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시마 예술의 탄생 - 인구 소멸의 섬에서 피어난 현대미술의 도전과 기록
아키모토 유지 지음, 지소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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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나오시마 예술의 탄생』은 예술의 섬 나오시마를 단순히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아키모토 유지가 나오시마 프로젝트의 탄생과 성장을 직접 따라가며 남긴 기록에 가깝다. 이 책은 예술이 어떻게 한 장소의 운명을 바꾸고, 그 장소와 함께 자신의 형체를 얻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완성된 풍경 뒤에 숨어 있던 긴 시간을 마주하고 나면 나오시마는 더 이상 관광지의 이름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곳은 예술이 놓인 장소가 아니라 사람과 기업과 지역의 시간 속에서 끝내 예술이 현실이 되어간 하나의 공간으로 남는다.


아키모토 유지의 『나오시마 예술의 탄생』은 나오시마 프로젝트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담은 기록이다. 숫자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업 안에서, 예술가에서 아트 디렉터로 변신한 저자는 15년에 걸쳐 실패와 갈등, 그리고 성취의 시간을 통과한다. 공해와 쓰레기로 오염되고, 개발 실패에 지친 주민들마저 떠나가던 섬. 이 책은 그곳을 단순히 예술품을 전시하는 섬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가 되는 섬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 안에서 이들이 무엇을 했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냈는지를 차근차근 펼쳐 보인다.


『나오시마 예술의 탄생』의 저자 아키모토 유지는 나오시마 프로젝트를 이끈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실무자라기보다, 예술을 믿는 감각으로 움직인 사람에 가까웠다. 그는 기업 안에서도 주변부에 가까운 부서에 속해 있었고, 수익을 우선하는 조직 안에서 늘 자신의 자리와 프로젝트의 필요를 증명해야 했다. 불안정한 위치에 놓인 한 사람이 끝까지 예술을 현실의 언어로 번역해나가는 과정은 커다란 벽들의 연속이었다. 그의 15년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으로는 수익을 따지는 회사와 주주들을 설득해야 했고, 밖으로는 재개발에 지친 채 외부의 손길을 경계하는 주민들의 마음을 얻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작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고 승인받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가 끝까지 밀고 나간 기준은 외부에서 이미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이 아니라, 나오시마라는 장소에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여기에 가장 먼저 힘을 보탠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였다.


안도 다다오와 함께 첫 전시를 위한 공간을 만든 뒤, 나오시마에는 구사마 야요이, 미야지마 다쓰오, 제임스 터렐, 월터 드 마리아, 야니스 쿠넬리스 등의 작품이 차례로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현대미술을 나오시마 위에 올려놓는 일이 아니라, 나오시마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일이었다. 세상이 이미 높은 가치를 부여한 작품이 아니라, 이 장소와 가장 잘 맞는 작품을 선택하는 것. 그 결과 나오시마는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장소 자체가 예술이 되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이 작가들의 작업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각각의 성향은 모두 달랐지만, 나오시마 안에 놓이면서 이들은 따로 흩어진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졌다. 그 차이는 오히려 장소의 층위를 더 풍부하게 만들었다. 어떤 작품은 바다를 향해 공간을 열었고, 어떤 작품은 실내를 무겁게 닫았으며, 또 어떤 작품은 시간과 빛, 보이지 않는 감각을 끌어들였다. 그렇게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작품들은 나오시마라는 장소 안에서 하나의 큰 서사를 이루었다.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은 바다와 하늘을 끌어들여 공간을 바깥으로 연다. 선명한 색과 반복되는 점은 멀리서도 눈에 띄지만, 중요한 것은 그 작품이 놓인 자리다. 호박은 단독으로 존재하기보다 부두와 바다, 수평선까지 함께 끌어안으며 나오시마의 첫인상처럼 작동한다. 반대로 야니스 쿠넬리스의 〈무제〉는 물질의 무게로 실내를 봉인한다. 그 대비가 나오시마의 공간감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납과 사물의 묵직함은 공간을 닫고, 섬의 밝은 풍경과는 다른 밀도를 만든다.


미야지마 다쓰오의 〈시간의 바다〉는 숫자와 물로 시간을 흐르게 만든다. 깜빡이는 숫자들은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며, 오래된 집 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떠오르게 한다. 제임스 터렐의 〈달의 뒤편〉은 어둠 속에서 보는 행위 자체를 흔들고, 월터 드 마리아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아는/알 수 없는〉은 제목 그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아는 것과 알 수 없는 것 사이에서 공간을 하나의 사유 장치로 바꾼다. 이 작품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시마는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예술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소가 된다.


저자가 단순히 작가와 작품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외부의 자본과 기획이 지역을 일방적으로 덮어쓰지 않도록 한 과정을 보여준 점도 인상 깊었다. 나오시마는 외지인이 들어와 일방적으로 바꿔 놓은 섬이라기보다, 지역민과 함께 호흡하는 방식 속에서 조금씩 예술의 공간으로 바뀌어 갔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순한 문화 프로젝트의 성공담이 아니라, 사람이 사라져 가는 지방이 어떤 방식으로 다시 자신만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으로도 읽힌다.


15년 동안 프로젝트에 심혈을 기울인 그에게 회사의 회장은 다른 섬에서도 같은 성과를 만들 수 있는지 묻는다. 저자는 이때 보편성의 차이를 말한다. 공산품의 보편성이 어디서나 재현될 수 있다는 데 있다면, 예술의 보편성은 유일성에서 나온다고. 여기서 나오시마가 복제 가능한 성공 모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령화와 빈집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오시마를 그대로 따라 해도 같은 효과는 생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의 시간과 기억, 사람과 풍경을 바탕으로 유일성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나오시마 예술의 탄생』을 통해 아키모토 유지가 이끈 나오시마 프로젝트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끝까지 따라가고 나면, 세계적 관광지는 더 이상 완성된 풍경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선택과 설득,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겹쳐 만들어진 공간이다. 그래서 이 섬은 예술이 놓인 장소가 아니라 예술이 현실이 되어버린 하나의 구조로 남는다. 책에 충분히 담기지 못한 작품 이미지와 공간의 모습은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 홈페이지에서 함께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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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AI로 급등주에 투자한다 - 클릭 한 번으로 연수익률 233%를 만든 인공지능 퀀트 투자
곽경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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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파이썬을 통한 인공지능 퀀트 투자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곽경일의 『나는 AI로 급등주에 투자한다』는 주식과 AI를 접목해 실전 투자 전략을 제시하는 책이다. 제목만 놓고 보면 흔한 과장형 투자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첫 페이지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런 선입견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AI를 만능인 것처럼 포장해 맹신하라고 말하지도, 코딩을 익히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대신 AI를 활용해 잘못된 코딩부터 경험하게 하며, 투자자의 사고를 정리하고 이를 반복 가능한 구조로 만드는 데 초점을 둔다.



곽경일의 『나는 AI로 급등주에 투자한다』는 인공지능과 퀀트 투자를 다룬 실용서다. 제목만 보면 책의 난이도가 꽤 높아 보이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것이 착시였다는 걸 알게 된다. 이유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내용 자체만이 아니라 전달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복잡한 개념을 설명하면서도 독자의 사고를 멈추게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서술 방식은 입문서로서의 완성도를 높인다. 즉, 쉽게 쓴 책이 아니라 쉽게 읽히게 쓴 책이다. 이런 특징은 저자가 코딩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이어진다.



저자는 퀀트 투자를 위한 코딩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코드는 소설처럼 읽고, 완성된 프로그램은 자신의 카페에서 내려받아 쓰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굳이 이 책으로 공부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는 것은 프로그래밍 능력이 아니라 데이터를 읽는 사고력이다. 쉽게 말해, 남을 부리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뜻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설명 방식은 기술적 개념을 다룰 때 더 분명해진다.



곽경일의 『나는 AI로 급등주에 투자한다』는 왜 AI를 활용해야 하는지부터, 관련 지식이 거의 없는 일반인도 AI를 이용한 코딩의 원리와 직접 만들기를 따라갈 수 있도록 풀어낸다. 그중에서도 이 책의 차별점은 일반 투자서와 갈라지는 지점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투자 공부를 하다 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이동평균선, RSI, 볼린저 밴드, 이격도, 스토캐스틱 같은 개념이 등장할 때다. 한 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용어를 이해하고 실제 차트에 적용해 해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것이다.



저자는 이 개념들을 곧바로 AI 코딩과 연결하고, 다시 이미지로 변환해 그림의 모양과 색만 볼 수 있어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책장이 넘어가면 제목에 들어간 급등주를 어떻게 찾을 것인지, 또 AI와 급등주가 왜 잘 맞는지까지 구체적으로 풀어낸다. 이후에는 비전문가가 가장 어렵게 느끼는 투자 포트폴리오 구성까지 해리 마코위츠의 효율적 투자선과 켈리 공식 등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이끌어 간다. 용어만 보면 어렵게 느껴지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면 이해가 바로바로 따라와 수월하게 배울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예측값과 실제 결과 사이의 오차를 기준으로 AI의 성능을 평가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이는 AI를 점괘처럼 소비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통계적 도구로 바라보게 만드는 중요한 전환이다. 쉽게 말해 예상 수익이 100원일 때 실제 수익이 99원이 나온 경우와 200원이 나온 경우는 둘 다 예측이 빗나간 것이지만, 오차의 크기는 전혀 다르다. 전자는 오차가 1원에 불과하지만, 후자는 100원이나 차이 난다. 즉, AI를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은 맞았느냐 틀렸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했느냐는 점이다.



이런 설명은 자연스럽게 AI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AI에게 ‘내일 주가가 얼마냐’ 같은 질문을 던지지만, 이런 물음은 그럴듯한 답변만 남긴 채 끝나기 쉽다. 반면 조건과 범위를 분명히 설정한 질문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결국 문제는 AI의 성능이 아니라 질문의 수준이다. 이 책은 추상적인 당위만 말하지 않고, 실제 질문의 예시를 통해 그 차이가 어떻게 벌어지는지 눈앞에 보여준다.



읽고 난 후 실제로 연습해 보면서 가장 신뢰가 갔던 부분은 높은 수익률을 강조하지 않는 점이었다. 책 표지에 클릭 한 번으로 연수익률 233%를 만들었다는 문구가 있어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막상 내용은 자신의 자산을 지키면서 투자하는 방법에 더 가깝다. 오히려 위험 대비 효율, 즉 ‘가성비’라는 관점에서 투자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많이 버는 전략보다 안정적으로 반복 가능한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태도다. 이 책은 돈을 크게 버는 법이 아니라, 덜 무너지면서 꾸준히 버는 법을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은 코딩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보는 과정이다. 책에는 원리 설명과 함께 코드가 그대로 제시되어 있어 구글 코랩을 이용하면 직접 따라 해볼 수 있다. 물론 끝까지 구현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어렵다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책에서 다룬 코딩 프로그램은 저자의 네이버 카페를 통해 제공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바로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는 먼저 직접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꼭 해보길 권하고 싶다.



이렇게 직접 만들어보고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결국 투자 기술을 넘어 태도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기록을 통해 자신을 검증하고, 타인의 말보다 실제 자금의 흐름을 보며, 무엇보다 자신의 판단이 가장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제목만 보면 자극적인 투자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분하고 실용적인 책이다. AI를 맹신하게 만들기보다 원리를 이해하고 질문하는 방식을 익히게 한다는 점에서 입문서로서의 장점이 분명했다. 투자와 AI를 함께 공부해 보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출발점이 되어 줄 책이다.



곽경일의 『나는 AI로 급등주에 투자한다』는 단순한 투자서를 넘어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도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답을 건네는 책이다. 저자는 과거 증기 기관이 처음 등장했을 때 돈을 번 사람들이 증기 기관 엔지니어가 아니라 그것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활용한 사람들이었다고 말한다. 프로그램까지 제공하며 우리에게 그 버튼을 직접 누를 기회까지 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AI를 막연히 두려워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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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천재 고려 - 최강대국에 맞선 작은 나라의 생존 전략
이익주 지음 / 김영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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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이익주의 『외교 천재 고려』는 미중 패권 사이에 선 지금 읽어야 하는 고려 외교사에 관한 책이다. 현대의 무역 전쟁에 과거의 국가사가 굳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현재와 매우 비슷해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만한 지점이 꽤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송, 명, 요, 금, 원나라 사이에 끼어 있던 고려의 사정은 현재 대한민국보다 훨씬 열악했기에, 우리 조상들의 행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미중 패권 사이에 선 지금 읽어야 할 고려 외교사, 이익주의 『외교 천재 고려』는 고려의 건국부터 멸망까지의 역사 가운데 외교와 관련된 부분만을 선별해 서술한 작품이다. 송과 남송,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 명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못지않은 강대국들과 시기를 함께한 고려 500년의 역사. 약소국이었지만 강대국에 끌려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국의 존재와 이익을 지키는 방향으로 실리 외교를 이어온 고려인들. 책은 그들의 선택을 통해 우리가 오늘의 위기를 돌파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외교 천재 고려』에서 저자 이익주는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까닭을 섬세하게 짚어낸다. 과거를 단순히 외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교훈을 길어 올리며, 역사가 발전한다는 믿음을 세우고, 역사적 사고력을 기르며,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모든 목적은 결국 하나로 모인다. 국제관계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지금의 위기를 빠져나갈 실마리를 찾는 것. 즉 역사는 “올바로 보고, 올바르게 인식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가장 실익 있는 대응을 하기 위한” 사고의 틀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실리적인 외교를 매 순간 이어온 고려의 행태를 파헤친다. 또한 500년이라는 비슷한 존속 기간을 지닌 고려와 조선의 외교 관점을 나란히 놓고, 평행선 위에 선 듯 보이면서도 전혀 다른 선택을 한두 왕조의 결과를 꼼꼼히 비교한다. 특히 고려 초기의 찬란한 시절이 아니라 가장 어려웠던 원 간섭기의 왕들을 집중적으로 다룬 점이 인상적이다. 성군이라기보다 나라의 존속을 위해 협상가가 되어야 했던 왕과 신료들의 모습은 오늘의 국정을 이끄는 관료들과 겹쳐 보인다.


또한 이 작품이 돋보이는 지점은 단순히 고려와 강대국의 관계만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국과 타국의 관계까지 함께 끌어들여 확장된 대외 질서 속에서 고려를 바라보게 한다. 주관적 역사 해석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입체적인 국제 관계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인식하게 만드는 서술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겉보기에 무관해 보이는 베트남 지역의 정세가 고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사례는 특히 인상적이다. 고려는 단지 존속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국제 정세의 틈을 활용해 실질적인 이익까지 얻어냈다. 


이러한 사례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약소국이었던 고려는 강대국 사이에서 줄을 서기보다 판을 읽으려 했다. 한 나라의 왕마저 체면보다 실리를 택하고, 때로는 자존심까지 낮추어야 했던 선택은 결코 나약함이 아니었다. 그 태도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처한 외교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얕은 판단으로 한 국가의 편에 서며 스스로를 약소국으로 규정하는 일도, 국력을 과신해 정면충돌을 택하는 일도 모두 위험하다.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던 고려의 상황은 그 극단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분명히 보여준다.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고려 말의 사정을 이 책은 깊이 조명한다. 저자는 당시 왕들의 선택이 얼마나 영민했는지를 보여준다. 대외적으로는 외교가 통하지 않는 원의 침략이 이어졌고, 내부적으로는 무신 정권으로 왕권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생존을 위해 원에 투항하고 영토를 내주었으며, 곳곳에서 민란도 일어났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한 세기 가까이 버텨낸 고려가 ‘고려’라는 국호를 유지한 채 원 간섭기를 벗어나는 장면은, 멸망 직전이었지만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나라를 살리기 위해 원의 공주와 국혼을 이어온 고려의 왕들은 단순히 혼인을 통해 안위를 도모한 존재가 아니었다. ‘국부’라는 지위를 통해 원 정치에 일정 부분 개입할 여지도 있었지만, 이를 함부로 행사하지 않고 상황을 읽으며 절제된 태도를 유지했다. 외국 공주와의 혼인은 개인적 욕망이나 체면이 아니라 국가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다. 체면보다 국익을 택한 이 선택은 굴종이 아니라 계산이었다. 힘의 구조를 냉정히 읽어낸 결정이었기에 고려는 끝내 ‘고려’라는 국호를 지킬 수 있었다.


고려 말의 상황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드라마로 익숙한 기황후 편이다. 고려를 위해 정의로웠던 기황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의 일가는 자국을 괴롭히며 사익을 취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권력욕이 역설적으로 고려의 최대 적이던 원의 붕괴를 재촉했다는 사실이다. 제1황후에 오른 지 3년 만에 주원장에 의해 쓸쓸한 최후를 맞은 그녀는 끝내 고려의 편에 선 적은 없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야망이 고려의 적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아이러니한 인물로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를 남긴 채 역사에 기록되었다.


결국 『외교 천재 고려』가 보여주는 것은 약소국의 생존 방식이다. 고려는 강대국 사이에서 감정적 대응이나 일방적 굴종을 택하지 않았다. 때로는 자존심을 낮추고, 때로는 개입을 자제하며, 상황에 따라 계산된 선택을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국혼과 같은 결정 역시 체면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를 읽어낸 전략이었다. 그 결과 100년에 가까운 원 간섭기 속에서도 국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외교가 도덕적 우열이나 명분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구조를 읽어내고 선택을 조정하는 판단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이익주의 『외교 천재 고려』는 미중 패권 사이에 선 지금 읽어야 하는 고려 외교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주는 책이다. 방대한 고려사를 나열하는 대신 외교라는 한 줄기로 정리해 국가의 선택 과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문적인 사료와 분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주관을 덧붙이지 않아 설득력을 갖춘다. 학문적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서술은 평이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결국 이 책은 과거를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교를 판단의 기술로 이해하게 만드는 역사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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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디 할머니 - 소설가가 사랑하는 박완서 단편 베스트 10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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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불리는 박완서의 단편 소설집 『쥬디 할머니』는 저자의 타계 15주년을 기리며 한국 대표 소설가 31인이 뽑은 명단편 10편을 묶은 책이다. 한국 소설가 가운데 드물게 감정적 호소나 저자의 판단을 앞세우지 않는 보여주기 기법을 구사해, 독자가 각자의 상황에 맞게 이야기를 받아들이도록 한다. 한국전쟁이라는 직접적 체험에서 출발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시대적 스펙트럼을 아우르며, 이 단편집은 읽는 이에게 뒤늦은 반전처럼 얼얼한 감각을 남긴다.


박완서의 『쥬디 할머니』는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에서 선별해 엮은 단편소설집이다. 각 편마다 등장인물도 다르고 시대적 배경 역시 지금의 현대인이 보기에는 꽤 오래전의 일이지만, 놀랍게도 그 시간의 벽을 가뿐히 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분명 먼 과거의 이야기임에도, 지금 바로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각 편마다 반전이 숨어 있고, 독자의 판단에 맡기듯 던져진 에피소드들은 단순한 문학 작품을 넘어 철학 소설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오늘은 책의 타이틀이기도 한 「쥬디 할머니」와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을 나란히 놓고 살펴보려 한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모두 할머니이지만, 자기 신화를 만들어낸 여성과 타인에 의해 여성성이 관리되고 박탈되며 강요되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쥬디 할머니가 여성성을 ‘과시’로 관리했다면, 할미꽃의 할머니는 여성성을 ‘통제’로 관리당한다. 이 두 작품을 함께 읽다 보면 여성성은 과연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언제나 타인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닿게 된다.


먼저 「쥬디 할머니」는 고운 할머니라는 외피 뒤에 남의 소실이자 자식을 버린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인물이며, 과거를 아는 사람과 마주친 뒤 기존의 울타리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택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그녀의 거짓말을 폭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쥬디 할머니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말 ‘안에서’ 살아야만 했던 사람에 가깝다. 그녀가 자랑으로 삼았던 자식과 손녀들의 사진은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울타리였다. 그런 의미에서 울타리는 거짓말이면서 동시에 생존 장치다.


마지막에 쥬디의 사진을 버리는 장면은 단순한 각성이 아니다. 이전의 설정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순간이다. 농장으로 향하는 선택 역시 속죄도, 도피도 아니다. 그저 또 다른 거짓말을 시작하러 가는 일에 가깝다.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인간은 진심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이 사라지는 순간, 삶 자체가 무너진다. 이 작품은 거짓말로 쌓아 올린 울타리를 과연 스스로의 손으로 부술 수 있겠느냐고. 인간은 언제까지, 어디까지 자신을 속이며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우리가 「쥬디 할머니」를 읽고 느끼는 불편함은 단순히 반전에 대한 소름이나 인물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거짓 울타리는 극단적이지만, 방식만 다를 뿐 그 구조 자체는 우리 역시 일상에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그녀가 다시 울타리를 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장면이 유독 무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역시 계속해서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결국 문제는 울타리를 쳤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한계를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 울타리가 전부라고 믿고 있는지의 차이이다.


다음으로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알지 못했던 두 노파의 이야기다. 첫 번째 노파는 마을에 들이닥친 미군들로부터 처녀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그들의 성욕 풀이 대상이 되기를 택한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녀의 옷을 벗기다 젊은 여자가 아님을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터뜨린 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채 선물까지 쥐여 주며 ‘마마상 찹찹’이라 부르고 돌려보낸다. 그녀가 보호받은 이유는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여자가 아니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노파는 남편을 잃은 지 며칠 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연히 들른 김병사와 마주한다. 당시 부대에는 총알이 숫총각만 찾아간다는 소문이 돌았고, 노파는 이를 듣고 자신을 이용하라고 말한다. 머뭇거리는 병사를 노파는 거의 덮치다시피 하고, 그 순간 그가 느낀 공포는 폭력이 아니라 노년의 몸에도 여전히 욕망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노파의 희열은 사랑이나 구원이 아니라, ‘나는 아직 여자다’라는 선언에 가깝다. 두 노파는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었던 셈이다.



저자는 이들에게 ‘노파’나 ‘할머니’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호칭은 성별과 욕망, 위험성을 지워버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존중의 언어라기보다 관리의 언어에 가깝다. 한쪽은 여자가 아니어야 살 수 있었고, 다른 한쪽은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아 타인을 파괴했으니, 중성적인 호칭은 오히려 거짓말이 된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가도 ‘여자’라는 존재만큼은 끝까지 남겨 두었고, 이 작품은 마지막으로 묻는다. 과연 이들에게 중성을 덧씌울 권리는 누구에게 있었을까?


박완서의 단편 소설집 『쥬디 할머니』 속 단편들은 하나의 주제나 태도로 정리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스스로 신화를 써 내려가며 살아남고, 누군가는 여자가 아니어야 보호받으며, 또 누군가는 끝까지 여자이기를 붙잡다가 위험해진다. 박완서는 이 선택들 가운데 어느 것도 옳거나 구원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판단을 거둔 자리에 인물만 남겨두고, 그들이 살아남은 방식과 무너진 지점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집은  무엇이 옳았는지를 묻기보다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며 살고 있는지를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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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는 연결과 소통, 그리고 바벨탑에 관한 이야기다. 스트라우트 월드의 결정체라 불리는 이 작품에는 그동안 그녀의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흔하디흔한 우리 주변 사람들의 일상을 따라가며, 그녀가 던지는 메시지는 놀라울 만큼 또렷하다. 기록되지 않은 삶, 이해할 수 없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 인생이 기록된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타인과 공존하는 방법에 대해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차근차근 살펴보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는 밥 버지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메인 주의 작은 마을에 사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실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작품은 하나의 사건을 따라가지 않는다. 대신 여러 인물의 삶이 짧은 에피소드처럼 이어진다. 병든 아내를 돌보는 남편, 외로움 속에서 노년을 건너는 사람,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는 인물, 가족과 멀어졌지만 끝내 완전히 끊어내지 못한 사람들. 이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며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서로의 삶을 스쳐 지나간다.


『이야기를 들려줘요』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설정한 인물들은 삶의 끝에서 더는 도망칠 수 없는 육십 대 이상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수많은 불륜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로 전락하지 않는다. 만약 주인공들이 서른이나 마흔이었다면 이 이야기는 선택의 서사가 되었을 것이다. 아직 빠져나갈 수 있고, 고칠 수 있고, 재배치할 수 있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이들의 불륜은 실수나 모험이 되고, 소통은 노력의 문제로 바뀌며, 오해는 수습되고, 죄는 갚을 수 있는 빚이 되며, 관계에는 리셋 버튼이 남는다.



근데 지금 인물들은 그 버튼이 닳아 사라진 나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선택이 아니라 잔존으로 이어진다. 왜 그랬는지가 아니라, 그렇게 된 채로 어떻게 하루를 넘기는가의 문제다. 설명은 중요하지 않고, 수정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신 남아 있는 태도만이 문제 되며, 옆에 앉을 것인가, 등을 돌릴 것인가만 남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지나온 연령대를 설정함으로써 더 이상 의미를 과장하지 않는다. 관계를 미화하지도, 죄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끝까지 남아 있는 방식만을 묻는다.


작품 속에는 죄를 먹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대표적인 인물로 밥 버지스가 등장한다. 이 설정의 원형은 서양 민속에 등장하는 죄 먹는이다. 사람이 죽으면 누군가가 와서 그 집의 빵이나 음식을 먹는데, 그 음식에 죽은 이의 죄가 옮겨붙어 있다고 믿었다. 먹는 사람은 그 죄를 대신 짊어지는 존재였고, 그래서 그는 마을에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멀리해야 할 인물로 여겨졌다. 축복과 저주의 중간쯤에 놓인 자리다. 이 작품에서 바로 그 역할을 맡은 인물이 밥 버지스이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죄를 먹는 사람’은 도덕적 판결을 내리는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남의 고백과 후회, 부끄러움, 끝내 말하지 못한 진실을 조용히 받아내는 쪽에 가깝다. 누군가는 말해야 살아갈 수 있고, 누군가는 들어줘야 그 말이 세상에 남는다. 스트라우트는 그 듣는 자리를 ‘죄를 먹는 사람’이라 부른다. 타인의 이야기를 삼켜 자기 안에 남기는 사람. 그래서 이 말에는 윤리보다 체온이 있고, 심판보다 생활이 먼저 떠오른다. 죄를 먹는 사람이란 결국 타인의 무게를 대신 들고, 아무 말 없이 늙어가는 사람을 뜻한다.



그렇다고 밥이 착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들어주기는 하지만, 잘 듣는 사람은 아니다. 타인의 말을 자기 언어로만 듣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죄를 먹는다'는 표현은 더 불편해진다. 그는 말을 그대로 삼키지 않고, 씹어서 소화한다. 다시 말해 자기 식으로 재배열한다. 그 결과 밥은 완벽한 공감자도, 순수한 수용자도 아니다. 그의 듣기는 늘 어긋나 있다. 그는 상대의 말보다 먼저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는 자기 상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맞춰 말을 이해한다. 그러면 저자는 왜 밥을 이런 인물로 설정했을까? 



이 질문은 곧 이해와 소통이 왜 이렇게 자주 어긋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진다. 바벨탑 이후의 언어는 민족 단위로만 갈라진 것이 아니라, 개인 단위로 더 잘게 쪼개진 것은 아닐까. 이런 세계에서 밥은 번역가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기 방언밖에 쓰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말하는 이의 핵심은 흘러가고, 밥 안에서 재구성된 의미만 남는다. 듣는 쪽은 구원받았다고 느끼지만, 완전히 이해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가 짊어지는 것은 타인의 진실이 아니라, 번역된 뒤 남은 잔여물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게 무가치해지진 않다. 오히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인간관계의 정확한 모습이다. 저자는 끝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냉정함을 유지한다. 진짜 공감 같은 건 없지만, 이런 식의 연결로 각자의 상처를 메꾸면서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밥이 죄를 먹는다는 건, 타인의 죄를 깨끗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언어로 오독된 채로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완벽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그 불가능함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인간이자 우리의 나아가야 할 모습으로.



이 소설을 읽으며 남는 감각은 분명하다. 인간이 연결을 시도하는 이유는 혼자 있기엔 너무 조용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미 망가졌고, 그럼에도 침묵은 더 견디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말로 떠들고, 자기 식으로 오해하면서도 같은 공간에 머무는 쪽을 택한다. 언어는 혼자서는 미완이고, 둘이 되면 더 미완이 되지만,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더 미완인 상태를 선택한다. 정확성보다 동행이 필요하며, 그 동행은 이해를 약속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안도를 주기 때문이다.



연결과 소통, 그리고 바벨탑 이후의 인간을 일상의 장면으로 그려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이야기를 들려줘요』가 전하는 말은 단순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말이 통할 수 있다는 희망도, 관계가 회복된다는 약속도 아니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남아 있어도 된다는 것, 온전한 공감이 사라진 뒤에도 같은 공간에 머무는 법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이 작품의 체온이고,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의 작품 속 얼어붙은 심장에 온기를 느끼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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