 가문의 죄와 억눌린 욕망이 굳어버린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녀가 펼쳐 보이는 초현실 속에서 인간 내면의 민낯을 마주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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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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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남극』은 클레어 키건이 이십 대에 써 내려간, 말해지지 않은 상실과 연약한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총 열다섯 편의 단편을 묶은 이 책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 가족이기에 끝내 고통을 나누지 못해 연대가 약해진 채 감내해야 하는 삶, 심각한 남녀 불평등 속에서 수긍하고 살던 여성들의 반기,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 앞에서 무너지기보다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과연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 이전, 그녀의 초기작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키건이 열어둔 행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남극』은 클레어 키건이 말해지지 않은 상실과 연약한 연대를 다양한 각도로 조명한 작품으로, 일상의 가장 낮은 온도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순간들을 담은 열다섯 편의 소설을 묶은 단편집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작품으로는 「물이 가장 깊은 곳」, 「진저 로저스의 설교」, 「폭풍」, 「노래하는 계산원」, 「화상」, 「자매」, 「불타는 야자수」, 「여권 수프」가 있으며, 남녀 간의 관계를 정밀하게 들여다본 작품으로는 「남극」, 「키 큰 풀숲의 사랑」, 「어디 한 번 타봐」, 「남자와 여자」, 「겨울 향기」,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가 있다.



클레어 키건의 데뷔작 『남극』은 가족, 연인, 이웃 사이에서 쉽게 말하지 못한 감정과 선택의 여운을 간결한 문장으로 포착한다. 극적인 사건보다 침묵과 여백에 집중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인물들의 삶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차분하지만 단단한 이야기들이 모여, 키건 특유의 절제된 세계를 보여준다. 특히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 이후 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정 부분을 조명하여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든다.


『남극』은 성적인 차별 속에서 투쟁하는 여성의 내면 온도, 결혼한 여성의 욕망이 얼어붙어 있는 상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상실의 아픔이기에 세상 앞에서도 투명해지는 영하권의 감정 등, 생존과 욕망의 온도가 뒤틀린 지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제목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감정의 단어를 버리고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그 온도를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달한다. 단 한 작품도 등수로 매길 수 없을 만큼 우열을 가리기 어렵지만,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몇 편을 조금 더 깊게 살펴보려 한다.



가장 먼저 「진저 로저스의 설교」이다. 제목의 진저 로저스는 늘 우아하게 웃으며 남자와 똑같은 춤을 추지만 뒤로 춰야 하기에 더 불리한 조건을 말하지 않고 견딘 뮤지컬 배우이다. 사실 제목과 내용의 표면만 놓고 보면 수긍보다는 의문이 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한 단계씩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주인공들의 내면이 제목에 그대로 투영된 것을 알 수 있다. 벌목꾼 짐을 집에 들여 가족처럼 지내고 엄마는 춤을 치료, 삶의 박자, 세상과 맞추는 법이라고 말하며 겉보기에 건강한 가정으로 연출된다.


그러나 클레어 키건의 작품들이 언제나 그렇듯 이 작품의 핵심은 벌어진 사건보다 말해지지 않음이 포인트이다. 딸이 짐의 침대로 들어간 이유, 그 밤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이 왜 다음 날 자살했는지 이런 주요 사건의 이유와 과정은 끝까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독자를 사건의 현장에 무자비하게 던져놓고 작가는 입을 닫아버린 케이스이다.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가 되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해부하는 의사가 되라는 듯이. 덕분에 독자는 선 당황, 후 감탄을 하게 된다.



결국 독자는 모든 사건이 끝난 뒤 이 가족이 추는 춤이 회복이 아니라 덮기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가족처럼 지내던 짐이 죽은 뒤, 이들은 춤을 춘다.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이 장면은 일반적인 독서 경험 속에서는 쉽게 수긍되지 않는다. 보통이라면 울며 무너지거나, 죄책감을 떠올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키건이 남긴 행간을 들여다보면, 이들은 감정을 말 대신 몸으로 흘려보내고 사건을 정리하지 않은 채 삶의 다음 박자로 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진저 로저스와 이 가족을 연결할 수 있다. 불리한 조건과 힘든 상황을 말하지 않고 견딘 인물인 그녀처럼, 이들 역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확한 박자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 제목은 설명이 아니라 불편한 겹침에 가깝다. 가족이 겪은 충격은 깊숙이 묻힌 채, 잘 살아가는 리듬 속으로 흘러간다. 춤을 추고, 삶은 계속되며,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간다. 제목의 진저 로저스처럼 말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박자를 어기지 않은 채 견디는 쪽을 선택한 여성의 몸처럼.


다음으로 「화상」이다. 이는 실질적인 화상이라기보다 심리적 화상에 가깝다. 전 부인의 아이들에 대한 학대를 견디지 못해 이혼한 남자는 새로운 아내를 맞아, 과거 전 부인과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온다. 상처가 아물기보다는 매일이 불안의 연속이다. 남편은 남편대로, 세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새로운 아내는 아내대로 각자의 화상 속에서 하루를 견디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 후 돌아온 남편은 온 가족이 주방에 모여 겁에 질린 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바퀴벌레를 죽이고 있는 장면과 마주하고, 곧 그들 사이에 합류한다.



이 장면은 상당히 의아하고 기이하게 보이지만, 여기에서 바퀴벌레는 가족이 공유하고 있는 과거의 아픔을 물리적인 형상으로 대치한 존재다. 터질까 두려워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것들이 숨겨진 공간이 아닌 일상적인 공간에서 집단적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각자의 아픔에 갇혀 있던 이 가족이 처음으로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같은 방향으로 몸을 움직이는 최초의 순간인 셈이다. 모든 분노를 쏟아낸 가족은 마침내 하나가 되고, 마치 이제야 서로의 화상을 치유할 준비가 된 듯이.


『남극』에서 클레어 키건은 말해지지 않은 상실과 연약한 연대를 열다섯 개의 경로로 보여준다. 이 단편들의 공통점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삼켜버린 순간들이며, 각 작품이 다루는 것은 사건의 전개나 결말이 아니라 기준선이 무너진 이후의 상태라는 점이다. 키건은 이를 관찰자 시점과 결핍의 구조, 인물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와 감정적 거리감으로 포착한다. 세계적인 작가의 출발점에 놓인 작품이지만, 여기에는 신인의 흔들림이나 과잉이 없다. 『남극』은 설명을 거부한 채, 끝내 식지 않는 감정의 온도를 독자에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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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지능의 역사 - 유레카부터 인공지능까지, 지성사를 통해 인간을 다시 묻다
이은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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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인간 지능의 역사』에서 이은수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기 위해 먼저 과거를 돌아본다. 구술과 기억에 의존해 생존하던 인간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와 마주하게 되었는지 차분히 짚어간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지 혁명을 겪은 인류가 환경에 적응하고, 그 적응을 다시 발전으로 밀어 올린 과정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풀어낸다. 그렇게 쌓아 올린 시선 위에서, 흔들리기만 하는 AI 시대를 사는 현대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이은수의 『인간 지능의 역사』는 다섯 장, 발견하다·수집하다·읽고 쓰다·소통하다·재정의하다로 이루어진다. 호기심과 욕망에서 출발한 ‘발견하기’는 곧 권력자의 ‘수집하기’로 이어지고, 다시 '왜'와 '어떻게'를 묻는 수집으로 저장성의 한계 끝에서 AI로까지 확장된다. 이런 시대에 인간은 읽고 쓰고 소통하는 행위를 통해 두려움을 덜고 인공지능과 협력하는 법을 익힌다. 마지막 ‘재정의하다’에서는 지능 인터페이스가 바뀔 때마다 인간이 적응해온 것처럼 우리가 이 시대에 적응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AI 시대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짚어내는 『인간 지능의 역사』는 기술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또렷하게 드러내는 책이다.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끝없이 흔들리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도 인간은 결국 단단한 바닥에 다시 발을 붙일 수 있다는 것. 저자는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빠른 박자로 현대인의 불안을 가라앉힌다. 익숙한 인물에서 출발하는 구성은 독자에게 호기심과 몰입을 동시에 준다.



저자는 고대 이집트에서 오늘날까지 지능 인터페이스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그 변화를 밀어붙인 환경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틈바귀를 통과하며 인류가 어떻게 적응해왔는지를 펼쳐 보인다.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건 AI 시대에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다. 두려움에 떠밀려 “AI는 나쁘다”라고만 외치기보다 협력하는 방식, 그 협력을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사고와 행동을 짚어낸다. 그래서 먼저, 구술과 기억에만 의존해 생존을 이어가던 인류가 어떤 경로로 AI와 마주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보자.


인간은 태생부터 호기심과 욕망을 품은 동물이다. 그런 인류 앞에 문자가 등장한다.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 익숙해서 특별할 것 없는 문자이지만, 당시에는 외부에 기억을 저장한다는 이유로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인간의 기억력이 약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인류는 이를 넘어섰고, 단순한 상형문자를 지나 알파벳까지 발전한다. 기록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은 신이 만든 세계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수학, 갈릴레이의 지동설 같은 외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은 곧장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다.


그러나 인간이 갈 수 있는 곳, 상상할 수 있는 곳을 거의 다 뒤집어놓고 나자 시선은 더 작은 곳, 내부로 향한다. 여기서 현미경이 등장한다. 지식의 확장은 단순히 바깥의 새로운 것들을 더하는 방식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던 수많은 책들을 한데 모으고, 그 축적을 토대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도 발전한다. 그 결과 필사 문화와 도서관이 흥하고, 저장 매체는 파피루스에서 양피지, 그리고 코덱스로 이어지며 달라졌다.



수집의 영역은 책을 넘어 세계 곳곳의 기이한 것들까지 포함하게 된다. 독일어로 분더카머라고 불리는 공간, 오늘날 박물관의 조상이라 할 만한 곳이다. 처음엔 귀족의 취미와 권력의 상징이던 이런 수집이 지식의 보편화와 함께 현대 박물관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모으는 데는 공간의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넘어가기 위해 인류가 선택한 것이 바로 인공지능이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드러난다.



그 첫 번째 특징은, 인류는 발견하고 수집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반드시 이를 나누는 행위까지 이어왔다는 점이다. 이는 호기심과 욕망이라는 인간 본능의 결과다. 현대도 다르지 않다. 과학의 한편에서는 영생과 자연법칙에 대한 욕망이 지식의 끝단을 향해 나아가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호기심이 사라진 듯 모든 판단을 인공지능에게 넘겨버리는 아이러니가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자발적 포기의 밑바닥에는 ‘AI가 인간을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넓게 깔려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수많은 지능 인터페이스가 등장하지만 결국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선형에서 비선형으로. 두루마리 양피지에서 코덱스로, 코덱스에서 인터넷 검색으로, 검색에서 인공지능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일관된다. 단계적이고 수동적인 탐색에서 적극적이고 연결적인 정보 관리로 넘어가는 진화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적 발전이 아니라 인간이 정보를 다루는 방식 자체가 확장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단계가 바뀔수록 구조는 복잡해지고, 원하는 지식에 더 빠르게 점핑하는 UI(인터페이스)로 확장된다.



세 번째 특징은, 지식 인터페이스가 바뀌는 순간마다 인류가 언제나 능동적 학습과 능동적 읽기를 고수해왔다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손수 필사하고, 책의 여백에 자신의 생각이나 질문을 적거나 밑줄을 긋는 방식으로 스스로 개입해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류는 과거의 방식을 단절하지 않고, 현재의 것에 자연스럽게 섞어 혼종 형태로 유지해왔다. 구술 문화가 문자와 AI로 넘어왔어도 여전히 오디오북과 팟캐스트가 부상하는 것이 그 예다.


『인간 지능의 역사』를 되짚은 뒤, 이은수는 AI 시대에 인간이 나아갈 길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 고유의 성향과 AI 고유의 성향을 똑바로 직시하고, 더 적극적으로 마주하라는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는 책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중요한 건, 인공지능을 무작정 두려워할 존재로도, 거꾸로 인간을 지배하는 상위 존재로도 상정하지 말라는 점이다. 저자는 말한다. 가장 인간다운 방식을 고수하며, 인류가 만들어온 지능 인터페이스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때 오히려 인간은 더 강해진다고.



#인간지능의역사

#이은수

#문학동네

#인문교양

#AI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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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
윌 곰퍼츠 지음, 주은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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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윌 곰퍼츠의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은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한 가지 방식을 그린 책이다. 일반적인 예술 입문서는 대개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가, 이 작품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머문다. 하지만 이 책은 그보다 더 앞, 예술가의 시각 자체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드물다. 저자는 여러 작가와 작품을 통해 특정한 해석을 제시하기보다, 작품이 태어나기 직전의 원초적 순간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래서 우리는 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해석 이전의 날것 같은 감각을 느끼게 된다. 이제 그 마법 같은 순간으로 들어가 보자.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한 가지 방식을 그린 윌 곰퍼츠의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프리다 칼로, 폴 세잔, 렘브란트, 칸딘스키, 페테르 파울 루벤스부터 조금은 낯선 데이비드 호크니, 바스키아, 제임스 터렐까지 등장한다. 각 작가의 대표 작품을 함께 실어, 예술가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총 서른한 명의 작가를 통해 이 책은 단순한 감상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출발해 삶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까지 이야기를 확장한다.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에서 윌 곰퍼츠는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한 가지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각 작가의 성장 환경과 역사적 사건, 개인의 상처까지 폭넓은 배경을 함께 제시하며, 예술가를 작품 너머의 인물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소환한다. 책은 기원전 1500–500년으로 추정되는 메소아메리카 고대 조형물인 소치팔라 조각에서 출발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을 호출한다. 그래서 이 책은 개별 예술가의 모음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아 온 시선의 연대기로 읽힌다.



저자는 단순히 여러 예술가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각 인물은 고유한 주제와 함께 배치되며, 작품은 그 자체로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심리를 비추는 하나의 장면이 된다. 이 과정에서 예술은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이해해 온 방식의 기록으로 확장된다. 개별 작품들은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며, 독자는 그 사이를 오가며 시선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이 설명서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는 예술가가 그 작품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상황과 선택의 순간을 먼저 꺼내 놓는다. 언제 어떤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 무엇에 부딪혔고 무엇을 외면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작품은 결과라기보다 결핍으로 허덕이는 한 인간의 필연으로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독자는 해석을 강요받기보다 자연스럽게 예술가가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작품 너머의 작가의 삶을 통해 그들의 시각을 처음 마주하면서, 머리로서의 이해가 아닌 감각에 가까운 인식으로 작품을 받아들이게 된다.


곰퍼츠가 보여주는 인물들은 모두 특정한 시대와 조건 속에 놓인 개인들이다. 그는 각 장에서 유명한 천재로서의 예술가가 아니라, 고립된 환경과 반복된 경험 속에서 선택을 강요받았던 한 인간의 모습을 먼저 드러낸다. 이러한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예술가를 위대한 천재의 자리에서 내려놓고, 그 삶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과 겹쳐 보게 된다. 저자가 묘사하는 예술가의 시각은 고립된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환경과 경험이 축적된 결과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인물은 프리다 칼로와 구사마 야요이다. 프리다 칼로는 의사를 꿈꾸던 소녀였으나, 교통사고로 인해 그 꿈을 강제로 포기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평생 신체적 고통과 함께 살아가야 했고, 그 고통은 작품 전반에 깊게 스며든다. 구사마 야요이 역시 어린 시절의 심리적 트라우마로 인해 시간의 무한함과 공간의 절대성에 사로잡힌 인물이다. 두 사람은 벗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으로 예술을 선택했다.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이해에 앞서 낯설고 기괴한 감각으로 먼저 다가온다.



그녀들의 공통점은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이 예술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데 있다. 두 사람 모두 신체적·심리적 결핍 속에서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으로 예술을 선택했고, 작품은 그 고통에 화장을 하기보다 처절할 정도로 날것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선의 방향은 다르다.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몸과 상처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고통을 개인의 역사로 끌어안는다면, 구사마 야요이는 반복과 확장을 통해 그 고통을 공간 속으로 흩어버린다. 같은 고통에서 출발했지만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계를 살아냈다는 점에서 이들은 특히 인상 깊다.


한 인물만 더 소개하자면 빛을 본 제임스 터렐이다. 저자는 그를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동굴 이론을 꺼내든다. 외부의 빛을 본 죄수가 동굴 속으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하지만, 친구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민다. 터렐의 작업은 바로 그 죄수가 다시 동굴로 돌아온 이후의 세계를 닮아 있다. 그의 작품은 무엇을 새롭게 보여주기보다, 우리가 이미 보고 있다고 믿어온 방식 자체를 흔든다.


그의 대표작인 스카이 스페이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천장에 난 사각의 틈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이 공간에서 관객은 창문을 보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열려 있지 않다. 하늘은 평면처럼 내려앉고, 빛은 시간에 따라 색과 깊이를 바꾸며 공간 전체를 지각의 대상으로 만든다. 터렐은 이 단순한 구조를 통해 우리가 현실이라 믿어온 감각이 얼마나 쉽게 흔들리고 편향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서른한 가지 방식으로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을 풀어낸 윌 곰퍼츠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세계를 무작정 들이밀지 않는다. 대신 아주 익숙한 것에서 출발해, 약간의 정보와 조금 비틀린 예술가의 시각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는 단순히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태도에 머물지 않고, 미술을 넘어 다양한 창작 활동으로 확장될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낸다. 또한 점점 더 단조로운 시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자신의 삶을 다른 경로로 바라보고 그 안에 풍성함을 더하는 가능성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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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임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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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신간 『바임』은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 그림 같다. 그의 기존 문학이 수채화 특유의 맑고 투명한 층위를 겹쳐놓은 이미지였다면, 이번 작품은 불투명한 미래를 유화처럼 두껍고 거칠게 덧칠한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선명함 대신 흐릿함으로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현실보다 초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책을 덮고 눈을 감으면 그 모호함이 오히려 우리 삶과 더 닮아 있어 오래 남는다. 포세가 새롭게 쌓아 올린 이 낯선 질감 속으로 잠깐 빠져보자.



총 세 파트로 나누어진 욘 포세의 『바임』 줄거리는 단추 하나를 달기 위해 길을 나선 야트게이르가 오래전 사랑했던 여인을 예기치 않게 다시 마주치며 시작된다.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않은 채 그의 삶에 다시 들어오고, 야트게이르는 그 흐릿한 인연을 받아들인다. 이어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파트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이어지며 야트게이르·엘리네·프랑크 세 인물의 이름과 관계가 교차한다. 이야기는 바다와 항구를 오가며 세 사람의 인연이 어디에 닿는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 그림 같은 느낌이 강한 욘 포세의 『바임』은 ‘바임 3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다. 『샤이닝』 이전의 작품들이 투명하게 번지는 수채화 같았다면, 죽음을 강하게 다루기 시작한 그 지점부터 포세의 문장은 불투명해졌고 이 소설에서 그 효과가 가장 짙게 드러난다. 문장의 불투명함이 깊어지면서 그가 오래 다루어온 침묵과 여백도 함께 농도가 짙어졌다. 서사보다는 감각을 따라 읽어야 하는 작품인 만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은유들을 살펴보고,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천천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첫 에피소드의 단추, 바늘, 실이다. 언뜻 보면 어리숙한 주인공을 드러내려는 장치처럼 보이지만, 초반 분량과 세 인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부분이 이후 이야기를 암시하는 은유였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오히려 포세가 독자에게 남겨둔 거의 유일한 힌트라고 해도 된다. 단추는 제자리를 잃은 야트게이르를, 바늘은 야트게이르와 프랑크 두 세계를 오가며 관통하는 엘리네를, 실은 남아서 모든 것을 묶어내는 프랑크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상 이 소설은 이 삼분 구조가 전체 서사를 움직이는 키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각 파트마다 문을 두드리는 존재가 등장한다. 파트 1에서는 엘리네가 야트게이르의 삶을 다시 두드리고, 파트 2에서는 죽은 야트게이르가 친구 엘리아스의 집 문을 두드리며, 파트 3에서는 엘리네가 프랑크를 향해 문을 두드린다. 이 작품에서 문은 삶과 죽음, 바다와 육지,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경계를 상징한다. 그리고 문을 두드리는 존재는 그 경계를 넘어오거나, 넘어가거나, 다시 돌아오려는 자들이다. 결국 문 두드림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건너오려는 징표이며, 경계가 흔들릴 때마다 나타난다.


세 번째로 바임에서 가장 이상하게 흔들리는 건 인물의 이름이다. 세 주인공 모두 하나의 고정된 이름을 갖지 못하고,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린다. 심지어 작중에서 본명은 누구도 부르지 않으며, 실제 이름이 오히려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진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는 이름의 고정성이 아니라 역할과 관계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는 뜻이다. 즉,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삶에서 만난 타자가 불러주는 이름이 실제 이름이 되는 세계다. 작중에서는 이름이 누구와 연결되느냐, 어떤 자리에 놓이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달라진다.


이는 삶이 고정된 정체성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재배치되고 흔들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진짜 이름은 거의 힘을 갖지 못하고, 대신 타인이 붙여주는 이름, 상황 속에서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이름이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현대인이 역할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달라지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바임의 이름들은 인물의 내면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구에게 다가가고 누구로부터 떠나며 어떤 세계에 발을 들이는지를 나타내는 표식에 가깝다. 이름은 정체성이 아니라 관계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닷가 마을이다. 이는 단순한 이미지적 상징이 아니라, 경계의 상태를 드러내기 위한 포세만의 장치다. 삶과 죽음, 육지와 바다, 붙잡힘과 떠남이 맞닿는 이 접점은 인물들의 흔들리는 존재감을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바다는 이들이 표류하듯 살아가는 상태와 겹치고, 항구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잠시 발을 디딜 수 있는 유일한 공간처럼 반복해 등장한다. 포세에게 해안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인물들이 흔들리고 머물렀다가 다시 흘러가도록 허용하는 세계의 구조 그 자체이다.



이 지점까지 오면 바임이 왜 그렇게 흐릿한 결을 품는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한다. 흥미로운 건, 삶의 모든 과정은 안개처럼 번지는데 유독 죽음만은 또렷하다는 점이다. 무덤의 묘비에는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이름으로 흔들리던 인물들의 본명이 남고, 세상 누구도 알지 못했던 진짜 이름이 죽음 이후에야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초현실에 가까울 정도로 모호한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정박한 자기 배 옆에서 죽음을 맞는 야트게이르의 장면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다. 마치 삶은 흐려지고 죽음만은 형태를 갖는 세계처럼.


죽음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이 작품의 시간 역시 흐릿하기 때문이다. 『바임』의 인물들은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서 떠다니고, 인연은 맺어지는 순간보다 흐르는 과정이 더 길다. 만나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지만 그 어떤 장면도 명확히 고정되지 않는다. 오직 죽음만이 흐름을 멈추고 형태를 만든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관계는 하나의 결말로 귀결되지 않고 오래 번지는 잔향처럼 남고, 인물들은 이름처럼 존재도 안정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 흔들림의 끝에서 비로소 죽음이라는 단단한 지점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욘 포세의 『바임』은 선명하게 설명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흐릿한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죽음의 형태만 또렷하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수채 물감으로 그린 유화처럼 번지고 덧칠된 문장 속에서 인물들은 이름도 삶도 쉽게 붙들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오래 남는다. 이해하는 순간보다 이해하지 못한 채 떠나보낸 장면들이 더 오래 손에 걸리고, 포세가 그린 세계는 마지막까지 설명되지 않은 채 묵묵히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는 동안보다 다 읽고 난 뒤에 더 깊게 밀려오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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